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제2절 자본주의의 부분적 안정과 소련 사회주의 건설 시기의 코민테른(Ⅰ)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49

글쓴이 :

제1절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사회 건설

3. 소비에트 사회의 변화된 양상

소 비에트 연방은 제1차와 제2차 5개년계획을 추진한 결과, 사회주의 국가로 ‘대변화’ 또는 ‘대변혁’을 실행했습니다. 1936년 또는 1937년에 생산과 교환의 주요 수단이 공공부문에서 소유·운영되었으며, 정치권력이 공산당 주도로 행사되었고 경제는 경제 계획의 기초 위에서 운영하는 국가가 되었죠.

1937 년에는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이 국가가 수매하는 전 생산품의 98.5%를 담당했으며, 국영과 협동공업이 모든 공산품의 99.8%를 담당하게 되었어요. 1913년 당시 전체 인구의 16.3%를 차지했던 지주, 부농 그리고 대·소 부르주아지는 1937년에는 사회계급으로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1913년까지는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하였던 노동자계급이 1937년에는 32.6%로 증가했으며, 57%는 집단농장에 속해 있었죠. 1927년과 1928년의 노동자 총수는 약 1,100만 명이었고, 1932년에는 2,30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1937년에는 2,70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톰슨, 2004: 377).

[표14―1]은 제1차 경제계획과 제2차 경제계획의 실시에 따른 공업생산의 추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14―1]소비에트 연방의 공업생산 추이(1928~1937년) (단위: 100만 톤)

자료: 김학준, 『러시아사』, 2005: 309.

 

구분

1927~1928

1932(1차계획 종료)

1937(2차계획 종료)

석탄

35.0

64.0

128.0

석유

11.7

21.4

28.5

철강

 6.7

12.1

17.7

선철

 3.2

 6.2

14.5

소 비에트 공화국이 제1차와 제2차 5개년계획을 통해 달성한 성과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1928~1937년 사이에 대규모공업 부문 생산 증가율은 매년 15~16%에 달했고 같은 기간 국민총생산은 매년 6.5~7% 증가했습니다(김학중, 2005: 309).

소 비에트 연방이 이와 같은 ‘대변혁’을 이룩함으로써 소비에트 인민의 상황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노동자의 수적 증가와 함께 대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집중이 커지게 됐죠. 제2차 5개년계획 말에는 공업노동자의 63%가 종업원 1,000명 이상의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었고, 소비에트 노동자 25.9%는 종업원 5,001명에서 1만 명 또는 1만 명 이상의 거대기업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은 ‘옥양목의 러시아’에서 ‘금속의 러시아’로 전환되었으며, 금속노동자가 소비에트 노동자계급 가운데 가장 큰 부대가 되었습니다. 1928년에는 금속노동자가 공업노동자의 14%를 차지했는데, 1937년에는 28.3%의 구성을 보였습니다.

또 노동자계급의 조직성과 사회주의적 의식성, 정치적 활동 수준, 그리고  노동의 적극성도 크게 성장했어요. 1936년에 공장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 그리고 전문직 노동자의 83% 이상이 노동조합원이었으며, 노동자 10명 가운데 한 사람은 공산당원이었습니다.

농 민의 사회적 본성과 태도도 사회·정치적 요인과 경제적 요인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농촌의 계급분화는 종료되었으며, 사회주의적 대경영인 콜호스 농민이 형성되었죠. 콜호스제도가 정착된 이후 노동자와 농민이 창출한 정치적 동맹의 바탕에는 전 인민적(국가적) 소유와 콜호스=협동조합적 소유 형태의 단일한 경제적 토대가 조성되었습니다.

그 리고 사회주의 건설 기간에 새로운 소비에트 인텔리겐치아가 형성되었습니다. 1928~1937년 사이에 소비에트 고등교육 시설은 전문가 56만 8,600명을 배출했습니다.  과학자는 8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혁명 전의 러시아에서는 1만 1,600명에 지나지 않았죠.

1936 년 12월5일에 열린 제8회 전 연방 소비에트 대회는 소비에트 신헙법을 채택하여 사회주의를 법으로 확인했습니다. 헌법은 사회발전의 수준에 맞추어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적 기초가 사회주의 경제체제와 생산수단·생산용구의 사회주의적 소유라는 것을 선언했어요. 또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에 따른 완전한 지배, 착취와 피착취계급의 일소, 사회주의의 중요한 원칙 ―개인으로부터는 능력에 따라, 개인에게는 노동에 따라― 의 실현을 명기하였습니다. 1936년 헌법은 사회주의 건설의 총결과로서 소비에트 사회의 구조에 따른 사회적 통일 달성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민족 동등권, 모든 소비에트 민족들의 형제적 우의와 협력을 민족정책의 주요 원칙으로 설정했습니다.

1936 년 헌법의 특징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최대의 목표로 설정하였다는 것인데, 헌법은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양심의 자유, 노동자가 여러 가지 사회단체에 결합할 수 있는 자유, 개인의 불가침과 서신의 비밀을 보장했습니다. 또 일체의 정치적 제한을 철폐함으로써 모든 시민의 완전한 법적 평등을 실현하고자 했고, 소비에트 시민의 권리를 보장함과 동시에 사회주의 제도의 강화와 옹호의 의무, 그 밖의 법률 준수를 요구했습니다.

그 런데 소비에트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는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 문제들이 있었어요. 특히 스탈린의 개인숭배,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규범의 침해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중대한 해악으로 작용했죠. 소비에트 연방에서 사회주의가 이미 승리하고 착취계급과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일소된 조건에서, 또 소비에트 인민의 사회·정치적 통일이 이미 달성된 상황에서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주의 지위가 강화되고 소비에트 국가가 발전하면 할수록 계급투쟁이 점점 격화된다는 잘못된 교의를 제기했습니다. 실제로 이 잘못된 교의는 사회주의 법질서의 침해와 대중 탄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스 탈린의 테제는 당과 국가의 우수한 일꾼, 중앙위원과 중앙위원 후보, 소비에트 군 사령관, 그리고 그 밖에 아무 죄도 없는 당원과 비당원에게 대규모의 탄압을 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어요. 당시 당과 인민에게는 스탈린이 권력을 악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잘 인식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소비에트 시민들은 스탈린을 사회주의를 승리로 이끌기 위한 투사로 생각하고 신뢰했죠. 그러나 사회주의 법질서의 파괴와 대량 탄압은 당에 대해서나 사회주의 건설에 대해 중대한 손실을 가져왔습니다(포노말료프, 1991: 187~190).

이 에 대한 역사학자 카(Carr, E. H.)의 스탈린 비판은 자못 혹독합니다. 스탈린은 레닌에게는 없었던 허영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실제 관직의 유지와 장식뿐만 아니라 절대 복종과 그의 잘못 없음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였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스탈린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잔혹하고 보복적이었다고 했습니다. 스탈린의 대중에 대한 태도는 모멸적이었고, 자유와 평등에 대해 무관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 혁명 발발 전망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었다는 것이죠.

스 탈린은 50살의 탄생일(1929년 12월21일)에 야망의 정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의 난폭하고 독단적인 권력행사에 관한 레닌의 우려가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에 충분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집단화, 강제수용소, 대규모적인 구경거리 재판, 그리고 지난날 그에게 반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가 권력의 자리에 오르도록 원조했던 많은 사람들까지도 재판 유무에 관계없이 무차별하게 탄압했죠. 출판·예술·문학·역사·과학에서의 엄격하고도 획일적인 강제와 모든 비판적 의견에 대한 억압은 말소될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고 카는 지적했습니다(Carr, 2004:169~172).

그 런데 홉스봄은 소련에서 시행된 어떠한 급속한 근대화 정책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무자비할 수밖에 없었고, 대다수 인민들의 의사에 반하여 부과되고 그들에게 상당한 희생을 안겨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강제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또 ‘계획들’을 통해서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는 중앙집권적인 통제경제는 마찬가지로 불가피하게 경제사업보다는 군사작전에 더 가까웠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Hobsbawm, 1996―3: 380).

이 러한 곤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건설은 계속되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경제·문화적 권위와 경제·방위에서 발휘한 발전 동력은 평화를 지키는 투쟁을 지지하고 제국주의 침략정책에 반대하며, 인민들 사이의 동등한 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투쟁의 유효한 수단으로서 그리고 세계의 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강력한 지지의 발판으로 이용되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67).

 제14장 2절 자본주의의 부분적 안정과 소련 사회주의 건설 시기의 코민테른

 “노 동조합은 자본주의 세계 전체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대중조직(포괄적인 조직)의 가장 중요한 형태이다. 그 밖의 여러 형태(공장위원회·경영위원회 등)의 대중조직도 매우 귀중한 것이고, 커다란 혁명적 미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대중조직의 형태들은 이제 겨우 광범한 노동자 대중에게 전반적으로 승인받기 시작하였다. 또 소비에트와 같은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대중·포괄적인 조직형태는 혁명이 직접 시작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볼 셰비키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의 하나는 기존의 사회민주당계와 그 밖의 노동조합(황색노동조합, 국수사회주의·기독교·파시스트적 노동조합) 내에서 추진하는 활동에 대해 이제까지보다 백배 이상 큰 주의를 기울이는 데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노동조합 내에서 개량주의적 상층부(노동귀족과 노동관료)의 독점적 권력을 현실적으로 타파할 수 있다. 또 노동조합은 이러한 조건에서만 계급투쟁의 가장 확실한 무기인 노동조합의 의의에서 그 골자를 모두 빼버리려고 애쓰는 개량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실제로 벗어날 수 있다.”

―코민테른 제5회 확대집행위원회 총회의 ‘코민테른 당의 볼세비키화에 관한 테제’.

 

1. 코민테른 제5회 대회

 

자 본주의 국가들의 부분·상대적 안정시기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변혁운동은 혁명적 강습(强襲)이 아니라 진지전, 즉 상대적으로 온건한 투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자본의 공세를 막아내고 근로대중의 당면한 정치·경제적 요구들을 옹호하며, 노동자계급과 그 조직을 전면적으로 강화하는 일이 노동운동의 주요 임무로서 제기되었죠.

코 민테른이 변화된 조건에서 당면한 노동운동의 임무에 관한 토의를 시작한 것은 제5회 대회에서였어요. 대회는 1924년 6월17일부터 7월8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렸습니다. 대회에는 대의원 504명이 출석했는데, 공산당과 노동자당 49개, 인민혁명당 1개, 그리고 국제조직 10개를 대표했습니다. 대회에는 조선 대표도 참가했죠. 이 대회는 코민테른 창설자의 한 사람이었고 지도자였던 레닌이 사망하여 그가 참석하지 못한 최초의 대회였습니다.

코민테른 제5회 대회와 제5회 확대집행위원회 총회(1925년 4월)에서 토의된 중심 의제는 당의 사상·조직적 강화 방침, 새로운 유형의 실제적인 전투적 당으로 전화하는 문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창조 등이었습니다.

코 민테른 제5회 확대집행위원회 총회는 ‘코민테른 당들의 볼셰비키화에 관한 테제’에서 “혁명 발전의 속도가 완만해지고 장기화함에 따라 볼셰비키화란 슬로건의 중요성은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증대되고 있다”며 “볼셰비키 당은 혁명의 물결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저절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볼셰비키 당은 노동자계급의 모든 투쟁에 참가함으로써 그 투쟁을 통해 형성된다. 코민테른이나 그 주변에 있는 우파 분자나 동요 분자는 혁명적 사건의 급속한 발전이 없다면 당의 볼셰비키화라는 슬로건은 부적당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천명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혁명적 발전의 속도가 완만해지고 그것과 관련하여 프롤레타리아 층 일부의 동요가 심해져 반혁명적인 사회민주당에 유리한 분위기가 커지면, 오히려 당의 볼셰비키화라는 슬로건은 그만큼 더 필요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사태에서 공산주의자는 동요에 대한 방벽을 만들어내고 프롤레타리아적 전위의 가장 우수한 분자를 우리 대열 내에 묶어내며, 이러한 분자들의 수를 늘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깃발 그 자체를 견지하고,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프롤레타리아적 중핵 ―온갖 조건에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준비, 조직할 수 있는― 을 결집할 수 있도록 그만큼 더 끈기 있게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리고 “당은 필요한 경우에는 혼란에 빠지지 않고 질서 있게 비합법 상태로 이행할 수 있고, 또 그 합법성을 손쉽게 방기하는 일 없이 합법 활동과 비합법 활동을 결합시킬 수 있으며,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합법적인’ 단서를 이용하여 지하생활의 테두리를 돌파하고 혁명을 준비하는 공공연한 대중운동의 선두에 설 수 있을 만큼 유연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그때 자신의 기본적인 혁명적 임무에 늘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어요(동녘, 1989 1: 229).

코 민테른은 당 사업 전개에서 ‘두 가지의 기본적인 위험’이 존재하므로 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그 하나는 ‘훌륭한’ 원칙을 가지고는 있지만 당면 시기의 대중적인 노동운동과 접촉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순수’ 공산주의자의 분파로 전화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당이 광범한 노동대중의 획득을 위한 투쟁과 공산주의의 원칙에 대한 충성을 결합하지 못하여 무정형의 반(半)사회민주주의적인 당으로 전화될 위험이 그것이다. 분파주의와 편협성이라는 스킬라, 무정형과 애매성이라는 카리브디스 양자를 피할 능력을 갖는 것 ― 이것이 당의 볼셰비키화를 촉진하는 것의 의미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동녘, 1989 1: 229~230).

코 민테른은 볼셰비키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볼셰비키화라는 것은 여러 나라의 주어진 구체적인 정세에 레닌주의의 일반 원칙을 적용하는 능력인 것이다. 볼셰비키화는 그것을 장악함으로써 ‘연쇄’ 전체를 끌고 가는 것이 가능한 주요 ‘고리’를 쥐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 ‘고리’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다양한 사회·정치 정세에서는 모든 나라에서 똑같을 수는 없다. 볼셰비키화는 코민테른의 가장 우수한 유럽 여러 당에서 이제 겨우 시작된 장기간의 ‘지속적인’ 과정이다. 앞으로 수행되어야 할 일은 거대하고, 그 해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동녘, 1989 1: 233).”

또 코민테른은 볼셰비키화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대중을 획득해낼 수 있는 올바른 정책이라고 규정하면서 “볼셰비키 당의 주요한 기초적인 조직형태는 생산점(生産点)에서의 당 세포이다. … 공장·경영의 당 세포 외에 노동조합, 공장·경영위원회, 협동조합 등과 같은 조직 내의 활동과 아울러 일련의 보조적인 무당파 조직 ―세입자, 실업자, 퇴역군인 등의 조직(그 내부에는 당 프랙션이 만들어진다)― 의 창설에 힘을 쏟을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볼셰비키화를 위해서는 우리 당이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노동자 조직의 그물망을 가능한 한 조밀하게 또 다양하게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모든 크고 급박한 문제를 이용하여 이런 저런 느슨하고 ‘자유로운’ 조직 ―그것이 생명력을 갖고 있는 한― 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표명하였습니다(동녘, 1989 1: 253).

코 민테른은 ‘볼셰비키화와 노동조합 내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도 ‘테제’에서 밝혔는데,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세계 전체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대중조직(포괄적인 조직)의 가장 중요한 형태라고 규정했어요. 공장위원회와 경영위원회 같은 다른 대중조직도 매우 중요하고 혁명적 미래를 갖고 있으나, 이 새로운 대중조직의 형태들은 이제 노동자 대중에게 전반적으로 승인받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죠.

노 동조합 내 활동에 대해서는 기존의 사회민주당계와 그 밖의 노동조합(황색노동조합, 국수 사회주의·기독교·파시스트적 노동조합) 내에서 추진하는 활동에 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노동조합 내 개량주의적 상층부(노동귀족과 노동관료)의 독점적 권력을 현실적으로 타파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동녘, 1989 1: 239).

코 민테른은 통일전선 전술에 관해서도 기본 방침을 밝혔는데, “통일전선 전술은 바로 대중을 혁명적으로 선동하고 조직하는 방법, 요컨대 사회민주당이 아직 수많은 나라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운동 단계에서 공산주의자가 광범한 노동자 대중에게 접근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통일전선 전술은 결코 코민테른 내 우파 분자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 코민테른의 지지에 따라 수행되고 있는 국제노동조합운동의 통일을 목표로 한 투쟁은 앞으로 여러 해가 걸릴 것이다. 국제노동조합운동의 통일이라는 사상은 노동자 대중의 광범한 층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다. 머지않아 이 문제가 모든 나라의 모든 노동조합 내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될 때가 올 것이다. 코민테른은 통일전선 전술(특히 제5회 세계대회의 해석에 따른 노동자·농민 정부라는 슬로건)의 적용에 겨우 이제 막 착수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코 민테른의 강령과 전술에 대한 논쟁이 구체화된 것은 1926년 여름 트로츠키주의자와 ‘신반대파’가 만들어낸 반레닌주의·반당적 합동 블록이 코민테른과 러시아 소련 공산당의 기본 노선에 대항하여 공격을 감행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트로츠키주의자는 강령이 제시한 지침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문제, 특히 영국 문제와 중국 문제에 대해서도 자체 정강을 내걸고 맞섰죠(김성윤, 1986 Ⅰ: 261~262).

1926 년 5월 영국에서 탄광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총파업이 발생했는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의는 영국 노동자와 광범한 연대운동을 벌일 것을 호소하면서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과 코민테른의 행동통일이 필요하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또 코민테른은 ‘우리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달성해야 하고 또 달성하기를 원하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연대행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조직들과 개량주의적 조직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를 보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영 국의 총파업이 패배로 끝난 뒤에도 탄광 노동자들만이 같은 해 11월 말까지 완강한 파업투쟁을 전개했는데, 트로츠키주의자와 반대파는 영국·러시아 노동조합위원회(영·러위원회)에 대한 코민테른과 당의 정책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가했습니다. 지노비예프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제출한 테제는 소비에트 노조는 영·러 위원회에서 즉각 탈퇴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죠. 지노비예프의 주장은 자본주의의 안정은 이미 종료되었거나 종말에 가까워졌고 자본주의 체제는 혁명적 폭발의 시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전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지 노비예프에 이어 트로츠키와 카메네프도 소비에트 노동조합이 영·러위원회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했고, 주요 타격을 영국 노조회의 총평의회 좌파 쪽으로 돌리도록 제의했어요. 트로츠키는 “영·러위원회의 출발점은 미숙하고, 발전이 너무 더딘 공산당을 건너뛰려는 조급한 충동이었다. 이것은 심지어 총파업이 일어나기도 전에 전체 경험에 잘못된 특징을 부여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스 탈린이 “만약 영국의 반동적 노동조합들이 자국의 반혁명적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기꺼이 우리나라의 혁명적 노동조합들과 블록을 맺으려 한다면, 우리가 왜 이러한 블록을 환호해서는 안 되는가?”라면서 영·러위원회의 역할을 강조한 데 대해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맞받았습니다. “만약 ‘반동적 노동조합들’이 자국의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투쟁할 수 있었다면, 이들은 반동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스탈린은 반동적이란 개념과 혁명적이란 개념을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다”(트로츠키, 2009: 138, 143). 

소 비에트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지노비예프의 테제도, 트로츠키와 카메네프의 제의도 모두 거부했어요(김성윤, 1986 Ⅰ: 263). 그러나 1927년 영국 정부가 ‘인도에서의 공산주의 선전’을 구실삼아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자, 영국노동조합회의(TUC)는 영·러위원회에서 탈퇴하면서 소련을 강도 높게 비난했습니다(핼러스, 1994: 173).

1926 년 5월, 지노비예프는 또 하나의 테제를 제출했습니다. 그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중국 공산당으로 하여금 국민당에서 탈퇴하도록 지령해야 한다고 제안했죠. 중국 공산당의 국민당 입당을 두고 트로츠키는 “부르주아지의 지도력에 대한 공산당의 공식적인 복종, 그리고 소비에트의 구성에 대한 금지령(스탈린과 부하린은 국민당이 ‘소비에트를 대신한다’고 주장하였다) 등은 1905~1917년 사이에 멘셰비키가 한 모든 행위들보다도 훨씬 더 노골적으로 그리고 파렴치하게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한 행위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이 제안을  ‘중국에서 혁명운동 말살을 초래하는’ 방침이라고 평가했죠.

그 러나 현실은 코민테른 방침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어요. 장제스 군대는 중국 전체를 군사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북벌’을 시작하여 1927년 2월에는 양쯔강(揚子江) 근처까지 진격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상하이에서 국민당을 지지하는 총파업을 주도했으며, 3월에는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했죠. 그리고 장제스가 며칠 만에 현지에 도착하여 노동자 조직을 깨뜨리기 위해 국민당 군대를 편성했습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대표들은 중국 공산당에 대해 무기를 숨기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무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했어요. 1927년 4월12일 국민당 군대가 드디어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상하이에서는 공산당과 노동자 조직이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로부터 3개월도 못가서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들도 장제스와 타협하고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등을 돌렸죠. 국민당 좌파를 이끈 왕징웨이(汪精衛)는 나중에 1930년부터 1944년 죽을 때까지 일본 점령 중국 지역 괴뢰정권의 수괴가 되었습니다(핼러스, 1994: 177~178).

이 밖에도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 등의 반대파는 코민테른의 기본방침에 반기를 들었고, 세계혁명 과정의 발전 전망에 관한 코민테른의 기본적 평가와 결론을 수정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반대파와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요 의제는 일국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에 관한 문제였어요. 1926년 10월26일부터 11월3일까지 열린 소련 공산당 제15회 협의회에서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사회주의 건설에 따르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들어 일국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회의적 주장을 폈습니다.

트 로츠키주의자들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직접적인 국가 차원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소련에서 시행되는 사회주의 건설은 세계혁명을 방기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망각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죠. 반대파의 이론적 토대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이었습니다.

트 로츠키는 그의 저서『영구혁명』에서 ‘영구혁명론’을 구체적으로 서술했습니다.  그는 영구혁명론에 통합되어 있는 세 가지의 핵심적인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영구혁명론의 첫 번째 측면은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의 건설 사이에서 혁명은 영구적으로 발전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두 번째 측면은 사회주의 혁명 그 자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경제, 기술, 과학, 가족 제도, 도덕,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진행되는 혁명들이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하는 가운데서 사회가 온전하게 균형 상태에 도달하지는 않으며, 사회주의 혁명 그 자체의 영구적인 성격은 바로 이 점에 있다는 것이죠.

세 번째 측면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성격이었어요. 그는 국제주의는 결코 추상적인 원칙이 아니라, 세계경제의 성격, 생산력의 국제적 발전, 그리고 세계 차원의 계급투쟁에 대한 이론·정치적 반영이라고 보았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일국적 기반 위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은 결코 일국의 기반 내에서 완성될 수는 없으며, 일국의 틀 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유지는 단지 한 때의 상황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트로츠키의 생각이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소련의 경우에서 보듯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다 할지라도 말이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고립될 경우,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필경 내·외적 모순들의 희생물로 전락될 수밖에 없고 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유일한 출구는 선진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승리하는 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혁명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하나의 총체가 아니라 오직 국제적인 사슬의 한 고리일 뿐이며, 세계혁명은 비록 일시적인 퇴조와 썰물이 있다 할지라도 영구적인 과정이라는 것이죠(트로츠키, 1989: 135~138).

트 로츠키의 주장은 결국 일국 사회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세계적 규모에서 혁명이 승리하지 못하면 소비에트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을 ‘변질과 부패’로부터 구해낼 수 없을 것이며, 제국주의의 정치·경제적 압력에 따라 사회주의 경제가 붕괴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소련에서는 자본주의 관계가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죠. 이러한 곤란을 극복하는 길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포함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위적으로 세계혁명을 ‘촉진’하는 데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건설의 성공을 위해 평화 유지를 추구한 소련의 대외정책을 ‘변질’로 규정하였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150).

반 대파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회 확대총회(1926년 11월22일~1926년 12월16일)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는데, 총회에서 채택한 결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회 확대총회는 소비에트 국가가 객관적으로 국제혁명의 주요한 조직적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확대총회는 소련 공산당이 과거의 모든 활동과 현재의 모든 활동을 통해 말로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증명하고 이 국제주의의 위대한 모범을 보여왔음을 확인한다. 확대총회는 민족적 편협성이라는 비난을 소련 공산당에 대한 중상이라고 생각한다”(김성윤, 1986 Ⅰ: 267).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의는 제7회 총회의 심의를 통해 지노비예프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 직무에서 해임하였습니다.

제 7회 확대 총회는 국제정세와 코민테른의 임무를 검토하면서 현재의 시기가 자본주의의 부분적 안정화 시기임을 강조했어요. 또 자본주의의 안정화를 일시적이고 애매한 것으로 만든 특히 중요한 요인으로서는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서 진행된 사회주의 발전, 영국 자본주의의 쇠퇴, 영국에서 첨예화한 계급투쟁, 그리고 중국의 민족혁명을 들었습니다.

-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동녘 편집부, 1989, 『코민테른 자료선집 1』, 동녘.
이인호, 1991, 「러시아 혁명과 노동자」, 서울대학교 서양사연구회, 『서양사연구 12권』.
Carr, E.H., 2004(first published 1979), The Russian Revolution from Lenin to Stalin 1917―1929, Palgrave Macmillan New York, 편집부 옮김, 1983, 『러시아 혁명―레닌에서 스탈린까지(1917~1929)』, 나남.
Thomson, John M., 1996, A Vision Unfulfilled: Russia and the Soviet Union in the Twentieth Century(D.C. Heath and Company), 김남섭 옮김,  2004, 『20세기 러시아 현대사』, 사회평론.
노말료프, B.N., 편집부 옮김, 1991, 『소련 공산당사 4』, 거름.
Hobsbawm, Eric, 1996―3, The Age of Extremes―A History of The World, Pantheon Books, a division of Random House, Inc., New York. 이용우 옮김, 1997,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 상, 하』, 까치.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The Institute of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 1985,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Problems of History and Theory, Volume 5, -Progress Publishers Mosc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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