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큰 별', 유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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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가 재단측 총장과 교수측 총장의 대립으로 내홍을 겪고 있는 가운데 민족사학을 자부하는 고려대학교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고려대학교 총장은 정치적인 자리였으며, 오육십년대 고대총장을 맡았던 유진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려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친일파 유진오의 일대기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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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의 아버지

현민(玄民) 유진오는 1906년 5월13일 서울 종로에서 출생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진 1905년의 다음해였다. 현민은 1924년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였고, 1926년에 법문학부 법학과에서 수학한 후 192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유진오는 경성제대에 결성되었던 경제연구회라는 마르크스주의 연구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좌파 문학의 길을 가기도 했지만, 1940년 이후는 본격적인 친일행각을 벌여 나갔다. 

서른이 안 된 나이에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 예과 강사와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의 교수로 재직할 정도로 그의 실력은 뛰어났다. 해방 이후에는 초대 제헌국회에 상정된 헌법의 기초위원으로 활약했으며, 법제처장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법질서의 근간을 만들어내었다. 또한 그는 1960년 한일회담의 필요성을 첫 번째로 역설했던 한일회담의 숨은 주체였으며, 곧 이어 야당 당수로서 활약했고, 그 뒤 광주학살 위에서 세워진 신군부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으로 활약했으며, '고려대학교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1987년 8월30일 세상을 떠났다.

친일단체 활동

그의 친일 행적은 일제의 침략 전쟁이 중국과 동남아 등지로 확대되던 1940년 중반에 접어드는 시기부터 본격화되었다. 유진오는 논문 「동양과 서양」, 단편소설 「남곡선생」과 「신경」 등을 쓰면서 문화 진영에서의 단체 활동을 많이 했다. 문인협회·문인보국회의 간부, 총력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으로 전쟁 소설 공모를 심사하였고,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두 번씩이나 참가하였다. 또한 조선언론보국회의 평의원을 맡기도 하였다.

내선일체 실천을 외쳤던 사람들이 만들었던 단체로는 조선문인협회(1939년 10월 29일 결성)와 그 후신인 조선문인보국회(1943년 4월 17일 결성)가 있었다.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은 김동환, 김문집, 박영희, 유진오, 이광수, 이태준, 최재서 등 일곱 명이었다. 이들 단체의 활동은 시국강연회, '전쟁 문학의 밤', '결전문예좌담회', 만주개척촌(국책이민부락) 시찰, 해군 견학단 파견 및 황민문학 건설과 총력 운동, 신도 실천의 모든 부문에 걸쳐서 전개되고 있었다. 

"어느덧 성전(聖戰)만 3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 먼 대륙의 오지에서 모든 고통과 맞서서 싸우며 혁혁한 무훈을 세운 황군 장병 여러분에게 삼가 감사와 경의를 바치고자 합니다. 돌이켜보면, 이 3년간 사변은 당초 우리들이 상상치도 못했던 웅대한 규모로 발전한 것입니다 …" (『삼천리』에 실린 「소감」에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외치다 

1941년 유진오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위촉되었고, 같은 해 8월12일 열린 문인협회 간부회의에서는 김동환, 박영희 등과 함께 상무간사로 위촉되었다. 이 당시 그는 친일잡지 『삼천리』 등에 친일 논문을 실었고, 학병 지원의 권유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외치고 다녔다. 국민총력조선연명에는 당시 친일문학자들이 만든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단체가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결합되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에 결성되었는데 당시 조선 문학자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최린, 김동환 계열의 임전대책협의회와 윤치호 계열의 흥아보국단이 통합한 것이었다.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은 이름 그대로 조선에서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위한 선전·선동의 역할을 나서서 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국민의용대의 조직 및 활동에 일치시키기 위해 해산될 때까지 학병의 권유와 내선일체를 열심히 외쳤다. 유진오는 총력연맹 문화부에서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결전소설 공모를 심사하였다. 그 외에 문단의 중요 행사로 1942년 이후 매년 1회씩 3회에 걸쳐서 개최된 '대동아문학자 대회'가 있었다. 이것은 대동아 문예부흥을 목표로 내걸었던 일본의 전시문화 공세의 한 종류였다. 여기에 대표로 참가한 사람 중에 두 번을 연이어 참석한 사람은 단 세 사람이었는데, 이광수와 쓰다, 그리고 유진오였다.

"동아문예부흥의 역사적 거보, 즉 문화상의 대동아전쟁은 이리하여 무력상의 대동아전쟁보다 훨씬 앞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벌써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면 동양은 어떻게 자신의 새 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동아문예부흥의 구체적 형태는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 새 동양의 수립, 동아문예 부흥의 출발이 동양적 전통의 회고로부터 출발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동양과 서양」, 『매일신보』, 1943. 1. 9∼13자)


[ 일제는 조선의 청년들을 학도병으로 내몰았다. 그 선두에는 조선 지식인이 앞장섰다. ]

일본의 '영원한 승리'

대동아전쟁이 진행되면서 일제는 병력 총동원을 위한 조치를 4회나 실시하였다. 1938년 2월23일 공포, 4월3일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제, 1943년 5월11일 내각 결정에 의해서 10월1일 훈련소에 입소한 해군특별지원병제, 1943년 10월1일 공포, 1944년 1월20일 시행된 학도병 징집, 그리고 1944년 4월1일에 징병 검사가 실시된 징병제도의 시행이었다. 이에 따라 친일파도 이러한 조치를 성은(聖恩)이라고 하면서 광분하였다. 이광수는 가요 '지원병장행가'를 작사했고, 주요한은 시 '첫 피'로써 지원병의 죽음을 예찬하였다. 그 무렵 1943년 11월 한 달 동안 『매일신보』에는 무려 12편이나 되는 학병 관계 사설이 실렸다. 11월18일 유진오의 「병역은 힘이다」는 제1면을 장식하였다. 또한 1944년 8월13일 전국 대강연회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는 주제로 행한 그의 강연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충성이 강하게 묻어 있다.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이 눈앞에 있던 시기에 유진오는 일본의 '영원한 승리'를 다짐하며 '대화일치(大和一致)'를 강조했다.

"전쟁의 귀추는 벌써 뚜렷해졌습니다. 침략자와 자기 방위자, 부정자와 정의자, 세계 제패의 야망을 쫓는 자와 인류상애(人類相愛)의 이상에 불타는 자의, 한마디로 말하면 악마와 신의 싸움인 것입니다. 정의는 태양처럼, 사악은 먹구름처럼, 구름은 마침내 태양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의로워 정의자가 일어설 때는 그 승리는 저절로 명백한 것입니다."

패색이 짙어지는 가운데 본토 결전을 결심한 일본은, 최후의 1인까지 싸우기 위해 조선에 국민의용대를 결성하게 하였고, 이에 의용병역법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본토 결전 작전 준비에 호응해서, 조선언론보국회는 1945년 6월 15일 언론총진격 대강연회를 열었다. 조선언론보국회는 1945년 6월 8일에 출범하였는데, 그 강령은 "첫째 조국의 대정신을 현양하고 성전 완수에 매진함, 둘째 내선일체의 이상을 구현하고 대동아 건설에 정진함, 셋째 언론의 총력을 결집하고 사상전에 감투함"이라고 되어 있다. 이들은 중요 도시에 언론인 25인을 파견해서 '본토 결전과 국민의용대 대강연회'를 열게 하였다. 유진오는 이 언론보국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제헌헌법을 만들다 

유진오는 해방된 바로 다음해인 1946년부터 민중당 대통령 지명과 신민당 당수가 되던 1967년 바로 전까지 고려대학교에 적을 두었다. 또한 1948년 대한민국헌법 기초전문위원을 역임하고, 대한민국 법제처장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임명을 받았다. 유진오가 직접 쓴 『헌법기초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전문위원 11인 중 본인만이 유일한 공법학자였다고 밝힌다. 공법학자란 사법이 아닌 헌법을 전공한 것이고, 즉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사법을 전공하였거나 일제 치하에서 관리로 일하던 자들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 한 잡지에 헌법과 관련된 글을 발표해, 해방과 함께 필연적으로 제기될 헌법 문제에 관해서 자신의 지위를 마련해 두고자 노력하였다. 더군다나 해방 후 공식 기구로 등장했던 조선인민공화국의 헌법제정 작업은 미군이 인정한 권력 기구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무시하면서, 친일 지주들로 구성된 한민당의 헌법제정 작업에는 참여하였다. 또 이승만의 독립촉성회가 주도하고 신익희가 구성한 일제시절 관리들의 연구모임인 '행정연구회'를 주축으로 헌법제정 작업을 준비하는 등 '미국-이승만-한민당' 인맥들을 충분히 활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철저하게 반공주의를 설파하며 반공주의를 통해 자신의 친일행각을 감추려 노력하였다. 한때 경성제대 마르크스 연구단체인 '경제연구회'에 가입했던 경력을 가졌던 그지만 그가 그토록 믿었던 대동아공영권 확립의 거대한 흐름을 좌절시키고 종주국 일본을 점령 통치하던 미국의 위력을 실감한 이후로는 좌익 계열과 거리를 두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그의 예상대로 "김구, 김규식이 5·10 단선·단정을 보이콧하자 실질적인 권력자로는 유일하게 이승만이 떠올랐으며" 한민당과 독립촉성회는 권력의 주체로 확고하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에 발맞춰 유진오 역시 한민당의 세력을 등에 업고 국회에서 헌법 기초위원으로 지명되었고, 권력을 향한 줄타기를 본격화했다. 그의 노력 덕택에 헌법의 기조는 애초의 내각제에서 하룻밤만에 대통령제로 선회하게 되며, 이는 이승만의 권력 의지가 직접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에서 헌법제정 당시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법에 대해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당연스러운 조치'라고 설명하며 별다른 언급 없이 지나쳤지만 반민특위를 둘러싼 이승만과 국회의 대립 상황에서 법제처장으로 정부측 대표 조사위원회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당시 이승만과 미군 사령부에서 추진하고 구성한 새 정부의 각료와 특히 총경, 경감 등의 경찰 구성은 많게는 90%까지 친일의 경력이 있는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 친일파를 기반으로 정권을 잡았고 그 후에도 이들을 기반으로 정권을 유지해 가야 할 이승만 정권으로서는 절대로 친일파를 청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국회 내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의 해체로 친일 단죄 시도는 그 뚜껑을 열기도 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역사가 심판해야 할 것들

해방 이후 유진오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한 일등공신이자 한일회담을 제안한 앞날을 내다보는 정치가였고, '민족 사학'을 일으켜 세운 등불이요, 반독재 운동의 기수였다. 유진오는 자신의 반민족적 친일행위에 대한 반성 없이 대한민국의 '일등공신'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군사정권 하에서 유진오는 학술원 공로상과 문화훈장을 받았고, 순탄하고 명예스런 삶을 살다가 1987년 죽었다. 임종 후 그가 총장으로 재직하던 고려대에 빈소가 마련되었는데, 이에 반대하는 고대 교수 5인의 '시위'가 일어났다. 

"우리는 특히 교육자로서 이미 일제 치하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을 노래했었고, 해방 직전까지도 '우리(일본 제국)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외치는 등 친일행각의 전력도 있거니와 야당 당수로서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처참한 광주의 불행과 직결된 정통성을 결여한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으로 다시금 변신했던 유진오 씨의 빈소가 고대에 차려진다는 것은 비교훈적이라고 생각하여 사회적 통념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항의 시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민 유진오의 일생은 1987년 당시 그의 죽음을 알리던 모든 일간지가 '한국현대사의 큰 별'이라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그의 업적을 찬양하기에 급급해 할 만큼 화려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외형적 공과에도 불구하고 그 밑바닥을 흐르는 맥을 살펴본다면 일관되게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한 민족의 대의와 양심을 철저하게 외면해 온 친일파이자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기회주의적 인사의 전형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친일 행각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공개적으로 반성하거나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혼란스러운 해방 정국의 빈틈을 헤집고 헌법제정 기초위원으로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였다. 그는 양심적인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 자신의 행각을 부끄러워하며 자숙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국내 유일의 헌법학자라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승만 일파에 기대어 친일파들로 우글거리던 제1공화국 법제처장을 지냈다. 또한, 5·16 쿠데타 세력과 영합하여 그 간판주자로 나섰으며,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시켜 버린 한일 굴욕 외교에 대해 자신이 맨 처음 그것을 건의했다고 자랑할 만큼 뻔뻔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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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兪鎭午 1906∼1987)
1939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1941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 
1942, 43 대동아문학자 대회 조선 대표 2회 연임 
1945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1947 대한민국 제헌국회헌법 기초위원 
1952∼65 고려대 총장 
1960, 61 한일회담 수석 대표 
1967 신민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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