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제1절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위기와 파시즘의 대두(Ⅱ)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36]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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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1장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위기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제1절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위기와 파시즘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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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한 측면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공업 생산력은 빠르게 증대되었고, 그 과정에서 은행과 산업자본의 유착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죠. 그러나 전시 수요의 중단은 철강을 비롯한 기간산업 부문의 독점체에 대해 큰 타격을 주었으며, 1920년의 공황은 북부 공업지대에서 일어난 노동자 투쟁과 아울러 이탈리아 금융자본의 지배체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大阪市立大學經濟硏究所, 1965: 508).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탈리아가 참전한 이래 3년 반 동안 500만 명이 징집되었고, 그 가운데 대략 장병 60만 명이 프리울리와 트렌티노의 높은 알프스 산기슭의 참호 속에서 전사했죠. 최전방에 배치된 대부분의 병사들은 남부 출신의 가난한 농부들이었어요. 당시 이탈리아 군대의 무장 상태는 형편없었으며, 배급량이나 월급 수준도 매우 낮았습니다. 반면에 규율은 엄격한 편이었죠. 1915~1919년에 걸쳐 병사 약 30만 명이, 대부분 탈영 죄로 군법정에 회부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폐해도 있었어요. 전쟁 참가는 1914년 이전의 자유주의 체제를 위협했던 분열의 틈을 메우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도 국가를 분열시켰던 거죠. 사회당은 두드러질 정도로 세력을 잃게 되었고, 바티칸의 불신과 증오는 고조되었으며,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매우 깊었습니다. 더욱이 군대가 정치인들의 간섭 없이 전쟁을 계속 수행할 것을 고집했다는 사실은 의회가 전쟁의 승리를 통해 어떤 찬사나 신망을 얻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했죠. 이렇듯 정부와 의회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카포레토 전투 이후 오를란도가 새 수상직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의 지배계급과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여론은 전쟁을 통해 더욱 악화되었죠(듀건, 2001: 271~272). 

전쟁이 끝난 뒤 정치적으로도 큰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우선 1918년 12월 이탈리아 정부는 모든 성인 남자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했고, 1919년 8월에는 좀처럼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비례대표제에 의한 선거가 실시되었어요. 1919년 11월 실시된 선거에서 사회당이 156석을 차지했고 가톨릭 정당인 인민당이 100석을 차지한 반면, 자유주의와 그 연합당은 전체 의석의 절반도 차지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축소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이탈리아 정부는 전쟁 승리에 따라 여러 가지 이권을 획득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죠. 그럼에도 파리 평화회담에 참석한 이탈리아 대표단은 참전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요구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어요. 이탈리아는 트렌토, 남부 티롤, 이스트라를 얻었으나, 달마치아와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항구 도시인 피우메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죠. 이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는 가운데, 1919년 6월 오를란도가 수상직에서 물러나고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니티가 새로 수상에 임명되었습니다. 

1919년 여름 이탈리아의 북부와 중부 지역에서는 식료품 소동이 발생했고, 상점들이 약탈당했어요. 1919년 한 해 동안 100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가했고, 그 이듬해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파업에 참가했죠. 

1919년 9월에는 유명한 시인이었던 단눈치오가 몇몇 군 장성들과 산업자본가들의 지원 아래 지원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피우메를 점령했습니다. 단눈치오는 일 년 조금 넘게 이 도시를 점령했어요. 1920년 12월 새로 수상이 된 졸리티는 해군으로 하여금 피우메를 진압하도록 했고 단눈치오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죠.

이처럼 정치적인 격변이 진행되는 가운데, 1920년에는 공업생산이 축소되고 실업이 증대되면서 파업 투쟁이 격화되었습니다. 1920년의 파업 건수는 전년에 비해서 증가되었으며, 운수노동자를 비롯하여 금속노동자, 기계제조노동자, 화학산업 노동자, 섬유노동자들이 완강한 투쟁을 벌였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507). 

기업주들은 정면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정부 측에 지원을 요청했어요. 그러나 졸리티 정부는 ‘불간섭’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것은 군대의 개입이 노동자 투쟁을 공장에서 가두로 진출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칫 자본 측과의 타협으로 혁명을 유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행한 결정이었죠.

1920년 9월에는 노동자 50만 명이 4주 동안 공장과 조선소를 점거하여 관리자들을 내몰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공장점거’를 단행하여 그 절정에 이르렀죠. 여기에서 이탈리아 노동운동사상 ‘신화’로 불리는 ‘공장점거’와 ‘노동자 통제권’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공장점거는 당초 노동조합의 임금교섭에서 발단되었어요. 1920년 5월20일 이탈리아 금속노동조합연맹(Federazione Italiana Operai Metallurgici: FIOM)은 제노바에서 전국대회를 열고 단체교섭을 위한 공식적인 요구안을 결정했습니다. 요구 내용은 임금 40% 인상(당시 평균 일당 18리라를 25.2리라로 인상)과 각종 수당 및 최저임금 인상, 연 12일의 유급휴가 지급이었죠. FIOM 지도자들은 임금투쟁을 통해 4월 파업 때의 ‘배반’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달래고 노동조합의 권위를 다시 세울 필요를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요구 내용에는 피에몬테 총파업에서 제기된 공장평의회나 내부위원회, 공장 내의 규율에 대한 것은 담겨 있지 않았죠.

FIOM은 6월18일 금속산업의 사용자단체인 기계금속산업조합연맹(FNSIM)에 단체교섭 요구안을 제출했어요. FNSIM은 FIOM 이외의 노동조합들도 교섭에 참여시켜야 한다며 교섭을 지연시키다가, 경기악화를 이유로 임금동결을 주장했죠. 사용자 측의 의도는 경기침체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동시에, 노사분쟁을 정부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8월13일 FNSIM은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확인하고 교섭 결렬을 선언했습니다. 이에 FIOM은 8월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밀라노 노동회의소에서 비상전국대회를 열고 8월20일부터 모든 공장에서 ‘방해전술’(ostruzionismo)을 실시하기로 결정했어요. 방해전술이란 작업과정에서 속도를 늦추고 안전규정을 철저하게 지켜 생산량을 줄이는 투쟁방법입니다. FIOM이 파업 대신 방해전술을 선택한 것은 ‘돈이 덜 드는’ 것이기 때문이었죠. 



전국의 금속산업 사업장들에서 방해전술에 따른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밀라노에서 새로운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8월30일 노동자 약 2,000명이 일하고 있는 로메오 공장 경영진이 노동자들 사이에 외국의 선동분자들이 잠입했다고 주장하면서 공장폐쇄를 통고한 것이죠. 이런 사태에 부닥친 밀라노 FIOM지부는 다른 공장들도 동일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노동자들에게 즉각 밀라노 시와 주변 지역에 있는 작업장 약 300군데를 점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공장점거는 별 충돌 없이 이루어졌죠. 경찰은 개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장 접근도 하지 않았어요. 정부는 이미 수차례 산업자본가들에게 무력개입이 불가능하다고 밝혔고, 졸리티는 정부 관리들에게 개입하지 말라고 지시한 상황이었죠. 그렇게 드디어 공장점거가 시작됐습니다. 이에 따라 FNSIM은 가맹 회원들에게 공장폐쇄를 권고하기로 결정했고, 토리노 금속산업 자본가들은 9월2일부터 공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했으며, 다른 지역 금속산업협회도 공장폐쇄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자본가들의 이런 조치에 맞서 금속산업 노동자들은 9월1일부터 4일 사이에 이탈리아 전역에서 작업장을 점거했어요. 점거에 참가한 노동자 수는 며칠 만에 4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토리노, 밀라노, 제노바를 잇는 공업 삼각지역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서 나폴리, 로마, 피렌체, 토스카나, 베네토의 시골 지역에 이르기까지 기계공장, 제철소, 조선소 등에서 공장점거가 벌어졌죠. 

공장점거는 노동조합의 지시로 시작되었지만, 일단 공장이 점거된 다음에는 각 공장 차원에서 노조 전국 지도부가 아니라 노동자 자신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어요. 점거된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한 것은 4월 파업 이전까지 기존 노조 지도부에 도전했던 공장평의회(Consiglio di Fabbrica)였죠. 공장평의회는 공장 방어를 책임져야 했으며, 노동자 적위대가 공장 안과 주변을 순찰하고 낯선 사람들을 감시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공장 주위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지붕에는 탐조등을 설치하는 등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했죠. 노동자들은 무장을 갖추었고 공장방어 시설을 설치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생산은 계속되었는데, 원료와 연료의 부족과 판매의 어려움 때문에 생산량은 평상시보다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장점거 이후 일주일 동안에도 사태 해결의 실마리는 찾아지지 않았어요. 노동총동맹 지도부는 이제 투쟁을 FIOM이 제시한 요구 차원에서만 제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노동자 통제권’(Cotrollo Operaio)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습니다. 노동자 통제권은 전쟁 기간 중에도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중요한 요구사항으로 제기되었죠. 

9월10일 CGL 전국협의회가 소집되었고, 이를 계기로 공장점거운동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소도시의 금속사업장 노동자들과 북부 대도시의 화학, 석유 등 다른 산업 공장들이 점거되기 시작했죠. 9월11일 열린 전국협의회에서는 노동조합 통제권 요구를 내걸고 자본가들과 협상을 하자는 안과 사회당이 운동의 지도를 떠맡고 생산과 교환 수단의 사회화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는 안을 놓고 논쟁을 벌인 결과, 전자의 안이 결정되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졸리티는 9월15일 CGL 지도부와 이탈리아 전국사용자단체인 콘핀두스트리아(Confindustria = CGII) 의장단을 초청하여 밀라노 지사와 토리노 지사와 함께 조정을 벌였습니다. 노동조합과 자본가 양측은 통제권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의견 대립을 보였죠. 졸리티는 “노동자들에게도 알고 배우고 스스로의 지위를 높일 수 있는 권리, 즉 기업의 운영에 참여하고 일부 책임을 질 권리를 부여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런 관점에서 졸리티는 ‘노동조합 통제권에 대한 입법안을 정부에 제출할 임무를 지닌’ 노자 양측 대표 6명씩 참가하는 공동위원회를 만들 것을 제시했습니다.

9월19일 졸리티는 사태 해결을 위해 공식적으로 노사 당사자들을 로마로 초청하여 협상을 추진했고, 그 결과 합의를 이끌었습니다. 임금은 일당 4리라가 인상되었고 최저임금과 생계비수당, 그리고 연장근로수당이 인상되었으며, 연 6일의 유급휴가와 해고보상금이 설정되었습니다. 또 공장점거 직전의 태업에 대해 임금을 지불하고 점거 기간의 노동에 대해서는 개별기업이 평가하여 보수를 지불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당초에는 제기하지도 않았던 노조의 산업에 대한 통제권이 인정된 것이죠. 이른바 ‘졸리티의 걸작’이 나온 것입니다.

‘로마 협약’에 대한 자본가 측의 반응은 대체로 강한 불만과 반발로 나타났으나, 일부에서는 “협약으로 혁명의 반동과 광기가 동시 붕괴되었다”며 지지했어요. 노동자 측의 반응은 타협에 대한 실망과 반발, 안도와 기대가 뒤섞인 것이었죠. 특히 토리노에서는 타협에 대한 반발이 어느 곳보다도 컸습니다.

1920년 9월 말 노동자들이 공장점거를 끝내고 철수한 뒤,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른 것은 노조 통제권에 대한 협약 규정의 실행문제였습니다. 9월19일 로마협약과 동시에 나온 수상 포고령에 따라 통제권의 입법 준비를 위한 CGL·CGII 공동위원회가 설치되었어요. 이 위원회에서 CGL 대표는 다음과 같은 통제권 계획을 제시했습니다. 각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추천한 후보에 대해 18세 이상의 모든 노동자들이 투표를 통해 노동자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가 이사회에 감사의 자격으로 참가하여 기업 활동 전반에 대해 정보를 얻고 감시를 한다는 내용이었죠. 또 각 산업부문별로는 개별 기업에서 뽑힌 노동자대표들이 선거인단을 구성하여 그 선거인단이 상급 통제위원회를 선출하고, 이 기구에 각 기업의 노동자대표들이 정기적으로 자기 기업의 생산품 가격, 임금, 경영방법, 생산기술, 자본구성에 대한 보고를 올려 이탈리아 산업 전체를 조정하는 근거로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콘핀두스트리아 대표들은 이런 CGL 계획을 경영진 없이 노동자들이 각 공장을 직접 경영하고 국가 경제 전체에 대한 공산주의적 경제계획을 수립하려는 작업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어요. 이에 따라 CGL은 양보안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종업원의 고용과 해고에 대한 규정이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노동자대표만으로 구성되는 고용사무소를 통해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노동력이 남아돌 때는 노동자들을 해고하기 전에 먼저 주당 노동시간을 최저 36시간까지 줄이며, 징계에 따른 해고조치인 경우 노사 양측이 합의해야 하고, 합의가 될 때까지 해고 대상자는 공장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위원회에서의 협상이 결렬되자, 졸리티는 1921년 2월9일 통제권에 대한 정부안을 의회에 제출했습니다. 정부안은 ‘상급 또는 산업부문별 통제권’은 배제되었고, 고용사무소에는 사용자대표도 참가하는 것으로 규정되었으며, 해고에 대해서는 사용자의 완전한 자유가 인정되었어요. 이런 정부안에 대해서도 자본가측은 격렬하게 반대했죠. 의회로 넘어간 졸리티의 통제권에 관한 입법안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으며, 결국 사문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1920년 9월 한 달 동안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전개된 공장점거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공장점거를 두고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평가가 제기되었죠. 한 축에는 공장점거는 진정한 혁명의 시도였으며, 그 속에는 이전까지의 사회주의운동과는 다른 새로움, 즉 공장평의회의 발견이 있었기 때문에 “통일 이래 이탈리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견해가 있었죠. 이러한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공장점거를 ‘대항 신화’라고 평가했습니다. 공산당 쪽의 역사가들은 공장점거는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대중을 지도할 진정한 혁명정당이 없었고, 결국 개량주의자들의 배반으로 패배하고 말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사회당 쪽에서는 공장점거가 “최대강령주의자(Massimalismo)가 초래한 유감스러운 상황”이며, 혁명에 대한 공포가 중간계급의 반동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엇갈리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1920년의 공장점거운동은 이탈리아 노동운동에서 중대한 교훈을 제공했고, 특히 공장평의회의 역할과 노동자 통제권 요구는 현장에서의 노동자조직과 투쟁역량의 실질적 강화라는 측면에서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죠. 특히 그람시가 노동조합 통제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도, “분쟁의 타결로 공장평의회운동의 정당성이 확인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공장점거에 대한 평가 가운데 주목을 끄는 내용입니다.  

1920년의 대규모적인 노동자투쟁을 거친 뒤 정치정세의 큰 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1920년 하반기에는 파시즘 운동이 점점 세력을 증대시켰습니다. 그 중심인물은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였죠. 그는 전쟁 기간에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인민』을 발간했는데, 이 신문은 그가 사회당으로부터 축출된 후에 창간한 일간지였습니다. 무솔리니는 1919년 밀라노에서 새로운 운동, 즉 ‘전투 파쇼’(Fasci di Combattimento)라는 정치단체를 발족시켰으며, 그 강령은 상원제의 폐지, 유권자 모임, 전쟁 수익의 몰수, 농민들을 위한 토지 분배 등을 천명했죠. 그러나 1919년 선거에서 파시스트 당원들은 단 한 명도 당선되지 않았어요. 이런 상황에서 남은 선택이라고는 우익으로의 전환뿐이었죠. 1920년에 바뀐 파시스트 강령에는 애국심, 전쟁의 정당성, 위대한 국가, 그리고 이탈리아 사회당에 대한 혐오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파시즘은 이탈리아 사회의 보수 세력을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듀건, 2001: 281). 



자본가들과 지주들로부터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받은 ‘파시스트 무장행동대’(squadre)는 1921년 노동자 조직과 민주단체에 대한 본격적인 국내전쟁을 시작했어요. 이들은 그 해 상반기에만 노동회의소 119군데, 인민회관 59개소, 협동조합 건물 107개소, 농민연맹 건물 83개소, 노동자 정당 지부 또는 서클의 141개 건물, 노동조합 위원회와 노동자신문 편집국 28군데를 부수거나 방화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조합과 사회주의자들의 활동과 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폭행하거나 살해했죠. 

파시스트 행동대는 이제 겨우 10대를 벗어난 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그 가운데는 프티부르주아 출신 학생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사회당의 토지 공유 정책에 불만을 가진 소지주들과 소작인들도 적지 않았으며, 대다수가 전쟁에 직접 참가했던 사람들이었죠.

파시스트의 공격에 대한 저항은 수동적이고 분산적이었습니다. 노동자 조직은 정치적으로나 물리적으로도 반격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으며, 노동자들의 투쟁은 애초부터 방위적 성격을 띠었죠. 파시즘의 위험이 증대되면서 몇몇 도시에 ‘프롤레타리아 방위위원회’가 생겼는데, 이 위원회에는 사회당 당원, 공산당 당원, 노동조합 활동가, 무정부주의자, 가톨릭 교도 등이 참가했습니다. 이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인민의 용사’(arditi del popolo)라고 불렀어요. 위원회는 집회를 열기도 하고 시가행진을 조직하기도 했으나, 위원회 참가 조직 사이의 의견 상이와 조직적인 결집의 취약성, 그리고 위원회 참가 조직의 반파시즘 운동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로 인해 운동은 점점 쇠퇴되었죠. 

파시즘이 이처럼 도전적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이탈리아 사회당은 1921년 1월 리보르노에서 제17차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그람시와 보르디가, 그리고 타스카가 탈당하여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설했죠. 공산당은 5월 선거에서 15석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1921년 선거에서 졸리티는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이 여당 후보로 입후보하는 것을 허용하였고, 이것에 힘입어 무솔리니는 다른 파시스트 의원 34명과 함께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어요. 졸리티가 파시스트 측을 민족주의 측과 함께 ‘민족진영’에 포함시킴으로써 파시스트 측의 선거전은 한결 수월하게 치러졌죠. 이것은 파시스트 측으로서는 집권층에 편승하여 얻은 호응과 지지의 실질적인 첫 번째 성과였습니다. 

이후 졸리티가 시도한 연합체계가 급격히 분열됨에 따라, 그는 사임하고 보노미가 그 뒤를 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파시스트는 사회당과 파시스트 사이에 맺어진 ‘화해의 협약’을 깨뜨리고 정부와 다른 국가 기관들의 공공연한 동조에 힘입어 거리낌 없는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한편, 1921년 11월 전투 파쇼는 30만 명 이상을 포괄하는 ‘파시스트 국민당’(Partito Nazionale Fascista)을 창립했습니다(허인, 2005: 282). 이 당의 강령은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대신에 사회조직의 지배적 형태로서 통일적 민족 이념을 제시하고, 강력한 정권 수립과 자유주의 국가의 ‘협동조합 국가’로의 전환을 요구했죠. 또 파시즘은 ‘위대한 이탈리아’를 창조할 수 있는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유기체’라고 선언했어요.

파시스트는 1921년에 파시스트 계(系) 노동조합도 설립했는데, ‘전국노동협동조합연맹’ ―공업노동, 농업노동, 무역과 상업 노동, 중간계급, 지식인, 해양노동자 조합― 이 그것이었죠. 창립된 바로 뒤 계급협력을 선언한 이 연맹에 무정부적 생디칼리스트 노조도 가입했습니다. 이 연맹은 1년 동안 4배가량 조직 확대를 달성하여, 1922년 말에는 조합원이 100만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557). 

파시스트는 1922년 10월 나폴리에서 당 대회를 개최했는데, 거기서 4만여 명의 파시스트 행동대원들이 ‘로마 진군’을 요구했어요. 1922년 10월28일 파시스트들은 로마 진군을 시작했고, 왕은 파시스트 운동을 호의적으로 관망하던 군과 민족주의자들의 압력 때문에 반란군 진압을 거부한 채 무솔리니에게 내각 구성을 요청했죠. 이렇게 ‘막후 협상’에 의해 무솔리니의 첫 번째 정부가 수립되었어요. 이 정부에는 파시스트 당원 외에 인민당과 자유당의 당원들이 참여했고, 공산당을 비롯하여 사회당 좌파,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공화주의자들은 그 반대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노동운동의 처지에서 볼 때 1923년은 암흑의 해였어요. 공산당뿐만 아니라 사회당, 민주주의파, 자유주의파, 가톨릭 교도들까지를 대상으로 한 테러가 단순히 파시스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국가기관까지 합세한 가운데 행해졌죠. 사실상 파업은 중지되었고, 임금수준은 전쟁 이전보다 더 낮아졌습니다. 이탈리아노동총동맹을 포함한 노동조합은 영향력을 잃게 되었고, 노동조합원 수는 격감했죠. 파시즘의 조건 아래서 이탈리아 노동자계급은 조직을 유지하고 새로운 투쟁전술을 수립해야 할 임무가 절실하게 제기된 것입니다.

프랑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는 겉으로 보기에 유럽 대륙에서 흔들리지 않는 주요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죠. 프랑스는 고도로 발달한 섬유공업 지대인 알자스와 풍부한 철광석 자원을 가진 로렌 지방을 되찾았습니다. 그 결과 유럽 최대의 철광석 생산국이 되었으며, 프랑스의 우수한 철강공업은 강철 생산능력을 30%나 증대시켰죠. 

그러나 전쟁에서의 승리는 너무도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이었어요.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인명피해였습니다. 약 800만 명이 군대에 동원되었고, 이들 가운데 16.6%인 132만2,100명이 전장(戰場)에서 죽었죠. 또 3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불구가 되거나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전쟁은 또 경제적 측면에서도 장기에 걸쳐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919년의 농업과 공업 생산은 전쟁 이전인 1913년과 비교해 45% 정도 저하되었죠. 자원은 파괴되거나 군사적 목적에 유용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농경지는 전쟁으로 황폐해졌고 마을도 피폐해졌죠. 특히 독일군 점령지에서는 과도한 침탈과 무분별한 파괴로 인해 광산 및 공장의 생산력과 철도망의 수송능력이 극심하게 떨어졌습니다(프라이스, 2001: 287). 

프랑스는 전쟁피해의 복구를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파괴된 지역의 재건에 역점을 두었어요. 그런데 재건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과 전시의 단기공채(短期公債)였던 국방위채의 상환, 루르의 군사적 점령비 등으로 정부 지출이 급증하게 되었죠. 독일로부터 들어오는 배상금 수입만으로는 그것을 충당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배상금은 1,300만 프랑에 이르는 총 재건비의 40%를 보전했을 뿐이었죠. 그 부족분은 적자재정과 민간으로부터의 차입에 의해서 충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김종현, 2007: 488~489). 그래서 프랑스는 상당한 기간에 걸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는 정치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게 되었어요. 1919년 실시된 선거에서 보수파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새로운 선거제도는 연합을 구성할 수 있는 정당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는데, 이것은 보수파에 대해서는 성공적인, 좌파에게는 절망적인 영향을 끼쳤죠. 사회당은 내부적으로도 러시아 혁명에 대한 방침 설정을 둘러싸고 분열된 채, 부르주아 정당들과 어떤 종류의 타협도 거부했어요. 한편, 급진당과 급진사회당은 보수파와 협력해 ‘국민 블록’(Bloc national)을 형성했습니다. 국민 블록의 창설이 의미하는 것은 보수파에게 공화제를 받아들일 의사가 생겼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 급진파 다수가 기존 질서를 진정으로 위협하는 세력으로 좌파를 지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프라이스, 2001: 293). 

선거 결과를 반영하여 처음에는 알렉상드르 밀랑이, 그리고 1922년부터는 푸앵카레가 주도하는 정부가 성립했죠. 프랑스가 1923년 독일의 루르 지역을 점령하면서 여론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고, 다음 선거에서 중도 좌파 연합 세력인 ‘좌파 연합’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전쟁이 종료된 직후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은 금속노동자를 필두로 여러 부문의 노동자들을 광범하게 결집시키게 되었습니다. 1920년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은 금속노동자 25만 명, 철도노동자 25만 명, 섬유노동자 20만 명, 건축노동자 15만 명, 광산노동자 13만 명 등 240만 명을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혔어요. 공식 통계로는 158만 명으로 발표되었죠. 프랑스 노동총동맹은 1919년까지 프랑스 유일의 전국중앙조직이었습니다. 그러나 1919년 11월에는 프랑스 기독교노동동맹(CFTC)가 설립되었죠. 그리고 1922년 1월에는 혁명적 소수파가 노동총동맹에서 떨어져 나와 통일노동총동맹(CGTU)을 따로 설립했습니다(Lefranc, (일본 번역판), 1974: 63, 69). 

프랑스 노동총동맹은 1920년 메이데이 이후 총파업을 결정했고 철도노조가 이를 주도했습니다. 그런데 총파업은 강력하게 전개되지 못하였고, 게다가 파상적인 투쟁방식을 취하여 그 형세는 매우 취약한 편이었죠. 정부는 철도 노동자 2만 2,000명을 해고 처분하는 것을 포함해 강도 높은 탄압으로 대응했고, 그것이 거의 15년 동안 노동조합운동을 마비상태로 빠뜨렸어요. 1921년 1월 프랑스 노동총동맹 자체도 재판을 받아 해산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행의 무기연기를 요구하는 청구가 이루어져, 법적 권리의 상실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죠.

이 같이 경제·사회적인 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은 계속되었어요. 그러나 투쟁조건은 점점 더 곤란해졌습니다. 1920년 말에 리모주의 도자기 공장 노동자 550명이 파업을 일으켰는데, 파업은 8주간 동안 계속된 끝에 부양가족이 많은 노동자에게만 얼마 되지 않은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죠. 마르세유의 화학 노동자와, 부코의 금속노동자, 생 지론의 제지노동자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1921년의 파업 건수는 감소했고 노동자 측이 승리한 경우도 점점 줄게 되었습니다. 

1921년 봄 노르 지역 섬유노동자 10만 명이 3개월 동안에 걸쳐 진행한 완강한 파업마저 성공을 거두지 못했어요. 그 해 9월에는 다시 섬유노동자가, 10월에는 파리의 건설노동자가 파업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파업 투쟁이 패배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이에 실망하여 노동조합을 탈퇴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났고, 1921년 한 해 동안 프랑스 노동총동맹은 조합원의 62%를 잃게 되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510). 

프랑스 노동운동이 깊은 침체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1922년 말에는 노동자통일전선 정책이 제기되었어요. 프랑스 공산당은 10월에 열린 당 대회에서 노동자 통일전선에 관한 결의안을 압도적 다수로 가결했습니다. 그리하여 공산당은 통일행동에 대한 정책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11월 공산당 정치국은 통일노동총동맹(CGTU), 노동총동맹(CGT), 무정부주의계의 노동조합연합, 사회당(SFIO), 출정군인공화파연맹(ARAC) 등의 모든 노동단체들을 대상으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공동투쟁 전개를 제안했죠. 이 제안에 대해 CGT와 SFIO는 거부 회답을 했어요. SFIO는 거부 이유로서 공산당이 이 전술을 사회당을 깨뜨리기 위한 일시적 책략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12월 프랑스의 루르 점령 위험이 임박했을 즈음 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행동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여기에는 CGTU, ARAC, 공산주의 청년연맹, 무정부주의계 노동조합연합 대표가 참가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665). 

1923년 가을에는 정기 선거가 예정돼 있었어요. 이에 따라 국제노동자연맹 프랑스 지부(SFIO)는 급진당 및 급진사회당과 더불어 ‘좌파 블록’을 형성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죠. 여기에 대응해 프랑스 공산당은 ‘노·농 블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는데, 이것은 도시와 농촌 노동대중의 선거동맹으로서 뿐만 아니라 ‘더욱 개선된 사회제도를 추구하는 동맹’으로 설정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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