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여러 번 방영이 된 미국의 TV 미니시리즈 중에 어원 쇼 원작의 소설을 각색한 '야망의 계절'(원제 RICH MAN, POOR MAN)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가난한 독일계 이민인 빵가게 아들로 태어난 소년이 상원의원으로 성장해 정치 문제와 사생활이 얽힌 음모로 인해 암살을 당할 때까지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이 드라마는 단순한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입었지만 그 안에는 말 그대로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비하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법과 사회시스템 자체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내용이 곳곳에 숨어 있는 걸작이었다.
지난 3월에 끝난 우리 드라마 두 편도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구조를 외피로 입고 우리사회의 현재를 되돌아보는 거울 같은 역할을 했다. SBS가 방영한 '발리에서 생긴 일'과 MBC에서 전파를 탄 '대장금'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 두 드라마는 현재 우리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문제들을 대중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풀어내는 기민함을 보이며 안방극장 손님들에게 재미뿐만 아니라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트렌디 드라마 속 냉엄한 계급구조
먼저, '발리에서 생긴 일'을 살펴보자. 정재민(조인성 분)과 최영주(박예진)는 말 그대로 '자본가'의 모습이다. 사랑과 결혼도 돈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강인욱(소지섭)은 자신의 '비천한 신분'을 학력으로 만회하며 자본귀족의 세계에서 자신의 노동력과 재능을 파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이수정(하지원)은 특별한 능력 없이 자본가 중심의 사회시스템 속에서 소모되는 인물이다. 드라마에서 그녀의 직업은 서비스직으로 점철이 되어있다. 그것도 이국적인 발리의 가이드에서 당구장 총무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밑바닥으로 내려간다.
이렇게 중심인물들이 상징하는 전형적인 계급구조는 드라마 속 갈등관계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리고, 수정의 뛰어난 외모를 중심으로 인물들 간에 얽혀 있는 애정관계와 더불어 드라마를 끌어가는 힘을 만들어낸다. 결국 두 건의 살인과 자살 한 건으로 마무리되는 이 드라마는 처절한 파국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생긴 일'이 무엇인지를 트렌디 드라마의 껍질 아래서 냉정하게 보여준다.
이 드라마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달동네에 살던 시절, 인욱이 옆방 처녀인 수정에게 갑갑한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려는 갸륵한(?) 마음에 이탈리아 사회주의 사상가 그람시의 책을 권한다. '얼마 안 있으면 읽다가 잠이 들 것'이라는 친절한 충고를 덧붙이면서. 그에 대한 수정의 대답은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지만 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참고서 한다는 건 안다'이다. '참고서 하는 것'은 갑갑한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녀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처음 등장한 진보적 여성주인공'대장금'은 초반부에서부터 캐릭터를 이용한 승부수를 던져 시청률을 높였다. 이제까지 우리나라 드라마에 나오는 여성캐릭터는 착하거나 악녀거나 돈이 많든 적든 가리지 않고 '예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결여된 것이 있었다. 바로 그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호기심'이고 좀 더 깊이 말하자면 개혁과 진보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정면돌파'의 행동이었다.
장금이는 어린 시절부터 "왜"라는 질문으로 이런 성격을 한껏 드러내며 주목을 받았다. 또한 이 드라마는 재신임과 탄핵이라는 현실 정치적 상황을 상궁들의 파벌 사이의 경쟁으로 은유하며 재미를 더했고 남자들이 주도하는 궁내의 정치역학에 의미가 있는 조연으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편, 이런 장금의 모습은 강금실 법무부장관의 모습과 겹치며 묘한 기시감을 주기도 했다.
'대장금'이 인기를 얻은 또 다른 비결은 '멜로'의 틀에 함몰되어 '드라마'가 무너지는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를 설명한다면 '남성중심의 조선사에 단 한 줄로 기록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임금님의 여성주치의 장금이가 그 위치를 얻기까지 경험한 굴곡이 많은 삶과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을 가미해 꾸며낸 것'이 될 것이다. 이 드라마는 이런 맥락을 끝까지 잘 지켜나가며 '애정'이나 '복수'를 극의 양념이나 향신료 이상이 되지 않게 비교적 잘 조정해 나갔다. 물론 뒤로 갈수록 '애정문제'가 강조된 것이 다소 아쉽기는 한데 이는 허준을 다룬 드라마에서 애정문제가 전체적인 드라마구도를 흔들지는 않았다는 점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극적 재미를 던져주는 이 드라마들은 그 이면에서 우리 사회가 부딪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반영하고 있다. '발리에서 생긴 일'의 파국적 결말이 보여주듯 우리 사회는 이미 경제적인 계급구조가 탄탄하게 안착되어 계급간 이동이 어려워지고 있다. 그리고 '대장금'에 대한 시청자들의 열렬한 호응이 드러내듯 우리사회는 여성인력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개혁흐름에 대한 희망이라는 대중적 열망을 품고 있다. 이 드라마들은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그람시'보다 쉽고 가볍게 많은 사람에게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