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제3절 프랑스에서 전개된 인민전선운동

부 제목: 
-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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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선 정권의 탄생

인민전선의 활동이 추진되는 가운데, 1936년 4월에 의회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인민전선을 구성한 주요 3당은 선거 블록을 형성하여 공통 강령을 제시했죠. 이는 전 세계가 당면한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책으로서 소련이 실험하고 있는 계획경제를 강조했습니다. 강령은 ‘신성동맹’에 대해 압력을 가하고, 공화제를 수호하는 제안을 포함했습니다. 또 강령은 기존의 디플레이션 정책을 비판하면서 실업을 줄이고 노동자계급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공공사업 계획, 실업수당 인상,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정책을 내놓았죠. 

강령은 농산물 시장에 대해 정부가 개입하여 가격을 인상하는 방법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무기산업과 프랑스 은행의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이것은 핵심적 보수파 압력집단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죠. 이러한 강령은 사회개혁을 실천하는 동시에 급진당의 지지자들인 프티 부르주아지를 보호해주기 위한 정책들이었습니다.

좌파 정당들의 이런 강령에 대해 보수파의 ‘공포 정치’ 공세도 만만치 않았어요.
 

“만약 인민전선이 승리한다면 자본의 해외유출이 뒤따를 것이고, 평가절하는 완전 파산으로 이끌 것이며, 무정부 상태가 오면서 전쟁이 발발할 것인데, 이는 인민전선의 배후에 모스크바의 그림자가 숨어있기 때문이다(프라이스, 2001: 313~314).”

1936년 4월의 1차 선거 결과는 좌파연합에게 그다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민전선은 542만 표를 획득했는데, 이것은 1932년에 획득했던 것보다 불과 30만 표 더 많을 뿐이었죠. 5월3일 치러지는 2차 투표에서는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단일 후보에게 표를 던지도록 유도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었어요. 그 결과 인민전선은 의석 367개를 확보했고, 우익 정당들은 222석을 획득하는 데 그쳤습니다. 

인민전선은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공고히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중간계급 하층, 특히 남부와 농촌에서 많은 표를 획득했습니다. 비록 유권자의 선택이 인민전선 쪽으로 이동함으로써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대표를 의회에서 각각 10명과 97명에서 72명과 146명으로 늘렸지만, 이것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연합 세력인 급진파를 희생시킨 대가(159명에서 116명으로 감소)였습니다(프라이스, 2001: 314~315).

드디어 1936년 6월4일 레옹 블룸(Léon Blum)을 수반으로 하는 최초의 인민전선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내각은 사회당과 급진당만으로 구성되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정부 밖에 남아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기로 약속했죠.

그런데 제1차 인민전선 정부의 출범을 바로 눈앞에 두었던 시점인 1936년 5월 중순, 공장 점거를 수반한 전례 없는 대규모 파업운동이 일어났어요. 1936년 1월부터 5월까지는 매월 평균 파업 건수는 약 45건 정도였고, 파업참가자 수는 9,000명에서 많게는 1만 4,000명 정도였습니다. 6월 들어 파업 건수는 1만 2,142건, 파업참가자 수는 183만 938명이었고, 공장 점거 파업 건수는 8,941건(전체 파업 건수의 74%)으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7월의 경우 파업 건수는 1,751건이었고, 파업참가자 수는 18만 1,471명이었죠.
 

인민전선 정부의 출범을 앞 둔 시점에서 노동자계급이 대규모 파업을 제기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와 관련해 제기되는 것은 1920년대의 ‘제2차 산업혁명’ 과정 속에서 기업집중, 기계화, ‘노동의 과학적 조직’ 등에 따른 누적된 불만, 대공황에 따른 더욱 심화된 경제적 고통, 1934년 2월의 정치위기를 계기로 분출했던 진보 세력의 반파쇼투쟁, 인민전선의 성립과 노동조합운동의 통합, 1936년 하원 선거에서 획득한 인민전선의 승리 등입니다. 더구나 노동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파업에 대해 더 이상 이전과 같이 물리력을 동원한 진압은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되었고, 그러한 전망이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파업이라는 직접 행동으로 나서게 했던 추동력으로 작용했죠(문선모, 1990: 124, 143).


1936년 5~6월 파업은 몇 가지 주요 특징을 나타냈습니다. 5~6월 파업운동은 역사상 유례없는 폭발성을 드러냈고, ‘근대적 공장 프롤레타리아트’가 파업 참가자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공장 점거라는 새로운 투쟁 형태를 취했죠. 파업운동에서 제기된 요구는 경제적 요구와 노동조합 권리에 집중되었지만, 대규모 파업투쟁은 어차피 정치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5~6월 파업 투쟁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가져다주었어요. 노동조합과 기업주 단체 사이에 체결된 ‘마티뇽 협정’은 임금인상을 비롯한 노동조건 개선과 노동조합의 기본 권리를 보장했습니다. 뒤이어 인민전선 정부는 주 40시간 노동일제와 유급휴가제, 단체교섭권의 보장과 단체협약 효력 확장제도 도입, 사회보험제도의 개선을 위한 입법화를 추진했습니다. 

5~6월 파업운동은 인민전선 정부나 노동자계급에 대해 조금도 양보의 의사가 없었던 기업가들을 굴복시킴으로써 블룸 정부가 사회・경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죠. 이 밖에도 5~6월 파업투쟁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은 의식 향상과 조직의 확대 및 강화를 이룩할 수 있었고, 사회당과 공산당의 조직 역량이 신장된 것도 파업운동의 성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티뇽 협정 체결

5~6월 파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1936년 6월 7~8일에 걸쳐 정부의 중재로 CGT와 프랑스 생산총연맹(Confédération Générale de la Production Française: CGPF)은 오텔마티뇽(Hôtel Matignon: 파리의 총리 공관)에서 ‘마티뇽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협정은 7개 항으로 되어 있으며,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단체협약 즉시 체결, 둘째, 노동조합 가입의 자유로운 의사와 권리 인정, 셋째, 임금인상은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에 따라 7~15% 내에서 결정하고 각 공장은 총 12%를 넘지 않을 것, 그리고 지역별 또는 범주별로 최저임금 선을 정하여 ‘비정상적으로 낮은 임금’을 재조정할 것, 넷째, 종업원 10인 이상 공장에서는 노동대표제를 확립하여 노동조건에 대한 노동자들의 개별 요구사항들을 수시로 기업가에게 전달하도록 하는 한편, 각종 노동관계 법령의 준수 여부를 감시하도록 할 것, 다섯째, 파업권을 인정할 것, 여섯째, 노동총연맹 대표위원회는 위의 협정들을 인정하고 그 적용을 위한 개별 협상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노동자들에게 조업 재개를 명할 의무를 질 것 등입니다. 

마티뇽 협정은 1918~1919년에 유럽 노동조합운동이 획득하였던 중대한 성과를 떠올리게 하는 노동자계급의 보기 드문 승리였어요. 이 협정은 한꺼번에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의 영향력을 크게 신장시켰으며, 작업장 대표를 제도화했고, 인민전선 정부로 하여금 사회개혁을 서둘도록 이끌었죠. 

그것은 새로운 출발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출발은 세 가지 계기를 수반하였죠. 첫째, 프랑스 노동조합운동의 약진입니다.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은 국가적 차원에서 정당한 발언권을 획득하였습니다. 또 노동조합 조합원의 수도 1년 만에 전례 없는 규모로 확대되어, 파업 시작 당시 약 77만 8,000명이던 것이 1937년 3월에는 400만 명에 이르렀죠. 


둘째, 인민전선 정부가 사회개혁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우익집단을 불법화하였고, 애초에 내세운 강령을 바로 실천에 옮겼죠. 

셋째, 노동자계급과 진보 정치세력이 사회・정치적으로 크게 진출하였습니다. 1936년 7월14일 열린 집회에서는 10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거리 행진을 거행하였고, 유급휴가 제도에 따라 지방과 해변으로 몰려가게 된 노동자들은 기존의 사회적 특권 지형을 흔들어놓았습니다(일리, 2008: 492~493).

마티뇽 협정의 체결에도 5~6월 파업운동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어요. 마티뇽 협정이 곧바로 효력을 갖고 전국의 모든 기업들에서 다 같이 시행될 수 있는 법령과도 같은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파업운동은 노동 관련 법안들이 국회를 통과하고 금속산업의 단체협약이 채결되었던 6월12일을 고비로 빠르게 진정 국면에 들어갔죠(문선모, 1990: 191).

인민전선 정부는 마티뇽 협정을 바탕으로 하여 국정 개혁 프로그램을 6월20일 국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유급휴가(연 2주간)에 관한 법률, 주 40시간 노동법, 의무적 단체협약법이 채택되었고, 고령자와 상이군인의 연금보장이 개선되었으며, 공공사업비가 증액되었고 실업보험제도가 개선되었습니다. 

프티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에 맞는 법률도 제정되었어요. 농민・소상인・수공업자에 대해서는 특별융자제도가 도입되었고, 이들에게는 납세 유예가 인정되었죠. 농민들을 위해서는 농산물 매입 가격이 인상되었습니다. 프랑스 은행의 개혁이 법률화되었는데, ‘200 가족’의 권리가 제한되었고, 새로 창설된 은행 이사회에 정부와 경제 그리고 사회단체의 대표가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군수산업의 최대 기업을 국유화하는 법률이 제정되었죠. 그리고 6월18일 정부는 이전에 공포했던 파시스트 단체 금지에 관한 법률을 재확인하였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35). 

인민전선 정부의 권력 장악과 5~6월 총파업, 그리고 마티뇽 협정 체결 등은 인민대중의 정치 역량 성장을 촉진함과 동시에,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새롭고도 복잡한 임무를 제기하였습니다. 그것은 극좌주의와 개량주의 편향을 극복하는 일이었죠. 

더욱이 1936년 5~6월에 결행된 총파업 승리는 일부 노동자들 사이에 ‘이제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극좌적인 선동에 영향을 받는 위험스러운 인식을 낳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선동은 노동자계급을 노동자계급이 아닌 동맹자들로부터 고립시키고, 결국에는 패배를 안겨주게 될 뿐이었죠. 프랑스 공산당은 마티뇽 협정 체결 후 노동자들에게 파업 중지를 호소하였습니다. 

한편, 대중투쟁을 개량주의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경향도 극복의 대상이었어요. 인민전선 정부 성립과 최초의 성공은 노동자들 일부 사이에 이 정부의 권력 장악에 따라 마치 대중투쟁이 불필요하게 된 것처럼 인식하는 개량주의적 환상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인민전선 정권 체제에서도 노동운동을 비롯한 대중투쟁은 자기 책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인민전선 정권의 집권과 정책 시행이 진행되는 가운데, 인민전선 내부 노선 대립과 복잡한 국제정세는 인민전선의 활동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어요. 더구나 인민전선 정부의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에 관한 문제 해결이 중대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경제적으로 환(換)관리가 구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방대한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었고, 마티뇽 협정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기업주들의 노력은 사회적 긴장을 증대시킴과 동시에, 국제 경쟁력의 약화를 가져와 국내에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죠. 9월에 정부가 막겠다고 약속한 프랑화의 평가절하(약 30%)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복잡한 국제정세, 스페인 내전과 이탈리아・독일의 프랑코에 대한 군사지원을 둘러싸고 인민전선을 구성한 각 정당 사이의 의견 불일치는 인민전선의 활동을 혼란 상태에 빠트렸습니다. 더구나 스페인 내전 ―1936년 2월15일의 선거를 통해 출범한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에 대항해 1936년 7월17~18일에 일어난 프랑코의 쿠데타로 시작되었다.― 은 인민전선 정부의 내부 분열을 키웠죠. 

한편,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국가 사이의 동맹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스페인에서 일어난 쿠데타는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반파시즘 연대를 가져오기도 하였죠. 스페인 인민전선 정권에 대한 지원이야 말로 블룸 정부가 추구해야 할 우선 과제였다.

그런데도 블룸은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군사계약을 존중하기보다는 프랑스 외무부와 영국 정부, 행정부 내의 급진당 인사, 우익 언론 등의 압력에 굴복하여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그 대신 이탈리아와 독일이 프랑코를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제적인 ‘불간섭 조약’을 내세웠어요. 이러한 결정은 스페인 공화국에 대해서는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결정은 프랑스 인민전선의 토대를 뒤흔들었죠. 이 결정은 공산당과 진보 단체들의 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일리, 2008: 496).

인민전선 내부의 대립은 인민전선 정부의 경제정책을 둘러싸고도 발생하였죠. 블룸 정부는 신용을 회복하고 급진당 협력자들과 조성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1937년 1월 정부의 사회개혁 계획을 ‘잠시 중단’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블룸은 계속되는 재정 상태의 악화를 해결하기 위해 비상권력을 요청하였죠. 블룸의 요청은 하원에서는 통과되었으나 상원에서 결국 부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블룸은 1937년 6월20일 사임했습니다(프라이스 2001: 317~318).

인민전선 정권의 와해

블룸의 사임 이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습니다. 1937년 12월에는 대규모 파업들이 일어났죠. 굿리치(goodrich) 타이어 공장에서 파업이 발생했고, 센 지방에서는 공공서비스 부문에서 파업이 벌어졌습니다. 1938년 3~4월에는 파리 금속노동자 15만 명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1938년 11월에는 주40시간 노동을 연장하려는 기업주의 방침에 대항하는 파업이 발생하였고, 11월30일에는 총파업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죠(일리, 2008: 494). 

블룸이 물러난 뒤에도 얼마동안은 인민전선이 의회의 다수파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블룸 내각의 뒤를 이은 쇼탕(Chautemps) 급진당 내각은 인민전선 정책을 계속 시행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의회정치의 규범에 따라 행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블룸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국민통일 정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인민전선의 해체를 노리던 보수파들은 이를 즉각 반대했습니다. 블룸이 세운 제2차 인민전선 정부는 벌써 출발에서부터 오래 유지될 것 같지 않았죠. 반파시스트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좌파연합 정당들은 새 내각에 대한 신임 투표를 통과시켰지만, 르브룅(Lebrun) 대통령은 급진파 지도자 달라디에에게 사회주의자 대표를 포함시키지 않는 정부 구성을 요청하였습니다. 

1938년 9월29일 달라디에는 프랑스 정부의 이름으로 뮌헨 협정에 서명했어요. 뮌헨 협정은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직접 할양하고 폴란드와 헝가리에도 일부 영토를 할양하면서, 나머지 지역을 무방비 상태로 남겨 놓는 방식으로 히틀러의 침략을 방조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당과 급진당은 뮌헨 협정 체결에 동의했지만, 공산당은 반파시즘 통일 사상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라 하여 협정 체결에 반대했죠. 1936년의 의회 다수파는 해체되기에 이르렀고, 공산당은 야당의 처지로 돌아섰습니다. 급진당은 1938년 10월 마르세유 대회에서 인민전선과 결별한다는 결정을 채택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의 국내정책과 대외정책에서 반공주의 경향의 성장을 의미하였죠. 

이러한 상황에서 ‘방독면’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혁명행동비밀위원회’(Comité secret d' action révolutionnaire)에 속한 일단의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정부 당국은 보고조차 받지 못하였습니다. 또 반공주의 운동의 또 다른 움직임은 새로운 극우 정당 창설이었죠. 1936년 6월 다른 우익동맹들과 발맞추어 결성되었던 ‘불의 십자가’는 ‘프랑스 사회당’(Parti social français)으로 명칭을 바꾸어 당원 60~80만 명을 확보하고 ‘강력한 정부’를 요구했습니다. 한층 더 명백하게 파시스트의 특성을 갖는 ‘프랑스인민당(Parti populaire français)’은 당원 약 20만 명을 포괄했으며, 이 단체는 한 때 공산주의자였던 자크 도리오가 창설했죠(프라이스, 2001: 319~320).

이와 같은 국내 정치 정세의 불안과 계속적인 경기침체, 그리고 국제적인 정세 악화는 인민전선의 부흥을 불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위험을 점점 증대시켰어요. 더구나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폴란드가 분할되었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소련의 영향권에, 리투아니아는 독일의 영향권에 들어갔습니다. 두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사태를 피하게 된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했죠. 영국은 폴란드에 대한 안전보장 약속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드디어 9월 3일 유럽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국내외적인 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프랑스의 인민전선을 붕괴시켰습니다. 프랑스에서 형성․발전된 인민전선의 승리는 길지 않은 기간에 걸쳐 유지되었지만,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었죠. 프랑스 국내에서 전개된 인민전선운동은 프랑스 정치 정세의 변화를 주도함으로써 파시스트 독재체제를 수립하려 시도한 극우 반동세력의 기도를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중간층의 동맹을 성취하여 민주주의 제도를 지켜냈죠. 또 부르주아 제도에서도 인민전선 정부는 노동자계급과 인민대중의 노동․생활조건과 기본 권리의 개선․신장에서 큰 성과를 이룩하였어요. 이와 더불어 프랑스 인민전선운동은 국제적으로도 각국에서 행해진 반파시즘 운동에 중요한 경험과 교훈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민전선의 경험과 전통은 프랑스 노동운동과 진보적 정당의 성장․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38~339).

참고문헌

동녘 편집부, 1989, 『코민테른 자료선집 3』, 동녘.
문선모, 1990, 「1936년 5―6월 프랑스 대파업운동의 성격」 한국서양사학회, 『서양사론 제35호』.
박단, 1996,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의 통합활동(1929.10~1936.3)―철도노조연맹을 중심으로―」, 한국서양사학회, 『서양사론 제49호』
――, 1997, 「1930년대 프랑스 노동조합의 반파시즘 투쟁―단위노조 활동을 중심으로―」역사학회, 『역사학보 156집』.
이용우, 1993, 「프랑스 공산당의 변화와 인민전선의 기원」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사학과 석사학위논문. 
Eley, Geoff, 2002, Forging Democracy, Oxford University Press Inc., 유강은 옮김, 2008,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좌파의 역사』,뿌리와 이파리.
Price, Roger, 1993, A Comcise History Of Fra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김경근․서이자 옮김, 2001,『혁명과 반동의 프랑스사』, 개마고원.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The Institute of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 1985,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Problems of History and Theory, Volume 5, -Progress Publishers Mosc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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