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박정희, 그 치욕과 영광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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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 실린 정해구(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의 글을 민족문제연구소의 허락을 얻어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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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 미노루 생도의 답사

1942년 3월 어느 날 만주의 신경군관학교 졸업식장에서 오카모토 미노루(關本實)라는 한 졸업생이 '어전강연'이란 답사를 하고 있었다. 답사 내용은 일본 천황과 일제의 만주 괴뢰국 황제 부의(輝儀)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으로,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카모토 미노루, 그는 그후 20여 년 뒤 5·16군부 쿠데타를 통해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박정희 바로 그였다. 중국인과 조선인 생도 240명 가운데 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 대표로서 답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졸업식장에서 그는 우등상으로 만주 괴뢰국 부의 황제로부터 금시계도 받았다. 

만주에서 박정희가 군관학교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40년 봄부터였다. 그 전 해 만주로 왔던 그가 그 해 봄에 신경군관학교 제2기로 입학했던 것이다. 신경군관학교로 말하면, 그 정식 명칭이 '만주제국육군군관학교'로서 일제의 만주 괴뢰국인 만주 제국의 육군사관학교였다. 

당시 그와 함께 입학한 신입생들은 일본인 240명, 만주인 228명, 조선인 12명이었다. 그의 입학 성적은 240명 중 15등이었다(일본인 신입생의 성적은 별도). 당시 같이 입학한 조선인 중에는 나중에 5·16군부 쿠데타 당시 이에 반대한 제1군 사령관 이한림(李輪林)도 끼여 있었다. 입학 당시 23세였던 박정희는 5년제 사범학교를 마친 후 3년간 교사 생활을 한 후에 군관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에 3∼4년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곧장 입학한 다른 학생들보다 대여섯 살 많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선배들에게 항상 깍듯이 예절을 지켰고, 졸업시 수석을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학교 생활에 매우 열심이었다고 한다.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이한림, 김재풍(金在豊), 이섭준(李燮俊) 등과 더불어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일본 육사 편입은 당시 만주계 및 조선인 생도 중에서 성적이 좋은 사랑에게 베풀어지는 일종의 특전이었다. 일본 육사의 교육은 만주군관학교보다 더욱 혹독했다. 박정희의 일본 육사 생활 역시 만주군관학교에서의 생활과 별로 다르지 않아, 여전히 그는 모범적이었다. 이러한 그를 보고 육사 교장이었던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 장군은 "다가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 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고 생도들을 모아놓고 말할 정도였다. 다가키 마사오(高木正雄)는 박정희를 부르는 또 하나의 일본식 이름이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했고,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교육총감상을 받았다.

박정희의 독립운동?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것처럼 언급한 글들이 많다. 그러나 명확한 검증없이 내세워지고 있는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제의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와 일제 괴뢰군인 만주군에 몸담았던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 논란이 되는 첫번째 문제는 일제 패망 직전 그가 여운형(呂運亨)의 건국동맹과 관계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여운형의 건국동맹과 연결된 만주 군관학교 출신 박승환(朴承煥)이 만주군에 군적을 둔 조선 출신 장교를 상당수 규합,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전하의 연계를 도모하고 인근 주재 부대와 통합하여 1개 사단의 병력으로 국내 진공을 계획하였고, 바로 이 국내 진공 계획에 박정희도 참여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만주의 박승환과 연계를 지니고 있었던 여운형이 일제의 패망을 앞두고 연안의 무정(武亭) 및 만주의 박승환으로 하여금 유격대를 조직, 국내 진공 계획을 논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박승환이 만주에서 어느 정도 조선인 장교들을 규합했는지, 그리고 거기에 박정희가 가담했는지 여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다음으로 논란이 되는 것은 박정희가 광복군의 비밀공작원이었다는 주장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박정희는 '철석(鐵石)부대' 예하에 배속되어 만리장성 남방 평곡(平谷)에서 중공의 팔로군과 싸우고 있던 만주군 제7단에 소속되어 있었고, 중국 동부의 각 전선에 배치되어 조선인 장병들을 대상으로 귀순 공작을 벌이고 있던 광복군 제3지대의 공작원이 이 7단에 침투하여 박정희 중위 및 신현준(申鉉俊) 대위와 접촉, 이들을 광복군의 비밀 요원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육사졸업 후 소만 국경 지대인 치치하얼(齋齋哈爾)에 있는 관동군 635부대에서 3개월 동안 사관 견습을 받은 박정희는 1944년 7월경 만주군 보병 제8단에 배치되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 부대에 있었다. 만주군 제8단이 주둔하고 있던 곳도 만리장성 북쪽 변경 산악 지역인 열하성 흥륭현의 반벽산이었다. 당시 3천여 명의 만주족 및 한(漢)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8단은 그곳에서 팔로군을 토벌하고 있었고 박정희는 그곳에서 단장의 부관으로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박정희가 광복군의 비밀공작원이란 주장도 근거가 빈약하다. 

박정희는 만주군 제8단에서 일제의 패망을 맞았다. 박정희를 비롯하여 신현준 대위, 이주일(李周一) 중위, 방원철 중위 등 제8단에 같이 있었던 4명의 조선인 장교들은 어제까지 같은 부대의 동료들이었던 중국인 장교들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며칠 후 이들은 제8단과 헤어져 북경을 향했다. 8월 29일 북경에 도착한 이들은 조선인 동포가 경영한다는 덕경루(德慶樓) 라는 음식점을 찾았다. 이미 그곳에는 학병으로 끌려갔던 청년들과 만주 일대를 배회하던 동포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북경 동북쪽에 있는 북신구(北新區)라는 제지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공장은 모여든 조선인 병사들로 인해 순식간에 병영처럼 되었다. 이곳에 이들의 숙영지를 마련해 준 동북판사처장 최용덕(崔用德) 장군은 이들 4백여 명을 김학규(金學奎) 지대장이 지휘하는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시켰다. 최장군은 중국 공군 소장으로 장개석의 전용기를 조종했던 사람이었다.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로 불리게 된 이 부대에서 신현준은 대대장, 이주일은 1중대장, 박정희는 2중대장, 학병 출신인 윤영구(尹映九)는 제3중대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말이 광복군이었지 일제의 만주군에 근무했던 그들로서는 쑥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그것은 광복군이라기보다 고향에 돌아오기 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귀향대였던 것이다. 

한편 박정희의 광복군 경력과 관련, 박정희가 그곳에서 중대장을 맡고 있을 때 나중에 박정희와 대림, 결국 의문사까지 당했던 장준하(張俊河)가 박정희를 만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장준하는 박정희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일본군을 탈출하지 않았다는 점,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박정희는 여전히 창씨개명한 일본인 장교로서 조선인 독립 운동가를 학살하고 있었으리라는 점, 그렇기에 박정희는 기회주의자라는 점을 들어 박정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배신과 생존 

1946년 5월 박정희는 미군이 제공한 LST(상륙작전용 수송함)를 타고 천진을 출발, 며칠 후 부산에 도착했고, 그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냈다. 그러나 그는 그해 9월 서울로 올라가 후에 육군사관학교가 된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제2기로 입학했다. 2기생 중에는 10·26 때 박정희와 악연을 맺게 된 김재규도 끼여 있었다. 

1946년 12월, 3등으로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되어 춘천 제8연대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박정희는 얼마 동안 근무하다 1947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옮겼다. 이때 그는 중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대위로 승진했고, 이후 여기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제1중대장을 맡고 있었던 경비사관학교 시절 박정희는 나중에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선 그는 장도영을 여기서 만났다. 장도영은 당시 경비사관학교의 행정처장을 맡고 있었다. 또한 박정희는 1중대 2구대장 황택림, 2중대장 강창선, 2중대 2구대장 김학림 등과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이들은 1년 뒤 숙군 과정에서 남로당의 조직원으로 기소되어 사형당했다. 이들 중 강창선은 박정희의 남로당 연계와 관련이 있었다 한다. 다른 한편, 박정희는 교관으로서 당시 5기생들의 교육을 맡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박치옥, 문재준 등 나중에 5·16 쿠데타에 가담했던 다수의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5·16 쿠데타 때 5기생들은 주로 군대를 동원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경비사관학교 근무 중 여수· 순천 사건으로 광주의 토벌사령부에 잠시 내려갔다 온 박정희는 1948년 11월 11일 여수·순천 사건 이후 숙군 작업을 벌이던 군 수사당국에 체포되었다. 남로당의 비밀 당원이라는 죄목이었다. 그가 남로당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당시 죽은 그의 형 박상희와 관련이 있었다. 

1946년 9월 총파업에 뒤이은 10월 초, 대구와 경북 지역은 인민항쟁의 불길 속에 휩싸였다. 일제 때부터 항일 운동을 해왔고 당시 선산군 민전사무국장 겸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을 역임하고 있던 박상희 역시 군중들과 더불어 구미경찰서를 공격했고 서장 이하 서원 16명을 유치장에 감금했다. 10월 6일 진압군이 들이닥치자 도주하던 박상희는 경찰의 총을 맞게 되었다. 

형이 죽을 당시 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던 박정희는 형의 장례식에 내려가 보지도 못했고 아무에게도 그런 내색을 비추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그가 가장 따랐던 형의 죽음이 그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박정희는 그의 자술서에서 남로당에 입당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중에 집에 내려가 보니 그 유족을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이 잘 보살펴 주고 있었고 박정희에게도 「공산당 선언」 등의 책자를 주면서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남로당 가입을 권했다는 것이다. 

김창룡이 활약했던 당시의 대대적인 숙군 작업은 말썽도 많았지만 여하튼 결과적으로 군의 좌익 계열을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숙군을 통해 전군의 5% 정도인 4천 7백여 명의 장병들이 처벌을 받았고, 그 중 수백 명이 총살 또는 징역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러한 숙군 과정에서 유독 박정희만은 살아 남았다. 죄상대로 하자면 거의 총살이나 무기징역이 분명한 그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그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군부 내 남로당 조직 명단을 순순히 털어놓았고, 이를 통해 군부 내 조직원들, 특히 육사 내부의 남로당 세포들이 다수 적발되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가 군부 내 좌익 색출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구명에 나섰다. 우선 숙군을 직접 담당했던 김창룡과 김안일이 당시 육본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에게 숙군에 협조적인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박정희를 만나본 백선엽은 박정희가 구명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아' 그를 구원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백선엽은 하우스만(J. Hausman) 대위와 미 군사고문 단장인 로버츠(W. Roberts) 준장에게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했고, 하우스만은 박정희의 형 집행 면제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한다. 또한 백선엽은 육본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그 밖에도 박정희의 구명에는 정일권, 원용덕 등 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군의 만주군 인맥들이 박정희의 구명에 적극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구명 노력의 결과, 박정희는 12월 말경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을 수 있게 되었다. 불구속 상태로 진행된 군사 재판은 이듬해 2월 8일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형 집행정지 처분이 취해졌다. 그러나 형 집행은 면했지만 파면은 면할 수 없었다. 이로써 육본 정보국의 전투정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는 군복을 벗게 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백선엽의 선처로 문관 신분으로 정 보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관으로 근무할 당시 박정희는 나중에 5·16군부 쿠데타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육사 8기생들을 여기에서 만나게 되었다. 즉 1천 명이 넘는 졸업생 중에서 성적 25등 내에서 선발된 김종필, 이영근, 석정선, 이병희 등 15명의 8기생들이 박정희가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되었던 것이다. 

쿠데타와 황태성 사건 

1961년 5월 16일 새벽, 일단의 무장 병력이 한강을 건너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 이들은 중앙청, 육군본부, 중앙방송국 등을 점령한 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혁명'을 알렸다. 즉 박정희를 실질적 지도자로 하는 5·16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박정희는 과거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들을 쿠데타에 참여시켰다. 이를테면 만주군관학교 선후배들, 그와 동기생들인 육사 2기생들, 육사 중대장 시절 그가 가르쳤던 육사 5기생들, 그리고 그가 전쟁 말기 포병으로 전과하면서 형성된 포병 인맥들 등이 그들이다. 여하튼 3천여 명의 소수 병력으로 감행된 5·16군부 쿠데타는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게 된다. 2년간의 군정을 거친 후 대통령에 입후보한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963년 12월 14일 북에서 내려왔던 황태성이 전격적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황태성을 둘러싼 논란은 민정당의 윤보선(尹潽善) 대통령 후보가 유세 과정에서, 공화당이 간첩 황태성의 자금으로 사전 조직되었고 공화당 요원들이 황태성에 의해 밀봉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과거 여수·순천 사건에 관련이 있었다는 '사상논쟁'이 이미 윤보선에 의해 제기된 마당에, 황태성을 둘러싼 이러한 논란은 또다시 박정희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황태성은 누구인가?

박정희와 황태성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경북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같이 했던 인물로 황태성은 주로 김천에서, 박상희는 주로 구미에서 활동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황태성이 박상희의 중매를 섰을 정도로 가까웠다. 황태성이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던 시절, 박정희는 형의 친구인 황태성에게 자신의 진로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가 일제의 만주 육사로 가기로 결정함으로써 황태성과 박정희의 관계는 이후 단절되었다. 그후 해방이 된 이듬해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인민항쟁이 발생하자 그 와중에 박상희는 경찰에 의해 피살당했고, 황태성은 항쟁의 주모자로 몰려 피신했다가 월북하게 되었다. 북으로 올라간 황태성은 북에서 부무역상까지 올라갔다. 

박정희와 황태성의 관계는 남한에서 5·16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자 다시 한 번 운명적으로 얽히게 되었다. 남한에서 예상하지 못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자 북한의 대남전략은 잠시 혼선을 빚었다. 미국의 배후조정 없이도 쿠데타를 일으켜 새 군사 정권을 창출했던 쿠데타 세력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주목했던 그들은 남한의 쿠데타 세력과 접촉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비밀리에 남북 대화를 모색했고, 그 결과 서해 도서지방에서 몇 차례에 걸쳐 남북간의 비밀 접촉이 이루어졌다.  

한편 북한은 남북통일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과거 박정희와 관계가 있었던 황태성을 밀사로 파견했다. 당시 신장도 하나 떼낼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황태성은 그 일에 자원했다 한다. 남으로 내려온 황태성은 과거 자신이 중매했던 박상희의 처 조기분을 통해 박정희 및 그녀의 사위가 된 김종필과 접촉하고자 했다. 그러나 추후 발표에 의하면, 그는 '조 여사의 고발'로 남한 당국에 의해 1961년 10월 20일 검거되었다 한다. 

황태성이 접촉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검거되었는지, 아니면 접촉을 하다가 검거되었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검거된 황태성은 한동안 반도 호텔에 머물다가 그해 12월 초 서대문 형무소로 넘겨졌다. 그러나 문제는 보다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황태성에 관한 비밀이 시중에 누설되어 공화당 사전 조직설과 연계되고, 황태성에 대한 재판이 군법회의와 대법원을 왔다갔다하는 사이 그 사건의 전모가 미 정보당국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박정희의 사상적 배경을 의심쩍어 하던 미군정 당국은 황태성의 인도를 요구하고 나섰다. 사태가 이렇게 확산되자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대법원에서 황태성에 대한 사형 판결이 확정되자마자 그를 사형에 처해 버렸던 것이다. 

일제하의 젊은 시절에 5년여의 감옥 생활을 감수하며 항일 운동에 투신했고, 말년에는 병든 몸으로 통일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으로 내려왔던 황태성, 반면 일제하 젊은 시절에 자신의 입신을 위해 일본 근대에 투신했고 해방 이후에는 쿠데타의 꿈을 실현했던 박정희. 개인적인 관계로 볼 때, 박상희를 통해 서로 얽혔던 이 두 사람의 운명은 결국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악연으로 끝을 맺었다. 

경제성장과 장기독재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에 뒤이어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19년 동안 한국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가 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가 재임중 달성한 이러한 비약적인 경제성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외향적 경제성장을 추구함에 따라 우리가 잃은 것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전반 박 정권은 한일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경제개발계획에 충당할 자금이 긴급히 필요했던 박 정권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청구권과 경제 협력의 명분으로 무상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의 돈으로 이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이러한 굴욕 외교에 학생들과 야당은 박 정권이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례식에 처하는 등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했지만 박 정권은 계엄령을 발동하여 이를 억눌러 버렸다. 차관은 나중에 갚는 것이니 실제로는 3억 불을 얻고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을 헐값으로 넘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제성장 자금을 위해 1960년대 중후반에 취해진 또 하나의 조치가 한국군의 월남 파병이었다. 대략 1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되는 '월남특수(特需)'는 한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1만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월남 파병 역시 그 명분에서 볼 때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되지 못했다. 자신들의 독립을 되찾고자 1세기에 걸쳐 투쟁해 왔던 월남인들의 고난은 차치하고라도 미국 내에서조차 반전 운동을 일으킬 만큼 문제가 많았던 월남전에 한국군이 사실상 '미군의 용병'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은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호도하기에는 너무나 명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남북간에 첨예한 대림을 불러일으켜 1960년대 후반의 남북 관계를 전쟁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 과정에서 박 정권은 다수의 공안 사건들을 터뜨렸고 북한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EC 121기 격추 사건, 청와대 습격 사건, 울진 삼척 습격 사건 등을 일으켰다. 

한일회담이나 월남 파병과 관련하여 이제는 정신대 문제나 고엽제(枯葉劑) 후유증 같은 일만이 우리에게 남겨졌지만, 당시 급속히 추진된 외향적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민족적 자존심의 상실과 남북 관계의 악화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희생이 뒤따랐던 것이다. 다른 한편, 경제성장이 초래한 더욱 커다란 문제점은 그것이 우리 사회의 계급적, 지역적 분열을 가속화시켰다는 점이다. 1970년 11월 어느 날 서울 청계천에서 백주 대낮에 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 외치며 분신했다. 바로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평범하고 당연한 요구였다. 그러나 1960년대 경제성장 10년의 뒤안에는 10대의 어린 나이로 하루 14시간 이상씩 열악한 근로 조건에서 일해야 하는,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이 받는 임금은 최저생계비의 3분의 1도 안 되는 그런 희생들이 있었다. 

경제성장의 숨은 영웅들은 진정 그들이었다. 경제성장은 이렇듯 사회의 계급적 격차를 확대시켰다.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불균등하게 진행된 경제개발은 지역적 소외감을 초래했고, 이는 이후 광주민중항쟁의 한 요인이 되었고 지금도 지역 정치의 폐단을 남기고 있다. 

쓰러진 '유신의 심장'

1967년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어렵지 않게 다시 당선되었다. 1969년에 들어 3선 개헌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3선 개헌안이 확정됨에 따라 박정희는 1971년 4월 제7대 대선에서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즉 1960년대에 이룩한 고도성장을 인질로 해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위해 장기 독재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유신 독재하의 사회는 남발되는 긴급조치와 빈틈없는 통제로 꽉 짜여진 숨막히는 사회였다. 백만인 개헌청원운동, 긴급조치 1·2호, 민청학련 사건 및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서울대 김상진의 할복자살, 긴급조치 9호, 민주구국선언, YH사건,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과 제명 조치, 부마항쟁이 이어졌다. 그 중에서 박 정권이 취한 가장 야만적인 조치는 민청학련의 ‘국가변란기도'를 공산주의자들의 사주와 연관시키기 위해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의 관련자 8명을 대법원의 기각 결정 하루만에 사형시켜 버린 일이었다. 

1979년 10월26일, 장기 독재의 길에서 갈 데까지 간 박정희는 민주화 운동의 대응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숨을 거두었다. 김재규의 표현대로 그것은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총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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