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1849년 혁명과 노동자계급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5]

글쓴이 :

"우리는 지금 화산 위에서 잠자고 있다. … 땅이 다시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으며, 폭풍우는 지금 지평선 저 위까지 다가왔다." 
- 토크빌

"1848년 혁명은 큰 파도와 같이 솟구쳤다가 깨어지면서 신화와 약속 이외에는 남긴 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1848년 혁명들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혁명으로부터 몸을 뺐다. 그들은 프랑스의 지도 아래 서로 보강해 가면서 옛 지배자들의 부활을 막거나 연기시키고, 러시아가 개입해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다시 한 번 '위대한 국민'이 된다는 보수와 그것에 따르는 위험보다는 국내의 사회적 안정 쪽을 택했던 것이다."
- 에릭 홉스봄 

1.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봉기 

'2월 혁명'의 발발 

1848년 2월 '7월 왕정'은 파리 노동자들의 봉기로 무너졌습니다(1830년 7월 혁명의 성공으로 루이 필립을 왕으로 세운 부르주아 왕국을 말합니다). 노동자들 스스로 수도의 광장과 거리에서 공화제를 선포했으며 임시정부도 공화제 선언에 동의했죠. '프랑스 공화국! 자유, 평등, 우애!'가 그것입니다. 프랑스 공화국 2월 혁명에서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루이 필립의 부르주아 입헌군주제를 타도하고 프랑스 공화정을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7월 왕정의 위기는 1845년부터 증대하기 시작했어요. 7월 왕정은 애초부터 심한 재정난을 겪어온 데다, 1845년부터 몇 년에 걸친 곡물 흉작으로 곡가를 위시한 물가앙등이 초래되었습니다. 여기에다 영국의 전반적인 상업 및 산업공황이 유럽 대륙 나라들의 경제를 극도로 위축시켰죠. 1847년 들어 경제 상황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전국에서 엄청난 실업이 발생하고,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조건이 심하게 악화되었어요. 

당시의 프랑스 정부는 이와 같은 위기상황을 타개할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1840년 공화파의 반란을 거쳐 정권을 잡은 기조(Guizot)내각은 '점진적 개혁'을 내세웠지만 상층 부르주아지를 위한 정치를 펼쳤고, 영국에 대해 굴욕적인 정책을 펴는 등 대외정책의 실패를 거듭했어요. 이런 가운데 반정부파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전역에서 선거법 개정을 위한 개혁 연회를 조직했습니다. 당시 선거법은 재산자격에 따라 유권자의 범위를 엄격히 제한했는데, 1839년의 경우 유권자는 전체인구의 1/170에 해당하는 20여만 명에 지나지 않았어요. 연회 선동 방식이란 연회 형식의 소규모 집회를 활용한 것인데, 공개 집회를 여는 게 어려운 조건에서 연회 석상에서 건배하는 자리를 빌어 연설을 함으로써 비판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한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정황들을 배경으로 하여 발발한 2월 혁명은 2월22일부터 2월25일 사이의 노동자 봉기를 정점으로 했습니다. 2월22일, 이날은 파리 마들렌느 광장에서 국민연회가 열리기로 예정된 날이었어요.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정부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비롯한 시민 1만여 명이 연회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광장을 때리는 빗소리와 함께 "나가자! 나가자! 우리 함께! 압제자의 피로 옷소매를 적시자"로 끝나는 '라 마르세예즈'가 장엄하게 울려 퍼졌고, 군중들은 '개혁 만세', '기조 내각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어요. 정부는 큰 규모로 확대된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정규군을 투입했고, 군대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항했으며, 군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되자 시위대는 점점 더 불어났고, 시위는 밤새 계속되었어요. 

이튿날인 2월23일, 루이 필립 국왕은 정규군 3만 명을 동원해 시위 진압에 나섰습니다. 시위 군중들은 '루이 필립 타도', '공화정 만세'를 외치며 대항했죠. 시위대의 대오가 불어나면서 국민방위대의 일부가 시위대쪽으로 합류했고,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루이 필립은 기조 내각을 물러나게 했어요. 기조의 실각으로 사태가 수습되는 듯 했으나, 밤이 깊어지면서 군대와 무력 시위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고, 외무부와 수상 관저 앞에서 벌어진 돌발적인 총격전이 노동자들의 반란을 더한층 부추겼어요. 총격전으로 50여 명이 사망했고, 국민방위대가 혁명파에 가담하게 되며, 국민방위대와 정규군이 대치하는 사태가 벌어졌어요.

2월24일에는 파리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 1천 5백여 개가 둘러쳐지고 교통이 완전 차단되었습니다. 혁명파에 포위된 정규군이 무장해제를 당하고 일부가 국민방위대에 합류했어요. 이날 파리 시청이 포위되고 국왕 퇴위와 공화국을 요구하는 포스터가 나붙기 시작했죠. 정오가 지난 뒤 국왕 루이 필립는 긴급 성명을 통해 왕좌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함으로써 7월 왕정은 임시정부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2월25일 아침 임시정부는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노동자들은 7월의 날들에 부르주아 왕정을 쟁취했듯이 2월의 날들에는 부르주아 공화국을 쟁취했습니다. 7월 왕정이 스스로를 공화주의적 제도들에 둘러싸인 왕정이라 선포해야 했듯이, 2월 공화국은 스스로를 사회적 제도들에 둘러싸인 공화국이라고 선포해야 했죠. 이 양보 역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강제했습니다.


[ 시위대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항했지만 군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쓰러진 시위대 ]

부르주아의 국가 

2월의 바리케이드 위에서 생겨난 임시정부 각료의 대다수는 부르주아지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고, 노동자계급은 단 두 사람의 대의원 루이 블랑과 알베르가 있을 뿐이었어요. 임시정부는 2월 혁명에서 수행한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인정하여 노동권을 선언하고 노동자의 단결권도 승인했죠.  

그리고 정부는 "민중에 의해 수행된 혁명은 민중을 위한 혁명이 되어야 하므로 노동자의 오랜 부당한 고통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여 노동자 대책 정부 위원회를 창설한다"고 공포했습니다. 뤽상부르 위원회로 불리는 이 상설 특별위원회는 실상 노동자들의 대중투쟁 결과 2월29일 설치된 것으로, 노동자들의 생활개선 정책을 강구할 임무를 지게 되었다. 또 임시정부는 2월27일 국민작업장 설치에 관한 법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법령은 본질적으로 영국 신(新)구빈법의 프랑스판이었죠. 이것은 사실 노천 노역장과 다름이 없었는데, 정부는 국민작업장을 설치해 파리의 실업자대중에게 일정의 유급 작업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긴장을 완화하려 했습니다. 정부는 실제로 공황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리로 내팽개쳐진 노동자 10만여 명을 국민작업장에 수용했어요.

국민작업장 설치나 뤽상부르 위원회 구성 자체는 '노동을 조직하라'는 슬로건에 담긴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받아들인 정부의 양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요구들은 부르주아 공화제 하에서 실현될 수는 없었어요.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와 공동으로 2월 혁명을 수행한 사실에 비추어, 자신들이 부르주아지와 나란히 해방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와 나란히 프랑스라는 국민적 틀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것은 비극적인 환상이었고, 이 환상은 계급투쟁이 진행됨에 따라 깨집니다. 이런 환상의 종말은 봉기의 시작을 의미했어요. 

2월 혁명 이후 노동자 조직상황은 어떠했던가를 살펴봅시다. 뤽상부르 위원회 주도로 재봉공, 마구(馬具)제조공, 방적공 등의 협동조합이 설립되었고, 이런 협동조합은 같은 직업에서 또 직업과 직업 사이에서 노동자 단결의 기초가 되었어요. 3월과 4월에 조판공, 악기제조공, 재봉공, 인쇄공, 금속노동자, 건축노동자 등의 단체들이 결성되었습니다. 또 노동자들의 정치활동은 처음에는 주로 민주주의 클럽을 중심으로 펼쳐졌죠. 

한편, 2월 혁명에서 핵심 요구로 제기되었던 보통선거제가 3월 들어 확정되었습니다. 21세 이상 되는 모든 남성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된 것이죠. 그 결과 유권자는 1846년 당시의 248,000명에서 960만 명으로 늘어났고, 선거일은 4월9일로 공고되었습니다. 이 자체만을 놓고 보면, 2월 혁명이 성취한 큰 성과였죠. 그러나 새 유권자의 대부분은 문맹상태의 농민들을 비롯한 민중이었고, 이들의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 의식을 좌우하는 것은 부유한 지주, 상층 부르주아지, 그리고 성직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선거일 연기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 1848년 2월 파리 민중의 투쟁장면을 그린 포스터. '프랑스 공화국' 이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

이런 가운데 헌법제정 국민의회 선거가 당초 공고일보다 2주 연기된 4월23일과 24일에 실시되었고, 선거 결과는 부르주아지와 군주주의 반동파의 확고한 위치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지방에서 두드러지게 그러했는데, 의원으로 선출된 880명 가운데 500명이 신문 「국민」(Le Natonal)을 중심으로 결집한 온건 공화주의자들이었어요. 더욱이 100명의 정통 왕조파와 약 200명의 오를레앙파는 2월 혁명 바로 뒤 스스로 공화주의자로 자처했어요. 민주주의 진영은 100명에도 못 미치는 사람들이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그 가운데 사회주의자도 몇 명 있었습니다. 노동자 후보자들 가운데 헌법제정 국민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사람은 가구공 아그리꼴 뻬르디기에(Agricol Perdiguier)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진영의 지도자들이었던 까베, 블랑끼, 라스뻬이유, 소브리에 등은 낙선했어요.

이런 선거 결과를 두고 노동자들은 깊은 의혹과 분노를 갖게 됩니다. 리모지에서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국민방위대를 무장해제 시키는 일도 일어났고, 루왕에서는 4월 말에 노동자들이 무기를 들고 국민방위대와 총격전을 벌였어요. 노동자 11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23명이 치료를 받다 병원에서 숨졌으며, 50여 명이 중상을 입게 되었어요. 루왕에서 일어난 사건은 6월 노동자 봉기의 전주곡이 되었죠.

헌법제정 국민의회는 5월4일 처음 열렸는데, 바로 뒤부터 의회 해산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었습니다. 5월15일에는 몇몇 민주주의 클럽들의 주도로 국민작업장 노동자 일부가 참가한 100여 개 조합 대표들이 바스티유 광장에 모였고, 그들은 의회가 열리고 있던 부르봉궁으로 향했습니다. 그리하여 시위대는 의사당과 시청을 잠시 점거하기도 했으나, 국민방위대가 시위대를 물리력을 동원해 해산시키고, 주동자들을 모조리 체포했죠. 5월15일 노동자투쟁은 노동자들에게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불신을 한층 더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항하기 위한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노동자들의 '6월 봉기'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이 커지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에 전투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정부는 6월21일 행정위원회 명령으로 사실상의 국민작업장 폐쇄를 결정했습니다. "18세에서 25세까지의 노동자는 병역의무에 복무해야 하고, 나머지는 지정된 지역에서 토지 정리 작업에 종사하게 할 것"이 결정 내용이었지요. 이를 두고 칼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노동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굶어 죽거나 싸움에 나서야 했다. 그들은 6월22일 엄청난 폭동으로 응수하였는데, 이 폭동은 현대를 가르고 있는 두 계급 사이의 최초의 대전투였다. 그것은 부르주아 질서의 유지냐 파괴냐를 놓고 벌어진 투쟁이었다. 공화국을 가리고 있던 장벽은 찢어졌다".

국민작업장 폐쇄 소식을 접한 노동자들은 6월22일 파리 중심부로 모여들었고, 10만 명에 이른 군중들은 "우리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치며 뤽상부르궁으로 행진했습니다. 봉기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파리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정부는 육군장관 까베냑(Cavagnac)에게 전권을 맡기고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까베냑은 정부군 5만 명을 수도에 배치하고, 지방 정부에 국민방위대의 파견을 요청했죠. 6월23일 정오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오후에는 정부군이 총격을 가했으며, 밤새도록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6월24일과 25일에도 전투는 치열하게 계속되었으며, 반란자들과 군대의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협상이 제기되었는데, 여기서 노동자 대표는 국민작업장 폐쇄 무효화, 노동 권리 보장, 군대 병력 파리 철수, 구속 노동자 석방, 입헌공화제 창설을 위한 인민 권리 부여 등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요구는 사실상 현 정부의 타도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수용될 리 만무했죠. 

6월26일 오전 정부군은 총공격을 감행했고, 파리 노동자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영웅적 비극'의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6월 노동자 봉기의 패배를 두고 뷰리(J. P. T Bury)는 "구호도 주모자도 깃발도 없는 10만 명의 반란이었다. 그것은 국민 일부의 다른 일부에 대한 반항이었다.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계급적 투쟁이었으며, 일종의 노예전쟁이었다"고 했습니다. 거리에서 무기를 소지하고 체포된 사람들이나 노동자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즉석에서 사살되었는데, 재판이나 조사 없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1천5백 명을 넘었습니다. 체포된 1만1천 명 가운데 주동자들은 재판에 회부되고, 4천 명이 알제리로 추방되었으며, 6천4백 명이 석방되었습니다. 칼 맑스의 기록에 따르면, 3천명 이상이 죽고 반란에 참가한 1만5천 명이 재판도 받지 않고 유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 파리의 '6월봉기'가 패배하면서 1천5백명 이상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

노동과 자본의 전쟁 

6월 봉기의 패배를 두고 맑스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신라인 신문」(1848년 6월29일 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내전, 가장 끔찍한 형상의 내전, 노동과 자본의 전쟁이다. 부르주아지의 파리가 불꽃으로 하늘을 장식한 반면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파리가 불길에 타고, 피를 흘리고, 신음하던 6월25일 저녁에 우애(Fraternit )는 파리의 모든 창문들 앞에서 불타버렸다. 우애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가 융화되고 있는 한에서만 지속되었다. … 2월 혁명은 아름다운 혁명, 일반적인 공감을 얻는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그 혁명 속에서 왕권을 반대하여 현저하게 나타난 대립들이 발전되지 못한 채 나란히 졸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그 대립들의 배경을 이룬 사회적 투쟁은 단지 허공에 뜬 존재였고, 문구의 존재, 말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6월 혁명은 추한 혁명, 혐오스러운 혁명이다. 왜냐하면 사실이 문구를 대신해서 나타났으며, 공화국이 괴물의 머리에 덮어주고 가려주던 왕관을 벗김으로써 괴물의 머리 자체를 드러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월 봉기의 특징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일까요. 6월 봉기는 2월 혁명과 달리 낙관주의와 열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했습니다. 또 6월 봉기는 노동자계급이 다른 어떤 세력과도 동맹관계를 갖지 못한 채 고립상태에서 감행되었습니다. 파리 노동자들의 요구는 민주주의 사회공화국이었습니다. 사회공화국이 실제로 무엇을 지향했는가는 명확하지 않지만,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정부의 타도를 목표로 투쟁했으며, 민중세력이 공화국 헌법을 제정할 수 있는 제도를 요구했습니다. 이런 요구들은 결코 실현되지 못했지요.

6월 봉기의 패배는 부르주아 공화제의 퇴장을 재촉했습니다. 6월 봉기 과정에서 탄생한 까베냑 정부는 국민작업장의 폐지, 모든 형태의 클럽 폐쇄, 공화주의로 기울어진 국민방위대 해산, 노동일 제한 법령 폐지, 사회주의 탄압 등의 반동 정책과 조치를 취했습니다. 헌법제정국민의회는 11월 대통령에게 막대한 권력을 부여한 헌법을 결정했죠. 12월10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빠르뜨가 당선되었습니다. 1849년 초 소부르주아 민주주의파들이 군주주의를 지향하는 부르주아 정부와 의회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고, 같은 해 6월에도 정부 정책에 반대하여 시위 투쟁을 결행했으나 참담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한 혁명의 심장을 찔러 쓰러뜨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2. 독일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

독일의 노동자계급은 사회적·정치적 발전에서 볼 때 프랑스나 영국의 노동자계급에 비해 훨씬 뒤쳐진 상태에 있었으며, 단결에서도 취약했습니다. 그런데도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중요 세력으로 대두했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우선 목표는 봉건 잔재를 일소하고, 민주주의 토대 위에 독일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봉건 귀족은 과거의 특권을 대부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고, 봉건적 토지보유제도는 거의 모든 곳에서 지배적이었으며, 독일 연방 안에는 38개의 군주제 제후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추진에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임무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데도, 당시의 부르주아지는 자본축적의 정도나 세력 면에서 매우 취약했고, 계급으로서의 성장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국민 대다수는 수공업자, 소상인, 노동자, 농민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촉진할 만큼 성장해 있지도 못했습니다.

독일 전역을 휩쓴 민중 봉기 

1848∼1849년 독일 혁명은 2월말부터 남부와 남서부 제후국들에서 시작되었고, 주요 추진세력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비롯하여 수공업자와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소부르주아지, 노동자, 직인, 도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2월27일 만하임과 바덴에서 도시민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고 국민의 무장, 출판의 자유 보장, 배심원제재판제도 시행, 전국의회 소집 등의 요구(이른바 3월 요구)를 제기했죠. 3월2일에는 뮌헨에서 노동자, 직인, 수공업자 등 노동대중이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여 군대를 물리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농민들도 봉건적 부역 반대 투쟁을 벌였구요. 

혁명의 파고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프로이센이었습니다. 3월3일 쾰른에서는 노동자와 수공업자 5천여 명이 참가하여 시위를 벌이고, 그 중 일부는 시청으로 쇄도했어요.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집회는 저녁 무렵에야 군대의 힘으로 해산되었습니다. 이것은 독일 혁명이 시작된 이래 최초의 대중적 노동자 시위였죠. 노동자 시위는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기도 했습니다. 혁명운동은 드디어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까지 확산됩니다. 

3월6일부터 노동자, 수공업자, 학생, 상인들은 베를린 시민들의 휴식공원인 티에르갈텐 구역에서 매일 집회를 열었습니다. 여기서는 연합 주의회(landtag) 소집이 주요 요구의 하나로 떠올랐죠. 3월13일에는 노동자를 포함한 민중 1만여 명이 티에르갈텐에 집결했으며, '노동부' 설립을 비롯한 요구들을 제기했습니다. 이날부터 군대와 군중들의 충돌이 일기 시작했구요. 3월16일에는 군대가 군중을 향해 발포를 했고, 여러 사람들이 피살되었습니다. 3월18일에는 대규모 시위가 결행되었고, 군중들은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센 국왕은 군대에 시위 진압명령을 내렸고, 기병대가 동원되고 군대가 발포했습니다. 군중들은 무기상점에 들어가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는 한편, 1천여 개의 바리케이드를 치고 군대에 대항했습니다. 군대는 보병 1만4천여 명과 대포 36문으로 진압에 나섰죠. 봉기대는 3천∼4천명 정도였으나 베를린 시민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다음날인 3월19일 아침 전투가 더욱 격렬한 형세를 보이자, 국왕은 군대의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베를린 민중은 16시간 동안 피 흘린 전투 끝에 승리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승리는 값비싼 희생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약 230명의 봉기자가 목숨을 잃었죠. 그들 대부분이 노동자와 수공업자들이었습니다. 이날 정오 국왕은 희생자들에게 조의를 표했고 희생자의 주검을 궁전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빌헬름 4세는 시민들이 무장을 하는 데 동의했으며, 민중의 증오 대상이었던 정부를 퇴진시켰죠. 자유주의 부르주아 대표가 새로운 수상으로 지명되고, 봉기한 민중진영은 몇 가지 민주주의 권리를 획득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실제적인 단결권을 획득했으며, 노동자 일부는 무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 1848~1849년 혁명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의식을 일깨워 노동자가 정치.사회 생활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시발점이 되었다. ]

군주제와 결탁한 부르주아 

3월18일 이후 프로이센에서 일어난 혁명운동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유주의자들이 혁명을 배반해 군주제와 절충적 타협을 했고,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광범한 지지를 획득하지 못했으며 민중은 지도력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이것은 다른 제후 국가들의 혁명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도 3월18일 베를린 민중투쟁은 독일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성장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죠. 독일 노동자들은 프랑스 노동자계급과는 달리 군주제에 대항한 투쟁경험을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 대부분이 조직되어 있지 못했는데도, 복종과 속물(俗物) 정신을 극복하고 수세기에 걸쳐 신성하게 여겨져 왔던 것에 대한 도전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3월 투쟁 이후 베를린 노동자들은 끈질기게 민중의 무장을 요구했습니다. 3월 혁명의 결과, 프로이센에서는 독일의 많은 다른 제후국처럼 부르주아지의 지원자들만 민병대에 등록할 수 있었죠. 6월 들어 프랑크푸르트, 쾨니히스베르크, 그리고 베를린의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의 무장을 요구로 내세웠습니다. 6월14일에는 베를린에서 노동자와 수공업자들이 전국민의 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자 경찰 및 민병대와 대치하게 되었지요. 오후에는 대규모로 불어난 노동자 군중이 병기고로 몰려갔습니다. 노동자 시위를 해산하기 위해 민병대가 발포하여 사상자가 나게 되고, 밤늦게 횃불로 길을 밝힌 노동자 군중이 무기고를 습격했습니다. 그러나 무기를 탈취한 사람들의 일부는 곧바로 부르주아와 학생들로부터 무장해제 당했고, 노동자들은 민병대에 밀려 바깥으로 내몰렸죠. 6월14일 사건으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군주주의자들과 밀접하게 결합하는 한편, 노동자들에 대해 대항의 자세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이제 고립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죠. 

1848년 가을 이후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의 전역에서 반동의 거센 공세가 취해졌습니다.
   
공세는 주로 국민의회 쪽으로 모아졌고, 프로이센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노동자, 수공업자, 소상인의 반란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1949년 5월과 7월 사이에도 독일의 몇몇 지역에서 반동세력과 민중사이의 전투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전독일 헌법제정을 둘러싸고 벌어졌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긴 논의 끝에 1849년 3월말에 헌법 초안을 승인했죠. 이 초안은 진보적인 내용도 담고 있었는데, 독일의 중앙집권화와 부르주아 입헌제도의 전국적 도입이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헌법은 결코 통일된 독일 공화국 창설을 규정하지 않은 채, 군주제를 유지했죠. 그런데도 이 헌법 초안은 제후국 국왕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치게 됩니다. 

1849년 5월에는 독일연방 내 몇몇 국가들에서 제국(帝國) 헌법 실시를 요구하는 투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투쟁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파가 주도했지만, 봉기의 핵심은 노동자들이 담당했습니다. 이런 투쟁은 7월까지 계속되었으나, 7월23일 독일 혁명의 마지막 요새였던 라스타트가 무너짐으로써 1848∼1849년 혁명은 패배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독일에서 진행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패배의 원인은 무엇인가. 국가(제후국)의 분열에 따른 단일의 정치적 지도부 부재,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배신 행위, 소부르주아 민주주의파의 우유부단함과 동요, 독일 노동자계급의 불충실한 조직성과 정치적 준비의 취약(그것은 혁명의 주도권 장악을 막았다), 군주주의 전통의 온존 등이 혁명 패배의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도 1848∼1849년 혁명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의식을 일깨우고 정치활동을 촉진함으로써 노동자가 국가의 정치적·사회적 생활에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혁명 과정에서 독일 노동자계급은 군주제에 반대하는 대중 행동을 조직하고, 혁명운동에서 국민적 임무와 계급적 임무를 결합시키려 했습니다. 동시에 노동조합의 결성과 노동자의 정치조직 구축을 추진함으로써 계급으로서의 성장을 촉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노동자계급과 혁명 

1848년 2월 말과 3월 초 사이에 프랑스와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운동 소식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도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혁명의 발발을 막으려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노력이 행해지는 가운데, 3월11∼13일에 시민의 자유 보장과 국민 대의제 도입을 요구하는 청원시위가 행해졌습니다. 시위는 노동자, 수공업자, 학생, 소상인들이 주도했습니다. 

오스트리아 민중들의 투쟁 

3월13일 시위 군중은 오스트리아 '신분대표의회'(Diet)가 열리는 의사당으로 몰려갔죠. 이날 도시 외각에 살고 있는 노동자들도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시내 중심부로 행진했으며, 의회를 경비하던 군인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리니에'로 불리는 높이 4미터 정도의 벽으로 도시의 외각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신분이 낮은 노동자와 빈민이 여기에 살았습니다). 시위 군중은 '메테르니히 수상 퇴진'과 '민주주의 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대항했습니다. 학생들은 무장투쟁 조직인 '아카데미 군단'을 조직했지요. 이날 저녁 황제는 메테르니히 수상의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3월14일 노동자들이 경찰서와 세무서를 부쉈고, 민중과 대학생들이 무장하여 '국민군'을 구성했습니다. 3월15일에는 대규모 군중이 황제의 궁전을 포위하였고, 페르디난드 1세는 출판물 검열제 폐지를 재확인했으며, 빈 시장은 자유주의 귀족과 부르주아지 대표로 구성되는 '임시(치안)위원회'로 대체되었습니다.

민중들의 거대한 항거에도 불구하고 4월25일 발표된 헌법 초안은 황제의 절대권력을 조금도 완화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선거권은 재산자격에 따라 부여됨으로써 많은 부류의 노동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으며, 또 봉건제와 노예제의 폐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정이 없었죠. 5월14일 황제는 칙령으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민주주의 세력의 대표들이 참여했던 국민군 정치위원회를 해산시켰습니다. 이런 조치에 대해 노동자와 학생이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사실 5월 민주주의 운동의 슬로건은 헌법제정의회 소집, 4월25일의 헌법 초안 폐기, 국민군 정치위원회 복원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으며, 5월26일 정부군이 빈의 모든 전략적 지점들을 장악했습니다. 이에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시내 중심부로 몰려들어 바리케이드를 치고 정부군과 대치했지요. 5월27일에는 노동자 수천 명이 무장하고 대항했으나 소부르주아 지도자의 설득으로 후퇴하고 맙니다. 

그 후에도 8월 임금인하에 반대한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10월에는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결정적인 전투가 빈에서 벌어졌죠. 오스트리아 정부는 혁명이 일고 있는 헝가리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군주제의 전쟁 준비는 빈의 민주주의 세력의 분노를 자아냈죠. 1848년 10월6일 노동자, 학생, 수공업자, 소부르주아 지식인 등이 궐기하여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을 하고 대항했습니다. 이때 부르주아지는 정부 편에 섰으며, 투쟁이 치열해지면서 학생들도 혁명으로부터 점점 뒤로 물러났죠. 민중들의 무장투쟁은 10월30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혁명은 실패로 그치고, 야만적인 보복이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1848년 오스트리아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은 조직되지 않았고 독자적 정치행동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투쟁을 바르게 이끌지 못했다하더라도, 혁명의 가장 크고 가장 전투적인 세력으로 대두했습니다.


[ 1848년 오스트리아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은 가장 크고 전투적인 세력으로 대두했다. ]

이탈리아 민중들의 투쟁
 
이탈리아는 1848년과 1849년 광범한 혁명적 해방운동의 무대가 되었지요. 투쟁의 핵심 목표는 부르주아 혁명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적 분열을 해소하고 봉건주의 잔재를 근절하는 것이었지요. 1848년 3월 빈에서 발발한 혁명운동 소식이 이탈리아에 퍼지면서, 밀라노와 베네치아 민중들이 오스트리아 지배에 대항하여 투쟁을 일으켰습니다. 1848년 11월16일 로마에서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로 교황은 쫓겨나고 보통선거권이 실시되었습니다. 1849년 2월9일에는 로마 공화국이 선포되고, 교황의 세속적 권력 폐기가 선언되었죠. 이탈리아 민중들의 투쟁은 1949년 중반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투쟁은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이 주도했으나 주력부대는 노동자계급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1848년 유럽 혁명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자립을 촉진했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경계를 명확히 했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대항하고 그것을 대체할 세력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출·성장 가능성을 뚜렷이 보여주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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