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이 집권한지 일년 조금 넘었다. 그런데 그 일년 동안 50년 헌정사상 처음인 사건이 유독 많았다. 지난 3월12일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공조에 자민련이 막판 가세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 통과시킨 것은 그 절정이었다. 이후 대통령은 분명 존재하되 대통령 역할을 하지 못하고, 직함에서조차 아슬아슬함이 느껴지는 '대통령권한대행 국무총리'가 한시적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탄핵안 처리 과정에서 거대 야당의 힘을 한껏 뽐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탄핵 역풍'으로 끝간 데 없이 추락하고 있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50%대에 가까운 지지율을 보이는 등 '탄핵 특수'를 누리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탄핵사태는 정치개혁과 민생이 주요 화두가 되어야 할 4월 총선을 '탄핵찬성 대 탄핵반대' 구도로 단순화시키며 한국정치의 역사를 한발 뒤로 물려 버렸다.
[ 탄핵안 가결을 둘러싸고 국회의원들이 몸싸움을 하고 있다. - 출처: 참소리 ]
한나라와 민주, 뭘 믿고 저질렀을까
탄핵을 강행한 야당들은 역풍으로 전통적인 '텃밭'인 영남과 호남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탄핵안을 강행한 것은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사건일 수도 있다. 야당들의 무리수를 이해하기 위해선 탄핵 정국 이전의 전반적 여론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는 탄핵 이전부터 30%선이 붕괴됐었다. 전직 대통령들과 비교해보면 집권 이후에 이처럼 급속히 지지율이 하락한 것도 '초유의 사태'다. 그러나 여당이라 할 수 있는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꾸준히 상승해서, 탄핵안 통과 이전에도 이미 지지율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민주당은 호남에서조차 아성이 무너진 지 오래였고, 한나라당도 안전한 텃밭인 영남에서 부산·경남지역을 중심으로 부동층이 증가하고 있던 상태였다. 총선을 앞두고 이같은 상황을 반전시킬, 즉 전통적 지지층을 결집시킬 카드로 야당이 내놓은 것이 바로 대통령 탄핵안 발의였다.
탄핵안 통과 전날인 11일 저녁 10시께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탄핵안 반대 여론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원래부터 한나라당 지지하는 사람은 열에 넷, 저쪽은 여섯"이라며 '6대4 판세론'을 역설했다고 한다. 한나라당의 주요 지지층은 전체 여론의 40%지만 그들의 결집도와 참여도가 반한나라 지지자들에 비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탄핵에 대한 반대 여론도 높지만 예의 한나라당 지지 계층과 겹치는 '침묵하는 다수'들에 기대를 걸겠다는 것 야당의 계산법이었다. 특히 선거에서 중요한 변수인 40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가장 높았다는 점도 이를 감행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한편, 3월11일 대통령 특별기자회견과 그로 인한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자살로 여론이 급속히 나빠진 것도 탄핵안 발의를 감행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상당수 언론이 비공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 20%선이 무너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탄핵에 반대하던 한나라당과 민주당 소장파들이 막판에 탄핵 찬성으로 돌아선 이유도 이같은 결과를 놓고 당 지도부가 집요하게 설득한 것 때문이라고 한다. 노무현 정권은 조금만 더 몰아치면 쓰러질 듯 위태위태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한나라당과 민주당 내에서 '총선연기 후 내각제 개헌'이란 정권찬탈 시나리오도 실제 논의됐었다고 한다.
[ 노 대통령이 3월11일 측근비리와 관련 회견에서 탄핵정국과 총선을 연계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출처: 시민의 신문 ]
최대수혜자는 열린우리당과 노 대통령
정치적 위협 카드 정도로 여겨졌던 탄핵안이 급기야 12일 통과되었다. 의장석을 점거한 채 이를 저지하려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박관용 국회의장이 헌정사상 여섯 번째로 발동한 경위권에 따라, 처참히(?) 끌려나갔다. 이러한 상황의 전 과정은 KBS 등 방송을 통해 수 차례 공개돼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물론 열린우리당 당직자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당일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대응은 사전에 짠 각본에 따른 것이지만.
의원 수 139명인 거대야당 한나라당은 영남 특히 부산·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고정지지기반이 점차 약화되는 추세에 있었다. 대선패배에 따른 기대감 상실, '차떼기 정당' 등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부패정당으로의 이미지 실추, 또 반DJ 정서에 기반한 반사 이익 공간이 소멸된 것 등이 그 원인이었다. 한편, 열린우리당과 분당 이후 급속히 세가 약화된 민주당은 독자적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한나라당에 대한 대항마로서 정치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음에도 이를 저버리고 한나라당과 공조를 하면서 더 이상 지지층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탄핵사태 이전 열린우리당은 정당지지도는 높지만 실제 지역선거에선 만년 2위에 머물 수도 있는 불안정한 처지였다. 하지만 탄핵 정국을 기점으로 원내일당은 물론 과반을 넘어선 개헌선 의석 수를 확보할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총선 120∼130석 획득을 노무현 대통령 재신임의 가이드 라인으로 제시한 것도 이런 분석에 기반한 것이다. 탄핵 가결 이전 정 의장은 개헌 저지 의석(100석)을 총선 목표로 제시했었다.
탄핵이 가결되는 순간엔 패자처럼 굴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열린우리당은 가장 큰 수혜자가 됐다. 3월 셋째주 각종 여론조사에서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50%를 오르내리고 있으며, 수도권을 비롯해 충청, 호남, 부산·경남 등 전국적으로 열린우리당 후보들이 지지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탄핵반대 대 탄핵찬성' 구도로 형성된 열린우리당 쏠림 현상은 탄핵의 충격을 대치할만한 변수가 없는 한 총선 결과로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다.
물론 야당 내에 '이대로 죽을 수만은 없다'는 위기 의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막판에 대형 이슈가 터져 나올 확률도 높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자의 충성도가 다른 정당에 비해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아직 총선 결과를 속단하긴 이르다. 한나라당이 3월23일 총선을 진두지휘할 새 대표로 박근혜 의원을 선출한 것도 대구·경북 지역을 비롯한 보수층 표심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또 과거보다는 그 영향력이 크게 줄었지만 선거 때마다 등장했던 '막판 지역주의' 역시 전체 의석 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다.
정권의 면죄부가 된 탄핵가결
전략적 차원에서만 평가해도 야당의 탄핵 카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탄핵안은 노무현 대통령이 총선과 재신임을 연계시키겠다는 약속에 대해 숱하게 비판했던 야당이 똑같은 오류를 범한 것이다.
대통령 탄핵은 대선 차원의 문제다. 대안적 리더십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탄핵은 야당이 꺼내 들어선 안 되는 카드였다. 대선은 대선이고, 총선은 총선이다. 더구나 이미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차기 정권에서 대통령을 내놓기 힘들어 보이는, 집권 기대감을 상실한 정당이다. 노무현 정권에서 한나라당은 대안세력, 하다 못해 견제세력으로서도 야당 역할을 못했다. 그저 '정권 흔들기'에 매몰된 '안티세력'으로 밖에 자리매김하지 못했다. 민주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문제는 야당의 '무리수'가 정쟁 차원을 넘어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느냐는 점이다. 탄핵 이외에 다른 정치적 이슈는 모두 실종됐다. 정당의 정책이나 노선 차이는 별다른 변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17대 총선이 구시대 정치인을 몰아내는 인적 청산의 계기 뿐 아니라 정치개혁 차원에서 민주노동당 등 새로운 정치세력 진출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지만 탄핵국면에 휩쓸려 공론화의 장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한편, 탄핵 반대 여론이 강하게 일면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도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도 상황을 탄핵 정국으로 몰고 온 공범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4월 총선은 또 한 축에선 이라크 파병 결정, 부안 핵폐기장 부지 선정 문제, 새만금 공사 강행,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등 지난 1년 간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의 장이기도 한데, 탄핵안 가결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일종의 면죄부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탄핵안 가결까지 상황을 노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몰고 갔다'는 근거 없는 시나리오가 퍼졌던 것도 이런 결과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냉정히 돌아보고 찬찬히 준비하자
현 기류가 계속돼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면 노무현 대통령은 '강력한 대통령'으로 컴백할 것이다. 벌써부터 여권 일각에선 정기간행물법 개정과 같은 언론 정책 정비를 통해서 보수 언론을 압박하는 방안 등 반대세력에 대한 견제 작업이 얘기되고 있다. 과연 총선 이후 정국과 민생은 '탄핵반대'를 외친 국민들이 원했던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제 탄핵이란 광풍에서 한발 벗어나 냉정히 돌아보고 찬찬히 준비해야 될 때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