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나는 노동절을 기대하며

노동사회

신명나는 노동절을 기대하며

admin 0 3,659 2013.05.12 06:58

5월1일 ‘노동절(May Day)’이 돌아왔다. 이번 노동절은 노동자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법하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온몸에 휘발유를 붓고 분신을 통해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한지 23년 만에, 4?15 총선에서 당선한 노동자 국회의원들이 그를 찾아 각오를 다지는 광경이 연출됐다. 독재 정권에 의해 재갈이 물렸던 노동자들이 입을 연 지 16년 만의 일이다. 그렇게 노동자?서민의 대표를 이제 국회의사당 안에서 보게 됐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노동자의 삶은 갈수록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무심히 쳐다본 이번 노동절 포스터의 붉은색 글씨들, ‘차별철폐, 정규직화’, ‘노동3권, 건강권쟁취’ 등의 구호들은 사실 전태일 열사가 몸이 타 들어갈 때 절규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기대와 절망 사이에서 이제 우리는 세계 노동자의 축제인 노동절을 맞았다.

노동절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갖가지 억압에 맞서 어깨를 서로 맞대고 ‘연대’해 저항하는 노동자의 이미지이다. 사실 노동절은 미국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위해 1886년 5월1일 총파업에 돌입했다가 경찰에 진압당하고, 그 지도자들이 장기형 또는 사형을 선고받은 미국의 ‘헤이마켓 사건’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행사다. 우리나라에서도 1923년 첫 노동절 기념행사를 연 이래, 노동절은 일제와 자본가에 저항하는 노동자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노동절은 그 기원부터 노동자의 분노에 찬 함성과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같이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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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는 있되 집합행동에 함께 가야할 '열광'이 빠진 모습이다."   - 출처: 세계노동절112주년기념사이트 ]

‘연대’는 있되 ‘열광’은 없다

노동자의 현실이 여전히 참담한 우리의 노동절도 한 곳에 모여 각오를 다지고 거리를 함께 행진하면서 노동자의 힘을 과시하는 모양으로 진행되어 왔다. 힘들고 고립된 싸움을 벌이다 노동절에 모인 동료 노동자와 학생들은 가슴 벅찬 ‘연대’의 느낌을 받았다. 비록 거리 행진을 하면서 경찰과 벌이는 몸싸움에 지치고 으레 나타나기 마련인 최루탄 가루를 온 몸에 뒤집어 써야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노동절이 ‘자족적인 행사’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힘 빠진 노동절’,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노동자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무기력한 노동절’이라는 비판도 들린다. 현실을 살펴보면 수긍이 가는 비판이다. 사전 문화 행사,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의 지도자들의 발언, 좁은 자리가 불편하다 싶으면 일어나서 정해진 곳까지 진행하는 거리 행진이라는 구태의연한 진행. 

최근 몇 년간은 무장한 경찰과 노동자, 학생 사이의 긴장이 무뎌지고 거리 행진에 필요한 차로가 ‘폴리스 라인’을 통해 제공되면서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나 인도 위를 걷는 것도 ‘심심한 일’이 되어 버렸다. 한 마디로 말하면 ‘연대’는 있되 집합행동에 함께 따라야 할 ‘열광’이 빠진 모습이다.

사실 2002년 여중생 촛불집회나 작년의 부안 주민의 저항, 올해 탄핵 정국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촛불집회가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많이 모여 한 목소리를 냈던 ‘연대’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현실을 바꿔 ‘다른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집단적 열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집단적 열광’이 있었기에 부안 주민의 저항처럼 열악한 조건에서 진행된 촛불집회도 마치 축제처럼 진행될 수 있었다. 단적으로 1996년 말에 열악한 조건에서 진행된 총파업도 이런 ‘집단적 열광’이 없었다면 그렇게 인상적인 모습을 띌 수 없었을 것이다.

‘연대’와 ‘열광’이 함께 하는 노동절을 만드는 것이 단순히 진행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 실현될 수는 없다. 그것은 노동자 개개인과 노동절을 둘러싼 상황과 긴밀하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구성된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탓, 상황 탓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전반적으로 노동운동이 어려운 현실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노동운동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대’와 ‘열광’이 함께하는 모습을 만들었다. 과거에 선배들이 그 상황에 맞는 방식을 만들었다면, 지금 우리도 지금 상황에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노동절의 진행 틀을 지금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열광’이 여기저기서 제기될 수 있는 ‘역동적인 방식’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동절, 이렇게 바꿔보자!

그렇다면 ‘연대’와 ‘열광’이 공존하는 노동절은 어떤 모습일까? 『야생초 편지』의 저자로 유명한 황대권 씨가 ‘엠네스티 노르웨이(Amnesty Norway)’의 초청으로 노르웨이를 방문해 겪은 경험은 공유할 만하다.

노르웨이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은 1년 중 하루를 노르웨이에 있는 시민?사회단체(NGO)에게 ‘하루 방영권’을 줌으로써 해당 단체의 이념을 대중에게 알리고 방송을 통해 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그해에는 엠네스티가 선정됐고, 양심수로 선정돼 엠네스티가 석방 운동을 벌였던 황 씨도 그 행사 때문에 초청되었다.

황 씨가 묘사한 ‘엠네스티의 날’은 매우 인상적이다. 노르웨이 전국을 잘게 나누어 지역 회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길거리 캠페인을 나서는 동시에 집집마다 방문해 돈을 모금한다. 황 씨 역시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수많은 지역 회원들과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오슬로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엠네스티의 이념과 활동을 홍보하고 모금 활동을 독려했다. 물론 이 모든 활동은 국영 방송국을 통해 하루 종일 생생하게 보도된다. 그날 하루 노르웨이 국민에게 엠네스티는 큰 화젯거리가 된다.

한국방송공사(KBS)에게 노르웨이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역량만으로도 충분히 노동절 하루, 온 국민에게 노동계의 이슈를 화젯거리로 만들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올해 노동절의 핵심 이슈인 ‘차별 철폐, 정규직화’를 전면에 내세워 114주년 노동절을 ‘차별 철폐의 날’로 선정하고 그날 하루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조합원과 그 가족들이 하루 종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 전국의 거점 도시 곳곳에서 노르웨이에서 엠네스티의 활동가와 자원봉사자들이 했던 것처럼 활동을 벌인다면 어떨까?

‘연대’와 ‘열광’이 함께 하는 축제의 장으로

광화문과 대학로, 여의도와 종로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곳곳에서 삼삼오오 노동조합의 깃발을 들고 노동조합의 주장을 시민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알리고 필요한 모금 활동을 벌인다. 꼭 유인물을 나눠주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다. 고된 노동 속에서 틈틈이 준비한 즉석 거리 공연이나 전시회도 가능할 테고, 지역의 현안을 미리 파악해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지역 주민들의 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하루 연대 활동’을 벌이는 것도 좋을 테다. 고립된 채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료 노동자를 지지 방문할 수도 있다. 

그렇게 곳곳에서 계획된 활동을 벌인 후, 정해진 시간이 되면 걸어서 또 지하철과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미리 정해진 전국의 주요 지점으로 대이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모인 노동자들이 어울려 축제의 장을 마련한다면 그야말로 ‘연대’와 ‘열광’이 함께 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런 모든 활동을 인터넷을 통해 알리고 방송을 한다면 노동절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터와 집에서 참여할 수도 있다.

이렇게 노동절 하루를 온전히 노동자의 날로 만든다면 교통 체증 보도로 ‘물타기’를 시도하면서 노동자들의 축제를 무시해온 언론도 주목을 안 할 수 없다. 그간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노동절을 잊고 지냈던 많은 ‘진짜 노동자’들이 집에서, 일터에서 노동절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기회를 가질 가능성도 더 높아질 것이다.

이제 노동절을 진정한 노동자의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헤이마켓 사건’으로 교수형을 당한 한 노동자는 다음과 같은 최후 진술을 남겼다. 그는 어떤 노동자의 날을 꿈꿨을까? 1백년 이상 지속된 세계 노동자의 끈끈한 ‘연대’를 복원하고, 해방을 향한 ‘열광’이 들불처럼 타오르는 그런 노동절을 꿈꾸지 않았을까?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 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다면 말이다.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고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