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1929~1933년의 세계경제공황과 노동자 투쟁 (Ⅰ)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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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황은 ‘황금의 20년대’를 지켜보았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산산이 찢어놓았다. 서유럽의 모든 거대 도시들에서 그들은 몹시 여위고 지친 얼굴로 누더기 차림을 한 채, 무거운 발을 끌며 무료 급식소를 찾아다녔다. 또 세계 나머지 지역의 소작지에서 농민들은 소작료와 세금을 내기에 충분할 만큼 곡물 가격이 오르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혹시 땅을 떼이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뭐든 먹을 것을 재배해 끼니를 이으려 애썼다.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덜 ‘진보한’ 사람들 ―그때까지도 화폐 경제에 거의 편입되지 않았던 자급형 영세농들― 이 오히려 가장 잘 살아남았다. 노동력을 판매해 생계를 이어간 사람들은 의지할 데가 전혀 없었다. 전 같으면 미국으로 이민이라도 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대량 실업 탓에 그 길마저 막혔다.
런던, 시카고, 베를린, 파리, 글래스고, 마르세유, 바르셀로나, 캘커타, 상하이, 리오, 더블린, 카이로, 그리고 아바나 등 어디나 황폐하기는 마찬가지였고, 도처에 만연한 비참함은 새로운 희망의 도화선이 될 수도, 광기에 찬 절망의 전조가 될 수도 있었다.
1930년대는 희망과 절망이 모든 도시의 거리에서 힘겨루기를 하던 10년이었다. 그것은 혁명과 반혁명이 격렬하게 투쟁하던 10년이었다. 그 10년은 세계를 또다시 전쟁으로 몰아넣은 반혁명의 승리로 끝이 났고, 새로운 전쟁의 야만성은 1914~1918년의 대학살조차 무색하게 만들었다.”


―Harman.

1. 대공황과 노동자 투쟁

세 계자본주의는 1924~1927년의 상대적 안정기를 겪은 뒤 ‘전반적 위기’ 국면을 맞았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가 과거와는 다른 몇 가지 위기적 요소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첫째는 러시아 사회주의 체제가 성립됨으로써, 자본주의는 이제 유일한 포괄적인 세계경제체제 역할을 그만두게 되었고, 세계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극체제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둘째, 국제노동자계급과 식민지․종속국의 인민들이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에 대한 투쟁을 추진하는 가운데, 투쟁의 강력한 물질․정신적 토대를 만들어냈습니다. 셋째로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형성을 들 수 있죠. 이것은 전쟁 수행을 위해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통제가 실시되면서 성립되었고, 위기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대응양식으로 나타났습니다. 넷째는 자본주의 경제 자체의 불안정성 증대입니다. 러시아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에서 이탈함과 동시에 세계시장의 축소, 식민지․종속국의 민족운동 고양에 따른 독점자본의 해외시장 활동 제약, 공장설비의 만성적 유휴 상태, 대량실업의 상시적 존재 등으로 인해 불안정성이 더욱 증대된 것입니다(김준호, 1983: 187~188).

이러한 세계자본주의의 위기 요소는 1929년 10월24일 이른바 ‘암흑의 목요일’(Black Tuesday)’에 일어난 미국 뉴욕 주식시장 붕괴를 기점으로 하여, 1929~1933년 사이의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공황은 자본주의 재생산과정의 대폭적인 교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공황이 발생하게 되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일시적으로 마비상태에 빠지고 생산력이 심하게 훼손되죠. 공황의 가장 일반적인 현상은 생산과잉과 투매, 물가하락 그리고 신용의 수축입니다. 이에 따라 생산의 축소와 기업의 도산이 발생하고, 노동자의 임금 하락과 실업의 증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죠. 그리하여 사람들의 빈곤과 생활고가 극심해집니다(오사카시립대학 경제학연구소, 1965: 169).

미국에서 시작된 1929년의 대공황은 세계적인 규모로 파급되었어요. 이에 따라 각국은 자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동원하게 되었고, 그것이 누적되면서 경제활동을 위축시켰고 공황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공업생산, 고용, 국민소득 등의 경제상황이 전반적으로 악화되었고 실업도 대폭 증가하였죠. 국제무역도 큰 타격을 받아 1932년의 국제무역액은 1929년에 비해 35%정도 감소했고, 무역량도 25% 줄어들었습니다. 또 국제금융관계와 국제경제 질서에서도 큰 변화가 나타났는데, 금본위제는 1931년에 영국에서 그리고 1933년에는 미국에서 각각 폐지되었고, 그 뒤를 이어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1931년 금융공황 이후에는 수입할당제, 수입금지, 그리고 수입허가제 등의 수입제한 정책이 광범하게 채택되었죠(김종현, 2007: 506~507).

이 와 같이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대공황의 발발에 따라 파국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상대적 안정의 붕괴와 위기의 격화에 대응하여, 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뉴딜이나 파시즘 체제로 상징되는 혼합경제체제=국가독점자본주의의 강화와, 군사부문 확대, 그리고 전쟁 경제에서 구하고, 배타적 블록경제를 형성하고자 하였죠(김준호, 1982: 190).

그렇다면 공황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공황은 자본주의의 내부 모순이 쌓여 표출된 것인 만큼, 공황이라는 구체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데는 많은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공황의 원인을 다루는 공황이론도 매우 다양한 접근을 통해 제시되고 있죠(김기원, 1984: 107~119, 양동휴, 2006, 21~28). 예를 들어, 제본스(Jevons, W.s.)의 태양흑점설과 같이 자연현상에서 공황의 원인을 찾는 이론을 비롯하여, 기업가의 장래 예상이라는 심리 작용에서 공황의 원인을 찾는 케인스의 이론, 자본주의 사회관계의 내부 모순에서 공황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비교적 체계를 갖춘 공황 이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노동자 대중의 소비제약을 공황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이론과, 소비재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으로 공황을 설명하는 이론, 그리고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발생하는 과소소비와 관련짓는 공황이론은 과소소비론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 외에도 임금과 이윤의 반비례적 분배관계를 중요시하는 신리카도 학파의 이론, 그리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변화에 따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 이론이 있다. 또한 농산물 교역조건 악화에 따른 지출수요 감소를 공황과 관련짓는 이론, 경제구조 변화에 주목하면서 국제적 채권․채무관계에서 공황의 원인을 찾는 이론 등도 있죠.

이들 공황이론은 극히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정 시기, 특정 국가의 공황을 설명하는 데는 많은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각 이론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고, 그 이론적 한계와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공황이라는 현상이 자본주의의 내부모순 표출이라 할 만큼 매우 복합적인 현상이어서, 아직 이렇다 할 통설로서 공황이론이 정립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죠. 다만 제1차 세계대전과 192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구조의 불안정성이 진전되어 1930년대의 대공황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 이것이 대공황 연구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양동휴, 2006: 21).

실제로 자본주의 경제에서 주기적인 경기변동은 항상 존재해 왔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가 1930년대를 전후하여 하강 국면으로 반전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 미국 주식시장 붕괴에 뒤이은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는 40개월 이상 지속되는 매우 길고도 혹독한 것이었고, 자본주의 역사에서 그야말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공황으로 기록되었어요. 공황이 회복 국면에 들어선 뒤에도 생산 후퇴는 상당한 기간 계속되었죠. 결국 1930년대의 불황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군수생산 붐이 일면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1929~1933년 사이의 공황이 자본주의 세계의 생산력 발전에 끼친 물적 손해는 실로 막대한 것이었죠. 은행제도는 도산의 속출로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고, 국제통화 위기가 자본주의 국가들의 금융구조를 뒤덮었습니다. 공업공황이 농업공황과 겹쳐 판매시장을 둘러싼 경쟁을 격화시켰으며,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었습니다.

대공황의 가장 큰 폐해는 무엇보다도 대량실업이었어요. 임금을 받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에게 공황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방대한 실업 규모였고, 그 실업이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 지속되었다는 사실이었죠. 공황기 가운데 최악의 시기(1932~1933년)에 영국과 벨기에 노동력 인구의 22~23%, 스웨덴의 24%, 미국의 27%, 오스트리아의 29%, 노르웨이의 31%, 덴마크의 32%, 그리고 독일 노동력 인구의 44%가 실업자였습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1933년 이후의 회복기에도 1930년대의 평균 실업률이 영국과 스웨덴의 경우 16% 미만으로, 나머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오스트리아, 미국의 경우 20% 미만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죠. 이러한 경제적 재난에 따른 폐해는 실업자 구제를 비롯한 공공의 사회보장제도가 미국의 경우처럼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20세기 말의 기준에서 볼 때 극도로 빈약했기 때문에 공황은 인민의 삶을 파괴하는 세계적 악성 유행병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Hobsbawm, Eric, 1996―3: 92~93).

한 편, 대공황 시기에는 국제노동운동이 새로운 고양의 단초를 열었고, 각 세력들이 재편성되고 대중 투쟁의 새로운 형태와 방법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졌습니다. 또 노동자 조직의 조직․사상․정치적 강화가 진행되었고, 지금까지 수동적이었고 정치적으로 중립이었던 근로대중의 전 계층이 창조적 능동성을 발휘하게 되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263). 이 시기에 전개된 대중적 노동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사회․경제적 권리에 대한 자본과 권력의 공격이 더욱 강화되고, 대량 실업이 존재하는 조건에서 갖가지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난관에도, 노동자계급의 파업 투쟁은 방위적 성격을 띠기는 했지만, 결코 멈추지는 않았어요. 1929~1932년의 3년 동안 자본주의 국가 15개국에서 파업이 18,794건 발생하였고, 파업참가 노동자 수는 851만 5,000명이었으며, 노동손실일수는 8,476만 8,700일이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영국에서 1,468건, 미국에서 2,700건, 프랑스에서 3,601건, 독일에서 1,304건, 일본에서 6,889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688건, 중국에서 1,333건, 인도에서 480건의 파업이 일어났죠. 이들 파업은 주로 광산, 섬유, 철도 산업을 중심으로 발생했으며, 많은 파업들이 정부 측의 탄압을 받으면서 단행되었습니다(Foster, 1956: 313).

세 계경제공황기의 노동자 투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의를 갖는 것은 실업자 투쟁이었습니다. 실업자 투쟁은 이전에 비해 매우 큰 규모로 진행되었으며, 조직적이고 목표 지향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실업자운동의 슬로건이나 요구들 ―빵 획득을 위한 투쟁, 실업 급여와 사회적 보험을 요구하는 투쟁, 강제 퇴거 반대 투쟁, 공공사업의 수립을 요구하는 투쟁 등― 은 지역․부분적 성격을 띤 것이 아니라 전국․계급적 성격을 띤 것이었죠. 실업자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국가는 미국, 독일, 영국, 캐나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폴란드, 네덜란드 등이었습니다.

1930년 2월 초에는 서유럽 국가들의 공산당 대표들이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회의를 열어 1930년 3월6일을 ‘국제실업반대투쟁의 날’로 정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이 제안은 대중들 사이에서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어요. 이날 유럽과 미국 공업 도시의 가두와 광장에서 수 만 명이 참가한 집회와 시위가 결행되었으며, 노동자들은 공황의 무거운 짐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지배계급의 정책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1931 년과 1932년에는 인민들 사이에서 자조(自助)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시애틀에서는 어부노동조합이 물고기를 잡아 과일과 채소를 가져온 사람들과 물품을 교환하였고, 나무를 벌채하는 사람들은 땔감을 다른 물건과 교환하였죠. 이러한 자조 조직은 모두 22개가 있었는데, 지부 각각에는 식료품과 땔감을 다른 물품이나 용역과 교환하는 물자배급소가 있었습니다. 1932년 말에 이르면 37개 주에 330개 자조조직에 가입한 회원은 3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933년 초에는 대부분 활동을 멈추었어요. 경제적인 난관 속에서 너무 큰 일을 시도하고 있었던 거죠.

자조운동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사례는 펜실베이니아 탄광노동자의 경우일 겁니다. 펜실베이니아의 광산에서는 실직한 광부들이 팀을 이루어 회사 소유의 소규모 광산에서 석탄을 채굴하여 도시로 실어 날라 시세보다 싼 값에 팔았어요. 1934년까지 광산노동자 2만 명이 차량 4,000대를 이용하여 ‘밀매’ 석탄 500만 톤을 생산하였죠. 이러한 시도는 법원에 기소되었는데, 현지 배심원단은 유죄를 평결하려 하지 않았고, 간수들도 그들을 투옥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현실적인 필요에서 나온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변혁적인 가능성을 담고 있었습니다(Zinn, 2005: 395).

영국에서 전개된 실업자운동은 전국실업자운동(National Unemployed Workers’ Movement=NUWM)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죠. 이 조직은 1921년 전후의 공황기에 영국공산당(CPGB)이 주도한 ‘전국실업자위원회운동’(NUWCM)으로 출범했다가, 1930년대 공황을 맞아 조직을 재편하여 전국적인 차원에서 실업자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실업자운동의 주요 투쟁 형태는 1929년, 1930년, 1932년, 1934년, 1936년에 조직된 ‘전국기아행진’이었어요. 특히 1932년의 기아행진이 최대 규모였으며, 시위 군중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죠. 1936년의 전국기아행진에는 25만 명이 참가하였습니다. 영국의 실업자투쟁은 공황의 경제적 타격을 크게 받았던 산업지역(이른바 재난지역: Distressed Area)의 지역단위 투쟁을 토대로, 전국실업자운동으로 총괄하는 전국적 차원의 투쟁으로 확장되었고, 1930년대 중반 전국실업자운동은 회원 10만 명을 포괄하는 강력한 조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930 년대 영국의 실업자운동은 실업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노동당이나 실업자운동에 대해 ‘적대적 무시’ 태도를 취했던 영국 노동조합회의(TUC)와는 대조적으로, 상대적으로 소수정파였던 영국 공산당이 주도력을 발휘하여 실업자운동을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의 형태로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영국 실업자운동의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전국적 조직이나 기아행진은 전개되지 않았지만, 프랑스 공산당이 중심이 되어 파리 지역이나 실업의 타격이 컸던 지역들에서 실업자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33년 11월에는 릴에서 파리까지 최초의 실업자 행진이 전개되었는데, 행진이 있기 전에 북부지방의 모든 지역에서 실업자 총회가 구성되고 행진을 조직하기 위한 지역위원회가 창설되었으며, 진정서를 제기할 대표가 선출되었죠. 실업자 운동 조직을 담당한 샤를 티용(Charles Tillon)에 따르면, 총 실업자 120만 명 가운데 원조를 받는 실업자는 30만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김신양, 1998: 50). 노동운동 차원에서는 프랑스노동총동맹(CGT)에서 분리된 통일노동총동맹(CGTU)이 주도하여 실업자위원회를 건설했으며 실업자투쟁을 주도하였습니다.

독일에서도 실업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파업투쟁이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대중적 기아행진이 확대되었습니다. 실업자운동은 전국실업자위원회를 중심으로 전개 되었는데, 이 조직은 실질적으로 독일공산당(KPD) 활동가들이 주도했으나, 형식상 노동조합운동에 속해 있었죠. 지역수준에서 기아행진(1930년 5~6월, 1930년 11월~1932년 11월)이 전개되었으며, 1931년 여름 기준으로 전국에 걸쳐 실업자위원회 1,500개에 회원 8만 명이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1930년 10월에는 베를린에서 금속노동자 13만 명이 파업을 일으켰는데, 여기에는 다른 산업의 노동자들도 합류하였어요. 1931년에는 대규모 파업이 발생했는데, 노동자 약 30만 명이 참가한 루르와 북부 슐레지엔 광산 파업이 그것이었습니다. 1932년에는 베를린의 운수노동자 파업이 제기되었는데, 여기에는 노동자 2만 2,000명이 참가하였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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