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청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56일의 기록

노동사회

어느 하청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56일의 기록

admin 0 4,960 2013.05.12 07:21

지난 2월14일 새벽 4시30분경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조선소, 현대중공업에서 50대의 늙은 사내하청 노동자 박일수 동지가 “하청노동자도 사람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자결했다. 그리고 추운 겨울, 매서운 바닷바람을 피할 곳 없어 공장 이곳저곳을 전전하고, 여름에는 펄펄 끓는 철판 위에서 한줌 그늘을 찾아 헤매야 했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한 많은 설움과 절망을 남기고, 박일수 열사는 분신 56일 뒤인 지난 4월9일 양산 솥발산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아 떠났다. 

1970년 현대건설(주) 조선사업부에서부터 시작한 현대중공업은 현재 선박건조량 세계1위를 자랑한다. 9개 도크에서 6일에 1척씩 연간 60여척의 배가 건조되고, 창사이후 이렇게 생산된 선박은 1,000여척이 넘는다. 세계 선박 공급량의 20%를 생산하고 기술력에서도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현대중공업은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의 조선소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잘 나간다는 곳에서 지난 2월14일 50대의 늙은 노동자가 자신을 지독히도 괴롭혔던 그 공장 안에서 분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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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9일 치러진 고 박일수 열사의 장례식.   - 출처: 민주노총 ]

임금체불에 대한 진정, 부당해고, 분신

해고되기 이전, 박일수 열사는 ‘한마음’이라는 사내하청협의회에서 활동했다. 이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박일수 열사는 여기서 하청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동료직원들의 연월차, 퇴직금 등에 관련된 임금체불 건을 맡아서 진정서를 제출하는 일을 해왔다. 

그런데 이를 고깝게 본 원청이 하청을 통해 박일수 열사를 해고할 것을 종용해 왔다. 그러자 하청업체는 ‘지불능력이 생길 때까지 체불임금 지급을 기다려주면, 일단 휴직처리를 하고 이후 다시 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을 타협안이라고 내왔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각서를 체결하고 이를 비밀에 부칠 것을 요구했다. 박일수 열사는 이러한 원·하청의 탄압에 맞서 2003년 7월22일, 탄압 사실과 각서의 내용을 공개하는 유인물을 현장에 배포했고 결국 강제휴직을 당하고 말았다.

강제휴직 기간 중에도 박일수 열사는 활발하게 활동했다. 임금체불과 휴직철회 등을 내용으로 하여 하청업체와 노사협의를 진행했고, 임금체불 해결을 위해 하청노동자들의 서명운동을 조직했으며, 현대중공업의 원·하청 활동가들을 만나 연대를 호소하고 투쟁을 조직했다. 그 즈음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사내하청노조가 결성될 때 위원장으로 거론되기도 했던 박일수 열사는 하청노조 결성 후 거세진 탄압 속에서도 고군분투했다. 타워크레인 고공농성을 준비하기도 했고, 지난 해 10월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가 돌아가셨을 때는 한 때 분신까지도 고민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열사는 자신의 조건에서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운동하기 위해서는 복직을 우선 관철시키고 현장에서 하청노동자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일수 열사는 활동가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면서,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나는 조합원들 속에 함께 하지 않으면 살수가 없다”며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2003년 12월 원청은 해고통지서도 보내지 않은 상태에서 박일수 열사의 모든 전산자료를 말소시켜 현장 출입을 원천봉쇄하였고, 이는 강제 해고로 이어졌다. 하루라도 빨리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박한 염원이 좌절된 것이다. 열사는 하청노동자도 인간답게 살수 있는, 노동의 대가를 온전히 받을 수 있는 현장을 하청노동자들과 함께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몇 번의 투쟁전술이 무산되면서 현장에 돌아갈 가능성은 계속 줄어들었고, 희망을 차츰 잃어버린 열사가 결국 분신하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막가는 현중노조, “열사가 아니다” 

박일수 동지의 분신소식이 전해진 2월14일,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는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긴급 비상운영위원회를 소집했다. 비상운영위원회는 박일수 동지의 죽음은 개인적인 이해와 비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현대중공업의 비인간적인 차별과 노동탄압이 낳은 죽음이며, 비정규직노동자의 참혹한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현대중공업노조가 참여한 가운데, 지역본부 운영위원들의 결정에 따라 ‘비정규직 차별철폐, 노동탄압 분쇄, 고 박일수 열사 분신투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협상대표로 이헌구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장, 김경석 금속연맹 울산본부장, 탁학수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 조성웅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위장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현대중공업노조는 2월15일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노총울산지역본부 운영위로 구성된 분신대책위가 박일수 동지의 분신을 이용하여 조직단위의 위상을 강화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며 공식적으로 분신대책위를 탈퇴했다. 뿐만 아니라 현대중공업노조는 『민주항해 1898호』를 통해, 자신들은 “분신대책위에 참여한 적이 없고, 박일수 동지는 도덕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열사로 규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대책위와 함께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대중공업의 이러한 태도 속에서 열사의 죽음이 ‘비관자살이며 불행한 가족사에 의한 것이다’, ‘보상금을 많이 받기 위해 현대중공업에 들어가서 죽었다’ 따위의 온갖 왜곡과 억측이 난무했다. 이렇듯 박일수 동지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자 분신대책위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검찰의 부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부검을 실시한 다음날인 2004년 2월17일, 시신을 울산 북구의 현대병원에서 동구의 울산대학교병원으로 안치하였다. 

이때부터 현대중공업 사측, 현대중공업노조와 대책위의 투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분신대책위는 울산대병원으로 열사의 시신을 안치하고 매일같이 현대중공업 각 정문과 동구 지역 곳곳에서 집회와 대시민 선전전을 진행하였다. 2월21일 ‘열사정신 계승 투쟁결의대회’에 이어 2월28일 ‘영남노동자 결의대회’, 3월13일 ‘전국노동자대회’, 3월27일 ‘투쟁결의 대회’, 그리고 각종 ‘문화제’ 등 크고 작은 집회를 통해 박일수 열사의 죽음을 전국에 알려냈고 비정규직 투쟁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시도했다. 

분신대책위가 현대중공업과 직접 교섭을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현대중공업 사측은, “분신대책위가 현대중공업노조가 교섭에 당사자로 참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인 교섭은 없다”며 교섭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한편, 현대중공업노조 대의원들은 2월25일부터 영안실을 침탈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3월4일에는 200여명이 몰려와서 대책위 지도부와 사수대, 그리고 하청노조 조합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고인의 명복을 기리는 각종 현수막과 만장, 농성장으로 사용하였던 천막까지 뜯어내고 투쟁물품을 강탈해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분신대책위와 현대중공업 사측과 현대중공업노조 사이의 공방이 계속되었고, 2월26일 금속연맹 중앙위원회는 만장일치로 현대중공업노조를 중징계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열사투쟁’을 이용해먹은 현대자본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분신대책위는 3월10일 기자회견을 통해 현대중공업 사측에게 조건 없는 교섭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좀처럼 교섭에 들어갈 수 없었다. 현대중공업노조는 계속 자신들을 인정해달라며 ‘인정투쟁’을 벌였고, 이를 빌미로 현대중공업 사측이 분신대책위의 교섭요구와 교섭형식에 대해서 합의를 미룬 것이다. 

현대중공업 사측은 박일수 열사의 죽음을 원청 정규직노동자들과 하청노동자들과을 분열시키기 위해서 철저히 이용하였다. 분신대책위가 북구 현대병원에서 동구 울산대병원으로 시신을 옮기고 현대중공업 각 문에서 집회와 선전전을 시작했을 때, 현대중공업 원청 노동자들은 열기는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표정에서는 같은 노동자로서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투쟁이 지속되자 현대중공업 사측은 원청 노동자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기 위해 원청노동자들의 가장 큰 약점이랄 수 있는 고용문제를 이용해 하청노동자들과의 갈등을 부추겼고 이는 어느 정도 들어먹혔다.

한편, 현대중공업 사측의 입장에서는 분신대책위 등 민주노조세력과 일정한 긴장상태를 갖는게 필요하기도 했다. 정몽준이 출마하는 4·15 총선과 관련하여 민주노동당과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현대중공업 사측은 『인사저널』 등 각종 선전물을 통해 분신대책위가 특정정당과 특정후보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조직된 것이라며 ‘비관자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말라’고 공세를 취했다. 게다가 4·15 총선이 본격적인 국면으로 접어드는 3월 중순부터는 급조된 지역 유령단체들이 현대중공업 사측의 논리를 그대로 인용해가며 공격적인 방식으로 여론을 호도해댔다. 결국 현대중공업 사측은 정몽준이 총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도록 만들어주기 위해 분신대책위와의 교섭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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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투쟁을 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조합원 뒤로 정몽준의 선거유세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 출처: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조합 ]

투쟁은 정리됐지만…

3월28일 새벽 이헌구 대책위원장과 조성웅 하청노조위원장이 연행되면서 대책위에 대한 이중의 압박이 시작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분신대책위는 울산지역 긴급 단위노조 대표자회의를 갖고, 3월29일과 30일, 양일 간 잔업거부와 31일 간부파업을 진행하며 4월을 넘어 5월까지 진행되는 장기전으로 들어갈 것을 선포하였다.

분신대책위 지도부 연행이후 사태는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사이 분신대책위는 이완된 내부 체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실제적인 장기투쟁 준비에 들어갔다. 4월4일과 5일, 연휴가 시작될 무렵 현대중공업 사측과 실무접촉이 재개되었고, 분신대책위의 요구안 전반에 대해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4월6일 실무교섭에 이어 분신대책위 교섭대표단과 현대중공업 사측과의 본교섭이 열리고 잠정합의안이 도출되었다. 잠정합의안이 만들어지고 분신대책위는 투쟁단위 전체회의를 통해 잠정합의안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또한 자체 토론회를 거쳤고, 분신대책위는 자정이 넘어서야 최종적으로 현대중공업 사측과의 잠정합의안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다음날인 4월7일 오전 11시40분 최종합의에 이르렀고, 이로써 2월14일 박일수 동지의 분신 이후 진행된 2개월에 걸친 투쟁이 일단락되었다.

노동자 연대만이 차별 끝내는 길  

박일수 열사의 장례식이 치러진 다음날인 4월10일 파워그라인더공(일명 ‘소지공’) 150여명이 사내하청노조에 집단으로 가입하였다. 이들은 현대중공업 조선사업본부 내 도장1·2부에 소속된 10여개 사내하청업체의 노동자들이다. 소지공들의 하청노조 집단가입은 표면적으로는 업체 측의 일방적인 임금체계 변경(일당제에서 시급제)에 따른 대폭적인 임금삭감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노조에 가입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집단적으로 표출할 수 있었던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박일수 열사 투쟁이었다. 그 투쟁의 결과로 쟁취한 ‘하청노조 인정과 활동 보장’에 대한 자신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번 소지공들의 집단행동은 철옹성 같은 현대중공업에서 깊은 패배의식을 품고 살아왔던 하청노동자들이 조직될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사건이다.

2003년 10월 근로복지공단 이용석 열사에 이은 박일수 열사의 죽음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고,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박일수 열사의 ‘인간선언’은 비정규직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박일수 열사 투쟁은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비정규직 차별을 둘러싼 커다란 투쟁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이는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투쟁의 결과로 현대중공업 사측과 체결한 합의서는 다만 ‘존재를 인정받은 증명서’일 뿐이지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전지전능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들만의 몫이 결코 아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현장에서 정규직 노동자들과 하청노동자들이 회사의 감시와 통제, 억압을 뚫고 단결하는 그 순간이 바로 열사투쟁이 진정으로 끝나는 순간이자, 승리를 알리는 새벽이 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