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나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모두를 노동자라고 하지는 않았죠. 노동자는 자본주의의 출발과 함께 출현하고 자본주의 사회에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와 노동자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사회인 봉건제도의 태 속에서 생겨납니다.
지구상에 자본주의 시대의 막이 열리게 된 것은 16세기라고 합니다. 16세기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임꺽정이 활동하던 무렵입니다만, 벌써 유럽의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자본가들이 노동력을 팔지 않고는 살수가 없는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일을 시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또 1501년 프랑스 리용 인쇄공의 경우처럼 노동자들의 투쟁도 일어나고 있었고 노동자 조직도 생겨나고 있었죠.
조선 봉건경제의 동요와 임금노동의 잉태당시 우리나라는 아직 조선왕조가 지배하는 봉건사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선 봉건사회는 신분제와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여 세워진 농경사회였죠. 곧 봉건귀족, 양반, 지주들이 토지를 지배하여 농민과 노비들을 묶어놓고 생산물과 노동력을 착취·수탈하는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16세기말과 17세기 중반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봉건체제의 권위는 심대한 타격을 입습니다. 그리고 생산력이 발달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그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죠.
17, 18세기 무렵에는 농지를 떠나 남의 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가들이 대량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기계제 생산이 본격화하고 있던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는 봉건제도가 동요하면서 자본주의와 임금노동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고 있었습니다.
조선 봉건체제를 동요시킨 것은 농촌 생산력의 발전이었어요. 양대 전쟁을 치른 후 농민층에서는 영농방법의 발달과 상품작물 재배 확대로 부를 축적한 부농층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양반지주와 달리 생산성을 증가시켜 노동력을 절감하고 경작지 소유와 상품거래를 늘려갔습니다. 이들은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양반토호나 관리의 수탈에 대항하기도 하고 양반신분을 사들이거나 양반 지주와 결탁하여 농민들을 수탈하기도 하였죠. 이전까지 조선사회는 오로지 양반지주가 지배자로 오랫동안 군림해왔습니다만 부농층이라는 새로운 경제적 강자가 나타나 양반계급과 공존해가게 된 것이죠.
농경지에 목줄을 대고 살던 농민들은 한편으로는 양반지주의 수탈에 못 견뎌 떠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력 발달에 의해서 토지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토지에서 떨어져 나온 농민들은 지주의 땅을 빌려 짓는 작인이 되거나 고공(머슴)이 되었습니다. 또, 농사일을 해주고 삯을 받는 품팔이꾼으로 전락하거나 곳곳을 떠돌면서 생활하는 유민이 되기도 하였죠. 이들 유민들은 도성 근처로 몰려가 빈민촌을 이루거나 광산 등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이처럼 양반지주가 독점하던 토지와 노동이 상품화되면서 부역노동도 고용노동으로 교체되고 수공업도 관청이 독점 지배하던 것에서 민간 수공업으로 바뀌어갔습니다. 관에 등록되어 얽매여 있던 기능인(장인)들은 품삯을 받고 일을 해주게 되고(임용사공), 일부는 스스로 상품을 생산 공급하여 상인자본으로 커갔죠. 농촌 수공업도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종래 자급적인 부업형태에서 상품생산제로 변화해갔어요. 유기, 철기, 자기 등 일부 품목에서는 지역 나름대로의 특산물을 생산하는 대규모 수공업촌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이들 민간 수공업에는 일부 장인이 들어가기도 하고 농토에서 추방된 농민들이 유입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조선 초기 성황을 이루던 광업은 전쟁이 끝나자 급속히 쇠퇴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금은광의 개발이 활발해졌죠. 조선왕조는 종래 관청의 직접생산방식에서, 채광을 인정하는 대신 세금을 거두는 방식으로 공업정책을 전환하였고, 이에 따라 비밀리에 공물을 캐는 ‘잠채’가 성행하고 대규모 민간 광산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미 공산에는 자본가(물주)가 관리자(덕대, 혈주)를 통해 노동자(광군)를 지휘하는 근대적인 자본주의 경영방식도 나타나기 시작하였죠.
상업의 발달과 신분질서의 붕괴
이처럼 각 분야의 생산력이 발달함에 따라 도시인구와 상품수요는 크게 증대하여 상거래가 활발해졌어요. 과거 관이 독점과 특권으로 지배했던 시장질서(시전)는 무너지고 각종 민간 영세상인이 영위하는 난전이 발달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중국, 일본과 무역을 하거나 서울과 지방을 잇는 거대 상인이 출현하여 상권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상인자본이 형성되어 간 것입니다. 결국 조선왕조는 관이 주도하는 상거래정책을 폐지하고 세금을 받고 개인 상업을 인정하게 되었어요. 이에 따라 밑으로는 영세상인, 소생산자층, 도시빈민의 상업활동과 위로는 거대자본을 지닌 상인들의 활동이 국가권력이 지배하는 특권상업체계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조선 왕조는 원활한 상품유통과 국가재정의 안정을 위해 17세기 후반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금속화폐를 만들어 유통시켰습니다. 금속화폐는 민중들의 생활에 급속하게 파고들어 각종 세금을 화폐로 내는 것을 촉진하였죠. 이런 조세의 금납화는 현물징수 과정에서 일어나는 중간횡령을 제거함으로써 국가재정의 안정에도 기여하였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화폐의 유통은 고리대와 같은 방법을 통해 화폐를 축적하는 등의 지배층의 수탈을 강화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농이나 부자상인에 의한 투기매점을 촉진시켜 농민층의 분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그리고 화폐는 그것을 못 가진 양반층에게는 몰락을, 하층이나 평민들에게는 그것을 통한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전통적인 신분질서나 가치체계를 급속하게 붕괴시켰죠.
게다가 17, 8세기에는 자연재해나 흉년이 자주 들고 양반지주나 지방관리들의 횡포와 수탈이 극심하였습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삼정제(三政制)의 문란과 매관·매직 등을 통한 가혹한 수탈이 극에 달하였죠. 이 때문에 수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유랑민으로 떠돌아 다녔고 과중한 세금에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나거나 화적이 출몰하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19세기에는 평안도와 경상남도에서 격렬한 저항투쟁이 일어났습니다. 흔히 ‘홍경래의 난’으로 불리는 평안도 농민항쟁이었죠. 이 항쟁의 주력부대였던 핍박받던 농민과 광군들은 평안도 일대의 관아를 휩쓸었습니다. 또, 경상남도 진주에서 시작된 농민봉기는 주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37개 고을로 확대되어 봉건왕조의 기반을 그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노동자계급 형성
이와 같이 지주제와 신분제를 양대 축으로 성립한 조선 봉건왕조는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그리고 대규모 민란으로 18세기경 크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토지에 얽매여 있던 농민들이 대량으로 방출되었어요. 이들은 ‘목구멍에 풀칠’ 할 돈이라도 벌어보려고 농촌 지주들에게 고용되거나 광산이나 수공업분야 또는 관청의 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기도 했죠. 남의 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 사람들은 임금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아직 근대적인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임금을 주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존재한 것은 아니었어요. 단지 봉건제가 해체되면서 자본주의사회로 나아가기 시작한 단계였습니다. 여전히 농민들은 신분적 예속에서 해방되지 않은 상태에서 토지에서 쫓겨나 노동력을 팔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임금 노동의 싹이 완전한 자본주의형태의 임금노동으로 바뀌게 되는데는 일정한 시간과 조건이 요구되었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은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이었죠.
[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있는 모습 ]
강화도 조약은 19세기 후반 미국 등 구미열강의 강요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식량공급과 상품소비시장을 찾아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맺은 조약입니다. 조선은 이 조약에 따라 부산, 원산, 인천 등의 항구를 열었고 이후 조선 봉건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었습니다. 각 개항장에는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상품이 밀려 들어와 봉건 경제의 몰락을 재촉하였죠. 조선반도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시장 장악을 위한 각축장으로 변했고 봉건지배체제는 급격한 변화의 도전 앞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의 운명은 외세의 탐욕 앞에 위태로워진 것입니다.마침내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항쟁에 나섰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항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삼남지방의 농민들은 전봉준 등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들고일어났습니다. 조선왕조는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하여 이러한 민중의 저항에 대응했죠. 갑오개혁은 내각제도 도입, 조세의 금납화, 도량형의 통일, 화폐의 은본위제 실시 등 정치경제제도의 개혁을 내세웠으나, 무엇보다 신분제, 노비제도, 과거제도, 연좌제 등 민중들을 옭아맸던 봉건적 강제를 폐지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농민군은 일제가 조선의 봉건왕조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파견한 대규모 군대에 의해 학살됐죠.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서 독점적 지배권을 확립했습니다. 그리고 1905년 보호조약, 1910년 한일합방을 거쳐 조선경제를 식민지적 종속경제로 재편성하기에 이릅니다.
이와 같이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의 봉건경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급속하게 자본주의 상품경제로 전환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임금노동자도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임금노동자의 원천은 물론 농촌이었죠. 농촌에서는 갈수록 농민분해가 가속화되었고 땅을 갖지 못한 방대한 인구가 광범하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일부는 농촌을 떠나 도시, 개항장, 광산, 철도 건설 공사장으로 흘러 들어가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임금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농촌 이외에 일할 곳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농촌에서 형성된 임금노동자들은 대부분 농촌지역에 남아 각종 농업노동을 담당하며 생계를 이어 갔습니다. 하지만, 농번기 이외에는 임금이 매우 낮고 고용의 기회도 많지 않아 이들의 생활은 극히 열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항 이후 가장 두드러지게 노동자가 많이 형성된 곳은 부두였습니다. 부두에는 무역의 증가에 따라 화물을 포장하고 운반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고, 농촌에서 밀려난 농민들이 몰려들었죠. 직업적인 부두 노동자는 1897년에 1천여명, 1902년에 2천여명, 1906년에 5천명으로 급증하였습니다. 비직업적 부두노동자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겁니다.
부두노동자들은 쌀의 부피를 달고 포장하는 두량군, 화물 운송을 담당하는 칠통군, 지게군, 하륙군 등으로 나뉘었으며 운반 거리와 무게에 따라 임금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일본 상인 자본가들은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조선인 노동자들을 착취하였어요. 노동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고된 일을 하고도 점심은 물로 채워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산은 개항 후 정부의 적극적인 광산정책과 일본으로의 금수출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외국자본이 들어오고 규모도 커졌죠. 이에 따라 농촌을 떠난 많은 빈민들이 광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1886년 영흥 금광에는 광부가 5, 6천명에서 많게는 1만명 정도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산 속에 토막을 짓거나 빈민촌을 이루고 근근히 끼니를 때울 정도의 낮은 임금을 받으며 아침 일찍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게다가 봉건관료와 현장관리자의 수탈과 횡포도 빈번했죠.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탈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도입된 철도, 전기 건설에도 많은 노동자가 몰려들었어요. 1897년부터 1903년까지 경인선, 경부선 공사에 경인지역과 부산지역 도시노동자들과 영세 농민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이들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1/2 또는 1/3수준으로 겨우 풀칠을 할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철도 건설에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어와 일을 시켰죠.
임금노동자의 전형인 공장노동자는 다른 분야보다 적었습니다만, 회사 설립 증가에 따라 서서히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인 회사는 1895년에 12개, 1900년 32개에서 1906년에는 81개로 크게 늘어났습니다(강만길, 2004:167). 한일합방 이전인 1909년까지 일본인이 설립 경영한 주요 공장수와 직공수는 정미소 28개에 737명, 기와벽돌 공장 15개에 559명, 철공장 13개소에 168명, 담배공장 4개에 593명, 기타 통조림, 기계, 제분 등 공장 24개에 1,058명이었고,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은 것까지 모두 합하면 당시 공장노동자는 대략 6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김윤환, 1982:35). 이들 공장노동자 역시 극도로 낮은 기아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당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죠.
[ 경인선 기차를 타고 있는 근대 조선인들(1910) ]
19세기 말 조선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조합의 등장
이처럼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농촌에서 이탈한 농민들은 그 이전과 달리, 자본주의 방식으로 일정하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임금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이윤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가들은 농촌에서 쫓겨난 방대한 실업자군을 무기로 협박하여 가혹하게 노동자들을 수탈하고 착취하였죠. 이 때문에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항시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비참한 삶을 영위하였고, 노동자들은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조직을 만들고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노동문제가 발생하고 노동자투쟁과 노동자 조직이 등장하게 된 겁니다.
부두 분야에서는 목포의 노동자들이 앞장을 섰어요. 1898년부터 1903년 사이에 목포 부두노동자들은 임금인하 반대, 십장의 중간착취 거부, 거류지에서의 일본패 착용 거부 등을 요구하는 동맹파업을 일으켜 업주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광산부문에서도 집단행동이 연이어 벌어졌죠. 1888년 함경도 초산과 1892년 경북 예천의 폭동, 1898년 강원도 당현과 1901년 운산 금광노동자의 파업 등이 그것입니다. 이들 투쟁은 대부분 봉건 관료와 외국자본가의 수탈이나 현장관리자의 폭행에 시달리다 못해 일시적으로 폭발 것으로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이었죠. 그런 속에서도 당현과 운산 광부들은 단순한 노동조건의 개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광산채굴권이 독일인과 미국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반대하여 파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경인철도회사 노동자들은 1901년 임금인상 투쟁을 벌였고 1909년 경성전기회사 노동자들도 집단적으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 때는 강제로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철도를 건설하려 한 것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이것이 반일 반철도운동으로 연결되기도 하였죠.
한편 열악하기 그지없는 노동조건 아래 노동자들은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라도 뭉쳐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일찍부터 노동자들은 조직을 만들어 대항하려 했을 터지만 그 조직이 언제 어떤 형태로 나타났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선 말기 여러 광산과 부두에서는 노동자들이 계(?)의 형식으로 스스로 만든 조직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의형제(義兄弟) 또는 만동생(萬同生) 등의 형태로 결합되어 있다가 점차 상호부조의 목적으로 약간의 회비를 거두어 노계(勞契) 또는 조합을 조직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일본인이 1921년에 쓴 자료에 의하면 1898년 성진에서 운반부 46명이 성진 세관 구내에 성진 본정부두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그 이후 군산, 진남포 등 부두와 평양, 개성, 용강, 이원 등에 노동조합이 출현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단체인 것은 분명하나 대부분 수입의 10분의 1을 회비로 받고 있는 점에 비추어 노동자의 취업을 알선하고 회비를 받는 단체로 추정되고 있습니다(강만길, 2004:199).
이와 같이 우리나라 노동자는 봉건체제 안에서 자본주의가 생성됨에 따라 그 씨앗이 잉태되었고,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의 노동자들보다 한참 늦게 등장했습니다만, 그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토지라는 생산수단에서 축출된 것,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인 투쟁을 벌인 것, 초보적인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 등도 다른 나라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 노동자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이게 됩니다. 바로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적 조건입니다. 이것은 제3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겪는 공통된 경험입니다만 훗날 두고두고 노동운동을 제약하게 됩니다.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 인민의 모든 인권을 억압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 잉여를 빼앗았어요. 식민지의 자원은 제국 자본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대상이며 민중은 경제 잉여를 생산하는 도구일 뿐이었던 거죠.
심지어 민족 고유의 언어나 문화조차도 바꾸어버렸습니다. 제국주의 자본은 경제잉여를 본국으로 가져갈 뿐 확대 재생산을 위한 재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노동력의 양성이나 노동조건의 양보는 일체 허용되지 않았어요. 결국 식민지 자원은 고갈되고 노동력은 극도로 피폐해집니다. 식민지 노동자들은 잔혹한 식민지 권력과 자본이라는 이중의 적과 싸워야 하는 힘든 과제를 안고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참고자료 ]
강만길(2004), 『한국노동운동사 1』(근대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조선후기-1919),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김경일(2004), 『일제하의 노동운동(1920-1945)』,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김금수(2001), “세계노동운동사-자본주의발생과 노동자계급의 기원”, 『노동사회』 2001년 10월호(통권 제58호)
김윤환(1982), 『한국노동운동사Ⅰ-일제하 편』, 청사
박준성(2002), 「한국노동운동사」, 제1기 금속노동자학교,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노동조합총연맹(1979), 『한국노동조합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