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경제정책 운용, 방향 선회인가 속도 조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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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진보개혁 인사들이 그랬듯이, 나는 ‘촛불혁명’과 박근혜 대통령 탄 핵, 그리고 문재인 후보 집권을 적극 지지했다. 내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이유는, 그가 집권하면 민주주의가 복원되고, 경제정의가 실현되며, 한반도 평화가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시詩의 시절은 가고 지루한 산문散文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기대한 대로,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문에 심각하게 후퇴했 던 민주주의와 남북대화를 성공적으로 복원했다. 그 성과가 국민들의 마음 을 크게 움직여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1년이 지났음에도 한때 80퍼센 트를 넘는, 역대 최고의 지지율을 누렸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 주당이 예상외의 압승을 거둔 것도 그 결과였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다. ‘화려한 시의 시절은 잠깐이요, 그 다음에는 지루 한 산문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다’고. ‘지루한 산문’이란 국민들이 매일매일 살아내야 할 일상과 먹고사는 문제를 지칭하는 비유다. 무능하고 부패한 거 악(巨惡)을 무너뜨린 감격도, 남북 정상이 두 차례나 상봉하는 장면을 지켜 보는 감동도, 일상적으로 먹고사는 일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금세 기억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유능하고 정의로운 정부는 ‘화려한 시’로 국민들의 마음을 얻으면서 동시에 ‘뛰어난 산문’으로 국민들의 일상을 편하게 해준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그리고 공정경제’를 경제정책의 캐치 프레이즈로 내거는 것을 보고,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는 일 못지않게 경제정책 분야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했다. 사실 지난 10여 년 이 땅의 민초들은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만만찮은 세월을 보냈다. 노동자의 절반 가까이가 비정규직으로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갖지 못하는 힘겨운 삶을 이어왔다. 자영업자들은 치솟는 상가 임대료와 재벌의 상권 침탈로 결국은 길바닥으로 내몰릴 것을 예감하면서도 자기 노임 깎아먹기와 적자 운영으로 간신히 버텨왔다. 중소기업가들의 형편도 자영업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어렵게 대학을 다니는 젊은이들에게 주어지는 미래라고는 비정규직 노동이나 자영업일 따름이었다. 서민들은 전월세대란으로, 집 가진 이들은 가계부채로 고통을 겪었다.

 

집권 후 1년 간 시늉에 그친 사회경제개혁

그래서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김상조, 홍장표 등 개혁 인사들을 정부와 청와대 요직에 임명했을 때, 그리고 정부가 소득주도성장의 첫 발걸음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추진했을 때 큰 기대를 걸었다. 당연히 곧바로 재벌개혁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지불능력을 키워줄 경제민주화 정책이 뒤따라서, 최저임금 인상 정책과 결합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최저임금 인상이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상징처럼 떠올라서 보수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지금까지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와 관련해서는, 겨우 일부 프랜차이즈 업체의 ‘갑질’을 시정하고,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기술탈취를 방지할 정책에 갓 손을 댔을 뿐, 재벌개혁 관련 핵심 법안의 제·개정에서는 거의 성과가 없고, 골목상권을 살리는 정책과 건물주의 갑질을 방지할 방안은 시행되지 않았다. 최저임금 인상의 결과 ‘을’과 ‘병’이 대치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노동 존중 사회’를 표방하며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국정과제 1호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하고,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함으로써 기대에 부응하는 듯 했다. 그러나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서는 자회사 방식을 허용하고 다양한 예외를 두어 많은 비정규직을 온존시켰고, 정규직화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차별이 해소되지 않아 무늬만 정규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게다가 민간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아직 시작조차 못했다. 최저임금 인상은 긍정적 성과이지만 때마침 그 산입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실제 효과는 반감되었다. 7월부터 시행된 연장근로 제한 정책도 탄력근로 확대니 처벌 유예니 하는 단서를 두어 정책의 당초 취지가 퇴색되었다. 노동자들이 조삼모사朝三暮四 식 정책 행보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라는 고사성어는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에 꼭 들어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실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지대추구를 방지하는 일이다. 지난 수십 년 간 대한민국은 특정 시기를 제외하고는 부동산 불로소득을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해서, 선진국에 진입하자마자 국민들이 땀 흘려 일하기보다는 땅으로 일확천금하기를 기대하는 ‘지대추구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임대소득과 자본이득을 합친 부동산 소득이 엄청난 규모로 발생하고 있고, 그 소득의 상당 부분을 소수의 부동산 부자들과 토지 투기에 몰두한 재벌·대기업이 차지한다. 기업은 생산적 투자로 이윤을 얻기보다 투기로 토지 불로소득을 얻는 일에 더 관심을 쏟고, 직장인은 월급을 알뜰하게 저축해서 노후를 대비하기보다 대출금으로 부동산을 사서 값이 오르기만을 기다린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제대로 먹고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은 아무리 빈둥빈둥 놀아도 날이 갈수록 재산이 늘어나는 부조리한 세상,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오죽하면 대한민국을 ‘부동산공화국’이라 부르겠는가? ‘부동산공화국’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에 미래는 없다.

‘부동산공화국’ 해체에 가장 강력하고 적절한 정책 수단은 부동산 보유세를 강화하여 부동산 불로소득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2015년 현재 부동산 보유세 실효세율이 0.16퍼센트에 불과해서, 보유세 부담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가장 낮은 그룹에 속한다. 보유세가 약해서 부동산 불로소득이 방치되다 보니 수십 년 간 주기적으로 부동산 투기가 발발했고, ‘부동산 불패’ 신화가 형성되어 모든 국민이 토지와 부동산을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 여기는 바람에 한국의 땅값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

문재인 정부는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하여 부동산 불패신화와 정면 대결했던 참여정부를 계승하는 만큼, 당연히 부동산 보유세 강화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보유세 개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정책기획위원회 산하에 설치된 재정개혁특별위원회가 두 달 여의 논의 끝에 발표한 권고안은 세수 효과가 1.1조원밖에 안 되는 ‘찔끔 증세’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전문가도 이 방안으로 부동산 불로소득이 차단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특위 권고안 발표 이틀 뒤에 기획재정부는 그 권고안조차 깔아뭉개고 세수 효과가 약 7,400억 원에 불과한 정부 개편안을 발표했다. 특히 주목되는 내용은 주택과 종합합산 토지의 종부세를 약간 강화하면서, 지불능력이 큰 대기업이나 건물주에게 부과하는 별도합산 토지 종부세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실현하는 전제조건이 ‘부동산공화국’ 해체일진대, 서민·중산층이 아니라 부동산 부자를 안심시키는 보유세제 개편안을 내놓은 것을 보면, 과연 문재인 정부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마음이 있었는지 의심하게 된다.

지난 1년 3개월 동안 문재인 정부는 복지 증세를 위해 소득세와 법인세를 일부 개편하여 연 5.3조원 증세를 하는 데 그쳤다. 이는 ‘핀셋증세’라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2012년 대선 당시에 문재인 후보가 연 19조 원 증세를 약속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연 5.3조원 증세는 복지 증세라고 부르기에는 초라한 금액이다. 이런 정도의 소극적 처방으로는 급속히 다가오는 저출산·고령화의 위협을 막아낼 수 없다. 자영업자가 아우성이고, 청년실업률이 10퍼센트를 넘을 정도로 심각한데, 기획재정부가 확장적 재정정책을 시행하지 않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옳은 방향임에도 효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은 과감한 복지정책과 거시경제정책을 펼치지 않는 탓이다.

 

6.13 지방선거 후 벌어진 노골적인 정책 ‘우클릭’, 그리고 지지율 하락

6.13 지방선거 이전 항간에는 문재인 정부가 과감한 사회경제개혁에 나서고 싶지만 혹시라도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자제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럴 듯한 이야기 같아서 나도 문재인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양해하고 있었다. 지방선거 압승 소식을 접하며 나는 문재인 정부가 드디어 그 동안 참고 있었던 개혁 조치를 발표하고 과감하게 추진하겠거니 짐작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6월 26일 소득주도성장의 입안자인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을 경질한 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경제정책 우클릭이 이뤄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일 규제개혁을 통한 혁신성장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윤종원 신임 경제수석은 소득주도성장을 포용적 성장으로 재포장하기 시작했다. 문 대통령은 관련 현장을 방문하며 규제 철폐의 의지를 다졌다. 7월 18일 의료 민영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의료기기 규제 혁신 방침을 밝혔고, 8월 7일에는 인터넷 전문 은행에 한해 은산분리를 완화한다는 방침까지 발표했다. 7월 30일 세제발전심의위원회 회의에서 발표된 ‘2018년 세법개정방향’에는 2008년 이후 10년 만에 세수를 줄이는 감세안이 담겼다. 그 와중에 7월 9일 인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회동이 있었고, 8월 6일에는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를 방문하여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혁신성장!”을 외치는 이벤트를 벌였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인물을 대통령과 경제정책 총수가 직접 만나서 일자리 창출 등 역할을 부탁한 것은 정책 우클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다.

소득주도성장을 본격 추진하는 것을 포기하고, 공정경제 실현을 위한 정책의 추진에는 큰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규제철폐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혁신성장만을 밀어붙이는 문재인 정부의 최근 모습에서는 일종의 기시감旣視感을 느낀다. 대선 기간 중에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를 강조하며 마침내 집권에 성공하고는, 집권 후 그 둘을 내팽겨 치고 오로지 창조경제 하나만으로 경제정책을 밀고 나갔던 박근혜 정부가 떠오르니 말이다.

여기서 지지율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방선거 직후 80퍼센트에 육박했던 대통령 지지율이 두 달 만에 20퍼센트 포인트 가량 떨어졌다. 50퍼센트 후반대의 지지율 자체는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하락 속도가 급격하다는 것이 문제다. 1년 이상 높은 지지율에 취해 있던 청와대 인사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들 중에는 약간의 인적 청산과 ‘개혁 시늉’만으로 다음 총선과 대선을 대비하려 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를 실현하려고 힘을 빼는 사이에 경제지표가 악화됐다는 것이 그 사람들의 원인 분석인 듯하다. 이런 원인 분석이 없었다면, 위에서 말한 일련의 우클릭 행보가 나오기는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정권 핵심부의 이런 인식은 얼마나 타당한 근거를 가질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런 근거도 없다. 최근 두 달 사이에 일어난 대통령 지지율 급락에는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등한히 한 채 최저임금 인상에 목을 맸던 탓에 일어난 영세 자영업자들의 반발, 부동산 불로소득 근절의 핵심 수단인 보유세 개편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가격과의 싸움에 집착한 탓에 생긴 서민층과 지방민들의 불만, 오락가락하는 노동 정책 때문에 촉발된 노동자들의 분노, 게다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과는 뚜렷한 차별성이 있으리라 기대했던 진보적 유권자들의 실망감 등 유력한 원인들이 널려 있다. 같은 기간 동안 정의당 지지율이 무려 10퍼센트 포인트 가까이 상승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그럼에도 청와대 인사들이 기업 규제와 초기 ‘개혁’ 정책으로 인한 경제적 성과의 부진을 지지율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면 이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소득주도성장을 제대로 추진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를 소득주도성장을 포기함으로 해결하려 하고, 공정경제 실현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 생긴 문제를 공정경제를 포기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니, 한심하다고 해야 할까, 불쌍하다고 해야 할까?

 

촛불정부에게 외치는 323명 지식인 선언

문재인 정부는 이미 길을 정하고 몇 걸음을 뗀 상태여서 그 길을 돌아 나와 제 길을 찾아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그 길을 계속 가면 문재인 정권도, 대한민국 국민도 곤란한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기에, 돌아 나와서 제 길을 가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의 박스안 내용은 내가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초안 작성을 맡았던 지식인 323인 선언(2018년 7월 18일 발표)에서 요구한 내용에다 최근의 정책 우클릭을 중단하라는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지식인 선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명자 숫자가 예상외로 많아졌는데, 이는 지식인 사회 내에 문재인 정부 사회경제정책의 우클릭을 걱정하는 분위기가 그만큼 확산되고 있었다는 증거다. 부디 문재인 정부는 아래의 요구를 받아들여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표방했던 초심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혹시 외부 여건이 좋지 않아서 경제지표가 악화될 우려가 있다면, 국민들에게 알리고 단기 부양책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 정부가 했던 쪽으로 정책의 근본 방향을 트는 것은 하수下手 중 하수다.

  •  특권과 반칙, 강자의 ‘갑질’을 저지하고 약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목적을 두었던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의 본래 정신을 새롭게 회복하고, 그 패러다임의 실현에 필요한 정책들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여 촛불정부의 소임을 다할 것.
  • 재벌에 넘겨준 권력을 즉각 회수하고 재벌체제의 적폐를 청산함으로써, 중소기업, 소상공인, 자영업자, 노동자, 농민 등 우리 사회의 ‘을’들과 대기업이 상생, 동반성장하는 경제 생태계를 조성할 것.
  • 은산분리 완화 정책과 재벌에 기댄 일자리 확대 정책을 즉시 중단할 것.
  • 상시적 업무의 직접고용 정규직 채용 원칙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실현함과 동시에 여성, 청년, 노년, 장애인 등 노동시장 취약 집단의 노동권을 보호할 것.
  • 부동산 불로소득 차단과 지대추구 방지의 효과를 발휘할 수 없는 기획재정부의 종부세 개편안을 즉시 폐기하고, ‘부동산공화국’을 해체할 수 있는 과감한 대책을 새로 마련할 것.
  • 농촌붕괴와 지방소멸 시대가 운위될 정도로 심각한 지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농정의 틀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지역재생 방안을 시급히 마련할 것.
  • 타성에 젖은 경제 관료를 중용하다가 개혁이 물 건너간 과거의 뼈아픈 경험을 되풀이하지 말고, 내각과 청와대에서 반개혁적 흐름을 주도하는 인물들을 개혁적인 인물들로 교체하여 담대한 사회경제개혁을 다시 추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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