민주노총이 입주하고 있는 영등포2가 대영빌딩. 그 건물 8층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주욱 걷다보면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표찰이 보인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으로 김태현 원장과 오건호 연구위원, 정경원 연구위원이 일하고 있는 사무실이 있고, 오른편으로 조금은 덜 정리된 채로 자료실이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다. 공간에 비해 사람이 너무 적어 썰렁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10년'을 쌓아가기 위한 초석을 준비하는 연구원 사람들의 움직임은 분주하기만 하다. 김태현 원장을 만나 5월 초 정식 개원을 앞둔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의 활동계획에 대해 들어보았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의 필요성과 그간의 진행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민주노총 정책실의 역할이 단기적이고 긴박한 정세에 조응하는 대응이라면 연구원에게 요구되는 것은 중장기적인 과제·방침에 대한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단병호 전 위원장 시절부터, 그리고 그 이전부터도 이미 민주노총이 다뤄야 하는 사회적·정책적 과제들이 상당히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노동운동은 그런 부분들에 대한 중장기적 대안들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채, 주로 단기적인 대응에 머무르고 있었죠. 이런 상황 때문에 정책연구원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이미 오래 전부터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현재 노동운동 내에도 한국노동사회연구소라든가, 영남노동운동연구소,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등 기존의 연구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연구소들은 각각 독자성과 내부적인 사정을 가지고 있고, 생각의 편차들이 있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일관된 조직적 원칙·방침과 연계되어 활동하기가 어렵습니다. 때문에 민주노총 차원의 정책연구원이 필요하다고 얘기되고 추진된 거죠.
실제 정책연구원 설립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문제점들은 어떤 것입니까.
사실 이전 집행부 시절인 작년 7월 중앙위원회에서 정책연구원 설립 계획안과 2억원 기금모금안이 통과됐습니다. 그 후 여러 차례 논의가 되긴 했지만, 정책연구원 설립 추진이 계속 늦춰졌죠.
그 첫 번째 이유는 재정문제에 대한 대안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기에는 자체적으로 재정을 충당하는 것이 어려우니까 2억원을 각 조직별로 할당을 해서 모금을 할 계획이었죠. 이렇게 모금된 돈과 정책프로젝트 수입, 민주노총 재정 등을 통해 우선 운영을 하고, 정책연구원이 자리를 잡으면 점차 모금부분을 줄여나가면서 일반회계를 늘여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모금이 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작년 7월 모금이 결정된 이후 바로 '열사정국'이 들어서면서 모금이 진행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또 현재는 4·15 총선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정책연구원을 위한 모금이 활발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실제 정책연구를 담당할 인력을 구하기가 힘들었다는 점입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도 사람 구하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민주노총 정책연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랄까, 최근 진보적인 젊은 학자들의 재생산이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서 현장에서 요구하는 부분을 담당할만한 연구인력의 풀이 전반적으로 취약해져 있습니다. 작년 7월 이후 전 집행부에서도 상근연구원을 뽑기 위해 공채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사람을 못 뽑았거든요. 그만큼 현장의 운동이 요구하는 부분에 걸맞은 연구인력의 토대가 취약해 있다는 거죠.
신입 연구원들이 갖춰야할 요건은 어떤 것입니까.
어쨌든 정책연구소가 상당히 많은 연구 영역 -경제일반, 노사관계, 노동시장, 운동사, 사회공공성- 등을 다루게 될 텐데요. 노동자의 시각에서 이 문제들을 바라보고, 더 나아가서 현실적인 과제에 대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정책역량을 갖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부분에 맞춤한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발견되지 않는 것이죠.
재정 확충, 인력 재생산을 위해 정책연구원이 어떤 구조를 갖춰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많이 취약한 상황이긴 하지만, 재정은 어쨌든 가맹 조직의 정책연구프로젝트 수행 등을 통해 점차적으로 일반 회계에서 대부분을 담당하는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연구프로젝트는 상근연구원들이 직접 맡아서 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겁니다. 교수 등을 중심으로 자문위원단이 꾸려질텐데, 이 자문위원단과 운동의 현장에 있는 연구역량 등을 유기적으로 네트워킹해서 조직이 필요로 하는 주된 과제들 별로 이들을 결합시켜 사업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현실 운동과의 관계 속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재생산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를 만들어야겠지요.
정책연구원이 내놓는 연구결과물은 어떻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첫째, 기본적으로 민주노총의 조직적 요구에 복무하는 측면이 제일 중요한 것이죠. 민주노총에게 제기되는 중요한 과제에 대해서 중장기적으로 정책방향을 잡는 역할 말입니다. 예를 들어, '미조직노동자 조직화 방침'이라든가, '산별 교섭 정책과제' 등에 대한 연구결과를 정책연구원이 내놓고 조직이 기존의 관성을 넘어서 새로운 전망을 가지고 실천해 나갈 것을 요구한다든지 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정책연구원의 연구결과물은 우선적으로 조직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둘째, 어쨌든 노사관계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 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텐데요. 정책연구원은 예를 들어,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 중 몇 퍼센트냐',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어떤 일자리를 창출해야 하는 것인가' 등 이데올로기적 전선에 걸쳐있는 다양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민주노총이 좀 더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내놓는 것을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이를 토대로 노동운동은 정부정책의 변화를 요구하고 국민을 상대로 노동계 정책의 합리성을 설득하여 이데올로기 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현재 정책연구원이 우선적으로 중점을 두고 있는 연구과제와 사업계획은 무엇입니까.
정책연구원이 다뤄야 할 연구과제들은 노사관계, 노동시장, 사회복지, 공공성문제, 신자유주의 세계화, 비정규직 문제 등 매우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는 모토를 들고 민주노총 새 집행부가 들어선 만큼, 현재는 우리 운동 내부의 혁신, 조직 혁신을 위한 과제들에 우선적으로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이 창립되고 벌써 10년 다 되어갑니다.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의 지난 10년을 평가하고 새로운 10년을 준비하기 위한 성찰과 연구가 정책연구원의 중요한 과제로서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노동자 내부의 격차와 배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중장기적 정책대안들이 연구될 필요가 있겠지요. 비정규직 조직화방안이라든가, 차별·격차 해소를 위한 임금정책, 최근 제기되고 있는 연금정책에 대한 대안, 제조업 공동화에 대한 대안 등 많은 과제들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은 출범을 준비하고 있는 단계이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연구원의 체계를 안착시키고 연구에 정식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선 목표입니다. 메이데이를 전후로 해서 연구원의 정식 출범을 알리는 심포지엄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월례토론회를 두 가지 정도 계획하고 있는데, 하나는 중요한 경제적인 쟁점과 관련된 '월례경제분석워크숍'입니다. 또, 노사관계, 사회공공성, 노동경제, 비정규 등에 대한 정책연구발표회도 월 한차례 정도 진행할 계획입니다.
진보적인 연구자들과 정책네트워크 구축은 어느 정도 진행됐습니까.
정책연구원 외부에 자문위원회를 폭넓게 꾸릴 계획입니다. 우선 민주노총과 민주노조운동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중진 학계인사들을 중심으로 해서, 노사관계, 노동시장, 사회복지, 여성 등 각 영역별로 몇 명씩 모두 30명 내외의 자문위원단을 구성할 것입니다. 이는 연구원 사업방향과 정책과제 등에 대해서 의논하고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겠죠. 그리고 젊은 소장 학자들의 경우는 정책연구원이 프로젝트나 과제를 수행하는데 결합하도록 할 수 있을 겁니다. 또, 각 연구 주제와 관련된 연구자들 모임을 추진할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부분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정책연구원의 네트워크를 확대할 계획입니다. 서로 약간의 입장차이가 있더라도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구조가 되도록 해야겠죠. 자문위원회는 지금은 추진 단계입니다. 교수들 모임을 한차례 진행했고, 조만 간에 자문위원을 정식으로 위촉할 것입니다. 민주노총이 지난 몇 년간 학계와 약간 거리가 있었는데, 그러한 부분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료실을 운영할 계획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상이 있습니까.
민주노총 내에 자료실을 만드는 것은 어쨌든 처음으로 시도되는 일입니다. 우선 그동안 민주노총 각 실별로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과 산하 가맹조직들, 산별 연맹이나 지역조직들의 자료들을 모두 모아 분류·입력(PDF)하고 체계화해서, 민주노총과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찾아 볼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 전노협 등의 자료들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관련된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또, 내년이 민주노총이 건설된 지 10년이 되는데, '민주노총 10년'과 관련하여 연표를 정리하는 등의 여러 가지 발간사업을 자료실이 중심이 돼서 진행할 계획입니다. 성공회대학교NGO자료실 등과의 교류도 활발히 할 것이고요.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의 원장 입장에서 '바람직한 한국형 노사관계'를 위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문민정부 이후에 많은 변화가 있긴 했지만, 우선 한국의 노사관계는 노동배제적인 부분이 여전히 기조에 깔려있다고 봅니다. 노·경총 합의니, 노사정위원회 설립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형식적으로는 노사관계 틀이 재편되고 있는 것 같지만, 아직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구속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조건들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노동배제적인 부분이 민주적인 관계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노사관계는 주로 기업단위에 집중되어 있고 총연맹과 기업별노조 사이, 중간적인 산업·업종 단위가 거의 비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토대 위에서는 사회적 논의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양대노총, 경총, 정부 등 중앙단위들이 한다고 해도 실질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산업별 교섭이 중심이 된 토대 위에서 중앙교섭이라든가 중앙의 사회적 대화가 있고, 산별 교섭의 보완단계로서 기업별 교섭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총체적 교섭의 틀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 정책연구원장으로서 노조간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십시오.
우선 정책연구사업과 관련하여 재정 집중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현재 조직을 운영하는 자금은 대부분 단위사업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안 중 일부, 예를 들어, '제조업 공동화' 등은 단위사업장 별로 각개약진하고 어떻게 한다고 해서 대안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단위사업장에 집중된 자금의 일부를 각 산별 단위로 집결시켜 산업정책과 관련된 대안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결합하고, 또 그것을 민주노총과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정책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책연구원은 조직적 요구, 노동운동이 단기적인 대응에 급급하면서 중장기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조직적 염원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결과적으로는 현재 취약한 상태에 있습니다. 3·4월에 준비기간을 거쳐 5월 메이데이를 전후로 해서 심포지엄을 열고 공개적인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될 텐데요. 현장 간부들이 모금이나 정책연구원 사업에 대해서 좀 더 신경을 쓰고 많은 제안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바쁘신 가운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빠른 시간 내에 자리잡기를 성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