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룰라 정부 어디로 가는가?

노동사회

브라질 룰라 정부 어디로 가는가?

admin 0 4,014 2013.05.12 06:39

최근 국내 한 일간지는 "변하는 남미"라는 연재물을 실으면서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실바(룰라) 대통령은 "더 이상 노조 지도자가 아니"며 "불가능한 대선 공약들은 아예 터놓고 못 지키겠다 해버렸고, 필요한 개혁을 위해서는 원수졌던 정적들을 능숙하게 끌어안는 프로정치인이 돼 버렸다"고 평가했다.

"이봐 룰라, 선거공약 어디 갔어?"

jsyoon_01_1.jpg또 룰라 정부가 "강력한 긴축정책으로 국제적 신용을 유지하고 물가안정을 도모하는 데 성공했으나 대내적으론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고 있"으며 "집권 첫해 마이너스 경제성장에 실업률은 더 높아졌고 기존의 사회보장 혜택에 칼질까지 해대니 정치적 반대파는 물론 지지기반이었던 노조조차 선거공약은 어디 갔느냐며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주요 외신들도 룰라 정부가 집권 20개월 동안 재정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재계의 요구에 따라 수십억 달러 규모의 감세 조치를 단행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또 룰라 정부는 지난해 연금개혁을 통해 공무원 노동자들의 반발을 불렀고, 애초 약속과 달리 미진한 토지개혁으로 지지세력이었던 무토지농민운동(MST)에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전세계 진보운동 세력의 관심을 모았던 지난 2002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60%가 넘는 지지율로 당선됐던 룰라 정부의 이와 같은 행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룰라 정부는 서구의 사민주의 정당들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일까.

4년 임기 중 1년8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저 "선거를 통해 집권한 좌파정당의 필연적인 우경화"로 낙인찍기보다는 창당 22년만에 집권한 브라질 노동자당(PT)이 자신의 이상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것들에 대한 면밀하고 비판적인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룰라가 물려받은 것, 2천3백억 달러의 빚

최근 브라질 관련 소식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룰라 정부의 긴축재정 정책과 관련된 얘기들이다. 노동자당은 이미 지난 2002년 대선에서, 카르도주 정부가 3백억 달러의 차관을 받는 대신 국내총생산의 3.75% 재정흑자를 유지할 것을 약속한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협약을 준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4년 전 대선에서 아이엠에프와의 협약 파기를 주장하고 한시적인 국가지불유예(모라토리움) 선언도 가능하다고 했던 것에 비하면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페르디난두 엔리케 카르도주 전임 대통령이 집권한 1995년 당시 브라질은 1천4백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채무를 지고 있었다. 카르도주 정부는 8년 임기 동안 무려 3천4백억 달러를 외채 상환과 이자를 갚는 데 쏟아 부었지만 임기 말 브라질의 국가채무는 2천3백억 달러로 불어나 있었다.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빚을 져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된 결과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브라질 국민들의 75% 이상이 정부정책의 변화를 요구할 정도로 우파 정부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1998년 경제위기 이후 처음으로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파 후보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반면 4번째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룰라 후보는 줄곧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외신에서 룰라 후보가 2위와의 격차를 넓히고 있다는 보도가 나올 때마다 주식, 채권, 헤알화는 '트리플 약세' 행진을 거듭했다. 룰라가 당선될 경우 채무불이행을 선언할지도 모른다는 국제금융계 인사들의 협박성 발언들이 거듭될 때마다 브라질 경제는 요동을 쳤다. 이런 상황에서 룰라를 비롯한 대선 주자들에겐 집권 후에도 아이엠에프와의 협약을 준수할 것을 약속하라는 유무형의 압박이 가해졌고 다른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룰라도 협약의 이행을 거듭 약속했다.

IMF 요구인 재정흑자 '초과달성'

결선투표를 통해 대선에서 승리한 룰라는 지난해 1월 취임 후 재정흑자 기조를 오히려 상향조정해 그동안 의심쩍은 눈길로 바라보던 국제금융기구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새 정부의 경제팀을 보수적인 인물들 위주로 기용한 룰라는 원래 약속보다 0.5% 포인트 높은 4.25%(국내총생산 대비)를 재정흑자 목표치로 설정했다.

집권 전에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고 쳐도 집권 후 빈곤 퇴치를 위한 '기아 제로' 프로그램, 토지개혁, 최저임금 인상 등을 위해서 더 많은 재정지출이 필요한 상황에서 더 가혹한 긴축정책을 표방한 이유는 뭘까.

일단 신자유주의적인 정책기조를 지지하고 있는 경제팀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노동자당 내 우파인 안토니우 팔로치 재무부 장관, 미국계 다국적 투자은행 경영자 출신의 엔리케 메이렐레스 중앙은행 총재를 비롯해 농업자본가 출신인 무역개발부, 농업부 장관 등은 강력한 긴축정책을 주장하고 있는 정부 내 핵심인물들이다.

한편, 이렇게 긴축정책을 강력히 주장하는 경제팀 외에도 정부 내에는 아이엠에프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긴축정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세력도 존재하고 있다. 긴축정책은 유지하되, 정부가 공공투자를 확대해 사회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아이엠에프와의 협상을 통해 재정흑자를 산출하는 방식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토지 재분배를 위해 정부가 '농업채권'을 발행할 경우, 이는 내국채로 간주돼 재정흑자 규모가 줄어들게 되는데, 아이엠에프와의 협상 과정을 통해 재정흑자를 산출하는 방식에 있어 약간의 융통성을 보장받자는 얘기다. 하지만 팔로치 장관을 비롯한 경제팀에서는 이를 불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정부 내 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룰라 대통령의 핵심참모인 조제 디르세우 전 당대표가 경제팀에 대한 공격에 나서고 있다. 올 초 측근의 뇌물 스캔들로 곤욕을 치른 디르세우는 살인적인 고금리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팔로치 재무장관의 발언에 대해 노동자당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도 높은 비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원들 사이에서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 룰라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되고 있다.

긍정적 대외정책, 그러나 "아이티 파병은 잘못"

경제정책과는 달리 룰라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룰라 정부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한 반대를 천명하고, 세계무역기구의 칸쿤 각료회의에서 선진국에 맞서 개발도상국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노력했다. 또 미국의 미주자유무역협정(FTAA) 추진에 제동을 걸고, 남미공동시장(Mercosur) 확대 등 '라틴아메리카 연대'를 꾀하는 등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밟아나가고 있다.

하지만 브라질 정부가, 무장반군에 의해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축출된 이후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아이티에 지난 6월, 1천2백명 규모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한 것에 대해서는 탐탁히 여기지 않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에미르 사데르 리우데자네이로 대학 교수(사회학)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지원방안은 카리비아해 연안국들로 구성된 카리비안 공동체(Caricom)가 마련해야 한다"며 브라질의 파병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을 넘보고 있는 브라질은 아이티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과 프랑스 군대를 대신할 군대를 파견해달라는 유엔 안보리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했다. 하지만 이는 군사적 개입이 장기화될 수 있고 향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지나친 내정간섭의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섣부른 결정이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 브라질이 역내에서 힘이 커지는 데 대한 거부감이 자칫 중남미 국가들의 공동의 행보에 차질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도 우려되는 지점이다.

올해 말 IMF협약 만료, 아래로부터 대안이 관철될 것인가

jsyoon_02.jpg지난해 11년만에 마이너스 성장(-0.2%)을 기록했던 브라질 경제가 호전되면서 올해 8월까지의 성장률이 4%를 기록했고 실업률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같은 호조를 반영하듯 지난 8월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룰라 정부의 지지도는 지난 6월의 29.4%에서 38.2%로 올라섰고 룰라 대통령의 지지도 역시 54.1%에서 58.1%로 상승했다.

또 리우에서 발행되는 일간 『글로부』에 따르면 오는 10월 실시되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집권 노동자당과 동맹진영의 후보들이 전체 26개 주도(州都) 가운데 상파울루, 포르투 알레그레, 꾸리찌바를 비롯한 19개 주도에서 타 후보를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지방선거가 룰라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로 여겨졌던 만큼 이와 같은 여론조사 결과는 브라질 국민들이 룰라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긴축재정 정책으로 고용창출, 소득분배, 성장의 조화로 요약되는 룰라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본궤도에 오르지 않는 지지자들의 반발은 계속될 것이다. 다행히(?) 국제신용평가회사인 스탠다드앤푸어tm(S&P)는 지난 8월 브라질이 올해 연말까지가 기한인 아이엠에프와의 협약을 갱신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제금융가에서 이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브라질이 더 이상 아이엠에프와 협약을 맺지 않아도 된다면 룰라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은 넓어질 게 분명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단일연맹(CUT)과 무토지농민운동 등 대중운동 진영의 힘으로 룰라 정부가 보다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남부아메리카대안정책연구소(PACS) 마르코스 아루다 교수의 지적과 같이 "무토지 농민, 빈민, 학생, 노동자, 실업자 등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진정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은 '동원전략'은 노동자당내 대다수 정파들이 합의하고 있는 "노동자 중심의 참여민주주의 모델"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좌파정당이 집권했다고 해서 좌파정치가 실현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사회운동의 동원전략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