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의 대행'을 넘어서는 시민운동의 모색

노동사회

'대의의 대행'을 넘어서는 시민운동의 모색

admin 0 3,725 2013.05.12 07:29

지난 90년대를 통해 사회운동의 한 축인 시민운동은 매우 빠르게 성장해 왔다. 이 성장은 한국사회에서 분출했던 다방면의 개혁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축으로는 이를 적절히 대변할 정치주체의 부재에 연유하는 것이기도 했다. 4·15총선은 6월 항쟁이 추구했던 '정치적 민주화'의 한 국면이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치의 전환은 시민운동의 존재근거와 사회적 역할에 있어서도 전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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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화로 가는 정치, 다시 시민사회

4·15 총선은 수구세력이 행정권력에 이어 의회권력까지도 상실함으로써 6월 항쟁 이후 최초로 실질적인 권력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 50년대 이후 최초로 진보정치세력이 의회에 진출함으로써 보수독점의 정치구조가 균열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다른 총선과는 구분되는 이른바 '정초선거(定礎選擧)'로 명명할 만하다. 

4·15 총선의 결과는 '차떼기'로 상징되는 수구세력들의 권력형 부정부패, '탄핵발의'로 압축되는 대의권력 남용에 대한 심판으로서 나타났다. 이는 유권자 또는 시민사회가 과거의 지역정치세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하며, 자립적 존재로서 일정한 정치적 복원력 또는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보수정치의 '합리화'와 '쇄신'이 가속화될 것임을 예고한다. 한편, 진보정치의 원내진출로 인해 한국정치를 지배해왔던 냉전적 도그마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은 보수독점 정치구조에서는 활성화될 수 없었던 정책적 경쟁의 풍토를 조성하는데 일조할 것이 틀림없다. 이는 대의제 정치의 정상화를 앞당길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바닥동력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동당의 자립적 활동의 뒷심으로 작용한 진성당원구조, 새로운 여당의 뒷심이 된 '노사모'와 '국민의 힘' 등 정치조직을 뒷받침하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동력들이 그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지금까지 실종되어 왔던 대의제를 복원시키는 힘이다. 이 아래로부터의 정치참여동력들이 가진 내포가 결국 '정상화된 정치'의 실내용을 규정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정상화된 정치를 가정한다면, 유권자의 수준이 정치를 규정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문제는 다시 시민사회다. 

법치의 명암 

4·15 총선의 성취 이면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존재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정치부패-측근비리 수사, 탄핵정국, 선거기간을 관통하여 소리 없이, 그러나 강력하게 정국을 주도해왔던 실체는 검찰, 헌법재판소, 선관위 등 행정사법권력이었다. 법치주의의 관행은 정착되어가고 있는데 반해 이를 주도하는 사법행정권력은 아직 개혁과 민주화의 성역으로 남아있다. 

정치부패수사와 측근비리 수사과정에서 검찰은 창설이래 처음으로 시민들로부터 지지와 격려를 한 몸에 받았다. 이는 정치의 정상화에 비견되는 '사정·사법의 정상화'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찬사를 받았던 검찰의 독립적인 처신과는 별개로 "검찰은 과연 누가 견제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새로운 숙제로 대두되었다. 그뿐 아니다. 헌정사상 최초라는 이른바 '탄핵국면' 속에서 9인으로 구성된 헌법재판소가 미묘한 권력투쟁의 최종적 판관으로 대두되었다. 이 과정에서 헌재는 권위 있는 '헌법기관'으로 다시 탄생하였다. 2004 총선에서 "어느 날 갑자기 강력해진 선관위"는 부패정치를 규제하는 '메스'가 되기보다 성숙한 시민사회를 재단하는 '망나니의 칼'이 될 수도 있음을 실감케 했다. 

사법권력에 대한 견제의 진정한 필요성은 사회경제적 분야에서 더욱 분명해 지고 있다. 파업지도부에 대한 손배소, 새만금 가처분소송, 호주제 폐지 헌법소원 등 사회운동 또는 사회적 쟁점해결에 있어 법적인 해결방식의 비중과 의미가 커지고 있고,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도 확대될 것이다. 20세기 초엽 한창 고조되던 미국의 사회운동은 보수적인 사법제도의 틀을 넘지 못하고 좌초하고 말았다. 정치의 정상화 가능성에 더해, 사법권력의 민주화와 시민참여가 새삼스러운 과제로 떠오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90년대 시민운동의 의미와 한계 

한국사회운동은 87년 6월 항쟁 전후로 본격적으로 분화 발전하였다. 독재정권과 권위주의체제의 패퇴가 뚜렷해짐에 따라 사회적 참여의 제도적 공간이 열리게 된 까닭이다. 이 점에서 이 땅의 모든 사회운동은 반독재민주화운동, 민족민중운동을 거름으로 성장한 열매들이라 할 수 있다. 

90년대를 거쳐 특히 시민운동이 급성장했다. 이는 사회적 분화와 권리의식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시민운동은 보수독점의 정치구조가 갖는 폐쇄성에 의해 자극 받았고 이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면도 있다. 기존 정치구조가 제기하지 않고 수용하지도 않는 사회적 의제들을 제기하고 관철시키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한편, 시민운동은 미숙한 시민사회를 배경으로 성장했다. 아직 자신의 권리를 능동적으로 찾아 나서지 못하는 '유년기 시민사회'의 대리자, 대변자로서 급성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90년대 시민사회운동의 급성장은 '대의의 대행'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경실련, 참여연대 등 다른 나라에는 존재하는 않는 준정당적, 통전적 권력감시단체가 성장했다. 환경운동, 여성운동 역시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중앙집중적 운동으로 자리잡았다. 이들의 활동은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의 성공을 통해 한 결절점을 이루게 되는데, 1000여개에 이르는 다양한 각 부문의 운동이 정치개혁, 부패정치청산으로 집결하게 된 데는 우리사회의 정치적 병목현상에서 그 설명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낙선운동은 예기치 못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변자적, 집권적운동이며 계몽적 운동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시민운동의 이러한 대변자적 진보성은 정치의 정상화와 네티즌을 필두로 한 자발적 유권자의 진출로 인해 상쇄되어 가고 있다. 이 운동에 결집했던 개혁적 시민-네티즌 역량은 안티 조선 등 급진적 언론소비자 운동, 노사모 등 정치적 서포터즈 운동 등 보다 폭넓은 자기결정력을 갖는 운동 영역으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90년대를 통해 성장한 시민사회운동은 보수독점의 정치구조에서 정책적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론으로 구체적인 정책대안에 바탕을 둔 입법운동과 소송 등 제도적 접근에 치중하였고, 이 과정에서 관료화된 '정치사회의 무능부패'와 '시민사회의 요구'를 대립시키는 일종의 시민권 확대전략을 취하였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초적인 절차와 형식의 부재, 정치개혁의 지체, 정경유착 등 전근대적 기득권 유착구조 등이 엄존하는 현실 속에서 상대적으로 효과적인 접근법이었다. 

그러나 추상적 의미의 정치사회와 역시 추상적 의미의 시민사회의 대립을 전제하는 접근방법은 계급적 이념적 분화와 대립을 우회하는 한계를 내재적으로 안고 있었다. 따라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착과 정치과정의 정상화, 시민사회의 이념적 계급적 분화에 따른 시민운동 그 자체의 분화 역시 완만히 진행되어 오고 있다. 그 내용 역시 단순한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가치기준과 패러다임에 기초한 신사회운동적 급진화와 다변화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치적 중립성'을 어찌할 것인가

정치가 정책적·이념적 분화를 일정하게 대변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해왔던 기존의 접근방법론 역시 재고될 수밖에 없다. 정책에 대한 엄밀한 평가에 기초한 명확한 정책적 연대의 입장표명, 즉 정책연대의 일상화가 그것이다. 이는 물론, 특정 정치세력에 대해 독립적인 주체로서 계속 존재하는 전제를 밑바탕에 두고 있다. 

87년 이후 지난 10여년간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은 분화와 갈등을 지속하면서도 연대와 협력의 노력 역시 지속해왔다. 이 또한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사례인데, 이는 시민운동, 민중운동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민주화운동의 태내에서 성장했고, 동일한 뿌리에서 분화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친화성에 비해 시민운동-민중운동간의 연대는 결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없다. 민중운동의 구조적 배제상황에 따른 대의의 연대 또는 공권력의 남용에 대한 일반민주주의적 연대는 지속되어왔고 시기별 정책협의틀 또한 존속해왔지만, 진정한 의미의 상호침투의 경험을 나눈 사례는 적었다. 정책대안지향(시민)과 이념지향(민중)의 간극, 조합적 이해관계(민중)와 계급적 중립(시민)의 강박은 해소되기 쉽지 않았다. 여기에는 정책적 조정력을 갖는 진보적 정치세력의 부재도 한몫 했다. 

새로운 정치적 상황하에서 시민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은 서로에 대한 개입적 발언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갈 것이다. 이는 연대운동의 성숙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진전이지만 개별 사회적 이슈에 대한 태도 역시 구체화와 첨예화된다는 점에서 사안별 이견을 객관화하고 서로를 구체적으로 검증하는 계기로도 작용할 것이다. 이 과정은 과거에 없던 새로운 갈등도 수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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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 과제: 저항연합, 직접민주주의 강화 

새로운 정치사회적 환경 아래서 사회운동이 당면한 가장 커다란 숙제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와 사회적 양극화에 대해 효과적 저항연합을 구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0여년간의 시민권 확대 노력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절차적 민주화와 사회복지 제도의 도입을 이룩해냈음에도, 시민의 삶의 질은 훨씬 더 후퇴했고 빈곤 역시 증대했다는 사실을 시민운동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여성, 환경 등 각 부문의 왕성한 활동과 정책적 관철에도 불구하고 구조적 상황의 악화가 지속되어 왔다는 점에 대해서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시민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와 성장개발주의의 재생산 모델에 대응하는 거시적 청사진과 정책적 수단을 체계화하기 위한 상호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민중운동과도 구체적 정책비전을 중심으로 협력을 구체화해야 한다. 

또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제도화, 보수적 국가기구 또는 보수적 법치의 공고화를 염두에 둔 포괄적 참여민주주의 청사진과 행동프로젝트도 필요하다. 각종 소환제를 비롯한 참정권 확대, 정치적 의사표현 및 직접행동의 제도와 수단의 확보, 입법만이 아닌 사법에의 감시와 참여 등 민주주의의 급진화가 요구된다. 부안방사성폐기물처리장 유치에 반대하는 부안주민운동 사례, 탄핵반대촛불집회 사례 등은 법치에 관해, 시민참여에 관해, 직접행동에 관해 여러모로 곱씹어 볼만한 운동적 쟁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한편, 새로운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인터넷 공간 등을 통해 분출하는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표현, 쌍방향 의사소통구조에 착목할 필요가 있다. 시민운동이 한층 성숙하고 자기의사가 뚜렷해진 시민사회에서 생존하려면 대변자·계몽자적 입장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회적 행위주체의 하나로 자기를 인식하는데 익숙해져야 한다. 시민운동의 근엄주의와 폐쇄성은 개선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간과되어 왔던 시민운동 의사결정과정에서 회원 및 시민참여를 통한 직접민주주의도 강화되어야 한다. 

다만, 네티즌 운동 또는 정치적 서포터즈 운동의 역동성에는 시민운동과는 다른 동학이 존재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네티즌 운동은 비조직성과 이슈에 따른 빠른 이합집산을 그 존재적 특징으로 하며, 정치적 서포터즈 운동은 정치공학적-권력투쟁적 관심이 주된 동력이다. 이 점에서 이슈선택과 제기의 엄정성을 특징으로 하는 시민운동의 제자리 지키기도 중요하다. 

시민운동 과제: 국제화·전문화·의제확장

생명, 평화, 국경을 넘어서는 정의, 문화적 다양성, 지속가능성, 성적 평등 등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기하고, 보수독점의 정치·시민사회와 투쟁해야 한다. 더 이상 정치사회 대 시민사회의 도식, 추상적 진보 대 보수, 민족과 반민족의 도식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 소수자와 연대를 강화하고 주류사회의 서열과 위계에 도전함으로써 형해화된 정치공학적 대립으로부터 사회정치적 의제의 폭을 확장해야 한다. 

또한 국제적 연대, 특히 아시아 등 남반구와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정치개혁 등 시민사회운동이 치중해왔던 과제들은 다분히 국경 안의 문제였다. 최근 수년간 정당 자신의 자기개혁, 노사모 등 정치적 서포터즈 운동의 분화 등으로 인해, 정치개혁에 있어서 정치권 자신과 유권자 운동의 자기동력이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 군사화, 빈곤, 지속가능성 등의 사회적 문제는 국경을 넘어서는 시야를 요구한다.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연대의 지평을 여는 것이 시민운동의 주된 역할이기도 하다. 

권력감시운동 역시 여전히 중요하다. 전문화, 안정화해야 한다. 시민사회운동이 정치적 중립성의 강박에서 자유로워지고 정치세력과의 정책적 연대를 선택적으로 강화하고, 더러는 정치세력화하는 것 등은 불가피하고 또한 바람직하다. 그러나 정치적 독립성에 바탕을 둔 권력감시기능을 잃어버린 사회운동은 정치권력의 부패를 막을 수 없다. 특히 사법권력에 대한 감시는 중요성과 의미를 더하게 될 것이다. 시민운동은 진보정치세력 및 민중운동과의 정책적 협의와 연대를 강화하되, 서로의 입장과 정책에 대한 엄밀성을 유지해야 한다. 한편, 권력감시의 전문화를 위한 모니터 단체의 분화와 계열화는 가속화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상대적으로 역할이 감소될 종합적 시민운동의 일부는 각 영역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계열화 또는 분화하는 것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