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실력과 역량으로 판갈이 할 때

노동사회

이제는 실력과 역량으로 판갈이 할 때

admin 0 3,106 2013.05.12 06:44

2004년 4월15일. 이 날은 ‘거대한 변화’의 기대 속에서 서로 다른 질감을 지닌 감동의 파노라마가 연출된 날이었다.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를 통한 제1당 교체와 민주노동당의 성공적인 원내 진입이 그 감동의 근거였다. 일각에서는 63.0%에 달하는 신진인사의 대거 진출을 통한 대폭적인 물갈이와 정치권 세대교체, 그리고 39명에 달하는 이른바 여풍(女風) 등을 보면서 개혁과 변화의 징후를 읽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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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9일 모란공원에서 참배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의원들.       출처: 판갈이 ]

지역주의 약화, 진보정당 원내 진출

17대 총선 결과는 무엇보다도 정치지형의 지각 변동을 알리는 중대 선거(critical election)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분할정부적 정치상황, 즉 행정부권력과 의회권력의 불일치 상황이 민주화 이후 최초로 해소되었으며, 이른바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분할정부적 이중권력 상황의 해소는 참여정부의 개혁 실종과 실패를 과거처럼 기득권 수구세력에 의한 ‘포위된 개혁’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번 선거를 통해 1950년대 진보당과 1960년 사회대중당의 출현이래 진보정당이 최초로 원내 진출을 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셋째, 한나라당에 대한 영남지역의 표 집중 현상을 볼 때 지역주의 정치의 해체를 말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열린우리당의 성과와 민주노동당의 성공, 민주당과 자민련의 몰락은 오랫동안 민주정치의 발목을 잡아온 지역당 구조의 해체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뜻한다. 

한편 선거란 긴 과정의 마지막 의식(ceremony)이다. 17대 총선의 전 과정은 열린우리당의 ‘탄핵심판론-거야 부활론’, 한나라당의 ‘거여견제론’, 민주노동당의 ‘판갈이-진보야당론’이 맞붙은 한판의 대격전이었다. 상식적으로 볼 때 17대 총선은 지난 16대 국회 4년 및 노무현 참여정부 1년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돌발적인 탄핵 사태가 지배적인 이슈가 되어 모든 현안과 쟁점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3보1배, 눈물로 상징되는 이미지와 감성의 정치만이 판을 쳤고, 정책 경쟁은 실종되었다. 물론 현대 정치에서 이미지 요소가 반드시 부정할 것만은 아니며,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이미지 정치가 선거의 지배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데 있으며, 그것은 기성 정당들의 현주소, 즉 정체성의 빈곤과 정책적 내용의 빈약함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었다. 

‘새로운 정치’ 시대 예감

13.0%의 정당득표율과 원내 10석으로 상징되는 민주노동당의 놀라운 성공은 기성 보수정치와는 질감과 색깔이 다른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정치’ 실천의 원내 교두보가 확보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우선, 냉전분단반공체제 하에서 결빙되어 온 보수독점의 기득권 정당구조와 질서가 수구적 보수정당-자유주의적 보수정당-진보주의정당 간의 정상적인 정치적 경쟁 구조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정체성 빈곤과 엘리트 특권을 기본 특징으로 하는 기성 보수정당들과는 달리, 진성 당원을 중심으로 당내 민주화를 이룬 정당이 최초로 대한민국 의회에 등장했다는 것과, 지역주의와 정치부패와 낡은 관행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정치인들이 조직적으로 의회에 진출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괄목할만한 약진이 ‘새로운 세상 만들기’를 꿈꿔온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의 결과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개인보다는 당을 앞세운 지역구 후보들의 밤낮 없는 고군분투, 비례후보들의 언론매체를 통한 고공 전투와 전국 순회, 지역과 중앙 상근 활동가들의 눈물겨운 실천, 민주노총과 전농 등 대중조직들의 참여와 지원, 여론주도층을 포함한 각계에서 쏟아진 지지 선언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집합적 실천이 대중들의 이율배반적인 전략투표 경향을 어느 정도 잠재우면서,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노동자와 민중들의 계급투표와 이념투표의 경향을 겉으로 드러낸 추동력이었다.

그럼에도 선거 결과에 대한 지나친 흥분과 준비된 역량에 대한 자만은 금물이다. 냉정히 평가해 볼 때, 총선 결과에는 주체적 실천 외에도 1인2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라는 제도의 효과와 정치적 격변 상황의 ‘부수적 효과(spill over effect)’라는, 민주노동당의 실력과 정치적 역량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요소들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 정당득표율(13.0%)과 후보평균득표율(7.9%) 사이에 존재하는 일정한 거리도 당이 지닌 총체적인 정치역량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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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5일 개표결과를 보기 위해 민주노동당사에 모인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과 단병호 비례대표의원이 악수를 하고 있다. - 출처:판갈이 ]

민주정치 발전의 키워드, 민주노동당

일각에서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성과에 근거하여 향후 개혁 드라이브가 강하게 걸릴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수구적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에 맞서 두 당간의 개혁 공조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단을 쉽게 내놓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번 17대 총선을 통해 민주개혁적 가능성의 공간이 확장된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열린우리당이 과연 민주개혁적 실천을 전개할 의지와 능력과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꽤 많은 함량 미달의 후보 공천과 그들 다수의 당선을 차치하더라도, 이념과 노선에 있어서 복잡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조정하고 해결할 만한 리더십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열린우리당 역시 민주개혁적 정체성이 빈곤한 정치집단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라크 파병과 새만금 간척사업, 노동과 농업 문제 등 지난 1년간 주요 현안에 대한 참여정부와 한나라당의 보수적 정책 공조가 그 증거이며, 이것이 바로 열린우리당을 자유주의적 ‘개혁’정당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보수’정당으로 보는 이유다.

이러한 점에 비춰볼 때 만약 기성 정당과는 ‘다른 질감의 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존재가 없었다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불안정한 양강 구도 속에서, 그리고 두 정당 내부의 주도권 다툼과 쉽지 않은 조직 정비 속에서 이른바 소모적인 ‘위기와 정쟁의 정치’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과거와 유사한 ‘불임과 배반의 정치’가 지속되리라는 불길한 전망도 일정한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의 존재 그 자체와 다른 색깔의 정치적 실천, 그에 따른 이른바 ‘민주노동당 효과’야말로 이러한 암울한 정치 상황을 변화시켜낼 주요 변수이며, 이러한 사실들은 민주노동당이 담당해야 할 정치적 책임의 몫을 더욱 무겁게 한다. ‘수구적 보수의 신속한 퇴출, 자유주의적 보수와 진보주의의 경쟁구도’의 형성과 정상적인 정치의 장을 열고자 하는 민주노동당의 실천 여하에 따라서 많은 변화들이 예상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그것을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역사적 반동의 힘도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우선 보수독점의 폐쇄적 정치체제와 엘리트 중심의 기득권 정치구도를 특징으로 하는 ‘3류불량정치’의 파열 속에서, 민생을 보살피고 갈등의 조정을 통한 문제 해결과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는 정치 본연의 역할이 되살아날 것이다. 또 특권 철폐와 민생 정치, 정책 경쟁 등 민주노동당의 선도적 의정활동과 차별적인 당운영 시스템은 기성 정당들에게 정치적 압박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면서 일종의 ‘민주노동당 따라하기’의 경쟁적 붐을 조성할 것이다. 이것은 ‘기대-실망’의 악순환의 반복적 사이클을 해소시키면서 기성 정치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거부를 새로운 희망과 신뢰로 바꿔낼 중요한 전기가 마련된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공격을 피하면서 안주하지 않기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리라 보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이전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완전히 노출되었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득권 집단들의 조직적 공격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가동되고 전방위적인 감시체계가 작동되면서 어쩌면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 

예컨대 갈등의 표출과 그에 대한 정치적 조정 및 사회적 합의의 도출이 민주정치의 기본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갈등의 표출=사회적 혼란’이라는 상식 이하의 전제 속에서 국민화합과 사회통합과 상생의 정치야말로 최고의 선이자 절체절명의 과제라는 무기를 앞세운 무차별적 압박이 가해질 것이다. 또 이념과 노선과 정책과 인물에 대한 검증이라는 명분 아래, 냉전분단반공주의에 근거를 둔 시대착오적인 레드 콤플렉스란 은밀하고도 변형적인 공세가 가해질 것이다. 나아가 갈등과 혼란을 조장하는 과격집단에서, 실현불가능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정치적 무능집단으로 공격 포인트의 전환이 예상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은 새로운 정당정치 모형의 창출을 위한 단초의 형성, 즉 운동의 정치적 연장으로서의 성격과 함께 정치의 운동으로의 확산이라는 이중적 과정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할 때, 제도화 과정에 경향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이른바 ‘길들이기 효과’는 낡은 정치 타파와 새로운 정치의 실현을 가로막는 주된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제도의 긍정성과 힘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제도에 길들여진 채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거나 순응하는 것은 결국 정치에 대한 불신을 고조시키고 급기야는 잘못된 과거로의 회귀라는 최악의 사회 분위기를 조성할 우려도 있다.

이처럼 여전히 쉽지 않은 길이 민주노동당 앞에는 놓여 있다. ‘민주 평등 해방의 새 세상’을 향한 진보정치의 한 순환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 무엇보다 당면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유비무환의 자세, 그리고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 하나에 신중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민주노동당의 실력, 정치적 역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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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명의 원내진출이 확정된 4월16일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기자회견을 갖고 이라크파병과 탄핵안을 철회할 것을 주장했다. - 출처: 판갈이 ]

다른 정치의 색깔을 위한 실력을 갖출 때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진보야당으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해내기 위해서, 그것을 넘어 대안적 수권정당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현장과의 유기적 소통과 생활밀착형 정치를 통한 생생한 민심 듣기와 민생 살피기라고 할 수 있다. 억압받고 차별받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의 우선적 권익 실현을 기본 지향으로 하는 민주노동당의 ‘다른 색깔의 정치’를 위해 이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며, 그 과정에서 사회적 지지 기반의 확장과 당 조직의 확산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민주노동당이 노동의 정치적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사회적 연대의 정치 가운데서도 특히 노동과의 열린 소통이 중요하다. 이점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통합 가능성 모색 및 산별노조체계의 확립, 노동조합의 낮은 조직률과 당 참여율의 제고를 통한 노동자참여의 취약성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대중투쟁과 의정활동의 새로운 결합 모형의 창출 속에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올바른 관계 설정, 예컨대 조직 자율성에 대한 상호 존중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지속시킴과 동시에, 예상되는 상호 긴장과 갈등 해소를 위한 민주적 협의와 소통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것을 상시적으로 가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50여년간 지속되어온 냉전분단반공체제의 필연적 산물인 노동친화적 문화의 부재라는 벽을 넘어서기 위한 목적의식적 실천이 요구된다.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역량 강화를 위해서는 당 내부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은 흔들림 없는 민주적 리더십의 소통적 구축, 당내 갈등 해소를 위한 참여와 감시의 민주적 시스템의 구축과 그것을 통한 균형과 견제의 쌍방향 정치 강화, 체계적이고도 알찬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과 그 프로그램의 즐거운 진행을 통한 당원들의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의 제고 등으로 모아진다. 

한편 17대 총선을 경과하면서 민주노동당은 이전과는 다른 정치적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그에 걸맞은 역할의 확장과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예컨대 『진보정치』 인터뷰(174호)에서 최장집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비정규직노동이나 평화 등 지금까지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대표하지 못한 영역이 광범위하게 열려 있는 상황에서, 바로 그 열린 공간을 민주노동당이 정치적으로 대표해야 한다. 아울러 정치의 정상화를 통해 사회 전반적인 탈정치화 추세를 변경시켜내고, 사회적 힘 관계의 기본 지형 속에서 그 힘의 중심을 보다 왼쪽으로 이동시켜내야 한다. 그것은 보수적 헤게모니에 대한 대항 헤게모니의 형성자로서 역할을 민주노동당이 수행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실력과 정치적 역량을 갖추고 또 그 사회적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확장시킬 때, 21세기형 새로운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은 세상을 바꾸고 또 다른 세상을 가능케 하는 긴 여정의 또 다른 한 순환을 보다 순조롭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