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창노련, 민주노조의 튼튼한 토대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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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한 87년 노동자대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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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던 30년 전 그때, 폭력경찰이 쏜 자욱한 최루탄을 가르던 시민들의 ‘독재타도 호헌철폐’의 함성은 민주주의와 노동해방에 대한 민초의 숭고한 열정이었다.  
긴 장마가 끝났던 그해 6월, 비밀리에 모인 30명 동지들의 비장함은 흡사 독립운동가의 결기와 같았다. 우리는 단 한 명도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 변치 말 것을 손톱을 깎아 맹세했다. 우리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최루액을 마시며 “호헌철폐 군부독재타도”를 외쳤다. 마산 창동, 3·15 의거탑, MBC방송국 앞, 북마산 등지를 돌며 독자적인 노동자 집회를 갖기도 했고, 학생들과 함께 모이기도 했다. 지나가는 시민이 건넨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일 때면 더없이 행복했다. 한번은 백골단의 습격으로 북마산 길가 어느 주택으로 몸을 피한 적이 있는데 그 댁의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대문을 걸어 잠그고는 최루액이 묻은 내 얼굴에 치약을 발라줬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마산경찰서 서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던 농성 집회에서 노태우의 6.29 항복 선언을 접했다. 그날 나는 한참을 울었다. 승리에 대한 성취감으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순진한 노동자인 나는 ‘한 만큼 얻는다’는 것을 당시 투쟁을 통해 알았다. 정치투쟁에서 투쟁한 만큼 쟁취를 경험한 것이다. 이날의 눈물을 나는 잊을 수 없다.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현수막에 담긴 노동자들의 요구사항 ⓒ노동자역사 한내)
 
정치투쟁 승리의 경험, 민주노조 조직으로 이어져
장마 후 태풍이 지나간 7월, 밀양의 자그마한 공소에 지역 활동가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얼마 후 우리는 노조를 결성하기로 하고 날을 정했다. 기존의 어용노조를 엎고 새로운 민주노조를 세우기 위한 투쟁을 결의한 것이다. ‘어용노조 몰아내고, 민주노조 건설하자!’,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대접하라!’, ‘쭈쭈바도 100원인데 10원이 호봉이냐!’를 구호로 내걸었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였던 우리는 노예의 삶을 청산하기로 했다. 이는 곧 억압과 착취의 굴레에 저항한 ‘공돌이, 공순이’의 인간선언이었다.      
당시 노동자의 근무 환경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휴가는 사전에 내지 않으면 무단결근으로 처리됐고, 잔업은 이유 없이 무조건 해야 했다. 철야작업도 다반사였다. 일요일 출근을 하루라도 빼려면 최소한 반장과 한 번은 싸울 각오를 해야 했다.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은 밥 먹는 식당도 다 달랐고, 사무직 식당에 어떤 밥이 나오는지도 몰랐다. 87년 대투쟁 이전, 노동자들의 삶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부품과 같았다. 우리는 노예 같은 삶을 벗어나기 위해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민주노조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때 우리는 노동자라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노조를 내 편이라 여겼다. 민주노조의 깃발은 노동자로서 당당한 삶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노조를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김금수 선배는 “파업투쟁과 노조는 노동자의 학교”라고 말했다.
노조 발기인대회에 비밀리에 모인 30여 명의 동지는 조직을 배신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전 조합원 보고대회를 준비하는 우리의 다짐은 단단했다. 아침이면 유인물을 가슴에 품고 회사에 갔다. 그 유인물은 어떤 것과도 가치를 비교할 수 없었다. 노조 설립신고는 첩보전과 다름없었다. 이른 새벽, 마산시청 공무원이 건물 문을 열기도 전에 화장실에 숨어들어 공무원이 출근하자마자 신고서를 접수하고, 접수증을 받아 나왔다. 당시 모든 신규 민주노조가 결성되는 과정은 우리와 같았다. 
점심시간에 보고대회를 할 때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그 시간 우리는 노동자로서 당당했고, 순수한 마음과 희망에 감격해 눈물짓기도 했다. 나는 그날 “가난하게 살더라도 정의롭게 살겠다”고 조합원 앞에서 약속했다. 그 다짐을 나는 지금도 가슴에 품고 있다. 
노동자의 피와 땀, 눈물로 쟁취한 민주노조이기에 우리는 일상 활동에 철저했다. 노조의 공식 대자보는 대의원 혹은 운영위원 선거구별로 반드시 조합원이 돌아가며 직접 써 붙였고, 조합원의 요구사항을 대의원이 직접 접수해 반드시 노조에 보고했다. 매월 1회 이상 임시 대의원회를 열어 대의 민주주의를 정착하게 했다. 노조의 각종 회의는 반드시 1시간 학습과 발표로 이뤄졌다. 그 당시 회의와 토론의 수준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철저했다. 예산 역시 철저한 감사와 사전 계획을 통해 집행했고, 반드시 월별사업을 따로 평가했다. 머리띠는 조합원이 직접 써야 하는 원칙도 있었다. 대의원 선거구별 상징 깃발은 조합원의 참여로 만들어졌는데 그 깃발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다. 
조합원의 투지와 그 능력은 대단했다. 몸 벽보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 삼미금속노동자들이 식당에 있던 쌀 포대를 러닝셔츠처럼 만들어 그 위에 요구사항을 직접 써서 입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집회를 할 때면 경남지역의 금속 노동자들은 북과 징을 울리며 사물놀이로 대오에 큰 힘을 실어 주었다. 노동자 집회가 일체 인정되지 않던 시기, 가두투쟁은 무조건 전투경찰과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노동자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공갈·협박은 노조가 조직된 후에도 여전했다. 특히 마산수출자유지역 내 여성사업장은 구사대 폭력이 빈번했다. 이것은 회사가 노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과 같았다. 내가 있던 타코마 조합은 남성사업장이라는 이유로 여성사업장 연대투쟁에 자주 동원되었다. 연대투쟁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었다. 마음에서 난 것은 조직에 대한 높은 신뢰와 헌신, 희생이 되어 30년 민주노조의 튼튼한 토대를 만들었다. 민주노조의 철저한 일상 활동과 연대투쟁은 마창노련의 정신을 만든 30년의 역사가 되었다. 
 
 
“87년 대투쟁 이후 블루칼라임이 자랑스러웠다“
1987년 이전 노동자들은 기름때 묻은 작업복보다 잘 다림질된 양복을 선망했다. 노동자라는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 대투쟁 이후 마창노련이 세워지고 민주노조가 활성화되면서 노동자들은 작업복을 당당히 입고 다녔고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마산·창원에서는 작업복이 노동자를 상징하는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1987년 대선 때, 함께 했던 동지들이 정권에 의해 구속되고 작업장에서 해고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연대만으로는 민주노조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노동자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다. 87년 투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마창 지역 민주노조 위원장들의 모임인 청년노동자회(청노회)는 이 상태로는 당시의 난국을 타계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한국노총을 민주화할 것인가, 아니면 별도의 민주노조의 연대조직을 꾸릴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다 우리는 민주노조의 독자적인 연합체를 세우게 된다. 그것이 마창노련이다.    
1987년 12월14일 우리는 청노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단위노조 상집간부가 참여하는 마창노련 발기인대회에서 노동해방을 위한 마창노련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노동자들과 진정으로 함께할 민주노조의 상부조직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냈고, 우리는 마창노련을 통해 민주노조의 수많은 전통과 역사를 대중에게 알렸다. 내부적으로는 마창노련과 단위노조와의 회의체계를 정립했으며 민주노조의 원칙을 세웠다. 조합원 중심의 활동에 반하는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다. 위원장의 교류를 상집 간부 운영위원·대의원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조합원 간의 연대로까지 일상화했다. 회의 결과는 반드시 공개했으며, 단위노조의 상집부서는 마창노련의 모든 사업장 부·차장을 중심으로 정기 모임을 갖고 교류했다. 토론은 치열하게 하되 결정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전통을 이때 세웠다.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외국인 투자기업들은 호시탐탐 민주노조 운동을 탄압했다. 우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외자기업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창원공단은 방위산업특별위원회를 조직해 연대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마창노련 신문을 발행해 전 조합원의 연대와 교류를 진작시켰고, 조직 바깥에서는 글쓰기 동아리인 참글, 풍물 동아리인 베꾸마당, 판화, 민노래 등 다양한 문화 연대가 이뤄지면서 투쟁과 함께 거대한 운동의 물결이 만들어졌다. 마창노련 전 조합원이 마산수출자유지역 내 민주광장에 모여 거대한 연대투쟁을 벌일 때, 나는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정치투쟁의 희망을 엿봤다. 
이후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까지 마산·창원 지역에서는 1천여 명이 넘는 조합원이 구속·수배되거나, 해고되었다. 하지만 그 희생과 헌신은 민주노조의 생명력 있는 숨결이 되었다. 나는 20대 후반 민주노조운동에 뛰어들어 30년간 3번의 구속과 2번의 해고를 당했다. 그 시간 나는 막말로 아내의 등을 처먹는 남편이었다. 가정보다는 조직이 우선이었고, 부모님께는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 작은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자식에게는 용돈 한번 넉넉히 주지 못했던 부모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민주노총 깃발만 보면 직업병이 도지고 만다. ‘가난하게 살더라도 정의롭게 살자’는 우리 집 가훈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87년 대투쟁에서 내가 본 희망, 그 희망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걸어 왔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6·70년대 노동운동 선배들이 생각난다. 이 글을 통해 뒤늦은 인사지만 조직 활성화를 위해 87년 당시 본인 급여의 절반 이상을 내어 헌신해 준 위원장 동지와 국장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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