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인의 고려 무사, 사막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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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젝트 '무사'

개봉 전 언론의 취재 건수로 <무사>에 필적할 만한 한국 영화는 없었다. 최고의 제작비, 한·중·일을 아우르는 스탭 구성, 장쯔이의 캐스팅, 역대 최장의 촬영 필름, 촬영 일수 등. 기존 한국 영화의 통념을 가볍게 뛰어 넘은 무사는, 그 자체로 한국 영화 산업이 맞닥뜨린 하나의 실험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영화 시장이 커지지 않았다면 이런 영화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2억5천만 달러(한화 약 3,250억 원)를 퍼부은 <타이타닉>이 망한다고 해서 헐리웃이 흔들릴 일은 없고, 같은 규모의 영화가 못 나올 일은 절대로 없다. 하지만 70억을 쏟아 부은 <무사>가 불발탄으로 그칠 경우, 산업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한국 영화판에서 이런 규모의 실험은 '모험'으로 치부될 것이 뻔하다.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아시아 영화는 정작 자국 관객들의 눈에는 재미없으며, 서구인의 눈을 빌어 바라 본 신비로운 아시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련의 비판을 받아왔고, 무사는 이런 영합과정 없이 한국 관객과 서구인들을 다 잡을 수 있는 기대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영화 <무사>가 150일간의 사막 횡단을 거쳐 걸어간 힘겨운 길은 제작팀만의 길은 아니었다. 이 영화에 시장의 확대 및 국제 시장에의 본격 진출, 소재의 다양화, 제작비의 양적 성장 등 한국 영화 산업의 여러 가지 화두가 동시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2. 현란한 폭력, 허나 무얼 위해…

『삼국지』와 『수호지』, 가깝게는 중국 홍군의 '대장정'을 비롯한 대륙의 서사시는 모든 사람의 성장기를 뒤흔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옳다고 믿는 바를 향해 제 목숨을 돌보지 않으며, 가파르고 험난한 길을 결코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선 굵은 삶과 정신은 자기를 쏟아 부을 대상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성장기의 동요를 강한 힘으로 옭아맨다. 

<무사>의 출발도 그 지점이다. 김성수 감독(각본도 직접 썼다)은 역사 속에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실종된 고려 사신단 일행을 주인공으로 하여 반도 땅의 비좁은 경계를 넘어 드넓은 중국 땅을 빌려 상상의 서사시를 그려냈다. 하지만, <무사>가 중국의 영웅담에서 빌려 온 것은 여정의 험난함과 남성적 힘일 뿐, 시대에 맞서 싸우던 영웅의 풍모는 아닌 듯하다. 

여솔(정우성)의 창이 슬로우 모션으로 허공을 가를 때 사방으로 튀는 핏방울과 쓰러져 가는 적들의 시신은 호흡을 멈추게 할 정도로 멋있다. 진립(안성기)의 신중한 화살 끝이 적의 목을 정확하게 꿰뚫을 때 객석의 피도 함께 끓어오른다. 더구나 가없는 중국의 황토 땅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무협이 펼쳐질 때는 '폭력 미학'이란 말에 부끄럽지 않을 장관이 펼쳐진다. 액션만 보자면 무사 같은 한국 영화는 일찍이 없었다. 한국 영화가 가진 상상력이 또 하나의 계단을 올라 선 것이다. 

칼날을 겨눈 대상이 가진 무력과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패배가 뻔한 길임에도 지켜야 할 것이 소중하기에 자기가 가진 모든 걸 거는 모습은 칼날의 매서움을 능가하는 대목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9명의 무사들은 각자가 지켜야 할 대상이 있다. 주 캐릭터인 여솔(정우성)은 노비 출신으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을 자유가 그 수호의 대상인 듯 하며, 최정 장군(주진모)에게는 부친의 영예를 더럽히지 않을 정도의 충의와 양명(揚名)이 중요하다. 주진군 대장 진립(안성기)은 일행을 무사히 고려 땅으로 데려가는 것이 지상 과제다. 

하지만 목표가 갈갈이 흩어져 있는 것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이 목숨걸고 지키려는 대상은 그들이 딛고 선 사막의 모래 알갱이만큼이나 좌충우돌을 거듭한다. 귀족과 평민, 노비라는 출신성분의 차이는 명나라 공주를 지키려는 최정의 명예욕 때문에 조금씩 빛이 바래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창을 들었던 여솔은 공주를 지키는 것으로 그 목표를 수정해 버린다. 대사가 없다 보니 짐작만으로 그 심중을 헤아려야 한다. 

이 무사들이 죽어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기란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도 어려운 일이며, 대상을 잘못 선택한 맹목적 애정이 위험한 것처럼 목적이 분명치 않은 비장한 결단은 화려한 액션으로도 가릴 수 없는 허점이다.

3. '마초'의 냄새는 나지만… 

잘 만든 남자영화는 나름대로 한 칼 하는 내공으로 성장기 소년의 가슴을 후벼판다. <영웅본색>의 싸구려 낭만주의에도 울 수 있는 게 소년의 마음이며, 우리 모두는 가슴 한 자락에 그 소년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무사>에 바라는 건 그들이 압제에 저항하는 투사도 아니고, 정치적 올바름으로 무장한 지사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전투에 납득할 만한 이유를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었더라면 하는 점이다. 물론 <영웅본색>도 이런 아쉬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지켜야 할 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생명까지 걸어야 하는 그 무엇이 각자에게 가지는 의미가 제대로 부각되었다면, 이 영화는 우리 가슴속의 소년들에게 떨림을 던졌을 것이다. 

이와 달리, <열혈남아>의 아화(유덕화 분)가 파멸이 뻔한 결론을 스스로 택하는 것에 관객이 공감하는 건, 그 이전에 그가 우정을 꼭 지켜야 할 이유를 충분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사>에서는 이유가 느껴지지 않는 각오와, 근거가 부족한 결의가 주인공들의 희생과 전투를 앙상하게 떠받치고 있다. 우리 사회 도처에 도사린 '마초'들의 객기와 어거지에 질려버린 여성의 입장에서 이건 결코 반가운 대목이 아니다. 

150분간 혈기 방자한 마초들이 별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눈에 힘을 주는 걸 참아야 하고, 몇몇 장면에서 배우는 비장한데 관객은 우스운 장면이 나오는 건 분명하지만, 극장 안 가고 비디오로 감상하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듯 싶다. 보려면 극장에서 제대로 봐야 한다. 적의 심장을 겨누는 활과 창의 향연은 시각적으로 장관이고, 감각과 스타일에서 결코 남의 뒷줄에 설 수 없는 김성수가 만들어 낸 화면은 극장 화면으로 즐겨야 할 몇 안 되는 한국 영화 중의 하나라는 심산에서다. 

논쟁거리를 제공하는 영화가 아니므로,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대면 그만인 즐거운 관객이 되기로 작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당신에게는 2시간 30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무협 영화만이 줄 수 있는 특유의 흥분이 오감을 자극하는, 십대 시절의 경험이 다시 한번 찾아 올 것이다. 그것도 Made In Korea의 라벨을 달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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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www.musa.co.kr 

*각본·감독 김성수 
1961년 서울 출생 
세종대 영문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영화연출전공<그들도 우리처럼><베를린리포트>(박광수 감독)의 조감독<그대 안의 블루><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이현승 감독),<세상밖으로>(여균동 감독) 각색
1993 단편영화 <비명도시>
1996 <런어웨이>
1997 <비트>
1999 <태양은 없다>
2000 <武士> 

*촬영 김형구 
1987 중앙대 사진과 졸업
1988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1989 유영길 촬영감독 촬영부 <성공시대><칠수와 만수><개그맨>1993 American Film Institute 졸업/MFA(석사) 취득
1993 <비명도시>(35mm 단편,김성수 감독)
1994 <닥터봉> (감독 이광훈 )
1995 <진짜사나이> (감독 박헌수)
1996 <박봉곤 가출사건> (감독 김태균)
1997 <비트> (감독 김성수 )
1998 <아름다운 시절> (감독 이광모)
1999 <태양은 없다> (감독 김성수)
<이재수의 난> (감독 박광수)
<박하사탕> (감독 이창동)
2000 <인터뷰> (감독 변혁)
<武士> (감독 김성수)
2001 <봄날은 간다> (감독 허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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