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1일은 17대 국회의원 후보로 등록을 하는 날이다. 선본에서는 이날 마포을지구당(비록 지구당은 법적으로 해소됐지만) 전 당원들과 함께 총선의 의의와 목표, 전략 등을 논의하는 대대적인 자리를 마련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문제가 생겼다. 현행 선거법상 선거 30일전부터는 일체의 당원행사가 금지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말인즉, 선거를 앞두고 당원행사가 자주 열리는데, 의정보고회, 당원교육, 당원연수, 선거결의대회 등의 이름을 달고 진행되는 행사는 사실상의 사전선거 운동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정당이 당원들을 대상으로 관광버스를 빌려 식사를 대접하고, 관광지로 유람을 보내는 일이 많기 때문에 이런 조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기고, 당원이 당원교육에 가서 식사대접을 받았다가는 범칙금이 부과된다. 가히 대한민국의 후진 정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조항이 아닐 수 없다.
당원에 전적으로 의지해 선거를 치러야하는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처구니없는 조항이다. 선거를 앞두고, 당의 정책을 당원들에게 주지시키고, 중앙당의 총선 목표와 지역 총선목표를 서로 공유, 이를 수정 보완하려면 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의 경험이 전무한 보수정당, 돈을 주고 당원을 입당시켜야 하는 보수정당체제에서 나온 한심한 조항이다.
게다가 보수정당 후보들은 이미 기호를 넣고 사전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선관위에 예비후보 등록을 마친 이후에는 명함에 국회의원 후보라고 기입해 출퇴근 시간에 배포할 수 있다. 이때 한나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은 기호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명함에 기호를 넣을 수 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원내 의석이 없기 때문에 후보등록을 하고 나서야 기호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이미 출발부터 불리함을 안고 가는 것이다.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다섯장
예비후보로 등록을 하면 선거운동기간에 보내는 공보물 외에 독자적으로 지역 유권자에게 예비 공보물을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오늘 퀵서비스로 예비 공보물이 왔다. 퀵서비스 노동자는 많은 분량의 공보물을 가지고 온 탓에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땀에 절어 물어본다.
"동교동도 마포을인가요?"
"예"
환한 웃음을 보이며 퀵서비스 노동자가 말했다.
"제 주민등록증에 주소를 보세요. 제가 동교동 살아요. 저 민주노동당 지지자입니다."
그 노동자는 민주노동당으로 보내는 물건임을 알고 무척 반가워했단다. 자신이 투표할 정당, 후보를 직접 보고 싶었던 것. 이런저런 말을 하며 민주노동당에 대해 얘기하던 노동자가 갑자기 힘주어 말한다.
"오늘 입당하겠어요. 원서주세요."
펜에 힘을 주어 입당원서를 써내려 가는 신입당원. 벗어 논 장갑은 여기저기 펑크가 나있다. 55년생, 적지 않은 나이. 평생 처음으로 당원이 됐단다.
"형편이 정말 어려워서 자동납부는 어렵고, 그냥 전 5천원씩만 낼게요."
그리고는 지갑에서 꼬깃꼬깃 접은 천원짜리 다섯 장을 건낸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오전 7시, 출근길 명함을 돌리는 일부터 하루 일과가 시작이다. 선거 경험이 없는 내게는 명함 한 장을 건내는 것도 무척이나 쑥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다.
아침시간에 한참동안 "안녕하세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후보 정경섭입니다"를 외치는 일이 그닥 쉽지만은 않다. 기계처럼 외치고, 반사적으로 명함을 건낸다.
그런데 지나쳤던 사람들이 되돌아와서 명함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알고보니 민주당 후보인줄 알았다가 민주노동당 후보여서 돌아왔다는 것. 과연 탄핵 정국은 무서웠다. 지역 상가를 다니며 인사를 할 때도 흔들리는 유권자의 모습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대통령이 너무 불쌍해요. 저번에는 권영길 찍었는데 이번엔 열린우리당 찍어야겠어요. 어떻게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어요. 이번엔 미안해요."
나오면서 상가의 상호를 적어 놓는다. 몇 번이고 가서 설득을 해야 한다. 적어도 대선 때 권영길 후보에게 투표했던 유권자는 확실한 지지층으로 잡아야 한다.
마포구에는 다른 구와 마찬가지로 공사를 하는 곳이 많다. 그래서인지, 상가를 다닐 때 참을 먹으러 온 일용직 노동자를 많이 만나게 된다. 먼저 음식점 주인에게 인사를 한 뒤, 식사를 하는 일용직 건설노동자에게 명함을 돌린다. 그때, 그들은 민주노동당 후보를 반색하며 반긴다. 이건 대선 때도, 지방선거 때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부분이어서 하루의 피로를 가시게 해주는 감동이 있다.
"이젠 민주노동당이지. 우린 말할 필요가 없어요. 걱정 말아요. 자, 이리 와서 술 한잔해요. 그러면 몸이 풀릴 겁니다. 자 와서 한잔 받아요."
망원역에서 퇴근시간 명함을 배포했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탈진한 상태로 사무실에 돌아오니 문자메시지가 온다.
"망원역에서 네임카드(명함)를 받았어요 젊으시던데 대단하시네요 힘내세요. 화이팅 -망원동주민-"
누군가 내가 나눠준 명함에 적힌 핸드폰 번호로 문자를 보낸 것이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한번 생각해 본다. 여론조사에서 3∼5%의 지지를 받아도, 친구들에게 민주노동당을 말하면 서러움을 당해도, 텔레비젼 뉴스에 당 활동이 한 줄도 나지 않아도, 그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고 있다.
모든 지역 선거운동본부가 다 그렇겠지만, 사전선거운동이 시작된 후 지구당(비록 법적으로는 해소됐지만)의 역량이 배가 된 것을 느낄 수 있다. 평상시에는 일주일에 많아야 두세 번 정도 당원들의 모임이 있었던 것에 비해 요즘은 매일밤 당원들로 사무실이 북적거린다. 보통 하루에 십여 명 이상이 상주를 하며 각 팀별로 회의를 진행한다.
특별당비를 내야하고, 퇴근 이후에는 자신의 시간을 쪼개서 회의에 참석하고, 선전전에 참석하고, 아침에는 평소보다 한시간 시계를 일찍 맞추고 부스스 일어나 출근 선전전에 참여하는 당원들. 후보가 아무리 힘들어도 쓰러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당원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곁에서 보기 때문이다.
3월 초순경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지구당은 지역 초등학교 앞에서 학교급식조례제정청구 서명운동을 벌였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온 학부모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서명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때도 도저히 상근역량만 가지고는 할 수 없었던 일을 당원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간을 내주어 성공할 수 있었다.
지역득표와 더불어 비례대표 득표를 위해
요즘 마포을 선거운동본부는 후보자에 대한 선거운동을 잠시 접고 정당명부 비례대표에 대한 홍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본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격으로 당이 유인물을 만들어 출퇴근시 배포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1인2표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라고 표기하면 선거법에 위반되기에 유인물 어디에도 민주노동당을 알리는 부분이 없다. 다만, 서부민중연대, 민주노총 서부지구협의회 명의에서 "민주노동당과 상당히 가까운 단체에서 나온 것"이란 유추만 가능할 뿐이다.
주민들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라고 선전전에 참여한 유세팀은 전한다.
"2표가 있다는 것 자체를 아예 몰라요. 정말 큰일입니다. 투표장에 가서 알게 생겼어요."
민주노동당 중앙당에서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당명부비례대표제에 대한 홍보가 부족하다며 항의방문을 갔지만, 별다른 수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민주노동당의 사활은 정당투표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라도 움직여야 한다. 여론조사 결과 전 국민의 30%가 정당투표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사실 피부로 느끼는 건 그보다 훨씬 심각해 보였다.
지역 후보로 나간 이상 내게 지역득표는 무척이나 소중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방침이 왜 '가능한 모든 지역에서 후보를 내는 것'이었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역에서 후보가 나갔을 때만이 정당득표율이 높았다는 지난 지방선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에게 중요한 건 비례대표 후보를 한명이라도 더 국회에 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역에서 모든 후보들이 전사할 각오로 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