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모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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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읽기 편한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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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읽기 편한 책을 권하고 싶다.  

역사니 투쟁이니 민주주의니 전쟁이니 제국주의니 하는 부담스런 단어가 연상되지 않는, 사랑과 여유와 웃음과 유머로 가득 찬 책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문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위험을 무릅쓴 기적의 6주일'이라는 싸늘한 부제가 붙은 이 책을 소개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재미없다고 미리 생각하진 마시길. 

재미있을까 싶어 샀다가 첫 장도 못 읽고 덮는 책이 있는가 하면, 아예 읽지도 않고 책장에 꼽아두었다가 우연하게 꺼내 읽는데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파해버리는 책도 있다. 1989년 한글 번역본 초판이 나왔다가 2000년에 재판이 나온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삼백 쪽 가까운 두께의 책을 서문이라도 볼 요량으로 잠시 꺼냈다가 저녁밥도 먹기 전에 다 읽어 버렸다. 

이 책은 사만 명이 넘는 사망자, 이천 명이 넘는 행방불명자, 그리고 백만 명에 이르는 추방자를 만들어냈던 칠레의 우익군사 쿠데타가 발발한 지 12년 만에 칠레에 잠입해 조국의 현실을 수천 미터가 넘는 필름에 담은 영화감독 미겔 리틴의 잠입 촬영 뒷 이야기를 노벨문학상 수상작가(1982)인 마르케스가 받아 적어 이야기로 꾸민 것이다. 

'고문'과 '죽음'을 언급한 부제처럼 미겔 리틴 감독의 칠레 잠행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감독이 잠입해 촬영했던 1985년은 합법 선거로 선출된 좌파 정부를 미제국주의와 자본가의 후원을 받아 타도한 군사독재자 피노체트의 철권 통치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계엄령이 선포된 긴박한 시기였다. 미겔 리틴은 칠레 지하운동 조직의 지원 속에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세 나라 촬영팀을 따로 구성하여 열대에서 만년설까지 아우르는 세계에서 가장 길쭉한 나라의 곳곳을 화면에 담는 '과업'을 총감독하였다. 

좌파 정부의 대통령이자 칠레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 소총을 직접 들고 피노체트의 하수인들과 맞섰던 아옌데가 장렬하게 산화한 곳인 '라모네다 궁'을 비롯해 칠레공산당 당수이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이슬라네그라 집, 그리고 아옌데의 정치적인 요새이자 정서적인 요새였던 곤셉시온 근처의 석탄 광산을 지나 아옌데의 친구였던 산티아고 달동네의 빈민들까지 그들은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칠레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촬영된 필름으로 텔레비전 방영을 위한 네 시간짜리 영화 한편과 극장 상영을 위한 두 시간짜리 영화 한편이 만들어졌다. 

1973년 9월 11일 전화로 간신히 연결된 한 방송국 라디오를 통해 아옌데는 총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칠레 인민들에게 고별 연설을 했다. 

"역사의 전환점에서 나는 인민의 충성에 대해 내 생명을 바쳐 보답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칠레 인민들의 가슴에 뿌린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게 될 것입니다. 적의 힘은 강대합니다. 적은 우리를 굴복시킬 겁니다. 그러나 사회의 진보는 범죄와 무력으로써는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들의 것입니다. 역사는 민중이 창조하는 것입니다. 곧 다시, 역사의 큰 길이 열려 자유를 찾은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전진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칠레 만세! 칠레 인민 만세! 칠레 노동자 만세!" 

부록으로 딸린 두 시간짜리 영화 대본 「칠레의 모든 기록」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마르케스 쓰고 조구호 옮김 / 크레파스,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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