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좌담] 조기 대선의 시대정신과 새 정부 과제

섹션:

글쓴이 :

 
< 개최 내역 >
○ 주제: 조기 대선의 시대정신과 새 정부 과제
○ 일시: 2017년 4월24일(월) 오후 3시
○ 장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회의실
○ 사회: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 토론: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이정우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주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회) 작년 늦가을에 시작된 촛불항쟁시위에 1,700만 명의 민중이 참여했습니다.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됐고 조기 대선이 치러지게 되었습니다. 밑으로부터의 민중의 저항과 항쟁으로 인해 지배 권력이 무너진 것은 우리 역사상 4.19혁명, 87년 민주항쟁에 이어 세 번째가 아닌가 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이후 한 달 반이 지났고 이제 보름 후면 19대 대선이 치러집니다. 촛불항쟁시위에 참여한 민중들의 바람은 무엇이었고 대선과 새 정부에게 어떤 것들을 기대하고 있을까요? 그 가운데는 ‘수구 보수 세력의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 ‘사회를 재구성하자’는 논의들도 많이 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오늘 대담은 촛불항쟁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조기 대선의 의미와 새로 출범하는 정부의 기본 방향에 대해 논의하고자 마련했습니다. 촛불항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심판, 그에 이은 조기 대선의 의미와 시대정신을 정리해보자는 것입니다.
 
 
조기 대선의 의미와 시대정신
최장집) 이번 촛불시위에 대해 이원보 이사장님께서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밑으로부터의 세 번째 항쟁이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라고 하더라도 그 성격은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의 두 번의 항쟁은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타도하는 민주항쟁이었는데, 이번은 민주항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격변이라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실천해오면서 특히 최근년에 이르러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라고 봅니다.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박근혜 정부는 민주적 규범이나 법과 제도‧절차를 무시하고 권위주의 체제의 성격과 운영방식을 많이 복원시켰고, 또 그런 방식으로 정부를 운영했습니다. 최근에는 70년대 유신체제가 부활된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고요. 체제는 분명 민주주의인데, 내용은 권위주의적이었어요. 이에 반대하여 촛불시위가 발생한 겁니다. 대통령이 권위주의적 요소를 가질 때, 국회가 이에 대해 비판하고 견제하면서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결과입니다. 청와대로 표상되는 대통령 권력의 압도적 힘에 대응하지 못하는 국회의 허약함은 이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의 탄핵에 이르는 길은, 제일 먼저 촛불시위 즉, 밑으로부터의 민주화 투쟁이 촉발되어 국회에 충격을 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니셔티브는 민의의 대의기구인 국회가 아니라, 광장으로부터 나온 사회적 힘이었습니다. 이 힘이 충격을 주면서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이 대통령 탄핵소추를 둘러싸고 양분된 덕분에 탄핵소추안은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한국 정치를 지배해왔던 보수정당의 양분은 한국 정치사의 대사건이라 하겠지요. 
하여튼 헌재의 대통령 탄핵 결과 현임 정권이 해체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헌법적 절차를 따라 탄핵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상 중요하고도 희귀한 경험입니다. 그 최종단계까지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치는 큰 위기를 맞았지만, 민주주의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됐다고 하겠습니다.  
 
이정우) 최 교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다 해주셨기에 저는 시대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지난 100년간 우리 역사는 항상 보수‧우익‧강경 세력이 권력을 잡고 민중의 요구를 끊임없이 묵살하는 체제가 지속되었습니다. 그 체제 하에서 예외라 할 만한 시기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밖에 없었습니다. 보수 체제 아래 민중의 합리적이고 정당한 요구조차 끊임없이 묵살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드물게 그 요구가 폭발적‧폭력적으로 분출된 사건이 바로 4.19혁명과 6월 항쟁이었습니다. 이번 촛불시위는 민중의 요구가 세 번째로 분출한 사건이라는 평가에 동의하고요. 
그러나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상당히 다릅니다. 4.19혁명과 6월 항쟁은 독재에 대한 항거와 저항으로 일어났습니다. 반면 이번 촛불시위는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보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나라를 지배하려 한 데 대해 국민이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군사독재적인 요소는 많이 퇴색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유신에 대한 강한 향수를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자기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지나쳤습니다. 여기에 더해 재벌과의 정경유착 문제도 있었고요. 정경유착은 과거 박정희 때부터 있었던 것인데 비밀에 부쳐진 채 다들 짐작만 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 뇌물 액수까지 낱낱이 밝혀지는 것을 보고,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가세했습니다. 다시 말해 촛불시위는 기회주의자들이 보수‧강경 우익정권과 유착해서 권력과 부를 거머쥔 정의롭지 못한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인 것이죠.  
 
 
보수 세력의 몰락과 새 정부의 과제 
사회) 대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보수 기득권 세력은 몰락하고 야당 후보들이 양강 구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구도가 한국 정치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의당을 제외한 야당들은 민주주의나 개혁을 표방하면서도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보수 야당이 집권할 경우에도 보수 기득권세력이 남긴 적폐를 청산하고 소외된 계층을 대변하며,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최장집) 대통령 탄핵을 통해 기존의 보수정부가 해체됐다는 사실과 그것이 어떤 진보적인 결과로서 구현될 것인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예상치 못한 해체로 인해 일단 기존의 한국 정당 체제의 기반이 붕괴됐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의 정당 체제 자체는 보수적인 여당도 있고,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야당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정당 정치를 움직여 온 것은 보수적인 가치이고 이념입니다. 이것을 ‘박정희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패러다임에 의해 국가가 통치돼 왔어요. 80년대 후반에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그 이후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들은 대체로 박정희 패러다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를 운영해왔습니다. 앞서 이 교수님께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예외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정치적으로 큰 변화는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정당의 정부 운영방식을 보면 여전히 보수적인 틀을 극복하지 못했고 대개 그 틀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의 몰락은 민주화 이후에도 유신체제를 지속시켰던 기반이 확실하게 허물어진 것을 의미하며, 정치적 전환점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집권 시 정부를 운영하는 패러다임, 정책의 기본 방향을 바꿔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이제 기존의 보수적인 헤게모니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이것을 대체할 만한 무엇인가는 나타나지 않은 공백상태가 현 상황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조기 대선은 탄핵의 직접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에 새 정부는 최소한 권위주의적 산업화의 틀을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그동안 경제,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회 세력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정치적 방법을 동원해야 할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이 점에서 이번 대선은 ‘중대선거’의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대선에서의 정당구도는 정치적 전환기에서 잠정적인 정당 체제가 아닌가합니다. 기존의 정당체제가 깨졌기 때문에 여론의 추이는 극히 유동적이고 선거결과는 현재 상황과는 아주 다를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현시점에서 본다면, 현재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중도보수적인 국민의당이 경쟁하는 동안, 기존의 보수진영의 후보가 당선가능성이 낮다는 점에서 이번 대선 경쟁구도는 특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새 정부가 시대적 과제를 이해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실제로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번 대선을 통해 나타날 다음 정부의 가장 중요한 어젠다는 두 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제도적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정부와 국가권력을 어떤 내용으로, 어떤 제도적 실천을 통해 운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 패러다임의 핵심이라 할 정경유착, 즉 국가운영의 권력 엘리트들과 재벌 대기업의 유착 또는 동맹관계를 어떻게 해체하고, 어떤 방향으로 이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실체적 개혁이 그것입니다.  
 
이정우) 촛불혁명의 제일 큰 의의는 박정희 체제의 붕괴 또는 박정희 신화의 몰락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신화는 지난 반세기 동안 국민들을 세뇌했고, 이로 인해 보수 세력은 선거에서도 너무 쉽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신화가 급속히 쇠퇴하고 있죠. 올해 초에 나온 여론조사 결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가장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을 물으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1위 또는 동률로 1위였는데, 올해 초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현격한 차이로 2위로 떨어졌습니다. 1위는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46%를 차지했고, 2위가 박 전 대통령인데 응답 비율은 20% 정도이며, 3위는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10%를 차지했습니다. 박정희 신화의 붕괴가 시작됐지만 아직 잔재는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대선에서 야당이 승리할 것으로 확실시되는데, 문제는 야당이 승리해서 새 정부가 출범하더라도 촛불민심을 반영하여 제대로 개혁을 해나갈 수 있을지 많이 걱정됩니다. 지금은 새누리당이 몰락하면서 보수 표가 분산돼 있지만, 저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치적 성향의 절반은 보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나라고 진보 성향이 취약한 나라로, 보수 세력의 비율이 40% 정도이고, 진보 세력은 잘해야 20% 정도일 겁니다. 그래서 진보 세력이 선거에서 이기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중도적이며, 유동적인 성향의 인구가 40% 정도인데 어쨌든 이번 대선에서는 보수가 몰락하는 바람에 진보가 이기긴 이길 것 같습니다. 과거 같으면 보수 세력은 무조건 1번 새누리당을 찍었는데 지금은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여러 당으로 흩어져 일부는 안철수, 일부는 유승민, 일부는 홍준표 후보를 지지하고 있죠. 사실 안철수 후보의 지지자 중에는 호남지역과 진보 세력이 꽤 있는 반면 보수 세력도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의 혼합 세력인 겁니다. 
하여튼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보의 승리고, 보수는 패배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보수 세력은 원체 강하거든요. 대선 후에 보수 세력이 재벌이나 언론 등과 연합하면 언제든지 새 정부를 흔들 수 있고, 새 정부가 조금만 잘못하거나 정부운영에 혼선이 생기면 ‘봐라, 진보는 무능하지 않냐’며 금방 반격하고 단결할 수 있기 때문에 새 정부가 갈 길은 굉장히 험한 가시밭길일 것입니다. 특히 촛불 민심과 탄핵이라는 동력을 받고도 제대로 못할 경우, 무능하다고 바로 돌팔매를 맞을 것 같아서 많이 걱정됩니다.  
 
 
적폐 청산과 개혁의 우선과제는?
사회) 새 정부는 개혁을 추진할 텐데 정책구상과 수행의 판단 기준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촛불항쟁 과정에서 나온 민중들의 요구나 대선주자들이 내놓은 공약의 우선순위는 바로 적폐 청산, 구체제 청산으로 보입니다. 우선 적폐의 의미가 상당히 광범위하니 그 개념부터 정리해보죠. 권력의 지나친 집중, 검찰이나 국정원 등의 권력 남용, 언론‧공영방송의 횡포, 재벌체제와 정경 유착, 색깔론, 지역 구도 등이 그 예로 지적되는데, 과연 정권교체로 적폐 청산이 얼마나 가능할까요?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전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개헌을 그 전제조건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장집) 우선 적폐라는 단어는 개혁할 것이 분명히 있고 개혁의 주체가 누구이고, 개혁대상이 누구인가를 상정하는 이분법적 언어의 의미를 상정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실제 선거의 승자가 패자를 적폐의 대상으로 삼아 청산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면, 이 말 자체는 민주주의에 합당한 언어로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개혁하는 사람과 개혁의 대상이 되는 사람으로 정치와 사회를 양분시키는 효과를 가질 수 있으니까요. 구질서는 붕괴된 상태이거나 크게 약화된 가운데, 과거의 문제점들을 개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과거 개혁은 사람을 선별해서 청산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와 가치, 규범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와 법을 개혁하고, 이를 실천하고 습관화하는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정치, 좋은 정책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신화가 붕괴되었으니 이를 해체하고 대체할 수 있는 새 시대에 걸맞은 비전이나 정책 방향을 잘 설정하는 것은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조기 대선을 통해 출범하는 정부는 누가 집권하든 굉장히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조적으로 여소야대이고, 개혁과제는 크고, 많기 때문이죠. 촛불시위라는 큰 사회적 동원이 있었지만 극보수파들이 안정을 찾으면 지금과 다른 형태로 결집‧재정비하여 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여지도 상당히 크다고 봅니다. 새 정부는 개혁의 비전이나 프로그램을 추진‧실현하는 데 있어 한편으로는 통합을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합을 저해할 수도 있는 과감한 개혁 추진 과정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실체적 개혁에 있어 중심적인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재벌구조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그리고 이 문제를 접근하는 핵심요소로서 노동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거죠. 박정희 패러다임의 핵심은 빠른 경제성장을 위해 국가가 앞에서 끌고 재벌을 동원해 성장목표를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노동은 배제됐죠. 따라서 새 정부는 소외되고 배제된 노동을 기존 생산체계의 중요한 파트너로서 참여시키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울러 그동안 국가 권력이 대통령으로 극도로 집중돼 있었는데 이를 견제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하고, 또 적절하게 분산시켜 다원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국가주의적으로 문제를 보고 해결하는 것에서 벗어나 사회가 더 자율적이 될 수 있어야 하고, 국가는 전체적인 방향만 제시하는데 치중해야 합니다. 이런 국가를 ‘제한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국가 운영 방식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 점은 현재 대선과정에서 중대 이슈로 제기되지 못하고 있죠.  
 
이정우) 적폐 청산은 촛불시위의 대표적인 슬로건이었죠. 그런데 최근 흐름이 조금 바뀌면서 야당이 적폐 청산이라는 말을 잘 안 쓰게 되었습니다. 이 말이 인적 청산을 연상시키고 누군가를 보복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와 광범위한 반발을 가져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당도 이 용어의 사용을 자제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적폐 청산은 제도적, 구조적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자는 뜻으로, 자제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죠.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서 보듯 구조적, 제도적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만 재벌개혁, 검찰개혁, 언론개혁 등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숙제가 많은데, 모두 쉬운 문제가 아닌데다 여소야대 국면 속에서 새 정부가 문제를 얼마나 잘 풀 수 있을지도 걱정입니다. 게다가 시간도 많지 않습니다. 새 정부는 전반부에 적폐 청산 또는 개혁에 주력해야 하고, 후반부에는 개헌에 주력해야 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따라서 2~3년 안에 개혁을 해야 하는데 적폐 청산과 재벌개혁, 언론 개혁, 부정부패 척결을 제대로 하려면 방법과 전략을 굉장히 현명하게 세워야 합니다.  
재벌개혁을 예로 들면 재벌 문제에 대한 여론은 광범위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재벌이 흔들리면 국민 경제가 위태로워진다’는 식으로 반발이 일어나 개혁의 동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개혁의 동력을 유지하려면 인적 청산 방식이 아니라, 재벌체제로 인해 피해보는 중소기업을 앞에 내세우고 불합리하며 불평등한 원‧하청 구조를 개혁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중소기업 종사자들이 워낙 많으니 이들이 개혁의 지지 세력이 될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응원에 기대어 나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개혁은 금방 좌절될 수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 국가 역할의 틀 자체를 바꿔야
최장집) 국가가 그 동안 경제를 운영한 가치와 방식은 성장 지상주의, 성장 유일주의였잖아요. 국가가 앞장서 모든 것을 경제성장을 위해 투여하고 동원하다 보니 사회적 자원과 혜택은 재벌 대기업에게 불비례적으로 투여됐어요. 반면 경제성장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상정하는 노동, 복지, 분배는 전부 뒤로 돌리거나 등한시했습니다. 그 결과 사회적 양극화, 낮은 수준의 사회정책이 만들어내는 부작용은 심각해졌습니다. 이제 재벌중심의 성장정책은, 성장에도 고용에도 효과를 창출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성장을 위해서도 노동, 고용, 복지의 가치가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됐습니다.  
요즘 4차 산업혁명이 많이 얘기되고 여러 대선후보들도 탈산업화를 얘기하는데, 저는 탈산업, 탈제조업 중심의 산업발전 방식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고용을 확대할 수 없는 생산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90년대 이후 IT산업발전에서 보듯 경제성장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IT산업이든, 4차 산업이든, 높은 지식중심적 고기술 산업분야, 높은 서비스부문에서의 고학력 인력은 선도산업의 발전을 이끌고 그로부터 일차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겠죠. 그러는 동안 저학력, 비정규직이 집중되어 있는 낮은 서비스부문, 자영업분야에서의 노동조건과 고용의 질은 훨씬 더 열악해지겠죠. 물론 고용확대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고요. 4차 산업혁명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과거 성장 지상주의의 연장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신기술 개발이나 4차 산업혁명은 기업에게 맡기고, 정부는 양극화 완화, 고용 확대, 중소기업 강화와 노동조건 개선, 특히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정책을 펴야 합니다.  
 
이정우)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유행이 되고 여러 대선후보들도 관련 공약을 내세우고 있는데, 저는 이 말 자체가 너무 과장된 것이라고 봅니다. 산업혁명의 기술적인 측면만 너무 강조하고 장밋빛으로 채색하는 듯해 걱정스럽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산업 혁명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그 때마다 일자리가 많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국가의 역할입니다. 이제 국가가 미래 성장산업을 선정하고 기업을 지원하며 앞으로 끌고 나가는 방식은 지양해야 합니다. 국가가 할 일은 기술혁신을 기업에 맡기고 기술혁신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사회안전망을 갖추고 실직한 노동자들에게 재훈련의 기회를 제공해 다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거죠. 박정희 패러다임에 따라 국가가 경제발전의 선두 기관차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일본은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저렇게나 많은 반면, 한국은 왜 없느냐며 탄식하곤 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국가가 꼭 해야 하는 기초 과학 연구는 지원하지 않은 채, 당장 수출하는 데 필요한 연구개발만 지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회에 국가는 4차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노동자를 보호하며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방식으로 역할을 바꿔야 합니다. 
 
사회) 앞으로의 환경변화와 구조변화의 한 요소로 이른바 4차 산업혁명문제를 뒤에 논의하려 했는데 먼저 정리해주셨습니다. 이 점을 포함해서 다시 개혁 문제에 다시 초점을 맞춰 보겠습니다. 두 분의 지적대로 그동안 한국 사회는 수구 보수와 군부 세력이 지배해오다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두 정부는 민주화와 개혁을 내세웠습니다. 새 정부가 적폐를 청산하고 정치 사회를 개혁한다고 할 때, 두 정부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많이 있을 듯합니다. 
 
 
DJ‧노무현 정부에서 얻는 교훈
이정우) 지난 100년의 역사 중에 진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적으로 비보수 내지는 중도 정부라 할 수 있는 시기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10년이었습니다. 논란이 있을 수 있는 평가인데 저는 성과도, 한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성과를 살펴보면 두 정부 모두 복지를 굉장히 중시하여 복지제도를 확충했고 관련 예산도 대폭 늘렸습니다. 그래서 소득재분배 효과가 있었는데, 두 정부 이전과 비교하면 효과가 현격합니다. 저는 이것을 ‘369’라고 표현합니다. 보수정권의 소득재분배 효과는 3% 정도였는데, 김대중 정부를 지나니 6%, 노무현 정부를 지나서 9%가 됐습니다. 100이던 불평등 수준이 91% 정도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60~70%로 불평등의 수준을 낮추는 OECD 국가들에 비하면 여전히 수치가 너무 낮습니다. 아직 갈 길이 먼 거죠.  
두 정부의 한계 또한 분명합니다. 따라서 새 정부는 두 정부의 한계를 거울삼아 좌고우면하지 말고 과감하게 개혁을 해야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봉하마을에 내려가서 후회한 대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대통령 재직 당시 복지예산을 늘린다고 많이 노력했는데 지나고 보니 조금 더 과감했어야 했다고 하셨지요. 복지예산을 파격적으로 늘렸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부족한데다,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아직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니까요. 저출산,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데 시간은 별로 없고 갈 길은 멉니다. 따라서 두 정부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삼아 진짜 과감하게 개혁을 해야 합니다.
 
최장집) 저는 90년대 말 김대중 정부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새로운 경제 모델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에 대한 구상이었습니다. 권위주의 정부 때는 경제성장만을 우선시한 채 민주주의 원칙과 가치는 배제하고 무시했죠. 그래서 민주화 이후 최초로 야당으로의 정권 교체가 이뤄졌으니 경제에 민주주의 가치를 접맥하겠다는 것으로, 굉장히 좋은 경제 모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정책으로 옮긴다면 국가와 재벌의 관계 재정립은 물론 노동문제도 재정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IMF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이 말 자체가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만났을 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경제개혁의 방향으로 삼고 좀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했더니, 햇볕정책에 집중하고 있는 탓에 둘 다 할 수 없다, 능력이 안 된다고 했어요.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기반이 약하고, 정부운영의 경험이 없었던 상태에서 국가를 운영해야 하니까 그런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모두 그런 문제에 직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대중 대통령이 IMF의 개혁패키지를 받아들이면서 노동문제에 대해 장기적인 입장에서 완충장치를 두지 못한 것입니다. 노동 분야에 짧은 시간 동안 신자유주의 원리를 그렇게 과격하게 꼭 집행했어야 했는지, 이에 대해서는 비판의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이정우) 보수 진영은 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10년은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실패 와 성공이 공존한다고 보는 것이 균형 잡힌 입장이라고 봅니다. 두 정부를 대신해 변명을 좀 하자면, 우선 IMF 환란이라는 미증유의 국가 위기 사태가 있었습니다.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급하게 꺼야 했기에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웠고, 대외적으로는 IMF와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던 측면이 있습니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려면 그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IMF 환란이 정권 교체를 가능케 한 이유 중 하나였다면, 다른 이유 하나는 DJP연합이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경제 분야를 JP의 몫으로 줬습니다. 경제정책 담당 장관들을 JP가 인선하다 보니,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이 입각한 거죠. 변명이긴 하지만 그런 내외적 환경으로 인해 당시 개혁 추진이 상당히 어려웠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IMF와 미국이 요구한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시장만능주의였습니다. 모든 걸 시장에 맡기라는 것이었죠. 또한 박정희 체제를 청산하라며 그 대안으로 미국식 시장만능주의를 요구했습니다. 지난 20년간 우리는 그 요구를 너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요. 그래서 너무나 살벌한 시장경제 체제에서 살게 된 것이고, 비정규직의 급격한 증가와 노동자들이 어려워진 것도 시장만능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아무리 강하게 신자유주의를 요구해도 할 말은 했어야 했는데, 우리가 너무 다급하다 보니 할 말을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반성해야 할 점입니다. 
 
사회) 민중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촛불시위 자체가 민주주의 발전의 표상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중들의 민주주의 의식이 굉장히 높아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새 정부에 대한 요구는 매우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기대도 꽤 높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미국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주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로 인한 중국의 경제 보복, 신 냉전 체제를 방불케 하는 한반도의 긴장상태, 사회양극화와 저성장 문제 등 굉장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차기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새 정부 최우선 과제인 북핵 위기 해결과 경제개혁
이정우) 대내, 대외로 나눠 한 가지씩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외적으로 최우선 과제는 북핵 위기와 사드 문제의 해결입니다. 특히 사드 문제는 국정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사드를 도입하지 않는다고 계속 단호히 얘기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논의 과정 없이 청와대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사드 도입이 결정됐습니다. 심지어 여당 내 논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 정부는 반드시 사드 도입과정을 철저히 조사해야 하고, 만일 비리‧ 부패의 일환으로 도입됐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것을 이유로 사드 도입 협약을 폐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드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또 북핵 위기의 대처방안으로 전혀 효과적이지 않으며, 미국의 대중 견제전략의 일환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사드 도입은 한반도 평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우리가 얻는 것은 중국과의 마찰로 겪는 막대한 피해뿐입니다.  
또한 대내적으로 최우선 과제는 경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재벌개혁과 중소기업 살리기를 동시에 추진함으로써 국민들이 ‘새 정부가 들어서니 뭔가 달라지는구나, 우리 회사 혹은 내 장사에 당장 변화가 오는구나’ 라고 느낄 수 있도록 경제개혁을 추진해 정부 출범 후 6개월 혹은 1년 이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장집) 저도 이 교수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경제 문제와 관련해 성장 유일주의를 극복해야 하고, 고용과 복지를 확대하며 양극화를 가져오는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청년실업 문제 해결도 반드시 포함해야 하고요. 
1970년대 박정희 시대처럼 경제성장률을 가치로 삼아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지지 기반을 닦는 일은 이제 끝냈으면 합니다. 국가는 전체적인 방향과 기조만 제시하고 사회나 시장의 자율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경제 정책을 운용해야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현재 정부가 완전히 행정부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입법부의 역할을 강화하고 사법부도 민주적 가치에 좀 더 부응할 수 있도록 3권의 균형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특히 사법부는 민주화 이후 사법개혁이 의제로만 제시됐을 뿐 실제 개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최근 젊은 판사들이 권위주의적으로 운영되는 사법관료 체제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에 있어서 민주적 가치가 훨씬 더 반영되어야 하는데, 그동안은 관료들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지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조가 거의 없었기에 정경유착이라는 말이 위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재벌대기업과 국가의 경제‧행정관료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경유착뿐만 아니라, 관료기구의 상하 모든 위계구조에서 부패와 비리, 무책임이 확대돼 왔습니다. 공적영역에서의 이런 무질서와 무책임, 공적 윤리의 상실은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이나 정의를 타락시키는 데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개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정부를 운영하는 방법에 있어 수정, 전환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최근 북한의 핵무장화로 인해 한반도의 전쟁위험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한국의 안보위기라는 새로운 중대 이슈가 등장하면서 대선 과정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새 정부는 새로운 경제운영을 위한 비전과 정책 프로그램들을 발전시켜야하고, 사회경제적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 것만도 엄청난 일인데, 이제 대북정책을 다시 설정하고 북핵문제를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긴박하고도 엄중한 대외 정책과제에 직면하게 됐어요. 이 문제를 길게 말할 수는 없지만 요점을 말씀드리면, 첫째, 무엇보다 대북정책, 남북한 관계의 목표는 평화공존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통일은 다음 목표로 설정하든 미루어두고, 한반도에서 평화를 안정적으로 제도화하고 관리하는데 총력을 기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앞선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통해서 북한정권을 붕괴시키고 통일을 추구했던, 즉 사실상 흡수통일을 추구했던 목표가 평화공존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과정에서 북한의 핵무장화와 군사화에 대응할 수 있는 미국에 의한 핵우산의 보호, 군사동맹관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남북한 간의 군사적 균형을 이루어야 하지만, 평화공존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남북한 간의 군사적 대립을 서서히 줄여나가야 합니다. 냉전시기 미소 간의 핵군축 과정, 그리고 유럽에서의 평화공존의 실현이 그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남북한 간의 평화공존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한미동맹과 병행하면서도 동아시아 국제정치 질서에서 한국이 독자적인 플레이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남북한 간의 평화공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중국, 한국과 북한이라는 핵심적인 당사자들로서 4개국뿐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까지 포함하는 6개국이 멤버가 되는 초국적인 다자간 기구가 만들어져야 해요. 북핵 위기를 둘러싼 6자회담의 틀을 더 강화하고 제도화한 국제적 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독일의 통일이 유럽연합이라고 하는 초국적 정치공간에 의해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섯째, 평화 지향적 대북정책의 안정적 추구는, 한국 정치와 사회에서 보수든, 진보든 어느 한 진영에 의한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보수와 진보사이에 컨센서스를 형성하는 것이 대북정책의 변화를 위한 필수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실패했던 것도 그렇고,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덴아우워의 ‘서방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대선국면에서 최대 이슈로 등장한 한국에 사드 도입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드 도입은 정부가 아무리 미국이 요구한다 하더라도 수용해서는 안 되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토록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 박 대통령은 국방, 안보책임자들과 사려 깊은 논의를 거치지도 않았고, 그 결정이 몰고 올 한중관계에 대해 검토하지도 않았으며, 그토록 중대한 사안에 대해 국회의 심의와 비준을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왜 이렇듯 도둑처럼 결정하고, 정부가 합의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새로 선출되는 정부는 이 문제를 다시 심의해야 하고, 만약 사드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사려 깊은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냉전해체 이후 지금 동아시아는 미국과 중국이 공동의 운영자로 역할 하는 이원적 위계구조로 변해가는 전환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역내 국가들은 안보가 필요할 때는 미국에, 경제교역을 중시할 때는 중국과 가까운 이중적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사드 도입과 같이 어느 한쪽을 배타적으로 선택하는 양자택일적 선택은 금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청해서 사드 도입을 결정했어요. 중국과의 적대관계는 경제적 이해관계에서도, 또 한국 안보문제에서도, 남북한 간 평화구조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도 전혀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현재 대선에서 경쟁하는 정당들과 후보들은 이 문제에 대해 현명한 대책을 세워야하고, 여론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론을 이끌 수 있는 비전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보는 ‘동북아 균형자론’
사회) 새 정부의 기본과제로 경제와 외교안보문제를 제기하셨는데요, 외교안보의 경우 대선후보들은 우왕좌왕하며 오로지 미국에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최근 한반도정세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일각에서는 남북한 관계, 한미‧한중 관계를 풀기 위한 핵심은 평화조약을 체결하는데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정우) 외교‧안보 전략을 잘 세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처럼 미중 간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신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때 노무현 대통령이 외교 전략으로 ‘동북아 균형자론’을 얘기했는데 일각에서는 ‘한국이 무슨 균형자 외교를 하느냐’며 비웃었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현 세계정세가 중국의 명청 교체기와 비슷하다는 얘기들이 있잖아요. 명청 교체기에 조선은 중립적으로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정세를 잘 관찰하고 대처해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보수 우익 정당은 미국이 시키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적인 외교‧안보 전략을 수립해왔습니다. 대미 의존도가 너무 높았고 또 너무 편향적이었죠. 한미동맹이 중요하고, 미국이 군사‧외교적으로 중요한 파트너인 것은 맞지만, 할 말은 좀 하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한반도에 전쟁 위험이 높았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호하게 ‘한반도에 전쟁은 안 된다’는 태도를 취했죠. 높이 평가 받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비슷한 경우로 노무현 정부 역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에게 단호한 태도를 보였죠. 
전쟁의 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예를 들어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에 정밀타격을 가한다면 자칫 한반도는 불덩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수 우익 세력은 미국 눈치만 너무 보고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외교‧안보에 있어 무능하고 전쟁 예방 능력이 떨어진다고 봅니다. 사드 도입을 일방적으로 찬성하는 보수 후보들은 한국의 안보를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좀 더 자주적, 균형적인 자세를 갖춘 대통령과 정권이 반드시 나와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번 대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국 경제의 새로운 대안, 소득주도성장
사회) 새 정부가 직면할 또 다른 큰 문제는 경제 문제입니다. 한국경제의 중심과제는 대체로 저성장, 양극화로 지적됩니다. 과거 성장방식은 이미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고 한국 경제의 ‘새판 짜기’가 필요한 때인데, 그 핵심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양적 경제성장의 대안으로 소득주도성장이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데, 해법이 될 수 있을지, 그 내용은 갖춰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정우) 우리나라는 지난 반세기 동안 성장 지상주의가 지배한 나라입니다. 제가 전에 덴마크에 가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운전사가 굉장히 행복하게 또 쾌활하게 운전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물었더니, 경제가 잘 돌아가는 덕분에 손님도 많고 기분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덴마크 경제성장률이 3%였습니다. 반면 우리는 3%라고 하면 죽을 지경이라고 하죠. 그동안 성장 지상주의에 너무 깊게 빠져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저성장과 사회양극화는 분리된 현상이 아니라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습니다. 양극화가 너무 심하니까 수요가 부족하고 소비자들이 호주머니를 열지 않으니 기업들도 물건을 팔 수 없어 경기가 침체되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거죠. 따라서 이 두 문제를 동시에 공략하는 해법이 필요합니다. 소득주도성장이 그 좋은 방안이라고 봅니다. 임금주도성장이라고도 하는데 ILO(국제노동기구)에서도 적극 추천하고, 프랑스, 중국 등 해외에서도 좋은 방안이라고 보고 실행을 위해 논의 중입니다. 반면 한국은 소득주도성장을 해본 적이 없고 관심조차 없어서 줄곧 재벌 중심의 성장, 수출주도형 성장 방식을 택해왔죠. 원래부터 우리나라는 수출 비중이 굉장히 높은데, 이명박 정부 이후로 이 비중은 더 높아져서 세계 최고 수준이 되었어요. 그런데 수출주도형 성장은 굉장히 위험한 방식입니다. 마치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다 담는 것과 같은데,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불황기에 수출이라는 한 개의 날개로 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수출이 중요하긴 하지만 의존도를 좀 낮추는 동시에 내수를 확대해야 합니다. 
내수 확대 방법으로 제일 좋은 것이 소득주도성장입니다.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높이고 중소기업을 살리며 복지 정책을 강화하면, 서민과 약자들의 소득이 먼저 증가함으로써 구매력이 높아지고 얼어붙은 경제가 풀릴 겁니다. 그렇게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면 그것이 바로 분배의 개선인 동시에 저성장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저성장과 양극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좋은 방법인 거죠. 새 정부는 경제 정책의 발상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중소기업, 노동자 등 약자를 살림으로써 경제를 살리는 경제 철학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협력적 노사관계로 노동자가 기업경영 기여해야
최장집) 이 교수님 의견에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저성장‧저고용 구조에서 고용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이 발전해야 하고, 제조업이 핵심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IT, 서비스 산업의 확대를 얘기했지만 한국의 산업구조가 튼튼한 것은 제조업이 강하게 떠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발전시켜야 하는데, 문제는 중소기업 지원이 재벌개혁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재벌이 전 산업에 문어발식으로 광범위하게 진출해서 위계적으로 시장을 컨트롤하고 중소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막고 있습니다. 대기업의 하청업체로서 중소기업은 대‧중소기업 원‧하청 문제가 합리적으로 풀려야 자연히 고용을 확대할 수 있을 겁니다. 한국의 제조업은 여전히 28%에 이를 만큼 강하고, 우리나라 전체 고용의 약 87%를 중소기업이 감당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대학졸업자들이 중소기업에 취직하고 싶은 인센티브가 없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입니다. 문제를 피상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중소기업의 인력은 부족한데, 대졸자들은 중소기업에 취업하지 않으려하고 대기업만 희망한다며 일자리 미스매치를 말하고 있어요. 그러나 문제를 다르게 보면 중소기업은 임금도 낮고 노조도 허용되지 않고 전망도 없으니, 청년들이 중소기업에 취직할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 거죠. 따라서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싶게끔 경제적 보상과 좋은 노동환경, 그리고 노조를 허용해서 좋은 노동조건을 만들어주고, 노동자들로 하여금 기업의 생산성과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노조 협력관계를 만들 수 있다면, 고용을 확대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정부는 중소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시장구조, 생산체제를 위해 정책적으로 이를 적극 지원해야 합니다. 
이 문제와 병행해서 노동문제를 말할 수 있습니다. 경영과 결합할 수 있는 노사관계를 발전시키는 문제죠. 우리나라 노조의 중심적인 기반은 재벌대기업 사업장 아닙니까. 중소기업에도 노조가 허용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유형의 노조는 투쟁적인 역할에 치중하기 보다는 노동자의 이익을 지키고, 기업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협력적 노사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기존의 투쟁 중심 노사관계에서 벗어나 중소기업에서 기업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발전시키면 좋겠습니다. 
정치학적으로 말하면 ‘코포라티즘(corporatism)’, 우리말로 ‘노사정 협력체제’라 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노사관계는 대부분 코포라티즘적 관계이지요. 우리나라 노사관계에서 이를 실행하기까지는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겠지만, 노사 협력적‧민주적 관계를 지향하여 노동자들이 기업경영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노사관계에서 왜 코포라티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유럽의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유럽에서 경제대국인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물론, 중소국가들인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등의 노사관계는 다 코포라티즘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들 나라에서 1970~80년대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신자유주의가 불어 닥쳤을 때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이 국가의 재정 부담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큰 압박요인이었습니다. 정부의 소득정책을 실현하는 데서도 노동자들의 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어요. 그래서 임금인상과 복지혜택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기업과 노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노동시간도 줄일 테니 해고를 하지 말라’고 기업과 타협했습니다. 이 코포라티즘을 통한 노사정 협력관계는, 신자유주의가 밀어닥쳤을 때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고, 또 기존의 복지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소였어요.  
노조가 결성되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노동자의 이익이 증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노조에 대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또는 ‘기업운영에 장애가 된다’라고 말하는데, 서구에서는 노조가 기업발전과 경제 성장에 있어 장애요인이 아니라, 세계경제 환경이 변하고, 경쟁력이 필요할 때 오히려 크게 기여했습니다. 앞에서 코포라티즘적 노사관계를 발전시켰던 유럽나라들을 말했는데, 그들은 모두 수출주도형 산업구조를 갖는 나라들입니다. 우리나라도 노조를 인정하고 민주적인 틀 안에서 노동자와 기업이 공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역할은 정부가 해야 하고요. 노동문제라는 것이 경제 분야, 생산부문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고용-피고용관계, 계약관계를 포함하고, 사회전체에 해당되는 이야기인데, 지금과 같이 노조가 인정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인간 존엄성의 회복이 가능하겠어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중소기업에서의 노조의 역할이 중요하고,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일하는 것을 통해 먹고 살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이 존중받지 않고서는 온전한 사회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최 교수님께서는 줄곧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해 오셨고, 이 교수님은 철학의 대전환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떤 경우든 노동운동의 향배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변화된 조건 하에서 또 개혁을 추진할 새 정부 정책 하에서 노동운동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동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이정우) 한국의 노사관계는 협력과 투쟁의 양면을 갖고 있는데, 투쟁 쪽만 너무 부각되어 노사 불신이 굉장히 강합니다. 노사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굉장히 높고요. 또한 날이 갈수록 노조 조직률은 떨어져서 10%에 불과합니다.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보는데 왜 그렇게 됐냐면, 정권에서 노동을 통제‧관리의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노조를 동반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통제의 대상으로만 보니 ‘어떻게 하면 노조를 잘 통제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그 방안으로 산별노조는 덩치가 너무 커서 통제가 어려우니 기업별 노조체제를 택한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이 체제가 굳어진 거죠. 
기업별 노조체제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일본과 한국 정도입니다. 일본은 춘투가 있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고유한 공동체정신이 있어서 노조가 좀처럼 강경투쟁을 하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계속 기업 내에서 투쟁을 하니까 노사 협력은 사라지고 서로 간에 불신과 투쟁만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기업별 노조체제의 좁은 틀을 벗어나 전 세계의 보편적인 산별노조 체제로 가야 합니다. 산별노조 체제에서는 노사 임금교섭을 산별수준에서 하므로, 노사가 기업 안에서 싸우며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습니다. 기업 내부에서는 노사가 협력하고, 투쟁할 일이 있으면 산별수준에서 하자는 것이죠. 
그런데 틀을 바꾸려 해도 사용자들이 거세게 반대할 겁니다. 사용자들은 산별체제로 가면 노조의 덩치가 커지고 더 과격해질 것이라며 반대하는데, 이는 단견입니다. 오히려 기업별 노조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노사가 사는 길입니다. 전국적인 규모의 교섭을 하면 노조도 훨씬 더 책임감을 갖고, 무분별하고 과도한 임금 인상을 자제할 것입니다. 유럽에서 코포라티즘이 성공한 비결이 바로 그런 선순환이었죠. 
또한 기업이 노조를 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고 이를 위해 누군가는 재계를 설득해야 하는데 그 역할은 바로 노사정 중 정부가 해야 합니다. 현재 노사정 사회적 대화의 틀이 거의 깨져있는데 정부는 재계를 설득해서 빨리 대화의 틀을 복원하고, 코포라티즘을 정착시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한국에서 과연 가능한가
사회) 노동운동과 관련해서 오래 쟁점이 돼왔던 것이 노동자 정치세력화, 진보정당 정치문제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진보정당이 분열되어 굉장히 위축된 모습으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진보 정당을 살려야 한다는 바람은 많고 그 방안으로 대통령 결선투표제, 비례대표제 확대 등 선거제도 개혁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제도 변화의 측면 외에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진보정치를 살리려면 무엇을 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면 문제에 대한 해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최장집) 지금까지 한국에서 노조를 기반으로 한 정당은 끝내 실패했습니다. 진보정당이라고 하는 정의당도 내용적으로는 노동을 기반으로 하기보다 ‘작은 민주당’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노동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꼭 정당의 형태여야 하는지 입니다. 유럽은 노동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민주당, 노동당 등의 진보정당이 있지만, 한국은 진보정당의 역사적 전통이 너무나 약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편향되어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노동운동은 전투적 투쟁 과정에서 과격하고 체제에 도전하는 세력이라는 이미지가 부각됐고, 또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었다고 봅니다. 나아가 중산층과의 연대마저 끊어져 고립된 결과 계속 약화돼 왔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는 상당히 어둡습니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체제와의 대립에서 벗어나 기업과 공존할 수 있는 틀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과연 정당으로서의 기반을 갖고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저는 노동운동이 반드시 정당을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거에서 표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상당히 유연하게 여러 정당과 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당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죠. 현재 한국 사회에 균열의 구조가 여러 개 있는데 노동을 중심으로 한 균열은 존재하지만, 정당을 만들 수 있는 것만큼 분명한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선거 제도까지 단순다수-소선거구제이고, 대통령 중심제인 탓에, 노동의 이익을 대표하는 진보적인 정당이 발붙이기 어렵다고 봅니다.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비례대표제를 바탕으로 하는 의회중심제가 돼야 하는데, 현 제도 아래에서는 거의 불가능하죠. 이번 대선이 끝나고 개헌 문제를 논할 때, 우리 정치 수준으로 보아 지금은 의회중심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운동이 기존의 질서와 공존할 수 있는 틀을 발전시키면서, 제도 변화가 수반된다면 그것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필요조건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새 정부, 노동을 보는 관점과 철학 새로 정립해야 
이정우) 앞서 노사정 대타협 모델이 필요하다고 얘기했습니다. 노사정이 사회적 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노조가 사회적 대화를 불신하는 탓에 대화가 잘되지 않습니다. 노조의 불신을 깨고 대화를 복원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정부의 역할입니다.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대화를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정부의 태도는 지금까지와는 달라져야 하고, 노동을 보는 관점 역시 바뀌어야 합니다. 그동안 정부는 노조를 통제, 관리 대상, 위기 극복의 수단 정도로만 봤습니다. IMF 환란 때도 그런 관점에서 노조를 이용하려다 보니, 노조가 불신을 갖고 대화 자체에서 탈퇴한 겁니다. 따라서 새 정부는 노동을 보는 관점과 철학을 새로 정립하고 부단히 노력해야 새로운 사회적 대화의 창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관련해서는 현재 정의당의 의석수가 6석이죠. 민주노동당 당시 의석수가 제일 많았을 때가 10석이었고, 통합진보당 당시에는 13석이었죠. 국회의원 선거방식이 승자독식 체제로 가다보니 그런 것인데, 민의를 제대로 반영한다면 진보정당이 20~30석 정도는 차지했어야 합니다. 따라서 비례대표를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거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최 교수님은 의회중심제로 가도 된다고 하셨는데, 장기적으로는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지만 아직은 좀 걱정스럽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방안은 선거에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도록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면서 장기적으로 의회중심제로 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는 재벌들이 국회의원을 돈으로 매수할 위험도 상존합니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당선되는 대통령은 재벌체제를 철저히 개혁해 정치, 경제, 사회에서 재벌들이 과잉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차단한 후에 빨리 의회중심제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노동의 목소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반영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2명의 대통령이 있는데, 링컨과 프랭클린 루즈벨트입니다. 두 대통령의 공통점은 노조를 중시하고 노동자를 우대했다는 것입니다. 이번 대선을 통해 노동을 중시하고 약자들을 우대하는 정치 지도자가 나오길 바랍니다. 
 
 
조기 대선의 시대정신, 복지국가‧노동이 있는 민주주의
최장집) 이번 대선은 정치적 대격변기에 치르는 중대선거의 의미를 갖는 선거입니다. 촛불시위를 통해 제기된 이른바 ‘적폐 청산’과 같은 커다란 문제를 생각하면 이번 대선은 앞선 대선들과 그 의미부터 다릅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는 대선 후보들이 일차적으로 언론에 반응하고, 유권자들의 눈치만 보느라 주요 대선의제로 큰 문제들이 잘 떠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박정희 패러다임의 붕괴라는 말도 희망사항이 아니라, 실제로 붕괴해 우리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반면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새 정부가 작은 문제에만 집중한다면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고 봅니다. 
 
이정우) 지난 대선에서는 경제민주화, 복지국가와 같은 큰 쟁점 혹은 화두가 있었습니다. 당시 박근혜, 문재인 두 후보는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공약을 경쟁적으로 내세웠죠. 반면 이번 대선은 촛불시위 이후에 치러지는 대선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큰 쟁점은 안 보이고, 작은 의제 혹은 과거의 발언을 놓고 싸우는 그야말로 쪼잔한 대선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 복지국가를 달성하겠다고 하고는 당선 뒤 부도수표를 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대선에서는 그런 큰 쟁점들을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당선 후에는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사회) 밑으로부터의 치열한 항쟁으로 구질서는 무너졌는데, 신질서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 같습니다. 두 분이 지적하신 것처럼 조만간 출범할 새 정부는 새로운 철학과 관점을 갖고 구질서가 잉태했던 모순을 척결하면서 새 체계를 구축해 가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촛불의 민중은 경제민주화, 복지국가라는 시대적 의제가 잘 실천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 정부가 이들 과제를 얼마나 잘 실현해 내는지 진지하게 지켜보고 대응책을 준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제작년도:

통권:

카테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