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진보의 가능성은 커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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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13일의 반추
제20대 총선거가 끝난 지 벌써 보름이 다 됐다. 그 사이 정당들은 새판 짜기에 골몰하고 논자들 사이에서는 선거의 과정, 결과에 대한 여러 분석과 향후 전망이 제시되었다. 총선은 박근혜·새누리당 집권세력의 제2당으로의 몰락과 여소야대, 3당 체제를 만들어 냈다. 정치개혁의 묵은 과제이던 지역구도 파열의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상전벽해, 돌연한 변화에 정당들은 물론이고 표를 찍은 국민들 스스로도 놀랐다고 했다. 선거 전 여소야대를 힘주어 예언하던 한 친구는 그 근거를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로 웃어넘겼지만, 한 표, 한 표 국민의 선택으로 권력구도가 삽시간에 바뀌어 버린 것이다. 보수여당이 제1당에서 밀려난 것은 이승만 정권 시대인 1950년 제2대 총선거 이후 처음이며, 여소야대는 16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무엇이 이토록 오랜 시간동안 침잠(沈潛)했던 표심을 뒤흔들어 버린 것일까?
지난 8년 동안 ‘이명박근혜 정권’은 경제를 일으켜 먹여 살려줄 테니 나만 믿으라고 했다. 산업화-민주화의 ‘자랑스러운 세계적 유산’도 잘 지킬 테니 군말 말고 따르라고도 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자본의 공격에 사지로 몰린 국민들은 기대를 갖고 그대로 따랐다. 보수정권이 안하무인으로 반민중·반민주·반평화의 폭주를 계속해도, 연이은 실정에 상투적인 사과 한마디 없어도, 국민들은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관대했다. 2012년 총선거, 재작년 6.4지방선거와 7.30 재보선, 작년 4.29 재보선에서의 여당 완승과 높은 지지율 등이 그 징표들이다. 또한 국민들은 집권세력의 만용을 견제하라고, 130석을 넘나드는 거대 야당을 만들어주었지만, 그 야당은 존재 자체를 의심할 만큼 여당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기만 했다. 국민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삶의 질 향상과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을 바랐고, 어느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며 그저 믿고 기다렸다. 
그러기를 10년여, 기대는 무너졌고 반전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 결정판은 정부의 노동개혁이었다. 노동개혁은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 아래 또다시 근로대중 전체를 거대자본의 속죄양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여야가 보인 공천과정에서의 추태와 대통령의 불법적인 선거운동 등은 독선·무능에 질린 국민들로 하여금 보수정권, 기존정당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접게 하는 마지막 계기였다. 식자들의 조급증과 비관론을 뛰어넘어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의는 분노와 좌절감에 의한 자기소외가 아니라, 투표참여를 통해 스스로 합리적·전략적인 결정을 내릴 정도로 변해 있었고 마침내 ‘2016년판 정치변혁’을 연출해 냈다.
 
대선가도에 드리운 보수화의 음영
총선 이후의 관심은 두말할 것 없이 대선 국면에 모아진다. 이제 정치권은 대권장악을 향한 의제선점과 민심 획득을 위해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는 한편, 세력 간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이 부산하게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총선거 과정과 그 후에 나타난 각 당 지도부와 주요 인물들의 주장, 논리 및 행동에는 몇 가지 중대한 변화의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정치적 보수화의 진전 가능성이다. 보수화 경향은 우리 사회에 이미 팽배해 있고, 그 위험성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이는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명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보수화 경향은 우리 사회의 거의 전 부문을 석권해왔고, 정권은 국정원, 검찰, 경찰, 언론매체를 장악하여 수구보수의 파쇼적 행태를 벌여왔다. 사법부 역시 이 변화에 굴복한 지 오래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정부가 공공부문에 성과연봉제 등을 도입하려 함으로써 보수우익의 행정체계 완결마저 눈앞에 둔 상황이다. 4.13 총선에서 정권의 횡포는 철퇴를 맞았지만 보수화 경향이 쉽사리 후퇴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박근혜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새누리당이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박정희 유신독재시대의 경제성장 신화와 거대자본 중심의 경제 살리기 전략이라는 지배기조가 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포스트 박근혜’를 준비하고 레임덕을 최대한 막아야 하기 때문에 정권은 합리적 보수를 일부 용인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민심교란을 위한 일시적인 기만책에 그칠 공산이 크다. 
하물며 보수화 위험을 증폭시키는 것은 야당의 행태다. 총선의 민심은 야당에게 뼈를 깎는 자기 혁신을 통한 정치개혁과 대선 대비를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은 초반부터 주도권 경쟁의 양상을 보이면서 소통과 대화를 통한 중도 대타협의 의회정치를 내세웠고, 대선 승리의 주요 요건으로 보수층 견인을 설정했다. 이는 총선의 승리 요인이 보수층의 야권 이동이라고 인식한 결과다. 야당 지도부가 세월호 참사 2주년 추모식에 시민사회진영의 비난을 무릅쓰고 불참한 것은 보수진영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린 결과라는 얘기마저 있을 정도다. 
 
‘중도’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야당의 보수화 
더불어민주당은 ‘경제’를 거듭 강조하고 있으며, 국민의당도 비슷하다. 경제위기 극복 특별위원회 구성이나 경제난 해소를 위한 여야 회합이 당 내에서 제기되고, 소득주도 성장론도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극심한 경제 침체 속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국민의당의 안철수 공동상임대표는 정부의 구조조정 전략에 ‘조건부 찬성’하기도 했다. 경제의 회생은 누구나 바라는 바다. 그러나 어떤 목표와 경로로 이룩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 새누리당이 최고의 전략목표로 내건 경제 살리기는 거대자본을 위한, 거대자본에 의한, 거대자본의 성장정책으로 집약된다. 반면 두 야당의 경제 분야 선거공약은 전망이 불투명하고 대안이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장주의의 대안으로 내세운 소득주도 성장론은 아직도 미완성의 상태이다. 
국민의당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중도·타협을 강조함으로써 보수 우경화에 대해 우려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국민의당이 먼저다. 많은 사람들은 ‘국민의당의 이념과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노동자들은 국민의당의 노동개혁에 대한 불분명한 태도를 의심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안철수 대표가 말하는 중도·타협의 정치개혁이란 정립된 이념을 실현하기보다는 대선승리를 위한 방편이라는 평가가 많이 나오는 것이다. 이 경우 의제의 가치나 중요성보다는 타협만이 합리적인 것으로 강조되기 때문에 보수화 경향을 확장시킬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두 야당의 중심에는 많은 개발주의자·시장주의자·성장지상론자들이 버티고 있다. 이 때문에 야당의 경제론은 위기론을 내세운 박근혜 정권의 성장 신화에 함몰될 가능성을 늘 안고 있다. 그들의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의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해결 또는 완화에 있지 않다. 더욱이 조직노동에 대한 거부감과 노동조합의 정치투쟁을 불온시하는 야당 지도부, 미·일의존의 안보체제, 북한붕괴론 또는 흡수통일론에 기울어 있는 의회주의자들로는 진보의 개념인 현상 타파는커녕 현상 유지마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20대 국회는 소통․대화․타협과 같은 절차상의 변화는 있을지 모르나, 자칫 ‘중도’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전반적인 보수화 경향을 더 뚜렷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선거는 권력판도만 바꾸었을 뿐, 정치의 본질과 국민들의 삶은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와 진보의 담론 확장을 향하여
결국 초점은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세 변화 속에서 보수화 경향이 강해지는 것을 막고, 민주주의와 진보의 담론을 얼마나 많이 키워낼 수 있는가에 있다. 민주주의와 진보의 중요성은 독점자본 중심의 불평등 억압체제로 인해 근로대중이 극도로 피폐해지는 것을 막고 기본인권을 보장하며, 진보정치의 담론을 확장함으로써 사회변혁의 바탕을 확장하는 데 있다. 진보의 확대를 차단하는 극우 세력의 횡포는 총선에서 철퇴를 맞았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재연될지 알 수 없다. 
합리적 보수의 바탕은 극히 협소하며 진보에 대한 민심은 아직도 차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진보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노동진영과 곳곳에 산재한 진보세력 스스로가 분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보세력의 역량은 취약하기 그지없다. 노동의 조직역량은 10%밖에 되지 않는 노조조직률이 잘 말해준다. 그마저도 양대노총으로 갈라져 있고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정파들의 이합집산도 빈번하다. 노동진영이 이번 총선에서 ‘박근혜 정권 심판’이라는 정당들의 목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구호와 분산적인 선거 전략으로 임한 것은 조직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진보정당들은 창조적이고 실현가능한 공약들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정의당만 6석을 얻었을 뿐 노동당, 녹색당, 민중연합당은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사회·시민운동은 여전히 부실하다. 투쟁 주제별로 치열한 활동을 벌이지만 조직의 기반은 부실하고 연대의 끈은 나약한 탓에, 역사적 반동을 뒤집을 만한 강한 충격은 주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사회의 모순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지만, 이해집단의 대응은 극히 불안정하다. 
이러한 객관적 조건들을 딛고 서기 위해 많은 방책들이 강구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역량의 확대이다. 노동진영은 조직을 확대하고 일상 활동을 활성화시키며, 조직 간의 연대와 공동전선을 확대·강화해야 한다. 또한 이념 및 기조 변화를 서두르고 선제적·공세적으로 실현 가능한 의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풀뿌리 조직들을 만들고 참여를 독려함으로써 노동․진보진영의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봄철의 한가운데인 4월 중순,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날들을 보냈다. 4.13 총선의 경이로운 반전이 연초록 새순 같은 환희로 솟아나는가 하더니, 세월호 참사 2주년의 슬픈 추억과 다짐을 되짚고, 다시 4월 민주혁명의 열기와 좌절의 아픔을 반추하는 열흘을 지냈다. 모든 것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만들어진 나름의 필연적 결과였지만, 무엇보다 총선의 드라마는 근래에 보기 힘든 값진 변화의 접점이었다. 이제 노동자들은 총선이 던진 정치적 지형변화를 참된 사회개혁으로 연결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2016년 5.1 세계노동절과 37돌을 맞은 5.18 광주민중항쟁은 역사발전의 주역인 노동자들에게 묻고 있다. 이 소중한 역사발전의 단초를 얼마나 힘 있게 열어 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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