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별교섭은 노사관계의 새판짜기

노동사회

산별교섭은 노사관계의 새판짜기

admin 0 4,048 2013.05.12 07:00

‘진보정당’과 ‘산별노조’를 노동운동의 양 날개라 했던가. 2004년 봄, 한국의 노동자는 그 두 개의 날개를 펴고 비약하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하나의 날개는 4·15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로 펴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날개, 산별노조 건설과 산별교섭, 사회적 교섭구조 확보투쟁은 지금 진행되고 있다.

한국정치 발전을 위해 보수와 진보의 양날개가 필요하듯, 노동운동과 노사관계발전을 위해서도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과 법·제도개선 투쟁, 그리고 기업별교섭을 뛰어넘는 산업별교섭, 사회적 교섭 정착을 통한 노조의 사회적 역할 강화는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올해 금속, 금융노조와 함께 보건의료노조 산별교섭 추진 양상과 연착륙 여부는 이후 노동운동이 양 날개를 펴기 위한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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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건의료노조 조합원들이 사측의 교섭참여를 요구하며 집회를 하고 있다.   - 출처:보건의료노조 ]

산별교섭 진전의 조짐이 보이다

2004년 봄 ‘보건의료노조 산별교섭 경기장’ 풍경을 한번 들여다보자. 3월17일 보건의료산업 노사를 대표하는 선수가 4만 관중(조합원)의 응원 하에 ‘산별 축구 경기장’에 입장했다. 사측 대표단 중 지방공사의료원(27개), 민간중소병원(33개), 특수목적 공공병원(2개)을 대표하는 선수들은 입장했지만 사립대병원(30개)과 국립대병원(9개) 대표는 입장을 하고 있지 않다. 

사립대병원은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까지 들어왔다가 경기규칙을 트집잡아 선수대기실로 돌아가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 안되면 경기에 불참하겠다고 으름장과 함께 농성을 하고 있다. 국립대병원 대표들은 아예 입장도 하지 않는 채 경기장 밖에서 올해 사측 대표가 이기면 내년 경기부터 참가하겠단다. 이기는 경기만 참가하겠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7만원의 입장료(투쟁기금)를 내고, 빅게임을 보기 위해 모인 관중(조합원)들은 짜증을 내다가 불참하는 사측 대표단에게 항의하기 시작했고, 이미 경기장에 와있는 사측 대표들도 잘못하다가는 경기의 승패에 관계없이 몰매를 맞을 분위기이니 일단 경기에는 참석하라고 종용하고있다. 

이렇듯 지난 3월17일 역사적인 산별교섭 상견례가 한양대의료원, 경희대, 이대 등 80여개 병원을 대표한 사측 교섭단과 노동조합 대표, 참관인 등 1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숭실대에서 열린 이후, 매주 수요일 교섭이 개최되어 4월21일까지 총 5차 교섭이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나타난 특징은 밖에서 ‘참여-불참’ 공방을 벌였던 그 이전과는 달리, 2002~2003년 96개 병원의 노사합의를 바탕으로 교섭장 안에서 교섭방식을 비롯한 구체적인 사안을 가지고 실질적인 교섭이 진행되고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측은 거부에서 참여로 선회하면서 공동 연대전선을 강화하고 있고, 병원협회의 조심스런 참여, 경총의 개입으로 산별교섭이 상당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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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측 대표단 구성이 관건

사용자단체가 발달되지 못한 한국에서 산별교섭이 제대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사측 대표단구성이 관건적 요소이다. 노조는 그동안 모든 병원이 병원협회에 교섭권을 위임하여 병원협회가 정식 교섭대표로 나올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병원협회는 시기상조론과 준비부족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사측이 스스로 대표단을 구성하여 교섭에 참가하는 방향으로 추진되면서, 작년부터 지역과 특성별 교섭 등 다양한 방안이 모색되다가 최근 병원 특성별로 대표단을 구성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병원자본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 크게 여섯 개 특성으로 나눠보면, 지방공사의료원(27개), 민간중소병원(30개), 특수목적 공공병원(2개)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대표단 구성을 해서 산별교섭에 참가하고 있고, 적십자사(19개)의 경우 산하 병원은 가능하나 일반사업장은 참가가 어렵다는 입장이다. 사립대병원(30개)은 병원협회에 교섭권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산별교섭에 참가하려 하고 있다. 반면 국립대병원(9개)은 교육부 지침 부재와 서울대병원장 임기(5월말) 등을 핑계로 참가 결정을 미루고 있다. 

노조는 대표단 구성을 하지 못한 병원들은 단협 합의대로 직접 산별교섭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측 대표단 구성은 사용자단체의 부재 속에 사측 내부의 다양한 의견 존재와 조율의 어려움, 주도 세력의 책임회피와 눈치보기, 교섭지연 전술, 경총의 개입 등과 맞물려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타결과정에서도 상당한 진통이 있을 것을 예고한다.

보건의료노조 산하 모든 병원 노사가 함께 참여하는 산별중앙교섭을 추진하고있으나, 유독 사립대병원만이 산별중앙교섭이 아닌 자신들과 별도 특성별 교섭을 주장하면서 교섭이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산별교섭-지부교섭 동시교섭, 동시타결 방침을 거부하고, 산별교섭 이후 지부교섭을 하는 단계적 교섭을 주장하면서 지부교섭까지도 거부하고있다. 이 과정에서 산별중앙교섭, 산별집단교섭 등 단협 합의 문구 해석에도 논란이 뒤따르고있다.

아직 본격적인 교섭에 들어가지 않아 전면적으로 확인되진 않지만 가장 쟁점이 예상되는 것은 역시 ‘주5일제’이다. 이 요구는 용어 사용부터 벌써 신경전이 팽팽하다. 노조가 요구하는 근로조건 개악 없는 온전한 주5일제 시행에 대해 사측은 통과된 법이 주40시간제라면서 개악된 근기법에 기초한 시행을 비롯해 주6일제 근무를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의료 공공성 강화요구에 대해서도 병원별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노사합의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올해 노동계 임단협 쟁점의 축소판

산별교섭 원년을 선포한 2004년은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고있다. 보건의료노조는 지난 2월26일 정기대의원대회를 통해 ‘4만 조합원의 힘으로 40만 보건의료 노동자와 함께 4천만 국민의 건강권 실현에 적극 앞장서는 산별교섭, 산별투쟁’을 내걸고 산별 5대 요구를 최종 확정하였다. 5대 요구에는 올해 노동계 전체 정세를 관통하는 요구가 그대로 들어 있다. 

첫째는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공공의료 확대·강화, △의료개방 반대 등 ‘의료 공공성 강화 요구’이다. 이 요구는 노동정책과 산업정책의 결합이 산별교섭의 취지와 의미를 살리는 핵심의제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있다.

둘째는 ‘주5일제 요구’로서 △주휴 연속 2일 휴가 보장과 인력충원을 통한 온전한 주5일제 실시, △임금과 단협 저하 없는 상향식 평준화, △중소·영세 비정규직 차별 없는 사회연대적 노동시간 단축, △환자 진료대책 마련 및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방안 마련이다.

세번째는 ‘비정규직 요구’로서 △정규직화 및 차별철폐, △정규직 임금의 80%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네번째 ‘임금 요구’는 정규직 중심의 임금인상(10.7%)만이 아닌 40만 보건의료산업의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와 함께 하기 위해 △전체 노동자 정액급여의 50%(정액 770,518원) 수준에서 ‘보건의료산업 최저임금제’ 도입을 요구하고있다. 다섯번째는 앞으로 산업별 노사관계 지향을 담은 산별기본협약 요구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별특별요구로서 비정규직 노동자 등 보건의료산업 전체 노동자의 공동이익 실현을 위해 노사정이 함께 내는 ‘보건의료산업 노동연대기금’을 요구하고 있다.

5대 요구는 기업별교섭이 아닌 산별교섭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올해는 산별교섭에 모든 것을 ‘올인’하기로 계획하고, 작년 하반기부터 일찍 교섭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상 최대 액수인 조합원 1인당 7만원씩을 결의하여 25억 이상의 투쟁기금을 모금하면서, 3월부터 4월까지 1만5천여명 이상의 조합원을 대상으로 하루 교육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최근에는 1천명의 간부, 대의원 상경투쟁과 철야농성으로 본격적인 현장투쟁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요 요구 여론화를 위해 각종 토론회와 현장조사를 하고 있고,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를 위한 100만 범국민 서명운동 전개를 포함하여 노조의 요구실현을 위해 국민과 함께 하는 다양한 대중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대정부 투쟁도 강화하여 관련 부처인 노동부, 복지부, 교육부, 행자부와의 면담을 진행하는 한편, 수요집회를 통해 5대 요구 해결과 산별교섭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정부 차원의 역할을 촉구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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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4일 한국여성개발원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4차 산별교섭  - 출처: 보건의료노조 ]

산별교섭과 노사관계 흐름의 분기점 될 듯

산별건설운동을 돌이켜 보면, 결코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거대한 바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과정이라 간주할 수 있다. 98년 산별노조 건설이후 6년 동안 꾸준하게 추진해왔던 산별교섭이 진전되고 있지만 산별교섭이 정착되기까지는 여전히 산 넘어 산이다. 이후 교섭은 사립대병원이 얼마나 빨리 특성별 교섭 주장을 철회하고, 산별교섭에 참가하느냐에 따라 정상적인 교섭 국면으로 들어갈 시점이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불참하고있는 국립대병원의 참여도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122개 병원 전체가 100% 위임하지 않더라도 특성별로 중심되는 병원들이 교섭에 참가하여 산별 타결이 되면 곧바로 영향을 미쳐 전체 타결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측이 끝까지 지금의 입장을 고수하여 파행교섭이 계속된다면 대학병원과 불참병원 중심의 전면 총파업은 불가피하다.

이제 보건의료노조의 첫 산별교섭이 어떤 형태로 마무리 될 것인가는 전적으로 정부와 사용자의 태도에 달려있다. 필자는 보건의료노조 산별교섭 원년 투쟁이 구시대 노사관계의 ‘막차’가 아니라, 4·15 총선 이후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차지,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등 새롭게 조성된 환경에 따라 참여정부가 애초 표방했던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구축, 중층적 교섭구조 확립의 시금석이자 새로운 노사관계를 여는 ‘첫차’가 되기를 희망한다.  

수구보수세력들이 한·민·자 동맹으로 탄핵을 감행하여 자멸했듯이, 병원 사용자들도 똑같은 전철을 되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산별교섭은 시대적 흐름이고 대세이다. 산별교섭은 정치권의 판갈이와 함께 노사관계의 새로운 판짜기 시작이다. 이를 역행하려는 흐름은 또 한번의 역사적 역풍을 맞을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