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제3절 프랑스에서 전개된 인민전선운동(Ⅰ)

부 제목: 
-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57 -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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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1장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위기와 노동자 계급의 통일 행동
제12장 소비에트 러시아의 방위와 ‘신경제정책’
제13장 1920∼1930년대 노동상황과 자본주의 일시적 안정기의 노동운동
제14장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 코민테른 활동
제15장 1929~1933년의 세계경제공항과 노동자 투쟁
제16장 파시즘과 전쟁 위협에 대한 투쟁
    제3절 프랑스에서 전개된 인민전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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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선은 수세적인 재조직화였다. 파시즘의 확산을 막는 장애물을 세우고, 파시즘이 승리한 곳에서는 저항을 고무하기 위한. 인민전선은 좌파의 공통 지반을 찾음으로써 공산당의 고립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폭넓은 협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원칙보다는 민주주의 원칙이 필요했다. 노동자계급 정당이 혼자 힘으로 승리할 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좌파가 민주적인 신뢰를 확립하기만 하면 연합이 기존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주의 이행의 토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인민전선 전략은 이러한 또 다른 미래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인민전선 전략은 ‘일시적인 수세적 전술 이상의, 궁극적으로 패배를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것은 또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세심하게 고려된 전략이었다(Hobsbawm)’.”

                                                ―일리. 

극우 반동의 폭동과 노동자계급의 총파업

1930년대는 국내 안정과 강대국으로서 대외적 위치라는 두 가지 믿음에 관해 갖가지 환상이 무너진 가혹한 침체기였습니다. 이러한 위기 국면은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보다는 프랑스에 늦게 찾아왔죠. 1930년에는 프랑스가 오히려 놀랍게도 번영을 구가하였습니다. 푸앵카레의 안정책, 그 가운데 프랑화의 평가절하는 세계시장에서 프랑스 상품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영국 화폐의 평가절하가 시행되었던 1931년 9월까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거죠. 이처럼 경제위기가 파산이나 생산절감, 그리고 대량 실업의 형태로 다가왔을 때도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처럼 심각한 국면을 맞지 않았어요. 그러나 위기는 오히려 프랑스에서 더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공황에서 빠져나오는 데도 느린 편이었습니다. 1935년 중반까지는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회복 추세에 들어섰던 데 비해 프랑스에서 진행된 경기침체는 1938년까지 계속되었고, 1939년에야 1929년의 생산지수 수준을 회복할 수 있었죠(프라이스, 2001: 299~300). 

프랑스의 1930년대는 끝이 보이지 않던 위기의 10년이었습니다. 프랑스 공업생산의 일반지수는 1930년의 108.4 포인트(1928년=100)에서 1935년의 79.5 포인트로 떨어졌죠. 1929년과 경기가 최악 상태였던 1935년 봄 사이에 철강생산과 같은 중화학공업의 핵심 분야는 40%의 감소를 경험했습니다. 또 이 기간에 총 화폐가치는 46%, 주식가치는 60%나 하락하였죠. 

실업자 통계는 자료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부정확했어요. 총 실업자 수가 1933년의 경우 100만 명을 넘어섰고, 1935년에는 200만 명 이상이었다는 통계(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24)와 ‘일자리를 못 구한 노동자’의 수를 1931년에 45만 3,000명, 1936년에 86만 4,000명으로 집계되었다는 소비(Sauvy, A)의 설명(이용우, 1993: 15), 전체 인구의 약 2.6%가 실업자였다는 통계(프라이스, 2001: 300) 등이 그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통계수치는 전체 노동력에서 노령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를 제외했고, 외국인 노동자를 본국으로 송환했기 때문에 수치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분 실업자’도 집계되지 않은 것이었죠. 

수출은 급격하게 감소했는데, 이것은 프랑스 정부가 국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경쟁적인 평가절하를 되도록 회피하고자 한 데 따른 결과였습니다. 1929~1935년 사이에 수출은 수량 측면에서는 44%, 가치 측면에서는 놀랍게도 82%나 감소하였습니다. 

당시 경제위기가 불러일으킨 파장은 사회집단에 따라 큰 편차를 나타냈어요.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집단은 소농들이었는데, 농업 분야의 실질수입이 32%나 하락하였죠. 산업노동자들 대다수는 비록 명목임금 하락과 실업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물가 하락에 따른 실질임금의 상승을 경험했어요. 기업주들의 순이익은 약 18% 하락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소규모 제조업자와 상점주들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회․정치적 긴장이 점점 심화되었던 이 시기에도 부유층은 대체로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죠(프라이스, 2001: 300~303).

이와 같은 경제정세에서도 당시까지는 프랑스의 대(大)부르주아지 사이에서 극심한 위기감이 감돌지는 않았어요. 더구나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독일의 지배적 과두정치(寡頭政治)와는 달리 자신의 계급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의회제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을 잘 이용하고 있었죠. 계급의 이해관계 측면에서 본다면, 프랑스의 독점부르주아지의 유력 집단은 파시즘 조류에 지지를 보낼 수 있었지만, 프티부르주아지의 민족 감정은 파시즘의 대중적 확산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25).

 

한편, 1930년대의 경제정세는 프랑스 공산당(Parti Communiste Français, PCF)으로 하여금 ‘요구투쟁’을 강화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마침 1932년 8월에 열린 제12차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확대총회는 요구투쟁을 특히 강조했죠. 이 회의에서 쿠시넨은 프랑스 공산당의 1차적 과업을 “노동자, 농민 대중의 일상적 이익을 지키는 데(임금인하 반대, 사회보험 찬성, 실업자 즉각적 구호 찬성, 과중한 세금 반대) 관심을 돌리는 것”으로 설정하였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토레즈는 노동조합 분야, 실업자 보호, 지방자치 분야, 농민문제 등 대중정책에 관한 상세한 강령을 작성했으며, 노동자들이 직면한 모든 문제, 즉 사회입법, 산업재해, 질병, 연금 등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당원들에게 촉구했습니다. 또 다음 해 7월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뒤클로는 “우리의 노력을 경제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투쟁, 특히 철도 노동자, 광산 노동자, 금속 노동자, 섬유 노동자들의 투쟁에 집중하는 것이 당장의 긴급한 문제”라고 주장했죠. 이러한 요구투쟁은 1934년 2월 행동 이후에도 계속해서 추진되었어요. 즉 요구투쟁은 ‘선행적 변화’에 그친 것이 아니라 1934년의 ‘통일전선’ 성립에서도 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이용우, 1993: 16~18). 

경제 위기와 경기침체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치적 불안정은 점점 커졌어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평화기에 내각은 42번이나 교체되었죠. 당시의 선거제도는 농촌과 소도시의 선거구민에게 불리했습니다. 이들은 사회개혁이 주로 도시 노동자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 인식해 대체로 사회개혁과 필요한 세금 부과에 반대했죠. 이들은 ‘급진당(Parti radical)’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급진당이 비록 좌파 정당임을 자처했지만 사회․경제 문제에 대해 사실상 변함없이 보수성을 유지했고, 급진당은 내각 구성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32년 5월에 실시한 의회 선거에서도 급진당 157명과 사회당 129명을 포함하여 좌파 의원은 334명이나 당선되었으며, 우파는 이보다 적은 230명이 당선되었습니다. 내각은 사회당(Parti Socialiste Français, Section Française de I'Internationle ouvriére: SFIO)의 입각 거부로 연립을 이루지 못한 채, 급진당 중심의 정부가 출범했죠. 급진당과 사회당 사이의 정치적 동맹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를 계속하였습니다. 양대 정당은 공황 때문에 발생한 적자 재정 문제를 놓고 심하게 충돌했으며, 이에 따라 1년 반 동안 내각이 네 번이나 바뀌기도 했어요. 급진당은 전통적인 금융관행과 사업 신용 회복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보수파들만큼이나 예산의 균형을 맞추려고 정부 지출을 줄이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에 반해 사회당 측은 국민경제를 활성화하여 국고 수입을 늘리자고 주장함으로써 날카로운 의견대립을 보였던 거죠. 

잇따른 내각 교체와 정부의 재정 정책의 혼선, 빈발하는 금융 부정사건 등은 ‘부패한 의회주의’에 대한 깊은 실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 공황의 발생과 이에 대한 정부의 잘못된 대응책은 도시의 중간층과 농민들로 하여금 정부에 대해 등을 돌리게 만들었죠. 중간계층들, 더구나 부유하면서도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지속되는 위기감, 수입과 지위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공포, 그리고 국제무대에서 프랑스가 점차 약화되고 있다는 인식 때문에 자신감을 크게 잃었으며,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까지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강하고 권위적인 정부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결국 우익이 부르짖는 ‘도덕적 질서’의 촉구가 민족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 그리고 반(反)볼셰비즘을 결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죠. 

이러한 상황은 일반적으로 ‘리그(league)’로 통칭되는 각종 극우단체들이 날뛸 수 있는 바탕 구실을 하였습니다. 1924년에 피에르 태탱제(Pierre Taittinger)가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여 제복을 입고 가두시위를 벌이는 ‘애국청년단’(Jeunesses patriotes)을 결성했는데, 이러한 조직체는 10여 년 동안 점점 더 폭넓은 지지를 획득하였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극우단체는 ‘불의 십자가’였어요. 이 조직은 원래 노병들의 조직이었으나 점점 중간계층 사이에까지 광범하게 확산되어 전성기에는 회원 15만 명을 포섭했습니다. 이 조직은 철저한 반공주의, 반사회주의를 특징으로 했으며, 전통적인 가톨릭 보수주의와 가까웠고 파시즘의 이상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기존 사회의 계급제도를 존중하였죠. 이러한 단체들은 1880년대의 극단적인 민족주의 조직들의 후예로서, 그들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비효율적이며 부패하고 무정부주의적’인 공화정을 대체할 권위주의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습니다(프라이스, 2001: 307~308).

1933년의 사회적 상황은 “정부가 더 이상 통치할 수 없고 권력이 거리로 이동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혼란스러웠어요. 공무원들은 봉급 인하에 항의하여 거리로 몰려나왔고, 소상인들은 2월과 5월에 무거운 세금 부과에 대한 항의 표시로 가게 문을 닫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같은 해 6월과 그해 말에는 ‘기아 행진’이 벌어졌고, 1932년 9월부터 1933년 9월까지 약 30만 명에 이르는 농민들이 농지 차압에 대한 반대 시위를 무려 200여 번이나 벌였죠. 몇몇 지역에서는 극우운동 가운데 프랑스식 파시즘의 특징에 가장 가까운 농촌운동(kergoat)으로 ‘도제르(Dorgéres)주의’ 운동이 번성하였습니다(이용우, 1993: 25).

이와 같은 정세에서 ‘정치적 폭발(l'explosion politique)’로 표현되는 극심한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930년대의 경제위기는 프티부르주아에 대해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안겨주었고, 그것은 파시즘의 대두를 위해 유리한 사회 조건들을 조성하는 요인이 되었죠. 또 국민연합 정부의 맹목적인 디플레이션 정책과 그것에 대한 하원의 반발, 그리고 그와 같은 요인들에 따른 내각의 불안정도 극우세력들이 날뛸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만들었습니다.

1934년 초 ‘스타비스키 사건(l’affaire Stavisky)’이 발생했어요. 이것은 귀화한 우크라이나 출신 유태인의 금융부정에 정치지도자들이 연루된 사건으로, 공화정 자체에 대한 도덕적 위신을 크게 떨어트렸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공화정의 타락상은 파시스트 세력들에게 공화정 자체의 전복을 꿈꿀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죠. 극우운동은 외국인 혐오증, 반유태주의, 반의회주의, 공화정에 대한 증오 등을 표방하였습니다. 1월 들어 프랑스행동단(l’Action Française), 애국청년단(Jeunesses Patriotes), 프랑스연대단(Solidarité Française), 불의 십자가(les Croix de Feu) 등의 파시스트 리그들은 시위를 잇달아 벌였어요. 1월 한 달 사이에 가두시위가 10건 정도 발생했는데, 이러한 가두시위는 대체로 폭력 행위를 수반하였습니다. 

1월27일 쇼탕 내각이 사퇴하고 3일 뒤 달라디에가 새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달라디에 내각이 신임 투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회당의 지지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달라디에는 극우파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비난 받고 있던 파리 경찰국장 쉬아프(Chiappe)를 해임했죠. 달라디에의 이러한 조치는 극우단체들의 ‘2월 6일 폭력행동’을 촉발시킨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각종 극우단체들은 새로 구성된 달라디에 내각이 하원의 신임을 묻는 날인 2월6일, 내각에 반대하는 가두시위를 벌일 것을 촉구했어요. 이날 하원 주변에서 시위대와 공권력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경찰 저지선을 뚫다가 시위자 15명이 죽고, 1,435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2월6일 사건은 파리 코뮌 이래 최대의 유혈 사태였죠(이용우, 1993: 26). 

그 다음날 달라디에는 물러나고 그 뒤를 이어 2월9일 두메르그(Doumergue, G)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두메르그 내각의 각료 20명 가운데 급진당 소속은 6명이었고, 나머지 13명은 우익 인사들이었죠. 내각에는 타르디에(Tardieu, A)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선임 내각의 일원으로서 우익 동맹조직들을 지원해준 인물이었습니다.

한편, 사회당은 8일 실행하기로 한 시위 계획을 취소했으며,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은 2월 12일 총파업을 결정하고 사회당, 사회주의공화당, 프롤레타리아통일당, 무정부주의연합, 인권동맹, 노동자․농민연맹, 생산노동자협회 자문회의를 초청하였습니다. CGT는 공산당이 달라디에 내각에 반대투표를 했다는 이유로, 급진당이 두메르그 내각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공산당과 급진당을 초청에서 제외하였죠. 공산당은 달라디에 정부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파시즘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으므로, 2월6일의 시위에서 드러난 적은 파시스트들뿐만 아니라 정부 자신이었다고 규정했어요.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의 공동행동 제의를 거부하였습니다(이용우, 1993: 28).

공산당은 사회당과 CGT와는 별도로 2월9일 단독 시위를 계획했어요. 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의회 해산과 자유의 존중을 요구하기 위해 2월9일 오후 8시에 공화국 광장에서 시위를 벌일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호소문은 “자본의 유혈 독재 타도! 노동자 ․농민 정부 만세!”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죠. 정부가 금지한 2월9일의 시위는 파리의 노동자 약 6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공화국 광장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위대와 이를 막으려는 경찰대 사이에 격렬한 유혈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 9명이 사망하고 1,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습니다. 이날의 시위는 3일 뒤에 감행된 총파업과 시위를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죠. 

1934년 2월12일은 프랑스 사회․정치사에서 중대한 날이었습니다. CGT의 총파업과 시위 계획에 사회당은 물론이고 프랑스공산당과 ‘통일노동총동맹’(Conféderation Générale du Travail Unitaire: CGTU)도 적극 합류하였죠. CGT가 주도한 총파업에는 파리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보르도, 낭트, 리모쥬, 툴루즈 등지의 노동자들이 대거 참가하였습니다. 우편, 가스, 국영기업, 건설부문 등에서는 거의 전면 파업이 벌어졌어요. 운수부문과 금속산업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습니다. 2월12일 총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수는 전국에 걸쳐 450만 명에 이르렀고, 파리에서만도 노동자 100만 명이 총파업에 참가했던 것으로 추산되었죠.

또, 이 날 전개된 사회당 주도의 시위운동도 큰 호응을 얻었어요. 여기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가했고, 파리에서도 1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하여 반파쇼 투쟁을 벌였죠. 더구나 이 날의 시위에서는 공산당과 사회당의 대열이 자연스럽게 합류하였고, 그 대열 속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의 통합을 요구하는 대중의 열망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습니다. 당시의 한 신문은 2월12일 나시옹 광장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죠. 

“각기 다른 길로부터 도착한 두 당 ―사회당과 공산당―의 시위 대열이 맞닥뜨리게 되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과 불안감이 스쳐간 뒤에 이 만남은 각 정당과 노조의 지도자들을 경악시킬 만큼 열광적인 감격을 불러일으키고 폭발적인 탄성과 환희를 분출시켰다. …… 박수와 노래, 그리고 “통합!”, “통합!”이라는 구호가 이 대중들로부터 터져 나왔다. 인민전선이 우리의 눈앞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환희와 질서 속에서.”

이날의 총파업과 시위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지방에서 행해진 파업과 시위에서는 행동통일의 열기가 더욱 높았습니다. 파리와 교외를 제외하고 약 346개 지역에서 집회와 시위가 전개되었고, 그 가운데 적어도 161곳에서 행동통일이 이루어졌죠. 이것은 ‘하층 통일전선’이 ‘상층 통일전선’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이용우, 1993: 35).

노동자계급이 주도한 ‘2월 행동’은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파시즘의 위협이 격퇴되었고, 국내 반동세력을 결집시키려는 책동을 무산시켰죠. 프랑스를 파시스트 열강 진영으로 끌어들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반대 거점으로 삼고자 하였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2월 행동은 인민전선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행동은 국제노동운동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29). 

이와 같이 반파시즘 투쟁을 함께 전개하는 가운데 노동조합운동은 하부에서부터 행동통일을 할 수 있었고, 이러한 행동이 1936년 3월 양대 노동조합운동의 통합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노동운동과 정당 사이의 공동 행동이 자주 이루어짐으로써 1935년 7월 인민전선의 대규모 시위가 진보세력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가운데 실행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음 해 인민전선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죠(박단, 1997: 120).

2월 투쟁 이후 프랑스 전역에 걸쳐 수많은 반파쇼(투쟁)위원회가 다양한 형태로 설립되었는데, 1934년 3월부터 5월까지 247개의 반파쇼투쟁위원회들이 탄생했어요. 이러한 위원회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을 포괄하였고 또 가장 영향력 있는 형태는 반파쇼지식인감시위원회(Comité de Vigilance des Intellectuels Anti-fascistes: CVIA)였습니다. 이 위원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학교수, 작가, 언론인, 노조 간부, 사회당 당원, 공산당 당원 등 광범위한 구성을 나타냈죠. 감시위원회를 조직하고 발전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조직은 사회당이었고, 공산당은 ‘암스테르담―플레이엘 운동’을 반파쇼 세력의 중심축으로 설정하였습니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위원회의 형태를 통해서만 전개된 것은 아니었어요. 반파시즘운동은 정당을 비롯한 정치단체나 노동단체들의 가두시위 형태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1934년 2월12일부터 1936년 5월5일까지 1,063건의 시위, 행진, 소요가 있었죠(이용우, 1993: 46).

반파시즘 대중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극우단체들은 “집회의 권리와 자유 발언권이 실질적으로 억압되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두메르그 총리에게 ‘공화주의자들의 귀중한 권리’를 보호해줄 것을 호소했다는 사실은 반파쇼운동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는가를 잘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1934년 4월 중순에는 공무원들이 공무원 8만 5천여 명의 해고와 27억 6천만 프랑의 예산삭감에 항의하여 대규모 파업과 시위를 벌였습니다. 또 4월5일과 7일에는 파리 전신국 노동자들이 봉급과 연금 인하에 반대하는 파업을 감행하였고, 4월15일에는 CGT 공무원 연맹이 전국의 140개 도시에서 포고령에 반대하는 안건을 행정관청에 제출하기 위한 집회와 행진을 벌였습니다. 

한편, 몇몇 극우단체들이 5월 들어 국민전선(Front National)을 구성하였고, 그 조직의 첫 번째 사업으로 5월13일의 잔 다르크 제(祭) 시위를 대규모로 벌일 것을 계획했죠. 극우단체들의 이러한 전면적인 반격은 오히려 민중세력의 반파시즘 운동을 더욱 촉진하였어요(이용우, 1993: 49). 연례 행사였던 파리 코뮌 희생자 추모행진(5월27일)에 제1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던 것도 그러한 사실을 잘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2월 사건 이후 전개된 이와 같은 일련의 투쟁 성과들은 결국 인민전선(Front Populaire) 형성으로 이어졌죠. 인민전선은 1935년 7월25일부터 8월20일까지 코민테른 제7회 대회에서 결정된 전술의 명칭인 동시에, 프랑스에서 실제로 전개되었던 ‘운동’, ‘정당 사이의 동맹’, ‘정부’, 나아가 하나의 ‘시기’를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합니다(이용우, 1993: 1).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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