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싸움은 인권을 위한 것"

노동사회

"우리의 싸움은 인권을 위한 것"

admin 0 4,307 2013.05.12 07:40

지난 6월25일부터 파업에 돌입한 금융노조 한미은행지부가 18일의 전면파업 끝에 2006년까지 성차별적인 사무직군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할 것을 합의했다. 이제 드디어 성차별적인 사무직군제를 대규모로 고수하고 있는 우리나라 은행은, 하나은행 ‘하나’만 남은 것이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하나지부는 ‘성차별 인사제도 철폐’와 ‘생존권 사수’를 중심으로 하는 요구안을 내세우며 2004년 임단투 투쟁을 지난 6월부터 전개하고 있다. 6월3일 제도개선 공청회를 시작으로 하여 간담회를 거쳐 지난 6월15일에는 본점 주차장에서 1,000여명의 조합원과 함께 투쟁 결의대회를 가졌다. 그리고 6월16일부터는 조합을 비상대책위원회 체계로 전환했다. 조합원들의 열기도 높아서 투쟁기금 모금에는 조합원의 90%이상이 참여하였고 7월2일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는 1,500여명의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총파업투쟁 결의대회를 철야로 진행하며, 결코 물러서지 않는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는 등 투쟁의 수위를 점점 높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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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15일 하나은행 본점 주차장에서 1,000여명의 조합원들이 함께 한 투쟁 결의대회    - 출처:금융노조 ]

그리고 한편으로는 노동부에 성차별 인사제도 개선을 위한 특별근로감독을 요청하여 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 또, 금번 투쟁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조합원임을 알리는 리본을 착용하고 대고객 홍보에 나섰고 공공기관 및 언론사 홈페이지에 하나은행의 성차별적 현실을 알리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2004 하나은행 투쟁의 중심에 있는, 성차별·동일노동차별임금 직군제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성별 분리를 이용하여 자본의 착취를 강화하고 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성전환 시험” 강요했던 여행원제도

은행권에는 이른 바, ‘여(女)행원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은행 설립 때부터 여성은행원을 남성과 구분하여 채용하던 것에서 비롯된 이러한 관행은 1975년 은행에서 직급별 차등호봉제도를 도입하면서부터 명문화되었다. 이때부터 일반행원과 여행원과의 구분이 호봉을 통해 드러나고 직급이 책임자급, 행원급(5급 중견행원, 6급 초급행원), 여행원급으로 나뉘어졌다. 같은 고졸이라도 남자는 6급 초급행원이었으나 여자는 6급 여행원급으로, 성별에 따라 임금 및 승진 체계가 달리 적용되었던 것이다.

대체로 6급 행원은 일정기간의 근속년수가 지나면 5급 행원으로 자동 승진되었으나, 6급 여행원은 만5년이 지나면 ‘여행원 5급’으로만 올라갈 뿐 더 이상의 승급은 없었다. 사실 당시는 결혼하면 그만두겠다는 '결혼 퇴직각서'를 써야만 은행에 들어갈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여성들의 장기근속을 보장하는 승진체계가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했다.

77년부터는 ‘여행원’에서 ‘행원’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전직제도와 책임자고시를 실시했다. 그러나 여행원 사이의 경쟁만 높였을 뿐이었다. 남자는 자동승격을 했으나, 여행원들은 만 5년이 지난 후 또다시 ‘전직고시’라는 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평균 합격률이 5% 미만이었던 이 시험은 여행원들에게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 “성전환 시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대리로 승진할 수 있는 ‘책임자고시'의 경우에도 남행원들과 다르게 여행원들은 이에 합격을 하더라도 중견행원으로 갔다가 일정기간이 경과해야만 대리로 승진이 가능했다. 

이렇듯 남자행원들이 하나의 사다리를 쭉 타고 올라가는 길을 여행원은 여행원, 행원, 대리라는 각각의 사다리를 올라가다가 건너고, 또 올라가다가 건너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했다. 이러한 성차별적 여행원제는 80년대 여성 금융노동자들의 산발적인 투쟁과 맞물려 부분적인 조정을 거치다가,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른 노동부의 폐지 명령과 노동조합의 대규모 투쟁을 통해서 90년대 초반에 드디어 공식적으로 철폐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이른 바 ‘신인사제도’가 도입되는 과정에서도 성차별적인 요소의 잔재는 유지되었고, 그것이 지금 하나은행에서 투쟁하고 있는 일반/사무직(FM/CL, FloorMarketer/Clerk) 직군 문제의 근거가 된 것이다.

여전한 하나은행의 성차별 직군제

하나은행은 1971년 설립된 한국투자금융주식회사가 여러 개의 금융회사를 합병하면서 성장해 왔다. 그리고 1991년 투자금융에서 은행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이러한 성장 과정 때문에 당시 하나은행은 인적구성의 구도가 다양했고, 다른 은행들보다도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1991년 업종을 전환할 때, 당시 여행원제 철폐의 대안으로 은행연합회가 제시하고 있었던, ‘신인사제도’를 큰 갈등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눈에 보이게 차별을 하는 여행원제가 명백한 성차별이라면, 남자 직원들은 주로 종합직으로 여성직원들은 주로 일반직으로 구분하여 차별 관리하는 ‘신인사제도’는 간접적인 성차별제도였다.

한편 하나은행은 이외에도 직군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1993년부터 고졸 여직원은 기존과 마찬가지로 일반직으로 채용하면서 대졸 여성들을 ‘전문텔러’라는 이름의 연봉제 직원으로 채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그 숫자를 계속하여 늘려왔다. 1998년 이후에는 고졸 여직원인 일반직 직원은 채용하지 않으면서 대졸 여직원인 ‘사무직’만 채용했던 것이다. 이렇듯 하나은행은 일반적인 신인사제도와는 다르게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임금체계를 가지는 ‘사무직’이 별도로 존재하여 정규직원 내에서도 종합직, 일반직, 사무직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하나은행 노사가 2002년 11월 단협을 통해 직군제 개편에 합의하면서 형태가 조금 바뀌었다. 기존의 종합직을 직무성과급 연봉을 받는 행원A로, 기존의 일반직과 사무직을 통합하여 호봉제 임금을 받는 행원B(FM/CL, 19단계 호봉제)로 재편된 것이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3개의 직군체제인가, 2개의 직군체제인가, 연봉제인가 호봉제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재편의 과정에서 대부분이 남성인 종합직과 거의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임금이 8개 시중은행 여성노동자들 중에서도 최하위라는 하나은행 여직원들의 처지가 개선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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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노조 하나은행지부와 서울은행지부 합동간부연석회의에서 공동투쟁을 결의하고 있는 모습  - 출처:금융노조 서울은행지부 ]

업무만 빼고, 고용·임금·승진 어디에서나 차별  

하나은행의 성차별적인 관행은 채용부터 시작된다. 종합직은 경우 극소수의 여성인력만을 채용하고, FM/CL의 구성 직군인 일반직과 사무직은 비정규직을 이용하여 대부분 여성으로 채우고 있다. 그리고 FM/CL의 채용상황을 보면, 학력이나 경력은 종합직과 별 차이가 없는데도 낮은 직급으로 채용된 경우도 허다하다. 1995년 영업직 채용현황을 보면 224명 모집에 224명 모두 남자다. 2000년까지 종합직에 여성을 1명 넘게 채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가장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는 2004년에도 52명 중에서 단지 7명만을 여성으로 뽑았을 뿐이다. 채용부터가 이러다 보니 종합직의 92%는 남직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FM/CL은 97.7%가 여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어 직군 사이 성별 분리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결국 문제는 이러한 성별분리가 여성을 초과착취하는데 이용된다는 점이다. 최근 은행의 구조가 급격하게 변화함에 따라 전통적인 업무영역이 붕괴되었고 FM/CL의 직무는 종합직과 큰 차이가 없어졌다. 그리고 학력이나 경력 같은 인적 속성에서도 별 차이가 나질 않는다. 일부 고졸 출신 노동자들의 경우 직무경력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학력차이는 실제 업무에서는 문제가 되질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듯 은행측에서 분리직군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하는 이유는 오로지 ‘인건비 절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하나은행의 인건비 비중은 다른 시중은행들에 비해서 상당히 낮은 편인데, 이는 1720여명에 달하는 FM/CL 직군 여성노동자들이 다른 여성금융노동자들에 비해서도 현저하게 낮은 임금을 받는데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2004년 1분기 월 2천8백30만원으로, 임원들이 국민, 한미에 이어 3번째로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어도 낮은 인건비 비율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성차별적인 직무 분리는 동일노동·차별임금 뿐만 아니라 승진 기회에도 작용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하나은행의 FM/CL직 여성노동자들은 유사한 업무를 하는 남성 종합직 행원에 비해 1천4백만원 적은 2천2백만원 정도의 연봉을 받고 있으며, 채용 당시에도 대졸 학력을 사실상 인정받지 못하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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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목소리’를 들어라!

최근 금융노조 하나은행지부와 지난해 사업장이 통합되었던 금융노조 서울은행지부는 통합노조 출범을 준비하면서 공동투쟁위원회와 노조통합 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성차별 직군제 등 차별철폐 △제도통합의 조기 완성 △노사관계 정립 △독재적 경영 타도 △조직통합 완성 등 공동투쟁의 목표와 요구안을 제시하고, 사측이 7월말까지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전면적인 투쟁에 나설 것을 선포했다.

하나은행지부에서 그러한 투쟁의 기운을 달구고 있는 것이 바로 성차별적 직군제에 대한 한계에 다다른 분노이다. 이는 단지 임금만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의 투쟁은 유린된 인권을 회복하기 위한 몸짓인 것이다.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고 있는 사측이 이러한 ‘인권의 관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파국’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