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제1절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위기와 파시즘의 대두(Ⅲ)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37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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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1장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위기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제1절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위기와 파시즘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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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국 경제는 전쟁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침체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입은 물질적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전후 크게 약화되면서 전쟁 이전의 경제적 우위는 지킬 수 없게 된 것이죠. 세계경제에서 영국의 경제적 지위가 낮아진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습니다(김종현, 2007: 486~488).

첫째, 세계대전의 결과로서 영국은 금융상의 우위를 상실했습니다. 세계의 금융 중심지는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동하게 되었죠. 그것은 영국이 미국으로부터 군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전쟁 기간 중 약 10억 파운드에 이르는 수익성 있는 해외투자를 청산하였고, 파운드화의 가치 하락으로 말미암아 금융상의 위신을 상실한 결과였습니다. 

둘째, 영국의 무역이 정체되었습니다. 영국은 전쟁 기간에 종래의 수출시장에서 필요한 상품을 수출할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극동에서, 미국은 주로 중남미에서 영국을 대신해 시장을 확대함으로써 영국의 수출이 더욱 감소하게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영국 제품의 수출시장이던 인도, 도미니카, 중남미 국가 등 저개발 지역에서 공업화가 진전된 것도 영국의 수출을 감소시킨 요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생산 감소도 수출 축소의 요인이 되었죠.

셋째, 영국 정부의 디플레이션 정책도 경제의 침체를 심화시킨 또 하나의 요인이었습니다. 전후 영국은 파운드화에 의한 해외투자 가치를 회복시키고 런던의 금융상 우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파운드화를 전쟁 이전 환율로 되돌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기본적으로 디플레이션적인 조정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이런 조정을 통해 1925년에 영국은 금본위제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위해 치룬 희생도 매우 컸어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정치 세력에서도 큰 개편이 이루어졌습니다. 1918년 영국이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전시내각의 전략적 사고가 아닌, 미국의 참전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바로 총선거를 실시해야만 했어요. 전시경제를 이끌기 위해 설립되었던 각종 기구들은 해산되었고, 전시내각은 정상적인 내각 정부로 복귀했죠. 파리 강화회의를 통해 로이드 조지 수상은 잠시 동안 권력의 후광을 누릴 수 있었으나, 이후 그의 권한은 연립정권의 한 축인 보수당이 여러 가지 정치적 부담을 안겨주게 됨으로써 축소되었습니다. 


[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연합국 측 4명의 지도자. 왼쪽부터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윌슨 미국 대통령, 올랜도 이탈리아 총리,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

1918년 총선거에서는 정당 세력의 재편이 이루어졌습니다. 영국 본토에서는 자유당과 보수당의 연립정부 측 입후보자들이 경쟁자들을 압도했죠. 자유당 내 로이드 조지 진영이 얻은 133석과 에스퀴스 진영이 얻은 28석을 포함하여, 연립정부 측이 총 478석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재출범한 노동당은 63명이 당선되었어요. 보수당은 라이벌이던 자유당이 분열로 인해 쇠퇴한 데 힘입어 선거구를 유리하게 설정할 수 있었습니다(스펙, 2002: 234).

총선거를 통한 노동당의 약진은 보수당에 의존하고 있던 로이드 조지의 운신 폭을 제한했습니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보수당 당수 보나 로 역시 전쟁 이후 노동당의 급성장이 가져올 정치적 파장을 인식하고 있었죠. 노동당은 의석수에서는 비록 63석만을 차지했지만, 총 득표에서는 238만 5,472표를 획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19년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런던의 경우 이전에 48석을 차지하고 있던 노동당 측이 무려 573석을 얻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보궐선거에서는 노동당이 압도적 우세를 나타냈죠. 1922년 11월에 실시된 하원 선거에서는 노동당이 420만 표를 획득하여 142석을 차지하게 되었고, 드디어 자유당을 제치고 제2당이 되었습니다.

이런 정치적 재편 과정에서 로이드 조지는 보수당과 연립정부에 가담한 자유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중앙당’을 창설하여 노동당의 대두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양측으로부터 전혀 환영을 받지 못하여 무산되고 말았어요. 1923년 실시된 선거에서도 노동당의 의석은 크게 불어났습니다. 자유당은 43석 늘어난 159석을 얻게 되었지만, 1923년 선거에서의 실질적인 최대 수혜자는 1922년 선거에 비해 무려 49석이나 늘어난 191석을 얻은 노동당이었죠. 이 같은 의석 증가는 이전 선거 때와 거의 동일한 득표를 했음에도 258석으로 감소한 보수당의 의석 축소에서 나온 결과였습니다. 결국 1924년 1월 볼드윈의 보수당 정부가 실각한 뒤, 램지 맥도널드 노동당 정부가 등장했습니다.

처음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의회에서 사회주의적 정책을 결정할 만한 정치세력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자유당의 도움과 심지어 보수당의 지지에 의존해야만 했어요. 결국 노동당 정권은 영국의 기존 정치구조를 뒤흔들 것이라던 우려와는 반대로 체제 순응적인 양태를 보였고, 사회주의 지지자들에게는 큰 실망을 안겨주게 되었죠(스펙, 2002: 240~241).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정치적 격변이 진행되는 가운데 노동자계급의 투쟁도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자본 측의 수탈과 정부의 억압에 대해 가장 완강하게 저항한 부대가 광산 노동자들이었어요. 

1921년 3월31일 광산노동조합연맹과 탄광 기업주들 사이에 체결된 임시 임금협정 기한이 만료되었습니다. 기업주들은 이를 계기로 광산 노동자의 임금을 대폭 삭감하려 했죠. 정부도 그 날 이후로 전쟁 동안 시행된 석탄산업에 대한 국가 통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부의 이 같은 지지에 힘입은 탄광 기업주들은 4월1일부터 전면적인 직장폐쇄를 선언했고, 100만 명이 넘는 광산 노동자들이 불시에 일을 빼앗겼어요. 정부는 곧바로 국내에 비상대권법(비상사태)을 공포했으며, 경찰과 군대가 전투태세에 들어갔고, 예비역 동원이 행해짐과 동시에 의용 ‘방위대’가 편성되었는가 하면, 탄광지대에 군대가 파견되었습니다.



정부와 탄광 기업주의 이런 조치에 대응하여 광산노동조합연맹은 3자 동맹에 속한 다른 노동조합원들 -운수노조 조합원과 철도노조 조합원- 에게 공동 파업 결행을 제안했습니다. 운수노조와 철도노조의 지도부는 1921년 4월15일 광산 노동자들과 연대 파업을 결행할 것을 약속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어요. 노동자들은 이 날을 ‘검은 금요일’이라 불렀습니다.

광산 노동자들은 근 2개월에 걸쳐 투쟁을 계속했으나, 광산 기업주가 제시한 매우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죠. 영국 노동자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부대의 패배는, 다른 부문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에 대한 자본가 측의 공격 수행에 길을 터주게 되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510~511). 

미국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렇다 할 피해도 입지 않았으며, 전시경제 체제를 수립한 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전쟁에서 경제발전의 활력을 얻은 나라였습니다. 전시 동원해제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일어난 전쟁 경기는 전후에도 계속되었죠. 그것은 주로 전후에도 정부가 계속해서 지출을 행한 결과였어요. 정부 지출의 일부는 연합국에 대한 차관이나 원조로 사용되어 그것이 다시 미국 상품의 구입에 사용됨에 따라 국내생산을 자극하게 되었고, 그 나머지 일부도 아직 동원이 해제되지 않았던 조선공업이나 건설업 등의 민간 산업부문에 대한 투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18년 말부터 1921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기업 활동과 전후의 호황이 일게 된 겁니다(김종현, 2007: 494). 

미국 경제는 1920년대 들어서도 두드러진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산업의 생산효율은 크게 향상되었죠. 경제의 회복 과정에서 도입된 신 기계와 대량생산체제의 채용, 경영의 합리화, 그리고 연구사업의 확충 등에 의해 노동생산성 역시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호황 국면에서도 석탄산업, 면공업, 조선공업, 피혁공업, 그리고 농업부문은 정체하거나 쇠퇴했어요. 세계 공업생산 가운데 미국이 차지한 비율은 전후의 36%에서 1920년에는 47%로 증가했고, 다른 나라의 생산이 어느 정도 회복된 192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40%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강병식, 1992: 31).

한편 미국은 전후에 종래의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한 반면, 미국 이외의 국가들은 전쟁비용과 경제재건을 위한 자금상의 필요에 따라 외화 획득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1920년대의 미국 경제는 자본주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순조롭게 발전을 이룩하여 ‘20년대의 번영’, 또는 ‘영원한 번영’을 누렸죠. 대량소비 풍조 속에서 토지투기 붐이나 주식시장 과열 현상 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이처럼 사회가 전반적으로 들뜬 분위기에서는 어느 한 부문에 주어진 충격이 아주 거대한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될 소지가 잠재되어 있기 마련이었습니다(양동휴, 2006: 20). 번영의 뒤에서는 공황의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던 것이죠. 1920년 말에 이르러 상품 판매가 격감하고 가격이 크게 떨어졌으며, 이에 따라 생산이 중단되고 기업도산이 속출하여 실업자가 양산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성장한 독점자본 측은 1918년에서 1922년까지에 걸쳐 잔혹한 반격을 가했는데, 그것은 노동조합운동을 파괴하거나 또는 절망적일 만큼 불구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Foster, 1956: 258).

노동조합운동은 자본 측의 공격에 파업투쟁으로 대응했죠. 그 투쟁을 이끈 중심 부대는 탄광 노동자와 철도 노동자였습니다. 1920년 9월에는 중재재정(仲裁裁定)에 불만을 가진 무연탄광산 노동자 14만 명이 파업을 결행하여, 약 3주 동안 계속하다가 파업을 거두었습니다. 앨라배마에서는 ‘오픈숍’ 제도 시행에 반대하여 갈탄광산 노동자 20만 명이 파업을 제기했죠. 파업은 거의 반년 동안 계속되었으나, 결국에는 기업주에게 유리한 중재재정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922년 4월1일에는 광산 노동자 60만 명이 일손을 멈추었어요. 그들은 임금인하에 항의하면서 6시간 노동일과 주 5일 노동제 실시를 요구했죠. 기업 측과 정부는 수천 명에 이르는 파업 파괴단을 고용하여 파업을 깨뜨리려 했으며, 그래도 파업이 계속되자 계엄을 선포하고 무력충돌을 도발했습니다. 결국 광산 기업주는 노동조합과 타협적 협정에 조인하게 되었죠.

같은 해 여름에는 철도 노동자 40만 명이 일제히 파업에 돌입했는데, 직업별 노동조합 사이의 대립으로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전국에 걸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4월에 발생한 광산 노동자의 파업이 종료되면서, 철도 노동자에 대한 압박이 더욱 강화되었어요. 법무장관은 그들을 ‘내란’ 용의자로 고발했으며, 노동자의 투쟁은 패배로 끝났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566).

미국의 노동자들은 매우 복잡한 조건하에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미국노동총연맹(AFL)의 지도부는 주요한 파업투쟁들을 적극적으로 이끌지도 않았으며, 노동조합 사이의 연대행동도 조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합동에 대한 어떤 제안도 거부했습니다.

한편, 이 무렵 전국 각지에는 이른바 ‘회사 노동조합’이 급성장했어요. 1922년 말에는 이런 노동조합에 조직된 조합원이 대략 5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또 노동자들이 소액 주식을 취득함으로써 마치 기업경영과 이윤분배에 참가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이 생산합리화와 노동생산성 향상에 동의하는 결과를 빚게 했죠. 자본의 공세 앞에 굴복한 노동조합 지도부의 이런 태도는 조직 역량의 약화로 이어졌어요. AFL의 조합원 수는 1920년의 400만 명에서 1923년 300만 명으로 줄어들었으며, 공업부문 노동자의 15%만이 노동조합에 남게 되었습니다.

노동운동이 이처럼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사회의 민주주의 세력은 독자적인 정치조직 결성을 시도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22년 초에 결성된 ‘진보적 정치행동회의’(Conference for Progressive Political Action)였어요. 이 조직은 사실상 철도노동조합이 주도했죠. 여기에는 노동조합, 농민단체, 그리고 여러 대중조직의 전국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참가했습니다. 1922년 2월과 12월에 열린 대회에서 이 조직은 독점체의 권력을 제한하고 미국 정치제도의 민주화를 목표로 하는 개혁 프로그램을 설정했어요. 그러나 조직적 역량이 강고하지 못하여 그 다음해 정치행동회의는 사실상 해체되었습니다. 

일본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연합국 측에 가담했고, 전쟁이 끝나자 전승국의 일원으로서 패전국인 독일로부터 남양군도(南洋群島)를 양도받아 식민지를 확장하게 되었습니다(시오다 쇼오베에, 1985: 52~53). 그뿐만 아니라 일본은 중국에서부터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시장 약탈을 강행했죠.

경제체제 내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한 독점자본은 대내적으로는 봉건적 유제(遺制)에 기반을 둔 세력들을 제압 또는 무력화시키면서(1917년 일본공업구락부 발족, 1922년 일본경제연맹 창립, 1924년 호헌삼파(護憲三派)내각 성립), 대외적으로는 조선 합병(1910년)을 발판 삼아 만주를 거쳐 중국 본토에까지 진출했습니다. 

한편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신흥재벌이 대두되어 강력한 콘체른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금융과두 지배의 중심에 자리 잡은 기존 재벌의 지배력은 전쟁 진전에 따른 경제 통제를 통하여 점점 더 강화되었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도모(住友), 수미다(安田) 등 4대 재벌의 지배는 결정적인 힘을 갖게 되었죠(오사카시립대학경제연구소, 1965: 857). 

세계전쟁의 결과에 따른 일본 경제의 번영은 노동자계급의 양적 확대와 구성의 큰 변화를 가져 왔으며, 노동자 투쟁도 조직적 성격을 강화했습니다. 1913년 광공업 노동자 수는 145만 명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1918년에는 248만 명으로 증가했죠. 

일본에서는 ‘쌀 소동’ 이후, 노동자의 투쟁이 증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비해 한층 더 조직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1917~1922년 동안의 파업 건수는 그 앞의 6년 동안에 비해서는 약 5배가량 증가했으며, 파업참가자 수는 거의 8배나 증가했어요. 요구조건으로는 8시간 노동일제, 임금인상, 노동조합과 단체협약 승인 등이 제기되었습니다. 투쟁 과정에서 선진적 노동자들은 노사협조적인 노동단체인 ‘우애회(友愛會)’를 계급적 전국조직인 ‘일본노동총동맹’(1921년 개칭)으로 전환시켰죠. 



당시 일본의 농촌에서도 소작쟁의가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소작쟁의 건수는 1918년의 85건에서 1921년의 1,680건으로 크게 증가했죠. 소작농과 영세토지소유 농민은 농지개혁의 실시와 소작료의 감면을 요구했어요. 1922년에는 노동총동맹의 제창으로 ‘일본농민조합’이 결성되었고,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부 675개와 조합원 5만 명 이상을 포괄하는 대중조직으로 전환했습니다.

노동운동 전개에서 노동조합 조직이 점점 체계화되고 투쟁이 크게 고양되는 가운데, 운동 노선과 이념도 마르크스-레닌주의 지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러시아 혁명 이전 전투적 노동자들이 지니고 있던 운동 노선은 무정부적 생디칼리즘이었죠. 이 노선은 메이지(明治) 말기 고도쿠 슈스이(幸德秋水) 이래의 전통을 갖고 있는 것으로, 노동조합운동의 고양과 결합되어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어요.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생디칼리즘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하면서, 노동조합의 적극적 활동가와 진보적 지식인들이 차츰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널리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른바 ‘아나·볼 논쟁(아나키즘과 볼셰비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1922년 7월 일본공산당이 창립되면서 일본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운동의 사상적 기조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정착되었습니다(시오다 쇼베에, 1985: 59). 

1923년 3월에 열린 일본공산당 임시대회에서 당 강령 초안이 토의되었으나, 강령 초안은 당 지도부의 검거로 미처 심의되지 못했습니다. 이 강령 초안은 잘 다듬어지지 못한 명제들도 포함하고 있기는 했으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일본의 구체적인 조건에 적용시키려는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었죠. 이 강령 초안은 실현해야 할 혁명으로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화할 전망을 갖는 부르주아 혁명을 제안하고 목표로서 규정했습니다. 또한 강령은 군주제의 폐지, 추밀원(樞密院)과 귀족원의 폐지, 군대·헌병·비밀경찰의 폐지, 보통선거권과 민주적 자유 실시, 8시간 노동일제와 쟁의권의 확립, 노동조합의 승인과 사회보장의 실시, 대토지 소유의 몰수와 소작지의 경작농민에게로 인도, 세제의 민주화 등을 요구했습니다. 또 외국에 대한 모든 간섭 기도의 중지, 중국, 조선, 대만, 북 사할린에서의 일본 군대 철수를 주장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669~670). 


[ 관동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시가지 ]

1923년 9월에는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가 발생하여 대규모적인 테러가 행해졌어요. 당시 행해진 테러의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재일 조선인에 대한 학살사건, 가메이도(龜戶) 사건, 오스카 사카에(大杉榮) 부처 학살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학살 사건 말고도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고 검거당하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어요. 그 결과 노동운동은 중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상당수의 지도자를 잃었죠. 이런 사태들은 일본 노동운동의 분열과 장기적인 쇠퇴로 이어졌습니다(시오다 쇼오베에, 1985: 64~6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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