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1929~1933년의 세계경제공황과 노동자 투쟁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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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요 자본주의 국가의 공황 극복을 위한 정책

1929~1933 년의 세계경제공황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계적 규모에서 진행된 심각한 불황이었으며, 그것은 매우 길고도 혹독한 곤궁을 빚어냈습니다.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나타난 공황은 자본주의의 자동조정 기능만으로 극복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방치했을 경우 자본주의 그 자체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민경제에 직접 개입하여 그것을 통제함으로써 공황을 극복하고 자본주의를 유지․발전시키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공황 극복을 위한 국가 개입의 형태는 나라마다 달랐죠. 그것은 특히 미국과 독일의 정부 정책이 매우 대조적인 면을 보였어요. 미국은 뉴딜(New Deal)정책을 통해 민주주의적인 전통을 살리는 가운데 유효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과소소비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독일은 전체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사회정책의 수단을 통해 실업을 줄이고 공황을 극복하려 했죠. 인민전선 체제의 프랑스는 미국과 독일의 중간적인 형태의 정책을 추구하였습니다. 즉, 프랑스 정부가 추구한 경제정책은 미국 뉴딜 정책의 축소판이었던 것에 반해, 그 기본이념은 오히려 독일의 그것에 가까웠죠. 한편, 영국의 경우, 정부의 개입 형태는 미국과 약간 달랐지만, 공황 극복의 이념은 미국의 그것과 유사했습니다(김종현, 2007: 508~509). 이제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의 공황 극복을 위한 정책과 경제회복 과정을 미국의 뉴딜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미국

세계경제공황 발발 당시의 후버(Hoover)정권(1929년 3월~1933년 3월)은 정부의 권한으로 경제에 개입하여 간섭하고 통제하거나 실업자와 빈민을 구제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등 공황대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하는 것을 자유방임주의를 해치고 미국의 전통에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또 정부가 시행하는 경제 관리는 필연적으로 모든 자유의 바탕이 되는 경제적인 자유를 파괴하게 되고, 결국 그것은 사회주의적인 방법이 되는 것이며 중간계층을 파시즘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경고하였죠. 결국 정부가 경제문제나 실업문제에 개입하여 이를 조정하는 것은 국민들을 ‘국가의 노예’로 삼는 것이며, 국민들의 진정한 자유는 상실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정종수, 1988: 29).

후 버는 또 대공황이 국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각국의 협력을 통해서만 그 해결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러나 해외시장은 1930년 이후에는 더 이상 개척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죠. 그래서 그는 국내적인 문제보다는 국제적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1930년에는 관세법을 개정하여 관세장벽을 쌓았고, 1931년에는 정부 사이의 배상과 채무에 관한 1년 동안의 지불유예를 선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 기조에 따라 후버는 1932년 6월에 로잔 배상회의를 열고 1933년 6월에는 런던 세계경제회의를 개최하도록 주선하여 세계경제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죠.

후버 대통령은 이러한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공황이 점점 심각한 상태로 빠져들어 돌이킬 수 없게 되자, 정부가 그동안 시행해온 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는 오랫동안 고수해 왔던 통화수축정책을 어느 정도 완화하여 자금의 유통을 조장하게 되었고, 각 부문의 기업인, 실업자, 주택소유자, 저당채무 농민들을 위한 원조를 강구하게 되었습니다.

또 후버 정부는 지방정부와 자선단체들의 구제활동이 자금 고갈로 마비상태에 놓이게 되자, 1932년 7월에는 긴급구제건설법(Emergency Relief and Construction Act)을 제정하여 주 정부에 대한 구제지출용 대부자금과 공공사업 활동을 위한 자금을 책정하였습니다(박무성, 1979: 76~78).

이 밖에도 후버 정부는 반통화수축적 조치로 1932년 2월에 글라스―스티갈(Glass―Steagal)법을 제정하여 연방 준비의 필요액을 완화함으로써 신용공급을 원활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연방주택대부법(Federal Home Loan Bank Act)을 제정하여 부흥금융회사의 기능을 확충하고 건축사업의 부흥을 시행했죠.

이와 같은 후버 정부의 공황대책은 경제의 악순환 방지에만 급급했을 뿐 적극적인 회복정책으로는 턱없이 미흡하였습니다. 결국 후버정부의 공황 극복을 위한 노력은 시장에 대한 자유방임주의적 관념, 재정적 보수주의, 그리고 정부 역할에 대한 제한된 조치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어요. 공황은 여전히 깊은 터널 속에 머문 채 결국에는 뉴딜정책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했죠(정종수, 1988: 33).

루즈벨트(Roosevelt, Franklin)가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에 취임한 1933년 3월4일은 대공황이 최악의 상태에 놓여있는 때였습니다. 대공황이 이제 고전적 자유방임정책으로는 도저히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면서, 종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떠한 새로운 방책이 강구되지 않으면 안 되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루즈벨트는 취임 하자마자 133일 동안에 걸쳐 공황 극복을 위한 방책들을 내놓았습니다. 1933년 3월9일 긴급은행법(Emergency Banking Act) 제정을 시작으로, 6월16일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NIRA)으로 마무리되는 15개의 법안을 제정하여 뉴딜(New Deal)의 골격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른바 ‘100일 회의’로 불리는 이 기간에 설정된 정책은 부흥(Recovery), 구제(Relief), 개혁(Reform)을 목표로 내세웠죠.

루 즈벨트의 개혁은 위기를 극복하고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재조직하는 동시에 루즈벨트 정부 초기에 일기 시작한 심상치 않은 자생적 반란 ―소작농과 실업자들의 조직화, 자조(自助)운동, 몇몇 도시에서 벌어진 총파업― 을 막는다는 두 가지 절박한 필요를 충족시켜야 하였습니다(Zinn, 2005: 392).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의 채택에 앞서 네 가지의 중요한 강령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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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의 4가지 강령

첫째, 위기에 놓인 미국의 민주주의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국가경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공화당 정부와는 달리 대공황의 원인이 국내 경제의 파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둘째, 국민경제의 전 영역에 걸쳐 국가적 통제를 필요로 한다.
셋째, 경제 사회의 구조 자체를 자유경쟁이 아닌 더 큰 집권화와 통제로 이끌어야 한다.
넷째, 노사관계를 조정하여 구매력을 향상시키고 대규모적인 공공사업을 추진하여 실업자를 구제하고 보험제도들을 설치하여 사회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박무성, 1979: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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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러한 강령과 프로그램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수립된 뉴딜정책의 중심 내용, 즉 산업정책, 농업정책, 공공사업정책, 재정정책, 노동정책을 살펴보겠습니다.

< 뉴딜의 산업정책>은 가장 핵심적인 정책으로서, 그것은 전국산업부흥법을 기초로 하여 전개되었습니다. 이 법에 따른 산업정책의 목표는 정부와 산업 사이의 협동체제(Government partnership with Business)를 확립하여, 산업 상호 간의 협동과 경영―노동 사이의 협력을 촉진하고, 이를 통해 고용수준을 향상시켜 국민들의 구매력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설정되었습니다. 또 농업과 공업의 생산물 가격을 높여 마비상태에 빠져있는 유통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경기순환을 호전시킴으로써, 모든 부문에 걸쳐 경제부흥을 꾀하고자 한 것이 목표였죠. 그리고 이 법은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으로 노동자의 소득을 증대시키는 한편, 공공사업 계획을 통해 실업자를 흡수하고 경기회복을 꾀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법이 규정한 중요한 사항은 ‘공정경쟁 규약’과 노동자 권익보호 조항, 그리고 공공사업과 건설계획에 관한 것이었죠. 공정경쟁 규약은 기업가 자신들의 자율적인 규제와 정부의 공식적인 규제를 결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는데, 이 규약은 1933년 이전부터 경영자단체들이 특수산업 분야에서 시행해 왔던 사항들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포함된 생산제한정책은 지나친 경쟁과 과잉생산을 방지하여 가격을 유지하고 이윤을 보호하기 위해 채택된 것이었고, 가격규제정책은 기업의 가격인하 경쟁을 방지하고 공정경쟁을 전개하도록 하여 그들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하고자한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다 음으로 노동자의 권익보호에 관한 규정은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하고, ‘황견계약’을 불법화했으며 최고노동시간제와 최저임금제를 강제화하였습니다. 그리고 공공사업과 건설계획에 관한 규정을 실행함으로써 공공사업 추진의 목적을 주로 실업자에 대한 구제와 정부의 자금 살포에 따라 구매력을 증진하고자 하였죠. 이러한 정책의 시행에 따라 지금까지 주 정부가 전담하여 수행해 왔던 실업구제대책을 연방정부가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NIRA에 바탕을 둔 산업부흥정책은 시행 초기부터 규약 체결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죠. 그것은 가격규제권 문제, 물가인상 문제, 경영자단체의 대표권 문제, 독점문제, 노동조합의 요구 문제, 중소기업 문제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둘러싸고 NIRA는 1933년과 1935년에 걸쳐 혹독한 공격을 당해야만 했어요. 대기업들은 정부가 노동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데 대해 불만을 나타냈고, 중소기업들은 독점체의 성장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자유주의자들은 반트러스트법의 적용 정지를 비난하였죠. 소비자층은 물가인상에 분노를 나타냈고, 노동자 측은 규약의 실제적인 결과에 대해 실망을 표시하였으며, 법률가들은 정책 자체가 위헌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NIRA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아져 이를 둘러싼 찬반론이 거세게 주장되는 가운데 1935년 5월27일 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렸고, 이에 따라 NIRA에 기초한 모든 활동은 중지되었어요. 위헌 판결의 근거는 첫째, NIRA의 규약에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권한을 아무런 표준 제한을 설정하지도 않은 채 의회가 대통령에게 위임한 것은 삼권분립주의 위반임으로 무효라는 것이고, 둘째는 NIRA는 통상규제 조항 위반으로서, 지방 정부에 위임되어야 할 주(州) 내의 통상 분야에 대해 주 사이의 통상권을 부당하게 사용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위헌 판결이 나자마자 곧바로 기업들의 과열된 경쟁이 되살아났고, 노동시간의 연장을 비롯하여 임금저하와 실업자의 증가 그리고 아동노동의 고용들이 보편화되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NIRA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통제방법이 요구되었습니다. 후기 뉴딜정책에서도 전기(前期)와 마찬가지로 반독점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적극적인 개혁정책의 추진이 필요하였죠.

1935 년에는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 Act: Wagner Act)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에 근거하여 새로이 전국노동관계위원회(National Labor Relation Board: NLRB)가 설치되었습니다. 또 사회보장의 확충을 위해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이 제정되었고, 1938년 6월에는 공정노동기준법(Fair Labor Standard Act)이 제정되어 노동정책이 제도화되었습니다.

NIRA는 노동정책에서 노동관계를 규율하는 법률체계를 갖추는 계기를 마련했어요. 쟁의행위에 대한 민사면책과 노동3권 침해행위에 대한 특별구제제도로서 부당노동행위제도를 설치한 것이죠. 또 최고노동시간제와 최저임금제를 제정했고 연소노동을 폐지하였습니다. NIRA는 고용 촉진에도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었죠. 그러나 NIRA는 당초 각계각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는 의도에서 제정되었으나, 실제상 대기업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뉴딜이 추구한 경제 조직화의 주된 목표는 대공황을 극복하여 경제를 안정화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의 목표는 반란이 현실적인 혁명으로 전화되지 않도록 하층 계급 사람들을 원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이 취임할 때 우려했던 그대로 노동자계급의 파업 투쟁을 비롯한 민중 저항이 여러 형태로 일어났죠.

다음으로 <뉴딜의 농업정책>은 농업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 AAA, 1935년 5월12일 제정)을 근거로 전개되었습니다. 미국의 농업은 이미 1920년대부터 불황상태에 있었는데, 이러한 농업불황이 대공황을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갔기 때문에 농업정책은 매우 중요한 영역이었죠. 미국의 농업이 안고 있었던 근본적인 문제는 과잉생산과 과소소비로 인한 농업구조상의 불균형이었습니다.

AAA에 기초를 둔 농업정책의 핵심은 정부 개입을 통한 생산통제정책과 농산물 가격의 인상․유지정책이었습니다. 농업정책의 목표는 농산물 가격을 인상하여 기준년도(1909~1914년)의 평형가격으로 회복시키고, 농업소득을 증대시켜 농민의 구매력을 높임으로써 총수요의 확대를 통한 전반적인 경제회복을 꾀하고자 한 것이었죠. 생산조정정책과 더불어 중요한 농민구제책으로는 여러 가지 입법을 통한 농민부채의 감소, 농촌부흥사업의 추진, 농업노동자와 소작농 문제의 해결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뉴딜 농업정책은 농산물가격지지정책, 농민구제정책, 토지보전정책을 핵심 내용으로 하였습니다. 농산물가격 지지를 위해서는 평형가격의 설정, 생산통제, 생산 삭감에 대한 보상지불, 농산물 가공세 부과 등이 실시되었으며, 그 집행을 위한 기관으로 농업조정청이 설치되었죠.

농민구제정책은 농업불황과 대공황으로 곤경 상태에 놓인 농민들에게 금융원조를 제공하고자 긴급농지저당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토지보전정책은 토양의 보전과 개선, 토지의 효율적 사용, 토양자원의 낭비적 사용 방지, 토양침식 방지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는데, 이 정책의 실질적 목적은 농민의 소득향상이었습니다(정종수, 1988: 50~53).

뉴딜 농업정책의 기초가 되었던 AAA의 규정들이 1936년 1월 대법원의 위헌판결로 효력을 잃게 되었는데, 그 근거는 어떠한 특정 행동에 동의하기 위하여 정부가 보상금을 지불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에서였죠. 즉, 어떠한 특정한 지역이 위험에 직면했다고 하여 의회가 헌법에서 제한한 권한을 이탈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기 때문에, 가공세의 부과와 보상금의 지불은 연방정부의 과세권 남용이고, 생산제한협정은 주권(州權)에 유보된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시한 겁니다. 이에 따라 AAA의 주요 규정이었던 생산제한정책과 가공세, 그리고 보상금제도는 무효화 되었지만, 시장판매협정과 상품금융회사 운영, 그리고 과잉생산 억제조항은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뉴딜의 농업정책은 일반적으로 평가할 때 불황에 빠진 농업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는 기대한 만큼의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농촌부채의 감소, 자작농의 증가, 농업의 능률화, 농촌의 안정 등 단기적인 구제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김종현, 2007: 510~511).

<뉴딜의 공공사업정책> 가운데 가장 야심차게 추진된 것은 테네시계곡개발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 TVA) 사업이었어요. 여기서 말하는 테네시계곡이란 앨라배마, 조지아, 켄터키, 미시시피,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버지니아 등 7개 주에 걸치는 10만 4,000km²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뉴딜 정부 주도로 테네시계곡 지역의 종합개발과 실업구제 등을 목적으로 테네시계곡공사법(Tennessee Valley Authority Act: TVA)이 1933년 5월18일 제정되었죠.

테 네시계곡 지역은 남북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미개발지역으로 남겨진 미국 최후의 ‘프론티어’였으나, 그 뒤로 목재, 석유, 천연가스 등을 채취하기 위한 자본의 진출이 이 지역을 급속하게 황폐화시켰죠. 이와 더불어 테네시 강 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1820년대에는 정부 차원에서도 운하 개설과 수력발전 개발 등에 대한 권고와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결실을 보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대공황에 따른 대규모 실업사태가 발생하면서, 테네시 강 유역의 종합개발과 실업구제를 목적으로 한 대규모 지역종합개발 사업이 본격적인 계획으로 설정되었습니다.

TVA의 목표는 법률상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죠. ① 최대한 홍수통제, ② 수상 운수를 목적으로 하는 테네시 강의 최대한 개발, ③ 홍수통제와 수상운수를 방해하지 않는 최대한의 발전, ④ 표준 이하 토지의 적절한 이용, ⑤ 해당 지역의 조림, 가능한 토지에 대한 적절한 식수, ⑥ 이 지역 주민의 경제․사회적 복지증진.

TVA에서 설정한 주요 사업들은 전력산업의 증대, 전력수요의 확대, 그리고 농촌사회의 전력화 사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전력사업, 토양보전․수리시설 정비․저렴한 화학비료 생산․과학적 영농방법 보급 등의 사업을 통한 농업개선사업, 산림자원의 보존과 식수사업, 그리고 홍수방지를 위한 30여개의 댐 건설 사업 등이었습니다.

TVA는 국가 주도의 전형적인 종합개발계획이었어요. 이러한 계획은 정통적인 미국 자본주의제도에 큰 수정을 가하게 된다는 이유로 당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것은 뉴딜과 같은 강력한 국가정책에 따라 비로소 실행될 수 있는 것이었죠. TVA는 뉴딜 기간에는 뚜렷한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그 이후에 지속적으로 정책 효과를 나타냄으로써 뉴딜 정책이 남긴 최대의 국가적 유산이 되었습니다(김종현, 2007: 512).

<뉴딜의 재정정책>은 산업정책을 비롯한 주요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정책이었습니다. 뉴딜 정책의 전기(前期) 시행 과정에서 취해진 정부의 재정지출은 침체상태에 빠진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일시적이고 긴급하게 채택된 유수정책(誘水政策: pump priming policy)이었죠. 그러나 공황이 장기화되면서 대량실업이 계속됨에 따라 긴급구제 목적의 뉴딜 재정정책은 그 질적 전환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뉴딜 정부는 긴급구제법(Emergency Relief Act)을 제정하여 6년 동안에 걸쳐 90억 달러에 이르는 자금으로 노동자 약 800만 명의 일자리를 만들었습니다(정종수,1988: 73).

그러나 1937년의 경기후퇴를 분수령으로 하여 뉴딜 재정정책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죠. 후기 뉴딜의 재정정책은 민간투자의 부족분을 보충할 정도의 규모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행해질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근거하였습니다. 이른바 보정적 재정정책(補整的 財政政策: compensatory Fiscal policy)이 그것이었습니다.

루 즈벨트 대통령은 1938년 신경제정책에 따른 경제회복 계획을 의회에 제출하였는데, 이것은 정부가 적자재정을 통해 공공사업에 대한 투자를 촉진하여 경기침체를 회복시키고 완전고용을 실현하려는 데 목표를 둔 정책이었습니다. 적자재정을 통한 공공투자는 사적 투자의 부족을 보충하여 경기 회복과 고용 증대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죠. 후기 뉴딜에서는 케인스의 경제이론이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뉴딜이 끝났을 때, 자본주의는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여전히 국가의 부를 지배하고 있었고, 법률과 법원, 경찰, 신문, 교회, 대학들 역시 수중에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수백만 명에게 루즈벨트를 영웅으로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의 도움이 있기는 했으나, 대공황과 위기를 불러일으킨 바로 그 체제 ―낭비와 불평등의 체제이자 인간의 필요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체제― 는 여전히 굳건하게 존재하였죠.

특히 대공황 극복을 목표로 한 뉴딜정책은 흑인들에게는 그다지 효과적인 혜택을 주지 못하였어요. 흑인들은 대부분 소작농, 농장 일꾼, 이민자, 가내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최저임금과 실업보험, 사회보장, 농장 보조금 등을 적용받기에는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흑인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얻는 데서도 차별을 받았죠. 그들은 마지막에 고용되고 제일 먼저 해고당하였습니다.

뉴딜 개혁이 잇달아 채택되고 있던 1935년 3월19일, 할렘은 드디어 폭발했습니다. 흑인 1만 명이 거리를 휩쓸면서 백인 상인들의 재산을 파괴하였죠. 경찰 700명이 투입되어 질서를 바로잡았습니다. 흑인 두 사람이 살해되었습니다(Zinn, 2005: 403~404).

많은 미국인들이 이 위기와 반란의 시기에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기 시작하였어요. 유럽에서는 히틀러가 등장했습니다. 태평양 건너에서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있었죠. 새로운 제국들이 서유럽의 제국들을 위협하였습니다. 미국에서도 전쟁은 그리 먼 일이 아니었죠.

 

영국

영 국 정부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정책방안들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1931년의 금본위제 이탈과 파운드화의 평가절하, 신용팽창에 따른 이자율 인하와 투자확대, 1932년의 일반관세 도입과 장기 자본수출의 규제, 주택건설 확대 추진, 직물․철강․조선 등 구산업의 침체와 대비되는 전기․화학․자동차 등 신산업의 급속 성장 추진, 그리고 1935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한 군비지출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영국은 1931년 9월 과거 1세기 이상에 걸쳐 지켜 온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변동환율제를 채택함과 동시에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하였습니다. 금본위제에서 이탈한 직후부터, 1920년대에도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영국 경제는 수출 증가, 수입 감소, 그리고 고용증대를 통하여 크게 호전되었습니다. 즉, 금본위제에서 이탈한 1년 뒤 파운드화의 가치는 약 40% 하락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거의 안정을 나타냈죠. 파운드화의 가치 하락은 무역관계를 개선시켰습니다. 파운드화의 평가절하에도 영 연방 국가들과 이집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화폐도 평가절하 되었기 때문에 수입가격은 상승하지 않았던 것이죠(김종현, 2007: 543).

또 자금을 싸게 공급하기 위해 이자율을 인하했는데, 이는 국공채 이자 부담을 줄여 균형재정을 유지하려는 재무성의 전통적인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리인하는 민간산업의 회복을 가능하게 한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죠. 이자율이 급속하게 하락하자 전반적으로 투자지출이 늘면서 이것이 경기회복을 주도하였습니다(양동휴, 2006: 65).

다음으로 영국은 공황 극복을 위하여 보호관세를 도입하였는데, 1932년 영국은 오타와 협정에 따라 경제 블록을 형성하는 한편, 일반적 보호관세를 규정한 수입관세법(Import Duties Act)을 제정하였습니다. 종래에는 보호관세가 예외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수입품의 약 83%를 무관세로 수입하던 영국이 이 법에 따라 공업원료와 일부 농산품 등 수입품의 약 25%만을 무관세로 수입하고, 나머지 수입품에는 모두 관세를 부과하였죠. 이와 같은 일반관세 도입에 따라 영국은 영 연방 국가들에 대해서는 관세의 특혜를 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나라들에 대해서는 더 큰 교섭력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수출을 위한 한층 더 유리한 조건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산업 합리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것이 영국의 산업발전에 대해 큰 자극을 주었죠. 정부는 산업의 재조직을 통하여 가장 효율적인 공장에 생산이 집중되도록 유도하고 자동차, 레이온, 전기기구, 비행기, 화학공장 등의 신산업 분야에 대한 합리화를 추진하였습니다(김종현, 2007: 544).

주택건설 정책도 경기회복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죠. 당시 국내총생산(GDP)의 약 3%를 차지할 정도이던 건축산업은 1933년과 1934년에는 GDP 성장에 17% 정도 기여하였습니다. 간접적인 효과까지 포함한 고용창출 효과는 1931~1935년 사이에 증가분의 30%정도로 추계되었죠. 이러한 주택건설 호황의 지리적 분포를 보면, 고용창출 효과는 자동차, 화학, 정밀기계와 같은 신산업의 급속한 성장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산업의 성장이 경기회복을 이끌었다는 주장들도 제기되었죠.

독일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 독일은 다른 나라에 비해 한층 더 혹독한 시련을 겪었어요. 독일은 패전 뒤 전쟁배상금 부담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외자도입, 특히 미국에서 들여온 단기외채 누적은 전승국의 배상금 압력과 함께 독일의 금융구조를 극히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1931년 은행공황으로 말미암아 금융질서는 거의 무너지고, 브뤼닝(Bruning, Heinrich) 정권이 시행한 디플레이션 정책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죠. 뿐만 아니라 디플레이션 정책은 국민의 구매력을 급격히 감퇴시켰고 이윤 전망을 흐리게 함으로써 투자를 격감시켰습니다. 이와 함께 수출격감이 불경기를 심화했으며 생산도 급격하게 감소하였죠. 그 결과, 실업이 크게 증가하여 1932년에는 등록된 실업자가 600만 명이었고, 비등록 실업자도 10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이들의 가족까지 합하면 당시 독일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실업상태에 있었습니다(김종현, 2007: 547).

1933년에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Hitler, Adolf)의 나치(Nazi) 정권은 실업문제 해결을 최우선 정책 과제로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33년 봄에 포고된 제1차 4개년계획은 독일 농민을 구제하여 국민의 식량공급을 늘리고, 실업문제를 극복하여 독일 노동자들을 구제할 것을 기본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에 따라 1932년 말부터 1935년까지 고용창출을 위해 총 52억 마르크(RM)가 지출되었는데, 이것은 3년 동안 독일 국민 총생산의 2.5%에 해당하는 액수였죠. 고용창출을 위한 이러한 투자는 민간투자 촉진책과 더불어 투자심리 등 민간의 기대를 낙관적으로 반전시켰는데, 이러한 정책은 라인하르트(Reinhardt) 프로그램을 위시한 직접적 고용창출정책의 큰 성과로 평가되었습니다(양동휴, 2006: 107).

1934 년 11월 독일의 재무장계획이 실천에 옮겨지면서 나치 정권의 경제목표는 크게 변화하였어요. 새로운 경제목표는 농업과 공업의 발전을 통해 경제적 자급자족을 실현하여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경제봉쇄를 당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해낼 수 있는 경제력을 배양하는 것이었죠. 이러한 목표에 따라 정부의 군비지출은 1933~1939년 사이에 총 900억 마르크(RM)에 이르렀습니다. 이 금액은 1938년 한 해 동안의 국민소득과 맞먹는 것이었죠.

여기에 정부가 지출한 공공사업과 경상경비를 합치면, 정부 부문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29년의 35.9%에서 1938년에는 57%로 증가하였고, 국민소득에서 정부지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1929년의 11%에서 1930년대 말에는 거의 50%로 증가하였습니다. 결국 독일 경제에서는 정부가 가장 큰 투자가인 동시에 가장 큰 소비자였죠.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농업, 공업, 상업, 무역, 노동 등 거의 모든 경제부문에 걸쳐 행해졌습니다.

나치 정부는 강력한 통제를 바탕으로 소비재 생산을 되도록 억제하고 생산재 생산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경제를 운용했으며, 특히 1937년 제2차 4개년계획부터 국내 부족자원에 대한 대체산업의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소비재 산업의 완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생산재 산업과 수입대체 산업은 빠르게 발전하였죠(김종현, 2007: 548~549).

나 치 정부는 초기에 팽창하는 재정지출의 증대를 통하여 유효수요를 창출하여 경기 회복세를 이끌었습니다. 다만, 고용창출 조치만이 아니라 산업연관 효과가 높은 모토리지룽(motorisierung: 자동화), 재무장 등 광범위한 부문에 대한 지출을 수행하였다. 또 나치 정부는 단순히 경제에 자금을 투하하고 소득이 증대되기를 기다리는 데 머무르지 않았어요. 정부지출 정책을 경제의 다른 부문을 통제하고 이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프랑스

프랑스는 대공황 극복 정책을 시행하는 데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을 보였죠. 그것은 1936년 5월 이후 ‘인민전선’ 정권이 공황 탈출을 위해 시행한 정책들이 ‘사회개혁’과 ‘관리경제’ 등을 기초로 한 데서 나온 결과였습니다.

대공황 초기 프랑스 정부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전통적인 금본위제를 계속 유지하였죠. 그러나 프랑스의 경제력이나 금융상황에 비추어 볼 때, 프랑화의 권위를 오랫동안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국제수지 적자와 자본의 해외도피는 금의 유출을 유발하여 결국에는 프랑화의 가치를 저하시켰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화의 평가절하가 불가피하다는 주장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여러 계층이 이에 반대하여 프랑화의 평가절하는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이 와 같은 상황에서 1935년 수상에 취임한 라발(Laval, Pierre)은 디플레이션을 통해 프랑화를 구제한다는 정책을 추구하였습니다. 라발의 디플레이션 정책은 균형예산을 취한 가운데 모든 가격과 지대, 이자, 임금 등의 고정소득을 일률적으로 10%씩 삭감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것이었죠. 그러나 라발의 정책은 균형예산을 실현하는 것부터 실패하였어요. 그것은 심한 디플레이션으로 말미암아 정부 지출의 삭감보다도 세입 감소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소득삭감은 노동자계급과 급진적 하급관료 말고도 디플레이션으로 고통을 겪어 온 대다수의 중산층, 농민, 그리고 소상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죠. 라발의 디플레이션 정책은 마치 독일에서 브뤼닝의 디플레이션 정책이 히틀러의 출현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민전선(Front Populaire)성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김종현, 2007: 545).

인민전선은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해 공산당, 사회당, 급진사회당이 중심이 되고 프랑스노동총동맹(CGT)과 지식인들까지 연합하여 만든 전선체입니다. 인민전선은 1936년 5~6월 선거에서 승리하여 블룸(Bulum Léon)정권을 탄생시켰죠.

블 룸 정부가 당면한 최대의 정책 과제는 대공황에서 탈출하는 일이었어요. 블룸 정부는 1936년 5~6월의 대규모 파업에 대한 정책적 대응이라는 명분으로 일련의 ‘사회개혁’ 시책을 실행하였습니다. 정부는 프랑스 노동총동맹(CGT) 지도부와 경영자단체 대표 사이의 교섭을 통해 마티뇽 협정(Accord Magtignon)을 체결하도록 유도하였죠. 협정의 내용은 단체협약권의 승인과 1936년 5월25일 현재 수준보다 7~15%의 임금인상, 주 40시간 노동일제와 연 2주일간의 유급휴가 법제화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노동정책은 실제로 임금을 30% 정도 인상한 것과 같은 효과를 유발한 것으로서, 계획이 목표로 한 총구매력의 증대는 거의 실현된 것이나 다름없었죠(김종현, 2007: 546).

이와 함께 농민층의 구매력 증대를 위해 소맥국(小麥局)을 설치하여 농산물시장의 조직화를 꾀하였습니다. 소비자와 농민, 그리고 제3자의 대표로 구성되는 소맥국 중앙회의에서 소맥 가격의 수준을 공정하게 결정함과 동시에, 생산조정이나 소맥국을 통한 매상 등의 시책에 따라 대(大)제분업자나 곡물상인의 투기와 부당이득을 배제하고자 한 것이 정책의 목적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중․남부의 많은 빈농과 소작농을 공황에 따른 몰락에서 구출하고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의 전통적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죠(松田智雄, 1983: 344).

다음으로 블룸 정권이 시행한 개혁정책의 하나가 주요 산업의 국유화 계획이었습니다. 국유화계획에는 금융자본가의 영향력을 약화하기 위한 프랑스은행(Banque de France)의 국유화와 철도․군수산업의 국유화가 포함되어 있었죠. 그러나 이러한 국유화 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어요. 발권은행의 국유화에도 실제로 금융자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지는 못했으며, 철도의 국유화는 명분뿐이었고 군수산업의 국유화는 오히려 생산의 와해만을 초래하였죠(김종현, 2007: 546).

인민전선 정부는 1936년 9월 국내외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을 받아 태환정지, 금의 수출 금지, 그리고 거래소 폐쇄 등의 조치(금본위제에서의 이탈)를 취함과 동시에 마침내 프랑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하였습니다.

인 민전선 정부의 개혁적인 계획과 정책들은 프랑스가 공황에서 탈출하도록 하는 데는 실패하였어요. 오히려 물가는 상승하고 생산은 회복되지 않은 가운데, 봄부터 여름에 걸쳐 획득한 임금인상 효과도 실질상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죠. 프랑스 경제는 침체되었고, 인민전선 정부는 퇴진하였으며 1938년 11월에는 민족주의적인 보수주의자인 레노(Reynaud, Paul)가 이끄는 새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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