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앞으로 전개될 독일에서의 생활은 전혀 상상이 되질 않았고, 비행기 안에 앉아 있는 자신을 낯설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아직 한국사회도 제대로 알지 못한 20살 나이에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기 위해 모국을 떠나고 있었다.
되새김질한 ‘이주여성노동자’ 정체성한국에서 나는 간호사로서 직업의식은 있었지만 내 자신이 노동자라는 인식은 없었다. 직업은 단지 선택이었고 내 정체성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러나 독일 땅을 밟은 순간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은 ‘외국인노동자’였다. 독일에서의 나의 존재근거는 외국인노동자라는 사회적 규정이었고, 나의 삶은 외국인법과 노동법의 테두리 안에 묶여 있었다.
외국인법과 노동법이 내 삶을 어떻게 좌지우지하는가를 실감하게 된 계기는 당시 실시된 독일의 새로운 노동정책이었다. 1974년부터 유럽공동국 소속 노동자를 제외하고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을 차단하는 노동정책이 실시되었고, 이에 따라 3년 계약이 끝나는 한국 간호사들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백림한국문화원 원장이었던 정하은 목사님이 설문조사를 통해 많은 한국 간호사들이 독일에 머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독일교회와 교인들에게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76년 6월 베를린에서 열린 ‘교회의 날(Kirchentag)’ 행사에 한인교회협의회도 참가하여 한국간호사들의 체류연장을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행사기간 동안 3천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고, 한국간호사들의 체류연장 요청은 교회의 날 행사의 결의사항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그 후속조치로서 베를린정부 내무부장관과 면담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독일에서 베를린 시가 처음으로 한국간호사들에게 무기한체류허가를 허락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또, 무기한체류와 연계되어 한국간호사들은 무기한노동허가도 취득하게 되었다. 한국간호사들이 무기한체류허가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나는 외국인노동자들도 자신의 권익을 위해 투쟁할 수 있고 독일의 노동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외국인노동자로서 스스로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주노동자도 누렸던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한국 간호사들은 3년 계약이 보장된 상황에서 일을 시작했고, 임무나 임금에 있어서 독일간호사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초기에는 문화적 차이나 언어소통에서 어려움이 있기도 했지만 한국간호사들은 분명한 직업의식, 친절함, 성실함으로 인정을 받았다. 우리들은 환영받는 외국인노동자들이었다.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무엇보다 가장 부러웠던 점은 누구나 아프면 입원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서비스(투약, 시술)를 충분히 받을 수 있고, 보호자가 없이 입원치료를 받는 의료보험제도였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아프면 온 식구가 간병 때문에 매달려야 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는 한국 상황과 비교하면, 독일의 의료보험제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의료혜택을 주는 제도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점은 우리 병동에서 청소하는 분(40대 중반)이 간호사인 나보다 휴가가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직업의 고하를 막론하고 나이와 근무연수에 따라 휴가를 받는 것이 정말 인간적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의료보험제도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공짜로 공부할 수 있는 무상교육제도였다. 그 동안 병원에서 일했던 나는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대학입학자격인 아비투어(Abitur)를 취득할 수 있었다. 내가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함부르크대학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무상으로 공부할 수 있고, 아이들을 유치원에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학금을 받고 있던 우리 부부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유치원, 음악학교, 체육기관에 거의 돈을 들이지 않고 아이들을 맡길 수 있었다.
[ 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임신, 출산, 육아지원프로그램을 지원받은 이주여성들 - 출처:이주여성인권센터 ]
맨 밑바닥으로 모이는 사회적 폭력
그렇다고 독일이 천국은 아니었다. 독일도 외국인에 대한 증오와 차별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이미 와 있는 한국인들은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었지만 1974년 이후 독일은 한국에서 더 이상 노동자들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을 향하는 외국인들의 물결은 끊이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이 직접 겪었던 상황들뿐만 아니라, 베를린 한국문화원 간사로 일하면서 어려움을 겪는 동포들과 함께 노동청이나 경찰청에 찾아가는 일을 통해서, 그리고 남편의 목회현장을 통해서, 한국인들이 외국인으로서 겪는 차별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평범한 독일국민들의 외국인 증오의 표면적 이유는 ‘우리 일자리와 우리 거주공간을 빼앗는다’, ‘우리 세금을 축낸다’ 등이었다.
내가 겪은 다음과 같은 경험은 많은 외국인들이 직접적이나 간접적으로 겪는 것이다. 둘째 아이를 임신한 나는 어느 날 큰 아이를 데리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어느 노인여성이 나에게 “왜 애를 둘이나 낳아서 우리 세금으로 키우려고 하느냐, 왜 너희 나라에 가지 않느냐”며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었다. 이 때 한 중년여성이 “외국인들도 이 곳에서 일하면서 세금을 내고 있어요. 외국인들이 일하지 않으면 당신이 연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몰라요? 만약 당신이 계속 이 여성에게 소리 지르면 경찰을 부르겠어요”라고 하자, 이 노인여성은 한 순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이 분은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독일 사회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 노인여성은 적은 연금으로 어렵게 생활하는 분이었고, 자신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모습이었다. 독일사회의 약자인 이 노인여성은 자신보다 더 약자라고 판단되는 외국인여성인 나에게 분노를 터트린 것이었다. 이 노인여성은 물리적 강자인 외국인남성에게는 아마 화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사회적 위치가 독일사회에서 가장 약자인 ‘외국인여성노동자’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경험이었다.
1970년에 한국을 떠나 처음 만난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독일의 복지제도는 나에게 놀랍고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외국인노동자로서의 제한과 차별을 넘어 인간으로서 당당함을 느끼고 나의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복지제도 자체만은 아니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주고 나를 외국인이 아닌 동등한 인간으로 대해 준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나를 동등하게 대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가 갖고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독특성을 인정해 주었고, 이것을 나눌 수 있도록 용기와 기회를 주었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당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 준 이들에게 나는 많은 사랑의 빚을 졌다.
“노동력을 원했지만, 인간들이 왔다”
25년의 긴 독일생활을 뒤로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좋은 점은 나의 존재근거를 허락받지 않아도 되고, 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마음 편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즈음 거리에 나가면 내가 모국을 떠나던 때와 달리 외국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중에는 1970년 나의 모습과 겹쳐지는 이주노동자들도 많이 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보다 나은 삶을 찾아 한국을 썰물처럼 떠나가고 있지만,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으로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다. 이들은 모두 보다 나은 삶을 향한 바다에서 썰물과 밀물을 이룬다. 나는 고향을 등지고 이국으로 떠나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밀물과 썰물의 흐름 속에 나 자신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독일은 노동력을 원했지만, 노동력이 아니라 인간들이 왔다”고 말한 어떤 독일소설가의 표현처럼 외국인노동자들은 노동력이 아니라 인간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독일인들에게 호소하던 나는 이제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내가 어떤 한국인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가장 약자인 이주여성노동자들의 모습에서 독일사회의 가장 약자였던 내 자신의 옛 모습과 만난다. 이주여성들이 외국인, 여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한국사회는 아직 요원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소망이다. 이주여성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이들이 당당한 인간으로 대접받도록 돕는 것이 내가 독일에서 이주여성노동자로 받았던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