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제2절 새로운 경제정책의 강구(Ⅰ)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41]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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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1장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위기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제12장 소비에트 러시아의 방위와 ‘신경제정책’
 제1절 소비에트 공화국의 방위
 제2절 새로운 경제정책의 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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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사회주의에 비해서는 악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봉건제, 소생산, 그리고 소생산자들의 분산성에서 기인하는 관료주의의 온갖 해악들에 비해서는 선이다. 우리는 아직 소생산으로부터 사회주의로 직접 이행할 힘이 없기 때문에 소생산과 교환의 자생적인(elemental) 산물과 같은 일정 정도의 자본주의는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특히 그것이 국가자본주의의 궤도를 향하도록 하는 것에 의하여― 소생산과 사회주의 사이의 매개 고리로 이용해야만 하며, 또 생산력 증대의 한 가지 수단, 한 가지 길, 그리고 한 가지 방법으로 삼아야 한다.”
―레닌

1. 내전 종식 후의 국내외 정세와 국민경제 부흥을 위한 당내 논쟁

국내전쟁과 외국의 무력간섭을 승리로 일단락한 뒤, 소비에트 공화국이 당장 해결해야 할 중대 과제는 다름 아닌 국민경제를 부흥시키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일이었습니다. 평화적인 사회주의 건설로의 이행은 매우 복잡한 국제정세와 국내정세 속에서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되었죠. 제국주의 국가들은 러시아 공화국에 대한 공격에서 패배하고서도 소비에트 권력의 기반을 없애려는 기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는 자본주의 진영 내 국가 사이의 모순과 계급적 대립으로 인해 쉽게 실행되지는 못했죠. 

1920년에는 경제위기가 도래했어요. 공장과 사업장이 폐쇄되었고, 거기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렸으며, 실업자와 반실업자의 수효가 4천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경제위기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 미국과 영국 사이, 일본과 미국 사이, 일본과 영국 사이 갈등과 충돌을 격화시켰죠. 이들 국가들은 모름지기 자국 이외의 다른 나라, 특히 소비에트 국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공황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내정세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어요. 국민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 외국의 군사간섭으로 인하여 심하게 황폐화되었죠. 노동자계급은 분산되고, 그 일부는 계급에서 탈락했습니다. 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사회적 기반이 취약해졌죠. 경제적 황폐는 한편으로 프티부르주아의 자연성장을 부추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정세하에서 1921년 초에는 ‘전시공산주의’ 정책이 새로운 정세와 모순을 빚게 되면서 정치적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국내전쟁과 외국의 군사개입 시기에 가능했던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라는 군사적?정치적 형태가, 평상시에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동맹 형태 즉, 경제적 형태가 필요했던 것이죠. 농민들은 자신들의 경영발전에 대한 유인(誘因)을 없애버린 식량할당 징발제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나타냈습니다. 소비에트에 대한 적대행동은 단보프 현, 우크라이나, 돈, 시베리아 등의 지역에서 부농의 폭동으로 나타났죠(황인평, 1986, Ⅲ: 129~130). 

1921년 3월 초에는 크론슈타트에서 돌발적으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발트 연안 크론슈타트의 요새의 수병 1만 6,000명이 “공산주의자 없는 소비에트”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죠. 이를 두고 일찍이 볼셰비키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크론슈타트 수병이 소비에트 정권에 반기를 든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 정권을 장악한 후 강경노선을 취한 데 대한 저항이었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합니다. 국제 부르주아지는 크론슈타트 반란을 ‘인민혁명’이라 부르기도 했죠. 

그러나 크론슈타트 반란에 참가한 수병의 대부분은 농촌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종전의 혁명적 수병들이 신 소비에트 정권 내로 흡수된 뒤 새롭게 충원된 불만계층들이었습니다. 아무튼 레닌은 이 사건을 당시 국내에 광범하게 존재했던 불만의 표출이라 해석했으며, 이를 “1921년 봄의 경제가 정치로 전화했다. = 크론슈타트”라는 표현으로 제시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85). 반란은 급속하게 진압되었지만, 새로운 반란의 위험은 그대로 남아 있었죠.

크론슈타트를 위시하여 시베리아와 여타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은 국내 정치위기의 표출이었어요. 당시의 정치적 위기를 레닌은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우리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커다란, ―내가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엄청난 국내적인 정치위기에 처해 있다. 이 국내 위기는 대다수 농민의 불만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불만도 표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황인평, 1986 Ⅲ: 131).

국내 정치위기는 당내에도 반영되어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당내 논쟁에서 제기된 것은 사회주의 경제의 관리 형태와 방법의 문제만은 아니었어요. 결국 당과 국가 그리고 노동대중 사이의 상호관계 문제, 프롤레타리아 국가 체제 내에서의 노동자계급 역할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1920년 11월에 열린 제5회 전 러시아 노동조합대회에서 당은 노동조합의 군사적 활동방법을 중지하고 민주주의적 활동방식을 채택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 의견이란 노동조합 지도기관 선출방식을 호선·임명제로부터 선거제로 대체할 것, 조합원들의 집회를 정기적으로 소집할 것, 선출된 기관은 반드시 보고해야 할 의무를 질 것 등이었죠.

노동조합의 민주주의적 활동방식에 반대한 것은 트로츠키였습니다. 그는 “노동조합운동이 프롤레타리아 혁명 기간에도 계속 ‘독립’을 누리는 것은 연합정책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노동조합은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도구가 된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다. 노동조합운동의 원칙 문제뿐 아니라 내부의 심각한 조직 갈등 또한 우리 당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다”고 주장했어요. 또 트로츠키는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 안의 자유분방하고 무정부주의적이며 기생적인 분자에 대한 혁명적 억압의 도구가 된다”고까지 했습니다(트로츠키, 2009: 171~172). 

트로츠키파의 주장은 한마디로 노동조합을 국가기관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들은 노동조합이 자치권을 박탈당한 채 정부기관에 통합되기를 원했어요. 이것은 트로츠키가 노동조합과의 갈등에서 이끌어낸 최종적인 결론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제도 아래서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국가에 대해 노동자들을 대변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의 공복으로서 노동자들에 대해 국가를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죠. 또 트로츠키파는 노동조합은 산업관리를 위해 노동자들을 훈련하고 국가경제가 나아가는 방향에서 동참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도이처, 2005, 1879~1921: 660~661).

노동조합 문제를 둘러싼 트로츠키와 레닌의 “실제적인 의견 상이”는 “대중에게 접근하여, 대중을 획득하고, 대중과 결합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레닌은 이를 두고 “여기에 모든 본질이 있다”고 했습니다.

트로츠키 말고도 여러 정파들이 독자적인 정강을 내걸고 등장했습니다. 시랴브니코프와 콜론타이를 지도자로 하는 ‘노동자 반대파’, 사브로노프를 지도자로 하는 ‘민주주의적 중앙집권파’, 부하린이 이끄는 ‘완충파’ 등이 그것이었죠.

‘노동자 반대파’는 국민경제의 관리를 ‘전 러시아 생산자 대회’라는 경제관리기관으로 이관하고, 개별 공업부문과 기업의 관리는 당해 노동조합과 종업원집단이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들은 최고국민경제회의를 폐지하고 국가에는 순행정적 기능을, 당에는 선전?선동 기능만을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죠. 노동자 반대파의 견해는 본질적으로 생디칼리즘적인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생디칼리즘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황인평, 1986 Ⅲ: 134). 

트로츠키파의 요구가 노동조합을 국가기관화 하는 것이라면, 노동자 반대파의 제안은 국가를 노동조합화 하는 것으로 해석되죠. 트로츠키파와 노동자 반대파의 주장은 언뜻 보기에 정반대인 것 같지만, 사회-경제적 개혁의 과정을 관리하는 당과 소비에트 권력과 능력을 불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습니다. 

‘민주주의 중앙집권파’는 노동조합이 최고국민경제회의의 간부회를 추천할 것과 당내에서 분파 결성의 자유를 인정할 것, 그리고 당과 소비에트의 지도적 기관에서 당내 분파가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게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 그들은 공장에서의 단독 책임제와 엄정한 규율 그리고 관리의 중앙집권제에 반대했죠. 

그들은 힘으로 인민의 신뢰를 얻으려는 정부의 방책에 항의한 최초의 볼셰비키 내 반대파였어요. 그들은 당을 권좌로 끌어올린 노동자계급에 당의 운명을 맡기라고 요구했죠. 그러나 당은 내전, 굶주림, 그리고 암 시장에 의해 위축되고, 기진맥진 상태에서 사기가 떨어진 노동자계급에게 당 자신의 운명과 공화국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도이처, 2005, 1879~1921: 662).

부하린파는 ‘완충적’인 정당을 내걸었습니다. ‘완충파’로 불리는 이유는 부하린이 레닌의 정강과 트로츠키파의 정강 사이에서 완충적인 역할을 담당하려 했기 때문이죠. 부하린파의 주장에 따르면, 노동조합이 경제관리기관에 대해 후보자를 뽑고, 지도기관은 그 후보자를 의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부하린의 완충적 정강은 본질적으로 트로츠키주의의 옹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부하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정강을 팽개치고 트로츠키의 주장을 옹호했죠(황인평, 1986 Ⅲ: 135).

이같이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당 중앙위원회는 루즈타크(당시 전[全]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의 회원이며 사무총장)의 테제를 기초로 하여 작성한 정강과 레닌을 비롯한 중앙위원 대다수가 서명한 정강을 채택했어요. 이 정강은 노동조합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가장 대중적인 조직이고, 이것은 국가의 조직도 아니고 강제적인 조직도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노동조합은 교육조직, 끌어들이는 조직, 훈련시키는 조직이고, 그것은 학교, 즉 관리의 학교, 경영의 학교, 공산주의의 학교라는 것이 레닌의 견해였죠.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노동조합의 기본적인 기능은 노동조합이 소비에트 국가의 계획 입안기관과 경영관리기관에 참여하는 것,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고 노동규율을 강화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 노동자의 물질적?문화적 이익을 배려하는 것, 노동자와 일반 노동대중 가운데서 국가기관과 경제기관의 기간 활동가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노동조합의 사명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발전시키고, 대중의 창의적 활력을 고양시키는 것입니다. 활동의 주요 방식은 강제가 아니라 설득이 적용되어야 하고요. 

격렬하고도 매우 광범위하게 전개된 논쟁에서 레닌의 견해가 당의 방침으로 채택되었고, 트로츠키와 부하린 그리고 여타 주장들이 근본적으로 비판당했습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것, 더욱이 프티부르주아적인 국가를 통치하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수백만의 대중을 지도하는 것은 결정적인 조건, 즉 당 내의 통일과 단결, 이데올로기의 일관성, 철의 규율, 기회주의적 편향과 분파투쟁에 대한 비타협이라는 조건하에서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던 거죠. 제10회 당 대회는 이런 중요한 조건을 조성해야만 했습니다(황인평, 1986 Ⅲ: 136).



2. 제10회 당 대회와 신경제정책(NEP)으로의 이행

러시아 공산당 제10회 대회는 1921년 3월8일과 16일 사이에 모스크바에서 열렸습니다. 대회에서 다룬 의제는 당의 건설과 통일, 노동조합, 민족 문제, 식량할당 징발제의 현물세로의 전환 등에 관한 것이었죠. 대회는 특히 식량할당 징발제를 현물세로 대체하는 문제와 ‘전시공산주의’에서 ‘신경제정책’으로 이행하는 문제, 그리고 두 개의 기본계급 ―노동자계급과 농민― 의 상호관계에 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심의했습니다. 

대회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동맹이 신경제정책의 본질임을 강조하면서, 이런 동맹은 경제적 기반 위에서 구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밝혔죠.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현물세 형태로서 농민의 손에서 식량잉여분의 전부가 아니라 그 일부를 수취하고, 나머지 잉여 식량을 농민이 자유로이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이런 조치들은 농민경영의 강화와 생산성의 향상, 그리고 농민들에게 맡겨진 국가적 의무의 정확한 확정이라는 필요에 따라 취해졌죠. 또 현물세제의 도입은 국영공업, 특히 국영중공업을 부흥?발전시키고 농업을 사회주의적 구조로 개조할 토대를 형성함으로써, 사회주의 경제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도 필요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88). 

이 같은 현물세의 도입은 개인 상업의 문제를 낳았어요. 개인 상업의 자유는 자본주의적 시장 요소가 기능할 수 있고 부농이 성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 영세기업이 생성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은 공업, 은행, 운수, 외국무역, 토지 등 국민경제의 중추적 부문이 국가 관리 아래 있는 조건에서 국영 상업과 협동조합 상업의 존재가 개인 상업이 초래할 폐해를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죠. 

레닌은 개인 자본을 ‘국가자본주의’ 방향으로 발전시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대공업을 가능한 한 빨리 부흥시켜 “주요한 생산력인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개별 공기업 ―소비에트 공화국이 자력으로 착수하기 어려운 부문: 임업, 광업, 석유, 전화(電化)― 을 외국자본에 이권의 형태로 공여하는 것을 국가자본주의의 한 형태로 지적했습니다. 

이런 정책에 대한 당원들의 반대도 없지 않았어요. 실제 거의 어떤 외국 투자가들도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업을 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자본에 공여할 이권들은 경제적 효과를 별로 가져오지 못했죠. 1928년에 외부 투자는 소비에트 총생산액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톰슨, 2004: 260).

레닌은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제한의 필요성도 강조했습니다. 그는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라는 궤도를 떠난 사회이지만, 그러나 아직 새로운 궤도에는 오르지 못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 국가자본주의는 우리가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본주의이며, 우리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제한할 수 있고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본주의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레닌, 1991,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제 11회 대회 정치보고: 174~175).

결국 신경제정책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동맹 강화를 바탕으로 국가를 사회주의 방향으로 발전시키며, 국민경제의 핵심 부문을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통제 아래 두면서 자본주의를 일정정도 수용하는 것을 방향으로 설정됐습니다. 최종적으로 신경제정책은 사회주의적 요소가 자본주의적 요소와 싸워 승리를 쟁취하고, 나아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죠.

이런 신경제정책의 목표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내의 반(反)신경제정책 분위기, 그리고 영웅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좌익 반대파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당원들 사이에서 신경제정책으로 인해 혁명의 이상이 손상되고 있다는 좌절감이 확산되었고, 높은 실업율과 임금·노동조건 개선의 부진, 경영자나 전문가 위주의 임금체계 등은 당에 대한 강한 불신을 불러일으켰죠. 이런 전반적인 불만 속에서도 신경제정책을 대체할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었고, 또 신경제정책을 포기할 경우 노·농 동맹이라는 당의 공식적인 노선과 정면 대결이 불가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책은 그대로 시행될 수밖에 없었죠(배영수, 2000: 622).

소비에트 공화국이 경제적 후진국, 그것도 오랜 전쟁과 혁명, 그리고 국내전으로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내적 구조 전체가 파괴된 상태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건설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기초를 공고히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서로 상반되는 요구들을 절충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대중적 직접민주주의’ 대 ‘계급의 적을 소탕하기에 충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 ‘경제의 효율적 운영’ 대 ‘노동자 관리체제’, ‘문화적 재건’ 대 ‘부르주아 잔재의 청산’,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상충되는 이해관계’ 대 ‘노·농 사이의 연대 유지의 필요성’ 등 서로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명제들을 한꺼번에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이 결국 일찍부터 국가권력의 비대화와 당 독재라는 현상을 빚게 되었다는 설명도 일정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이인호, 1991: 34~35).

신경제정책이 당 대회에서 채택되기 이전에도 경제의 계획적 지도가 강화되었어요. 이중 특히 1921년 2월 고엘로(GOELRO)위원회를 기초로 설치된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 고스플란)을 주목할 만합니다. 이 위원회의 임무는 국가경제계획을 입안하고 그 실현을 위한 일반적 통제방침을 작성하는 일이었죠. 이 계획에서는 경제적 균형과 경제의 부문?지역 간 연관을 바르게 규정하고, 사회적 생산의 연관부문들, 즉 채굴산업과 제조업, 농업과 공업, 운수부문과 국민경제의 활동, 그리고 생산과 소비의 성장 등의 조정을 확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정부는 고스플란이 장기적 경제계획과 단기적 경제계획을 잘 결합시킬 것을 의무로 부과했으며, 당면계획은 고엘로의 장기계획에 기초하여 작성하도록 했죠. 고스플란의 구성에는 중요 경제부문의 전문가와 과학?기술부문 활동가들이 참가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89~490). 

신경제정책은 현물에 의한 임금지불의 폐지와 균등 임금제에서 성과급제로의 이행을 채택하도록 제안했습니다. 노동생산성의 향상과 노동규율의 강화를 위해 물질적 자극의 역할이 커지고, 노동자계급의 생산적 활동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게 되었죠. 1921년 8월에 작성된 「인민위원회의의 훈령」과 「신경제정책의 원리의 실시에 대하여」는 국유 공업에서 “노동조합을, 또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 자신이, 생산관리조직과 공공산업의 작업조직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층 더 광범하게 개입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경제의 부흥과 발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공장 가동의 정상화를 위해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죠.

실제로 노동조합이 그 조직과 경제적 기능을 실현하는 데서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은 생산(경영)회의였어요. 이 회의에서는 개별 기업의 근본문제, 즉 생산규율, 노동의 생산성, 설비의 이용, 장기발전계획 등이 심의되었죠. 

전시 공산주의에서 신경제정책으로의 전환은 1921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3회 코민테른 대회에서 승인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공산당의 수가 크게 증가한 상태였죠.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여타 몇몇 나라들에서 공산당이 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공산당 결성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은 프랑스의 카샹과 크추리에, 이탈리아의 그람시와 톨리아티, 체코슬로바키아의 자포토츠키와 슈메랄 등이었죠. 1921년 7월에는 중국 공산당이 창설되었요. 코민테른 대회는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책과 전술을 승인하고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지원을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했습니다. 대회는 또 “대중 속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의 결성이라는 전술을 채택했습니다. 신경제정책은 이런 측면에서 국제적 의의를 갖게 된 것이죠.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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