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의 출범
2015년 11월22일 정의당, 국민모임, 노동정치연대, 진보결집+(더하기) 등 4개의 노동·진보정치 조직이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출범을 위한 통합 당대회를 개최했다. 통합 당의 명칭은 정의당이다. 여러 논쟁이 있었지만 2016년 4월13일 총선까지는 현재의 명칭 ‘정의당’을 사용하고, 총선 이후 대중적 논의와 공모를 거쳐 당원 총투표로 당명을 개정하기로 하였다.
지난 3년간 지루한 세력별 통합 논쟁 끝에 탄생한 정의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과연 통합정의당은 진보정당을 대표하여 총선에서 승리하고, 노동자들의 진보정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와 질문이 통합 당대회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진: 2015년 11월3일 국회에서 열린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통합선언 기자회견 ⓒ정의당)
거듭된 분당과 분열의 상처를 남긴 진보정치
지난 1997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를 저지하고 노동법 개정을 위해 일어난 총파업투쟁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일대사건이었다. 노동자들은 정권과 자본을 향해 상당한 기간 동안 대규모로 투쟁했다. 마침내 날치기 된 노동법은 총파업투쟁으로 폐기되었고 많은 노조간부와 노동자들은 승리했다고 환호했지만, 이어진 노동법개정 협상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반영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정치적, 외형적으로 승리했으나 법·제도는 바꾸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요구를 대변하고 싸워야 할 국회의원,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권영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 ‘국민승리21’의 후보로 나섰다.
비록 대선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국민승리21에 이어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2004년 10명의 민주노동당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진보정당의 전성기가 온 것은 아닌지 도취되기도 했다. 그러나 패권 다툼과 무능의 결과로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지루한 논의 끝에 진보대통합을 통해 통합진보당이 탄생했고, 2012년 4월 총선에서 13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되자 진보정치의 부활을 꿈꾸었으나,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출과정에서 부정경선과 패권으로 또다시 분당됐다. 진보정치는 노동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분열의 상처를 남겼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실패로 끝났다.
민주노총은 더는 정치세력화를 논의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통합진보당 분열의 상처는 노동자들에게 너무나 컸고, 2000년부터 이어온 배타적지지 방침의 철회는 지난 12년간의 정치적 성과, 1987년부터 이어져 온 노조운동 25년의 성과를 무위로 만들었다. 특히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진보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를, 노조 활동가 사이에서는 배타적지지 방침 철회 과정에서의 논쟁에 따른 갈등과 상처를 깊이 남겼다. 이러한 결과는 통합진보당, 정의당, 노동당,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 등이 각자의 길만을 가는 것으로 이어졌다.
다시 시작해야 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노동운동진영 내에서 진보정치 통합논의가 다시 나온 것은 2013년 초부터였다.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은 노조 내 전·현직 산별지도자 및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노동포럼에서 진보정치 통합 제안이 나왔다. 실제 논의는 2013년 4월3일 노조의 전·현직 활동가 100여 명과 7개의 현장조직들이 ‘노동중심의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2013년 6월6일 대전에서 열린 워크숍에 100여 명의 노조활동가들이 참석해 노동중심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에 대한 의견을 모으고 실천을 결의하면서 본격 행보가 시작되었다.
이 모임이 중요한 이유는 지난 20여 년간 노조운동시기에 반목과 대립으로 일관했던 민주노총 내의 양대 정파(국민파, 중앙파)의 경향을 가진 노조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이다. 어색한 만남이었지만 작금의 어려운 노조운동 상황을 볼 때 더 이상 대립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이 있었고, 이에 따라 ‘진보정치가 노동자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결의를 쉽게 모아낼 수 있었다. 이윽고 노동중심의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에 동의한다면 과거 불문이라는 정신으로 미래만 보고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논의에 속도를 붙인 계기는 노동정치연대의 멤버십을 가진 민주노총 지도부의 당선이었다. 2014년 말 3개 후보조의 경선으로 치러진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가 노동정치연대의 내부 지지를 받는 위원장이 당선되고, 노동정치연대 회원이 정치위원장으로 선임되면서 노동중심의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 흐름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갖고 논의를 주도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이미 민주노총의 결속력은 많이 약화되어 있었고, 다양한 진보정치의 흐름들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어느 한 방향으로 흐름을 만들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대중조직과 7개의 현장 조직들이 참여해 2013년 11월 창립한 노동정치연대와 함께 흐름을 만들어가는 투트랙 방식으로 진행하게 됐다.
노동정치연대는 2013년 11월 민주노총, 정의당 및 노동당,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 녹색당, 진보교수단체인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진보교연) 등에 통합논의를 공식 제안했고, 이들 단체와 함께 진보혁신회의를 꾸려 논의를 시작하였다. 당시 통합진보당이 빠진 것을 두고 민주노총 내에서 논쟁이 일기도 했으나, 노동정치연대는 모두가 참여하는 진보정치 통합논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 통합진보당은 2단계 통합대상으로 논의하기로 하고 1차 통합논의를 시작하였다.
4자 진보정치조직의 통합논의
4자 통합논의는 크게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2013년 12월 노동정치연대가 제안하여 시작된 진보정치 재편을 위한 논의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노동정치연대가 민주노총, 정의당, 노동당, 계급정당(추), 녹색당, 진보교연에 논의를 제안했으나, 녹색당과 계급정당(추)이 불참하여 5개 조직이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2014년 1월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통합진보당이 배제된 탓에 민주노총의 공식참여는 어렵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노동정치연대, 정의당, 노동당, 진보교연이 공식참여하고, 민주노총은 참관하는 진보혁신회의 준비모임을 만들어 논의를 이어갔다. 그러나 2014년 6월 지방선거 전 통합을 이뤄내지 못하고 논의의 속도가 늦춰지면서 지방선거에 대응을 하지는 못했다.
지방선거 후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각 단위에 본격적인 진보재편 논의를 위한 결의를 요구했으나, 논의에 부담을 느낀 노동당이 2015년 1월 진행되는 당 지도부 선거 이후로 논의를 미루자고 요청했다. 이에 논의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고 2014년 9월 진보혁신회의(준) 활동도 중단되었다.
외형적으로 보면 10개월간 논의 과정의 성과는 별로 없어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각 단위의 사정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진보재편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넓힐 수 있었다. 이는 이후 진보재편 논의를 만들어 가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사진: 11월 22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통합 정의당 당대회 ⓒ정의당)
통합 당대회가 개최되기까지
2014년 9월 이후 논의는 중단되었고, 민주노총이 처음으로 임원 직선제에 들어가면서 진보재편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진보재편 논의를 이끌어왔던 노동정치연대를 비롯한 각 단위들은 답답해하며 그저 민주노총 선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진보정치 통합을 위한 논의가 이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민주노총 선거가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두 가지 큰 변수가 발생하였다. 하나는 각계의 원로 및 인사들이 참여한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건설을 촉구하는 모임’(국민모임) 선언과 함께 정동영 전 의원이 결합한 새로운 정치 조직이 등장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이었다.
2014년 12월부터는 정동영 전 의원의 새정치민주연합 탈당과 국민모임 결성에 따라 논의의 중심이 국민모임으로 이동했으나, 어느 한 세력을 중심으로 진보재편이 어려운 현실을 인정한 국민모임의 제안으로 2015년 3월3일 4조직(국민모임, 노동당, 노동정치연대, 정의당) 대표자와 집행책임자가 비공개로 만났다. 이들 대표들은 진보재편의 논의를 4조직 중심으로 이어가는 것에 합의했다. 비로소 2단계 논의가 본격 시작된 것이다. 2단계 논의는 4월29일 보궐선거 공동대응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한때 정동영 전 의원의 관악을 출마와 관련해 국민모임의 미숙한 대응으로 보궐선거 공동대응이 무산되는 등 위기감이 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진보재편 논의가 무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도부들의 결단으로 논의는 재개될 수 있었고, 마침내 6월4일 4개 조직의 대표자들이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공동선언’을 발표할 수 있었다. 공동선언은 다수의 방송과 신문에 보도됐으며, 노동 및 진보진영에서도 많은 관심을 비롯해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리고 노조간부 및 조합원들에게 진보재편을 통한 진보정당 통합의 기대감을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6월28일 노동당 당대회에서 진보재편안이 부결되면서 통합파를 중심으로 일부가 탈당하였고 이들은 진보결집더하기(+)를 결성하여 논의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9월2일 진보통합을 중단 없이 추진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이후 주요 쟁점에 합의한 뒤 11월2일 통합선언을 하고, 빠른 속도로 통합준비와 세부논의 과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11월22일 4개의 진보정치세력이 참여하는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통합 당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독자적 정치세력화 대 선거연합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정치적으로 자기 이해를 대변하고 실천하는 정치조직을 선택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것은 노조와 정당과의 관계정립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정당의 가치와 노선과는 다르게 관계의 방식만을 가지고 설명한다면, 하나는 노조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통해 노동자들의 요구 해결을 시도하는 방식이다. 이는 노동중심의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 운동으로 나타나는데, 유럽이나 브라질 등 남미에서 주로 진행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노조가 자유주의 정당과의 선거연합을 통해 요구 해결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미국이나 일본에서 진행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노조 운동을 이끌고 있는 양대노총에 의해서 두 방식이 충돌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한때 녹색사민당을 만들기도 했으나 끝내 실패했고, 이후 선거 때마다 기존 보수정당인 여야정당에 대한 정책연합이나 정책 지지를 통해 조합원들의 요구를 관철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반면 민주노총은 아직까지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길을 가고 있는데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의 창당이 그러했다. 이때까지 민주노총은 창당을 주도한 동시에 중심 역할을 하면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에 대한 배타적지지 방침을 유지했다. 현재 배타적지지 방침은 철회했으나, 선거 기간에 복수의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방침은 유지하고 있다.
포기할 수 없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민주노총의 독자적 노동자정치세력화는 큰 도전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이 흐름을 주도할 민주노총의 응집력과 투쟁력이 많이 약화되었고, 사회적 영향력도 크게 후퇴하였다. 아울러 민주노총과 노동자들의 정치적 요구를 대변해서 싸울 진보정당은 사분오열되어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해졌다. 노동자들에게 힘이 되기보다는 짐이 되는 수준에 이르러 갈등과 분열,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럼에도 독자적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포기할 수 없고,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11월22일 출범한 통합정의당이다. 물론 노동·진보정치 분열과정에서의 상처가 너무나 컸기에 통합(재결집) 과정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노동·진보정치의 재결집을 위해서는 지난 과정에서 드러난 패권·분파주의의 극복과 함께 심하게 뒤틀린 신뢰를 회복하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통합정의당은 노동·진보정치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는 노동을 대표하지도 못하고 여전히 부족하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이 결합할 수 있는 근거지를 마련했다는 의미가 크고, 현장의 노동·진보정치 이탈을 일정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의미 있다.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결합하지도, 노동정치세력이 전체적으로 결합하지도 못했지만 노동자들의 진보정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간 한 달 평균 500여 명 정도가 정의당에 입당했으나, 6월4일 4자의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 선언 이후 당원 가입이 늘기 시작하여 통합선언과 통합 당대회를 진행한 11월에는 1,800여 명이 입당했다. 또한 12월 들어서는 2주 동안 무려 2,000명의 당원이 입당했으며, 특히 노동자들의 입당 흐름이 감지되고 있어서 고무적이다. 노동자들의 입당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정의당이 노동중심의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게 한다. 정의당은 이미 11월 말 기준으로 당원 수가 2만 명을 넘어섰고, 총선까지 당원 수 5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신규 입당자의 상당 부분은 노동자가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지지할 수 있는 진보정당, 정의당
현재 야권의 분열, 선거구획정 논의에 따른 비례대표 축소 시도 등 전반적인 정치상황은 정의당에게 상당히 불리하다. 그럼에도 정의당 내부 분위기는 ‘통합을 발판으로 한번 해보자’며 꽤나 긍정적이다. 통합이 되지 않았다면 진보정치에 악영향을 주는 ‘정치 쓰나미’에 휩쓸려 갈 수도 있었다. 따라서 통합은 그 결과를 떠나서 지금도, 총선 이후에도 진보진영이 악조건 속에서 단일하게 대응할 토대를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아울러 정의당은 12월12일 통합전국위원회를 통해 형식적인 통합절차를 모두 마무리하고 총선 준비에 본격 돌입하였다. 정의당의 총선 목표는 정당득표 20%, 20명 이상 당선과 함께 국회 원내교섭단체 구성이다. 쉽지 않은 목표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야 할 목표도 아니다.
정의당은 특히 정당투표에서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정의당에게 투표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호남지역과 제한적이지만 야권연대를 통해 수도권과 노동자 밀집지역인 영남 지역 등에서 지역구 후보의 당선도 가능할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통합 정의당의 탄생은 비록 부족하지만 노동자들이 지지하고 가입할 수 있는 진보정당인 동시에 총선을 비롯한 향후 선거에서 지지할 수 있는 정당으로써 노동자들에게 희망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