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의료와 의사의 존재 의미 : 『생명의 증언』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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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몸 상태는 어떤가, 원인은 무엇인가, 언제부터 발병했는가, 대소변은 어떤가, 어떤 음식을 먹고 있는가를 확인해야만 한다.’라고 히포크라테스가 주장했지만 나는 이런 질문에 또 하나 ‘직업은 무엇인가’라는 항목을 추가하고 싶다.” - 라마니찌(1663-1714, 책 38쪽, 강조는 인용자)
 
『생명의 증언』을 쓴 요시나카 다케시는 일본의 내과 전문의면서 동시에 직업환경의사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에서 생명의 위협에 노출되고, 이로 인해 고통받고, 그것을 직업병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워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직업병은 우리에게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원진 레이온’ 사건으로 익숙한 ‘(만성)이황화탄소 중독증’이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직업병’   
저자는 ‘산업의학의 선구자’인 라마니찌가 1700년에 쓴 『일하는 사람들의 질병』이라는 책에서 직업과 질병의 관계를 탐구하는 질문으로 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1983년 말 일본 교토부 우지시(宇治市) ‘유니치카 레이온 공장’의 만성 이황화탄소 중독증에 걸린 노동자 3명과의 만남으로 본문을 시작한다. 1980년대 후반 저자와 피해 노동자들이 직업병 인정 투쟁을 하면서 한국의 원진 레이온 피해 노동자 및 관련 전문가들과 만나게 되는 장면은 흥미롭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단순히 두 나라의 이황화탄소 중독 노동자의 아픔에만 주목하지 않고, ‘직업병 수출’이라는 사회구조적인 모순에도 눈을 뜬다. 본문에는 ‘일본 섬유산업의 재편’,‘한일 국교 정상화’, ‘일본 정부의 손해배상 및 차관 제공’ 등 섬유산업의 국제적인 재편과정에 일본 ‘동양 레이온’의 중고 기계가 한국으로 수출된 것을 소개한다. 
일본에서 제작된 레이온 기계(거의 플랜트 수준)는 인조견 추출과정에서 용매제로 이황화탄소를 사용하는데,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이황화탄소를 흡입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고 이 기계를 한국으로 수출하였다. 한국에서는 박흥식이 설립한 원진 레이온의 전신인 흥한산업이 기계를 수입하여 1966년 말부터 가동했다. 이후 한국에서는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인한 피해노동자가 속출하였지만 1981년에서야 처음으로 중독으로 인한 피해가 인정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위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있다가 노동자에게 가스보호 마스크를 지급하기 시작한 때가 1988년이라는 것이다. 이는 살인 방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에서는 1929년부터 이황화탄소 중독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관련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한국에 ‘직업병을 수출’한 것에 대해서 저자는 강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직업병 공장’인 원진 레이온이 1993년 가동을 중단한 이후 이 낡은 기계는 또다시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원진 레이온 기계의 중국 수출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인데, 책을 읽으면서 중국으로 갔던 기계가 최근에는 북한에서 가동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레이온 생산기계가 일본에서 한국, 중국을 거쳐 최근에는 북한으로 이전된 것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석면에 대한 규제가 시작되면서 석면공장을 멕시코의 마킬라도라(Maquiladora) 지역으로 이전한 사례와 함께 대표적인 국가 간 재해위험의 전가 사례로 알려져 있다. 실제 ‘세계체계분석(world-system analysis)’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중심부(core) 국가가 주변부(periphery) 국가로 위험산업(hazardous industry)을 수출하는 메커니즘 폭로가 1990년대 중반 이후 꽤 진행되기도 하였다. 저자는 일본의 작은 도시에서 자신이 만났던 직업병 피해 노동자의 문제에서 출발해 산업의 특성에 대한 이해, 나아가 ‘직업병 수출’에 대한 대응을 위해서 국제연대의 필요성까지 제기한다. 노동자와의 만남에서 국제연대의 필요성까지 저자의 인식이 자연스럽게 확대되어 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의료의 본질은 사람들의 행복에 공헌하는 것  
책을 읽으면서 산업재해 및 직업병에 대해 기업들의 고질적인 불인정, 직업병에 대한 제도적인 공백(틈새) 문제, 기업과 산업의학/산업위생학의 유착을 통한 산재은폐 문제 등이 비단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씁쓸했다. 내용의 1/3가량이 한국의 원진 레이온 직업병 사례와 한국의 87년 민주화 이후 양심적인 의료인(의사·간호사·전문가 등)을 중심으로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에 대응하기 위한 단체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서 일본인 저자의 책을 번역한 것이지만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다. 
저자는 사람들이 실제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의료’라는 사회적 행위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의학과 의료의 본질은 사람들의 행복에 공헌’하는 것이므로, ‘의료는 전문가인 의사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 공동 행위’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자본주의 생산과정이 변화해가면서 새로운 산업재해와 직업병이 등장하는 사회에서 의료와 의사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봤다. 나아가 산업안전보건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노동조합, 전문가 집단의 긍정적인 연대 필요성에대한 주장이기도 할 것이다. 기업과 유착된 산업의들이 주도하는 산재은폐 시도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는 의료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업안전보건 부문에서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것뿐 아니라 다케시나 삼성반도체 직업병문제에 대해 활동하는 ‘반올림’의 의사들처럼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노동자와 함께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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