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2일 국회에서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 보수정당 3각편대에 의해 이뤄진 그 날, 뉴스의 톱화면이 비켜가긴 했지만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도 예측 불가능한 표 대결이 진행되었다. 경영권을 둘러싸고 SK그룹과 금융투기자본인 소버린자산운용이 정기주총에서 사활을 건 표 대결을 벌인 것이다. 국회에 몰려 있는 시선만은 못 했겠지만, 당사자인 SK노조협의회 소속 노동자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눈과 귀도 여기에 쏠려있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이 됐지만 SK는 소버린을 꺾고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한편, 영국의 스탠더드차타드는 제일은행이나 외환은행 등 대주주나 한국정부가 지분을 매각하기로 한 은행들의 입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방침을 밝혔다. 이처럼 국제금융자본이 국내의 다른 은행 인수를 호시탐탐 노리며 '탄핵폭풍'에도 아랑곳 않고 주식을 매수하고 있는 동안, 외환은행 본점 앞에서는 투기성 국제자본인 론스타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긴 외환카드 노조 정리해고자들이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며칠째 출퇴근 상복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미국을 필두로 한 외국자본에 의한 국내은행 인수 및 소유지배에 대한 우려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우려는 점점 더 현실화되고 있다. 따라서 금융산업의 공공성을 확대하고 사회적 성격을 강화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동자 개입전략을 내놓을 것을 요구받고 있지만 노동계의 대응은 단위사업장의 이해관계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대응수준과 대응내용에 있어 대전환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3월 12일 SK(주)의 42차 정기 주주총회가 워커힐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 출처:오마이뉴스 ]
한국시장 절반 집어삼킨 국제금융자본
이미 우리는 1990년대 일본경제의 악화가 미국의 부동산 시장에 큰 영향을 미쳐 미국의 금융불안을 야기하였으며, 아시아 금융위기 시 일본계 은행의 대출금 회수가 해당 국가의 금융위기를 가중시키거나, 결정적 국면으로 선도해나갔음을 잘 알고 있다. 1990년대 외국자본의 진입이 많았던 아르헨티나에서 2001년 12월 예금동결 등의 금융위기 발생 시, 프랑스계 2개 은행과 캐나다계 1개 은행이 철수선언을 함으로써 금융혼란을 가중시켰던 사례가 불과 몇 년 전의 상황이다.
2004년 2월 한국은행은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의 은행시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외환위기 이전 1998년까지 HHI 600내외를 유지하였던 은행부문이 2003년 9월 기준 HHI가 1,291을 기록하는 등 집중도가 크게 상승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금융시스템 안정과 금융시장 효율성을 저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지적이었다. 우리나라가 기록한 이 수치는 미국 287, 영국 437, 일본 700 등과 비교할 때 월등히 높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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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쉬만-허핀달 지수(HHI: Herfindahl-Hirschman Index)는 특정산업 부문의 집중도를 판단하는 지수로 개별기관들의 점유율(%)을 합한 후 합산하여 산출되며 미국 법무부의 합병 가이드라인은 HHI가 1,800 이상인 경우 "집중", 1,000-1,800인 경우 "다소집중", 1,000미만인 경우 "경쟁"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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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시중은행의 외국자본 지분율을 보면, 1998년 말 12.3%이던 것이 2004년 3월 현재 50%를 육박하고 있다, 경제가 안정된 주요 선진국의 외국자본 은행산업 점유율이 10%대이며, 아시아 금융위기를 동시에 겪은 말레이시아가 19.0%, 태국이 7.0%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현재 국내의 7개 시중은행 중 제일(뉴브릿지), 외환(론스타), 한미(시티은행, 스탠다드차타드)는 완전히 외국계가 장악했으며, 국민, 하나은행은 외국자본과 국내자본이 공존하는 혼합계이다. 우리, 신한은행만 내국계로 분류된다.
세계최대의 다국적 국제금융자본인 시티은행이 한미은행의 지분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칼라일은 1년도 채 못돼 7천억원의 차익을 거두어 들였다. 이 과정에서 소버린처럼 '뜨네기'가 아님을 강조해왔던 칼라일은 한미은행을 인수한 지 1년도 안 돼서 매각을 서두르더니 급기야 초대형 은행의 수중에 한미은행을 밀어 넣는 핑퐁게임을 하고 있다. 게다가 시티은행은 한미은행의 주식을 51% 확보하는데 머물지 않고 100% 전면인수를 통해 상장폐지까지 한걸음에 내달릴 기색이다.
신용불량자 지원 외면하는 외국계은행
이처럼 금융의 집중도가 커지고, 국제 투기성 자본이 국내은행을 잠식해 들어올 때 나타날 것이라 우려되던 것들이 속속 현실화되고 있다. 국제투기자본 및 금융자본의 노골적인 사회적 무책임과 무임승차는 그들의 본질적 속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미 우리는 그들의 이러한 행태를 대우사태 이후의 회사채 만기연장과정, 엘지카드 부실카드채 처리과정에서 두 눈으로 확인한 바 있다. 소버린의 경우는 SK(주)측이 내놓은 투명경영위원회 설치 등의 선진적인 지배구조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론스타,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랜드리스, BNP파리바 등 이들 외국계 신용기관은 신용회복지원협약에 가입하지 않아, 개인워크 아웃을 통해서 충분히 갱생할 수 있는 신용불량자의 발목을 잡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외국계 투자은행들이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수십만명으로 추정되는 신용불량자들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신용회복위원회 관계자는 3월18일 "지난해 6월부터 수 차례에 걸쳐 외국계 투자은행들에 협약가입을 종용하고 있지만 아직 한 곳도 가입하지 않은 상태"라고 밝혔다. 자신들의 '단타형' 수익모델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중소기업이나 지역기업은 금융혜택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뿐만 아니라 정책협조는 매우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은행의 정책담당자는 "기업대출축소, 가계신용위주 소비금융 확대, 안전자산 중심으로 자산이 운용되면서, 경제성장동력이 약화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현재 상황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게다가 결정적 위기국면이 전개될 경우, 이들 자본은 한국경제, 한국사회, 그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노동자들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릴 것은 극히 자명하다. 이들 국제자본이 은행을 장악하면 할수록 국내산업 등 국민경제의 왜곡도는 커질 것이다.
금융노조는 현재 '금감위는 시티그룹의 한미은행 지분 전량 인수 승인을 거부할 것'과 '한미은행 상장폐지 계획을 철회할 것' 등을 요구하며 금감위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현안문제에 대한 대응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되는 우리의 경제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 말해 금융산업, 특히 은행산업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할 수 있는 노동자적 대안을 마련해나가야 한다.
[ 합병에 따른 정리해고를 둘러싸고 두달여 동안 파업을 진행한 외환카드 노동자들 - 출처:전국사무금융연맹 ]
금융기관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해야
금융·자본시장의 성격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금융기관의 소유구조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요 금융기관이 초국적 금융자본의 수중에 있을 때, 금융정책의 자율성은 확보될 수 없으며, 노동자의 이익과 국민경제의 안정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 투기자본 또는 국제금융자본의 횡포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금융정책 관련 정부기구, 특히 재경부, 한국은행(금융통화위원회), 금융감독위원회에 대한 감시와 정책참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또 한편으로는 금융산업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가능하도록 경영·지배구조의 개혁을 노동조합이 주도해 나가야 한다. 산별 차원에서 금융과 관련한 정책개발을 해야 하며,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고 필요시 대정부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은행 이사회의 경우, 사회적·민주적으로 통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원배분을 사회적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
국제금융자본의 투기적 운동이 지금처럼 세계화되는 경향 속에서 금융기관의 사회적 성격강화는 국제금융자본의 통제와 국가주권의 수호와 관련되는 것이며 국민경제의 안정성을 지키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계의 체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 금융노조의 정책연구원 설립과 운영은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매우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동자적, 국민경제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방향을 확보하지 못 한다면, 이 또한 단위사업장의 기업 이익보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노동조합의 상층부와 하부조합원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민주적 집중과 대중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는 활동을 통해 의식과 실천의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금융노동자들이 금융기관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하는 제도개혁 투쟁에 적극 나서서 투기자본의 문제, 국제금융자본의 문제에 대한 대안적 해결 세력으로 자리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