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통신노조 12월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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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벅찬 감동의 드라마

한국통신노조는 2000년 12월 18일 09시를 기해 전국 사업장에서 일제히 총파업에 돌입하여 12월 22일 노사합의 타결로 종료까지 5박 6일간 역사적인 파업을 수행했다. 전날 17일 비상조합원총회를 개최하기 위해 6,000여명의 조합원이 서울역에 집결했고 시내 대학으로 이동하려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 때문에 명동성당에 집결하여 농성을 하게된 것이다. 

이번 파업에서 가장 감동적이었고 의미 있는 것은 농성 및 파업동참 규모다. 일요일인 17일 비상조합원총회 참가규모는 대략 6천명선. 그런데 명동성당에서 농성거점을 확보한 뒤 이튿날 총파업선언이 있은 후부터 농성 및 파업대오는 계속해서 늘어났는데, 파업 첫날 명동성당에 1만 2천 대오. 둘째 날 1만 5천 대오, 나흘째는 명동성당에 2만 명이 육박했으며, 각 지역별로 출근 거부한 조합원까지 포함하면 파업대오는 3만 명에 이르렀다. 조합원 3만 8천명의 전국 사업장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명성에서의 농성과정은 살아있는 총파업 현장이었다.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를 밑도는데 갑작스런 농성으로 인해 아무런 물품준비 없이 첫날밤을 꼬박 새웠다. 천막 100여동(50인용), 간이화장실 26개를 반입하려 했으나 경찰이 이를 제지했고, 이후 간이화장실은 농성이 끝날 때까지 반입을 계속해서 저지 당했다. 또한 겨울비가 내리기도 해 그야말로 살인적인 추위와 싸웠는데 오직 의지한 것은 대형 비닐 한 장과 동지들의 체온뿐이었다. 농성이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면서 간이천막이 들어서고 식사문제도 도시락(평균 1만 3천 개)으로 해결되었지만 계속 반입을 제지당한 간이화장실 문제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 대변을 누려면 두 세 시간씩 줄을 서야 했으며, 옷에 그냥 싸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도 부지기수였고, 대소변을 줄이기 위해 밥을 굶어버리는 조합원도 많았다. 화장실 반입을 저지한 경찰 조치는 비인간적이고 반인권적이었다. 

한편, 발 디딜 틈 없는 명동성당을 뜨거운 총파업열기로 몰아넣은 것은 하루 밤도 빠짐없이 진행한 문화행사였다. 출연한 노동가수 문예일꾼만 해도 100여명이 넘었으며 저녁 9시부터 새벽 4시를 훌쩍 넘는 장기공연을 1만 5천여 조합원이 한데 어우러져 총파업 한마당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번 파업투쟁의 견인차는 사수대 동지들이었는데 100여명으로 구성된 사수대는 수삼일을 꼬박 새우면서도 눈물겹도록 헌신하면서 파업대오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번 파업의 진짜 주역은 조합원 대중이었다. 강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화장실문제가 해결 안 되는 고통을 말없이 참아주었고, 계속되는 동참과 합류로 파업대오를 늘려가 정권과 사측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끝내 손을 들게 한 것이었다. 

예고된 파업

이번 파업을 두고 "아무도 예견치 못한 파업"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과연 그런가. 물론 직접적으로 파업명령을 내리는 쟁의대책위원장의 심리적 동향만을 염두에 두면 그런 식의 표현이 가능할지도 모르나 이번 총파업은 필연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내부모순을 갖고 있었다. 그 정점에는 바로 정부의 일방적인 구조조정 정책, 그로 인해 수반되는 조합원들의 고용불안 그리고 민족통신인 한국통신을 지켜야 한다는 조합원 대중의 '애국심'과 '애사심'이 있다. 또한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말을 바꾸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영진에 대한 분노와 노조무력화 정책으로 인한 조직력 약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함께 폭발하여 일심동체로 총파업투쟁을 수행한 것이다. 

총파업투쟁에까지 이르게된 경과를 살펴보자. 한국통신노조 집행부는 2000년 단체교섭과정에서 상반기 민주노총 총파업투쟁 합류를 유보하면서까지 임금안에 대한 정부지침을 받아들였다. 이는 고용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또한 이 문제를 노사 신의로 대화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집행부의 의지와 방침이었다. 이때 사장은 공개적으로 "인위적인 인력감축은 더 이상 없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약속을 깨고 11월 18일 노조와 협의 없이 명예퇴직 시행공고를 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한국통신은 98∼99년에 걸쳐 1만 2천명이 정든 일터에서 쫓겨났다. 98년 말 정부의 한국통신 구조조정 지침의 핵심은 1만 5천명의 인원감축이었고 이것을 무리하게 추진한 결과 현업에서는 일손이 달리고 노동강도는 늘고 통신서비스의 품질은 떨어져 갔다. 게다가 IMT2000·위성방송 등 신규사업으로 인해 오히려 7천명의 인원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고, 2000년 한 해 당기순이익이 1조 2천억원에 이를 정도의 초우량공기업에서 더 이상의 인원감축이 불가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부와 사측은 당초 계획인 3천명 추가 인원감축 목표를 채우기 위해 전국을 초토화한 것이다. 강제적인 명예퇴직을 종용하기 위한 사측의 행위는 그야말로 불법·탈법을 넘어 비인간적인 만행이었다. 살생부를 만들어 집중면담, 여성조합원 표적 퇴직강요, 부부사원 부당 대기발령 등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살려달라"는 조합원들의 아우성이 조합사무실에도 빗발쳤다. 

또 한편으로는 본사에서 114안내·전화가설 고장접수 등 대민서비스 분사화 계획, 인력풀 운영 등 조합원들의 고용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계획 및 지침들을 무차별적으로 내려보내기 시작했으며, 또한 퇴직자 위로성금이라는 명목으로 1인당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의 임금을 강제할당 삭감하려는 지침을 내리고 서명을 강요했다. 2000년 단체교섭에서 구두로 합의한 보수제도 관련 사항도 묵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어찌 최후의 그리고 가장 강력한 저항수단인 파업을 단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력감축·민영화 반대투쟁

이번 파업은 일방적인 구조조정(인력감축)을 반대하는 투쟁이었지만 한편으로 한국통신 해외매각·분리분할 수순으로 가는 한국통신 민영화정책을 저지하는 투쟁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전기통신사업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상황에서 전기통신사업법의 각종 독소조항들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고 노조의 입장을 관철하려는 투쟁이었다. 

<전기통신사업법>이 8월초 입법 예고되었을 때부터 공공부문노조 공동연대투쟁의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당시 전국전력노조는 <전력산업구조개편특별법> 입법저지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고, 한국통신노조와 전국전력노조가 함께 "국가기간산업 해외매각 및 민영화저지 공동투쟁을 전개하자"고 결의하였다. 이에 곧바로 민주노총 공공연맹과 한국노총 공공노협이 함께 가세하여 철도·가스공사노조·정부투자기관노조연맹 등이 함께 하는 "공공연대"가 출범한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국가기간산업해외매각 민영화(사유화)반대 범국민 대책위원회>를 구성 본격적인 대국민 여론조성 및 정책활동을 병행해 나갔다. 이후 수 차례의 공동결의대회, 서명운동, 국회의원 면담, 정당 당사 방문 등 민영화저지 공동투쟁을 전개해왔던 터다. 

따라서 이번 파업의 목적으로 노조는 한국통신 민영화 반대를 분명한 기치로 내걸었고 향후 전개될 한국통신 민영화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저지선을 구축한 것이다. 한편, 이런 연대투쟁의 위력은 총파업기간에도 유감 없이 발현되었다. 파업 둘째 날 이미 파업중인 데이콤노조와의 공동 파업집회와 "공권력 투입 시 즉각 동맹파업에 돌입하겠다"는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 지지선언 등은 그 위력을 발휘해 정부와 사측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분석된다.


[ 이번 파업의 진짜 주역은 조합원 대중이었다. 강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화장실문제가 해결 안 되는 고통을 말없이 참아주었고, 계속되는 동참과 합류로 파업대오를 늘려가 정권과 사측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끝내 손을 들게 한 것이었다.  ▷ 한국통신노조 ]

노사-노정교섭

17일 비상조합원총회를 개최한 후 파업 돌입직전 일정부분 노사 근접안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한국통신 분사분할, 구조조정 저지, 민영화반대라는 투쟁의 본질적 목표에 매우 미흡한 것이므로 조합은 쟁의대책위 회의를 거쳐 '전면 총파업 돌입'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노사-노정대화는 단절되었고 한차례 고비를 맞게 되었는데 그것은 21일 명동성당에서 예정된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축하미사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도저히 이 축하미사를 가질 수 없게 상황이 전개되자 노사-노정대화는 급류를 탔고 결국 20일 새벽 노사 잠정합의안이 도출되었던 것이다. 이 내용이 공개되자 명동성당 농성조합원은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면서 총파업투쟁의 승리를 예감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잠정합의안에 서명을 위해 간 대표단이 반나절이 지나도 복귀하지 않아 초조감은 더해갔다. 결국 들려온 소식은 노사가 잠정합의안을 도출해놓고 사측이 서명을 거부해버렸는데 이유인즉 기획예산처가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으로 전해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합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에 이동걸 위원장은 투쟁명령 12호를 통해 "전 조합원의 명동성당 집결과 출근거부 그리고 23일 민주노총 지역집회에 결합할 것"을 발령했다. 즉, 파업대오를 더욱 굳세게 다지고 더 힘차게 투쟁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제 총파업투쟁의 형국은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는 정부와 "정당한 노사잠정합의안을 부결시킨 정부(기획예산처)에 대한 분노"로 인해 농성대오 강화로 맞선 노정 정면대결양상으로 치달았다. 정부는 경찰력을 증원 명동성당을 에워싸기 시작했지만 결정적인 힘의 균형은 조합원 대중으로부터 나오면서 노조로 기울기 시작했다. 즉 명동성당에 파업참여 조합원이 끊임없이 늘어나고 확대된 것이다. 거의 1만 2천에서 5천을 오가던 농성대오가 2만을 넘어섰고 명동성당 주변에도 수도권지역 조합원 4∼5천이 상가 구석구석에서 마음으로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힘을 바탕으로 22일 새벽 극적인 노사합의 타결을 이룬 것이다. 

노사합의서의 의미

이번 노사합의서에 대한 의미와 평가에 대해서는 그 후속작업이 현재 진행되는 과정이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부의 일방적 구조조정에 분명하고도 확실한 저지선을 구축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분리·분할의 중단을 의미하는 노사합의와 당초 3천명을 목표로 추진했던 강제명예퇴직을 중단키로 해 이미 신청한 1,100명 선에서 인력감축을 막아낸 것이다. 또한 고용불안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인력풀제가 철회되었으며, 강제명예퇴직 종용의 수단이었던 사내부부 부당전보발령도 철회되어 82명의 부부사원이 원복되었다. 끝으로 파업참여 조합원에 대한 징계문제도 징계범위의 최소화(쟁대위원 19명으로 국한)로 일단락 지었고,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지도부 6인에 대해서만 현재 사법처리 방향이 논의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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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합의서 전문
한국통신과 한국통신노동조합은 노사 현안사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1.금번 명예퇴직 및 희망퇴직은 추가 연장 없이 종료한다. 향후 명예퇴직은 인사규정에 의거 정기적으로 시행하며 강제하지 아니한다. 
2.금번 명예퇴직 및 향후 희망퇴직 접수기간 중 시달된 인력풀제 운영에 관한 사항은 전면 철회한다.
3.한국통신 민영화 추진은 노사가 참여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 운영한다. 
4.금번 명예퇴직 및 희망퇴직자 위로 성금모금은 중단한다.
5.회사업무의 분할 및 분사화(114안내, 선로유지보수 등)를 할 경우 사전에 구조조정 특별위원회에서 충분히 협의한다. 
6.보수제도개선사항은 2000년 12월중으로 해결한다. 

2000. 12. 22 

한국통신 사장 이계철, 한국통신노동조합 위원장 이동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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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 남긴 것

이번 총파업이 우리에게 남긴 것 중 가장 큰 것은 "자신감"이다. 정부의 잘못된 구조조정 정책에 맞서 우리는 언제든지 파업투쟁의 무기를 들고 떨쳐 일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또한 노동조합을 무시하고 짓밟으면 반드시 투쟁으로 되갚아 준다는 "자존심"을 회복하였다. 이 자신감을 바탕으로 향후 전개될 한국통신 민영화저지 총력투쟁으로 진군할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파업투쟁을 전개하는데 있어 처음 하는 전면 파업이라는 한계 때문에 발생했던 문제점에 대한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먼저 언론 및 대국민 여론획득 문제였는데 일단 보수언론들은 지나칠 정도로 왜곡·편파보도를 했다. 대표적인 것이 파업참여 조합원 수에 대한 오보인데 언론들은 일제히 파업참여숫자를 첫날엔 4천명으로 보도했고, 항의가 빗발치자 최대 1만 2천명(한겨레)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도시락만 1천 5천 개 소비했음을 감안하면 이것은 명백한 음해성 오보이다. 언론의 속성에 조합원들이 분노하고 각성하는 계기가 된 측면은 긍정적이지만, 효과적으로 대언론사업을 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반성의 여지가 있다. 

또한 투쟁과정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투쟁 목표를 가진 한국통신계약직노조와 연대투쟁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도 커다란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한국통신계약직노조는 7천명의 일방적 계약해지(해고)에 맞서 이미 12월 중순부터 파업투쟁을 전개하고 있었고, 명동성당 농성에도 합류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공동투쟁을 전개한다는 투쟁의 상을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자칫 정규직 및 비정규직 조합원간의 갈등양상을 빚어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아울러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던 파업으로 파업참여조합원들의 생리적·육체적 고통이 심했으며, 이와는 별개로 전술운용의 폭도 대단히 좁을 수밖에 없었고, 파업이후 후속작업에 따른 어려움도 배가될 수밖에 없었음은 반성의 여지가 많다. 

다만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극복해낸 원천은 조합원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위력적인 동참이었다. 따라서 이번 파업투쟁 남긴 것은 정부와 사측의 폭압적인 구조조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며, 이에 맞선 노조 투쟁은 언제든지 조합원 대중을 믿고 과감하게 투쟁하고 실천하면 정부와 사측의 힘도 물리치고 승리와 전진을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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