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민주주의 구해낸 '참여'의 힘

노동사회

위기의 민주주의 구해낸 '참여'의 힘

admin 0 3,953 2013.05.12 06:37

제17대 국회의원 선출을 위한 4·15 총선은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지연되어 왔던 한국 민주주의 공고화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부정과 부패와 정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16대 국회가 퇴진을 불과 한 달여 남겨 놓고 대통령을 탄핵함으로써 빈사상태의 한국 대의민주주의는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민주 이행 이후 꾸준히 성장해 온 시민적 참여 기제는 대의기제의 붕괴를 저지하고 한국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탄핵 직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시민들의 탄핵반대 시위와 총선에서의 심판은 흔들리는 대의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 새롭게 진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굿바이 3김시대, 흔들리는 지역주의

4·15 총선은 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정치를 지배해 왔던 '3김정치'를 마침내 종식시켰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말썽 많은 대통령 임기를 마친 다음 정치일선에서 후퇴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했고, 정치사회를 지역적으로 분할 장악해온 보수 정당들은 양김의 지원과 지지에 기대어 세력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여온 것이 우리 정치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4·15 총선은 우선 민주당과 자민련을 궤멸시켜 버림으로써 3김정치의 중요한 조직적 기반을 와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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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 천막당사 앞에서 개표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한나라당 직원들  - 출처:한나라당 ]

3김 중 유일하게 정치사회에 머물러 있던 김종필은 정계에서 축출됐다. 김대중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동교동계 역시 회복불능의 치명타를 입고 와해되었으며 김영삼의 상도동계 역시 이제 어느 정당에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이번 총선에서 선전한 주요 정당들이 3김식 사당정치의 행태를 확연히 탈피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3김정치의 종식은 지연되었던 민주주의 공고화에 한국정치가 한발 더 다가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정치는 이번 총선에서 지역주의를 완전히 극복하는데 실패했다. 특히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가 국토의 서쪽과 동쪽으로 확연히 갈리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비록 경남 일부 지역에서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그리고 무소속이 의석을 획득했지만 한나라당에 대한 영남의 압도적 지지는 여전히 반복되었다.

사실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의미 있는 탈지역적 선택권을 부여받았다. 우선 지역 투표에서는 탈지역적 전국정당을 표방한 열린우리당 등이 전국 유권자들에게 유의미한 선택 대상을 되었다. 그리고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도입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또한 탈지역적 선택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많은 유권자들이 탈지역적 투표를 했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앞날을 희망적으로 보게 해 준다. 호남과 충청의 유권자들은 결연하게 지역주의 정당을 버렸다. 또 10퍼센트가 넘는 전국의 유권자들이 또 다른 탈지역 정당인 민주노동당을 지지해 주었다. 이와 관련해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가 결코 특정 지역에 치우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대체로 고른 분포를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지역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전문가들의 기대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비례대표제 확대가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지역주의는 사실 수년 전부터 약화의 조짐을 보여 왔다. 양김의 정치일선 퇴진,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탈지역정당을 표방한 열린우리당의 조직, 선거법 개정, 대표적 영호남당의 담합에 의한 탄핵 소추 강행, 그리고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과 자민련이 참패하고 민주노동당이 원내 제3당으로 약진한 사실 등이 지역주의 퇴조의 큰 흐름 속에서 진행되어 온 정치적 사건들이다. 지역주의의 돌이킬 수 없는 약화 추세 역시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청신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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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우리당 당원과 직원들이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환호하고 있다.  - 출처:열린우리당 ]

근본적인 변화 몰고 올 원내 진보정당

이번 총선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정치적 의의는 민주노동당의 일대 약진이다. 분단과 한국전쟁에 따른 냉전적 반공 이데올로기의 강고한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수십 년 간 한국정치를 지탱해 온 보수독점적 정치구조를 혁파하기 위한 교두보가 마련된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무엇보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에 크게 힘입었다. 그러나 원내 10석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은 민주노동당의 차별화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총선을 일관해서 기존 정당들이 의존했던 득표 전술은 유권자들의 냉철한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미지와 이벤트와 눈물과 단식이 범람하는 선거운동의 틈새에서 오직 민주노동당만이 차별화된 정책을 표방하고 이성적 판단에 의한 선택을 유권자들에게 호소했고 적지 않은 유권자들이 이 호소에 응했던 것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이념과 정책적 차별성으로 지지를 동원해 낼 수 있다는 점을 이번 총선에서 확인시켜 주었다. 3김정치의 종식과 지역주의의 퇴조와 더불어 뚜렷한 정책차별성을 내세운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입함으로써 이제 한국 정당정치와 의회정치가 이념적, 정책적 차별성에 입각한 선진적 경쟁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종합적으로 이번 17대 총선은 1987년 민주이행 이후 한국정치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보수독점적 정치지형 속에서 봉건적 사당정치와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빈사상태에 빠져 있던 한국 민주주의가 공고화를 위한 획기적 진전(breakthrough)을 이루어 낸 선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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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대 총선에서 당선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들이 당선증을 받고 있는 모습  - 출처:판갈이 ]

참여, 대의가 조화된 민주주의로 가자

민주이행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기틀을 이루고 있었던 대의기제는 총체적인 문제와 한계를 보여 왔다. 우선 한국 대통령은 민주적 리더십을 확립시키지 못하고 전근대적 제왕적 지배의 경향을 강화시켜 왔으며 제도와 시스템에 의한 권력 행사가 아니라 봉건적 혹은 가산관료(家産官僚)적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해 왔다. 

국회는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건전한 견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치적 보스들에 맹종하는 의원들이 민의를 무시하고 정략적 정쟁을 반복하는 장으로 전락해 있었다. 보수독점적 정치지형 속에서 성장한 정당들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보스들의 사당(私黨)으로 전락해서 조직적 이합집산을 거듭해 왔다. 그리고 유궈자들은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지역주의에 입각한 투표 이외에는 의미 있는 어떠한 선택지도 부여받지 못한 채 지역주의 정파에 의해 식민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의기제의 낙후성은 한국 민주주의의 참여적 기제를 신생 민주국가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발달시켜 준 배경이 되어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민주주의는 참여민주주의의 건전한 성장과 발전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낙후성을 보완해 왔다. 이처럼 견실하게 성장한 시민적 참여의식과 참여기제는 낙후된 대의적 기제를 혁파하고 쇄신하라는 압력을 부단히 행사해 왔다.

따라서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는 이처럼 잘 발달된 참여민주주의의 기제에 힘입어 낙후된 대의적 기제를 선진적으로 개혁시켜서 이 양자를 유기적으로 조화시키는 일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유기적 결합을 토대로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국회·대통령 모두 쇄신해야

우선 제왕적 대통령의 봉건적 통치양식을 혁파하고 민주적 리더십을 바로 세워야 한다. 제도와 시스템에 의거하지 않은 권력의 사유화와 사적 행사는 엄격히 근절되어야 한다. 검찰, 정보기관, 국세청 등 권부를 활용한 압력과 통제의 관행이 혁파되어야 할 것이며 정당정치와 의회정치에 대한 부당한 개입과 압력 역시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대의기제에 대한 전근대적, 비민주적 통제수단 대신 대통령은 참여민주주의 기제를 창조적, 생산적으로 활용해서 대의제적 행위자들에게 적절히 견제를 던지거나 혹은 협력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국회 역시 대통령과 정부에 대해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고 또 민의에 입각해 생산적이고 투명한 의정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국회의원들이 지닌 부당한 특권들을 적절히 제한되어야 하고 의정활동의 투명성과 윤리성을 강제할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 국민들이 원할 때는 언제라도 위임된 권력과 권한을 돌려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역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개혁을 전제로 의정활동의 수준을 높이고 효율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기구와 인력의 보강과 증원이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정당들은 현재 진행 중인 탈지역정당화와 민주화를 더욱 가속화시켜야 할 것이다. 3김식 사당정치가 혁파된 자리에 민주적 리더십을 확립하고, 탈지역적 전국정당들 간의 이념, 정책적 대결구도로 정당정치의 틀을 개선시켜 가야 한다. 

참여민주주의 기제의 견실한 성장과 발전, 그리고 참여 기제의 창조적, 생산적 활용을 위한 제도법률적 방안 역시 진지하게 모색되어야 한다. 반공·냉전 헤게모니를 주변화시키기 위한 범시민적 노력은 한국 민주주의의 이념적 지평을 확대시키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과제다. 공익적 시민단체와 노동조합이 공공정책결정에 책임 있게 참여하는 장치를 제도화시키는 방안 역시 모색되어야 한다. 소위 결사체 민주주의(associative democracy)의 한국적 실현가능성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전자 민주주의를 통한 공론의 장을 보다 확대, 정비하고 직접민주주의의 기회와 가능성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 역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를 전제로 마련된 헌법 구조의 개편 역시 적극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대의민주주의 기제의 선진적 확립과 참여 민주주의 기제의 견실한 성장, 그리고 이 양자의 유기적인 결합과 조화에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려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