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14일 새벽 4시경, 현대중공업 사내협력업체인 인터기업 하청노동자 박일수(50세) 씨가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요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분신 당시 옆에 벗어놓은 작업복 주머니에는 "이 사회에서 하청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이길 포기하고 가진 놈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차별과 멸시, 박탈감, 착취에서 오는 분노,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나 한 몸 불태워 하청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일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는 내용의 유서가 들어 있었다. 그가 2개월 전, 20년 만에 처음 만났다던 딸조차 뒤로 한 채 가난하고 고단했던 50년 세월의 생을 끝마치면서 마지막 남긴 절규는,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였다.
박일수 열사는 유서를 통해 "부정, 부패, 착취, 비리, 직영노동자들의 하청노동자에 대한 행패와 멸시, 이 암울한 하청 비정규직 문제를 개선해 줄 곳은 아무 곳도 없다. 대한민국 노동법은 자본을 위한 법이고 하청 비정규직에게 생색만 내는 노동법이다. 억울함을 노동부에 고발해 봐야 부당해고비 몇 푼 받으면 끝난다. 하청노동자 90%가 불법 파견근로로 현장에 투입되면 직영노동자에게 작업지시를 받는다. 더럽고 어렵고 힘든 곳은 하청노동자를 투입시킨다. 이토록 비인간적이고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정말 죽기보다 서러웠던 하청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낱낱이 폭로했다. 결국 죽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었던 하청노동자의 처절한 삶, 누구의 책임일까?
차별받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닐 터인데
양대노총(민주노총울산지역본부와 한국노총울산지역본부)의 성명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 박일수 동지의 죽음은 현 정부의 비정규직 양산정책과 현대중공업의 비인간적인 차별과 노동탄압에 의한 사회적 타살"이라는 점에 대해서 대체로 공감한다. 그러나 박일수 열사의 유서에는 정규직 노동조합과 노동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상당하다. "현대어용 노동조합은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조합이고 '노동자는 하나다'는 원칙은 말장난일 뿐 열악한 하청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다. 태어나면서 귀족노동자, 하청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어떻게 하다보니 직영노동자, 하청노동자로 살뿐인데, 직영노동자라 하여 하청노동자를 기만하고 멸시할 자격은 없다"며, 정규직의 차별과 멸시도 열사에게 정말 참기 힘들었던 부분임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박일수 열사의 사회적 타살에 정규직 노동조합과 정규직 노동자의 책임은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박일수 열사는 "사내 복지시설을 하청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식당, 샤워실, 화장실, 커피자판기다. 그 많은 복지시설은 직영노동자만 사용한다. 직영노동자 탈의실과 하청노동자 탈의실에서부터 소외감을 갖게 된다. 하청노동자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한여름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그늘을 찾아 헤맨다. 한겨울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바람 피할 곳을 찾아 헤맨다. 직영노동자는 시설 잘 되어 있는 건물 내부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렇듯 직영노동자에 비해 하청노동자는 차별을 받는다. 직영노동조합 단체협약을 보면 백가지도 넘는 복지혜택, 문화의료혜택, 자녀교육혜택, 주거혜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하청노동자는 정해진 시급, 일급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며 통탄하고 있다.
이 같은 심각한 불평등이 박일수 열사에게 엄청난 박탈감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박일수 열사의 말처럼 "태어나면서 귀족노동자, 하청노동자가 정해진 것"은 아닐 터인데, 왜 불평등이 이토록 철저하게 구조화 된 것일까? 혹시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의 철저한 외면이 차별과 차이를 낳았고, 제 밥그릇과 자기 조합원만 챙기는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일터를 이토록 양극화시켜 놓은 것은 아닐까?
차별하는 허약한 노동운동, 연대하는 강력한 노동운동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사회가 없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말이다. 동시에 한 인간은 반드시 사회를 형성하는데 직접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릇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혼자만 행복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비정규노동 문제도 이런 관점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동아대 강신준 교수는 노동진영의 비정규직에 대한 정책적 대응방식은 크게 두 가지 사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차별을 주도했던 미국식이고, 다른 하나는 비정규직과 연대를 추구했던 독일식인데, 우리가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비정규노동에 대한 차별적인 대응이었고 그 결과는 노동조직의 지속적인 분열과 노동계급이 사회 내에서 힘없는 소수파로 전락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미국 노동시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과 이민에 의한 보다 값싼 노동력의 지속적인 공급인데, 이 후임 이민노동력은 언제나 노동시장에서 선임 노동자들의 지위를 위협"했기 때문에 미국 노동조직은 이들 후임 이민노동자들을 노동조직에서 배제하고 단체교섭에서 차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후임 이민노동자들은 비정규노동으로 밀려났고 노동조직의 전반적인 분열과 약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한편, 독일 노동조합은 "전후 일반구속력이라는 법·제도를 도입하여 30% 가까운 조직률의 노동조합이 체결한 협약성과를 90% 가까운 모든 노동자들에게 균등하게 적용한 결과 독일에서 비정규노동문제는 극히 예외적인 문제"로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런 민주적 원리는 조직에도 적용돼 독일 노동조합은 "전후 정치적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는 통합노조방식으로 건설되었고,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조직을 건설하여 사회 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다수파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강신준 교수는 "노동진영의 정책원칙이 차별이냐 연대냐의 차이는 이처럼 두 나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비정규노동의 존재여부와 노동진영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갈림길"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 노동진영이 분열과 통합 가운데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가 비정규노동의 해결 전망은 물론 정치적 진출에 성공한 우리 노동운동의 사회적 전망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과 독일의 사례를 부디 교훈으로 삼는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정규직이 먼저 나서야 한다
최근 들어 신문이나 방송에서 자주 접하는 단어가 '웰빙(well-being)'이다. '웰빙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을 만큼 이 말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웰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좋은 음식, 멋진 집 그리고 건강한 신체를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웰빙은 원래 '안녕, 복지, 행복, 복락'을 뜻한다. 그런데 요즘 언론에서 사용하는 것만 보자면, 이 단어가 단지 '신체적 건강'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 같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이란 단지 질병과 장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육체적·정신적 및 사회적 안녕의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건강이 '의학적 개념'만이 아니라 '정신적·사회적 개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안녕의 상태"가 불안전한 경우를 웰빙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전체 노동자의 53%(2001년 기준 OECD 통계)에 달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차별과 멸시에 신음하며 참담하게 살아가는 상황을 "사회적 안녕의 상태"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규직만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도 안녕할 수도 없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개인의 건강이나 복지를 보장받을 수도 없다. 진정한 '웰빙'은 모두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는 처절한 절규가 없는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람답게 살고싶다"는 지극히 당연한 욕구 때문에 분신하는 사태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먼저 정규직 노동조합과 정규직 노동자가 이를 위해 힘차게 나서야 할 터다.
비정규직에게 희망 주는 임단협을 기대하며
2004년 임금협상을 앞두고 마침 금속연맹 자동차분과 노동조합(완성차 4개사)이 노사 공동으로 '산업발전 및 사회공헌기금'을 조성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와 함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비정규직의 임금을 정규직의 80% 수준으로 확보한다는 요구안을 확정하고 나섰다. '산업발전 및 사회공헌기금'은 노사 합의로 당해 연도 당기순이익의 5%를 공동기금으로 조성하여 불우이웃 돕기 및 비정규직 처우개선과 자동차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실제로 노동운동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괄목할 만한 요구안으로 생각한다. 비정규직에게 진정으로 희망을 주는 협상을 충심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자동차 완성4사 노동조합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