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제1절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위기와 파시즘의 대두(Ⅰ)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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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1장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위기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제1절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위기와 파시즘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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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3월 카프 반란 당시 민병대 모습 ]

제11장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위기와 노동자계급의 통일행동 

제1절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위기와 파시즘의 대두


“전쟁의 한 가지 커다란 결과는 우리보다 당시 사람들이 평가하기가 더 용이하였다는 사실이다. ……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이 거둔 승리는 그 자체가 주요한 성과였다. 그러나 그들이 승리했다고는 해도, 전 유럽이 치른 희생은 엄청난 것이었다. 1913년의 유럽은 번영되고 안정되고 문명화된 곳이었지만 1919년에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여러 곳에서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었는데, 서부 전선은 북부 프랑스와 벨기에에 걸쳐 거대한 상처와 같이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보다 일반적으로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데, 유럽은 경제적인 피폐와 정치적 혼란, 그리고 심리적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보의 시대는 끝나버렸다.”  - 필립 벨

제1차 세계대전은 교전 국가들의 내부적 모순을 격화시켰으며, 전후 자본주의 국가들이 맞게 된 위기적 양상은 과거의 그것과는 다른 구조적 특징을 드러냈습니다(김준호, 1982: 187~188).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죠.

첫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성립됨으로써 세계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자본주의 단일권 체제에서 사회주의 국가와 병존하는 양극적 체제, 즉 ‘불안정한 균형’ 상황이 조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식민지에 대한 지배 체제가 민족해방 투쟁의 고양으로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교전국들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경제가 황폐화했으며, 식민지의 희생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복구 과정에서 자국 내의 부담들을 식민지에 떠넘기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지 사이의 모순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국가독점자본주의(혼합경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경제 과정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통제가 실시되면서 성립되죠. 또한 위기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이 증대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는 자본주의 경제의 불안정성 증대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러시아가 자본주의 세계경제 체제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써 세계시장이 축소되었고, 식민지?종속국가들에서 민족운동이 고양되면서 독점자본의 해외시장 활동이 제약되었을 뿐 아니라, 공장 설비의 만성적 유휴 상태와 실업의 상시적 존재 등으로 인하여 경제의 불안정성이 증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두 가지의 모순된 경향이 작용했어요. 하나의 경향은 사회?경제적 위기가 심화됨으로써 노동자들이 새로운 혁명적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의 경향은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처지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넘어서, 나아가 반격을 개시할 채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경향의 모순은 어쩔 수 없이 계급적 갈등을 첨예화시킬 수밖에 없었죠. 

1919년과 1920년에 걸쳐 행해진 전쟁에서 평화로의 이행은, 일정한 경제적 고양 조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속에서 수백만 명의 군대 동원 해제에 따른 실업은 거의 흡수되었고, ‘노동예비군’도 대략 전쟁 이전 수준에 머물렀죠. 임금도 소비재가격의 상승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승한 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노동자의 궁핍 감소와 계급적 분쟁의 완화를 이끌 수 있는 자본주의 발전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환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920년에는 벌써 경제적 고양이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표지(標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먼저 전쟁 기간에 높은 수준의 경제 발전을 수행할 수 있었고 또 전쟁에 따른 파괴를 모면했던 나라들, 즉 미국과 일본에서 경제공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위기적 국면은 차츰 유럽으로 확산되었죠. 노동생산성의 수준은 전쟁 이전에 비해 훨씬 저하되었는데, 이것은 생산설비의 노후화와 노동자들의 과로와 노동?생활조건의 열악성 등에서 비롯된 결과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유럽의 영락(零落)은 식량, 원료, 공업제품의 수입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습니다. 그러나 수입의 증대가 수출의 증가에 의해 보전(補塡)되지 못했기 때문에 무역적자와 신용부채가 증가했죠.

유럽에서 최초로 공황을 맞게 된 나라는 영국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중립 국가들이었고, 뒤이어 프랑스와 이탈이아가 공황을 겪게 되었죠. 패전 국가들의 경우에는 생산수준이 저하되었는가 하면 인플레이션은 격화되었습니다.

초기 공황 상태에서 어느 정도 위기 국면을 극복한 부르주아지 측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전면적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부르주아지의 공격이 노린 것은, 전쟁이 끝난 직후 몇 년 동안에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투쟁으로 획득한 성과들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어요. 부르주아지는 ‘생산합리화’의 필요를 구실 삼아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는데, 노동일의 제한 철폐와 임금 인하 등의 착취 강화를 시도했습니다. 

자본가 측의 이런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자 측은 경제적 파업과 정치적 파업을 병행한 투쟁을 실행했죠. 1920년 들어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파업 건수와 파업참가자 수가 늘어났으나, 같은 해 후반에는 파업투쟁이 후퇴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몇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1921년 말에는 세계경제 공황이 불황으로 전화하면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점점 더 약화되었으며, 파업투쟁은 대부분 노동자 측의 패배로 끝났죠. 

경제공황의 진행과정과 부르주아지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항 행동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매우 불균등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제 국가별로 그 양상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독일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베르사유 강화에 따른 매우 가혹한 부담을 안게 되어 매우 곤란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영토의 축소, 대외투자와 외국시장의 상실, 거액의 배상방출과 지불은 이 나라 경제를 극심하게 압박했죠. 

가장 먼저 인플레이션이 큰 재앙으로 밀어닥쳤습니다. 1914년 1달러당 4.2마르크였던  환율은 1921년 6월에는 62.50마르크가 됐고, 1922년 중반에는 277.78마르크였습니다. 그리고 1923년 초에는 무려 10만 마르크를 기록했죠. 이 같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인플레이션은 화폐의 본래적 기능을 정지시킴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정상적인 운영마저 위태롭게 했습니다(김종현, 2007: 494).

이런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은 약 400억 마르크에 이르는 전전(戰前)의 사채와 토지 담보 부채를 실질적으로 축소시킴으로써, 서부 독일의 대규모 중공업 기업가와 동부 독일의 융커에게 커다란 이익을 안겨 주었어요. 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은 기업가들에게 새로운 이익 획득의 기회를 제공했죠.

이 시기에 이루어진 기업 집중은 주로 콘체른의 형태를 취했는데, 이것은 수평적 또는 수직적 합병과 같이 기술적 효율을 요량한 것이 아니라 투기 차액을 노린 것이었다는 데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휴고 슈티네스와 칼 지멘스였어요. 슈티네스는 독일 사상 최대의 콘체른을 창설했는데, 이것은 1,340개에 이르는 공장, 탄광, 발전소, 운수 회사, 은행 등 일련의 광범한 기업군을 포괄했습니다. 이 ‘슈티네스 제국’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60만 명에 이르렀죠. 이 거대 콘체른 말고도 티센, 크루프, 볼프 등의 콘체른도 번영했습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가파르게 상승하던 기간에 무절제하게 합병한 거대한 기업집단은 급격히 붕괴하게 되었어요. 결국 슈티네스 콘체른도 1924년 봄에 무너졌습니다.

한편, 부족한 식량과 원료를 수입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던 독일에게는 수출증대야 말로 필수적인 과제였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시설을 근대화하고 경영조직을 합리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그런데 신용이 수축되고 국내자금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필요한 자금 조달은 외자도입에 의존해야만 했습니다. 1924년 독일의 통화안정을 위해 미국의 도즈(Dawes) 차관에 따라 제공된 20억 달러가 독일의 입장에서는 대규모 외자도입의 시발점이 되었죠(김종현, 2007: 492). 외자의 대량 유입에 따라 독일 공업의 근대화와 합리화, 그리고 생산능력의 확장이 크게 활성화되었습니다. 생산증대는 특히 중공업 부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어요. 또한 탄광과 화학 산업 그리고 철강 부문에서도 생산이 크게 증대되었습니다. 

막대한 외자도입과 생산의 증대, 그리고 기업합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제적 기반을 쌓은 독점자본가들은 증대된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노동자계급이 그동안 축적한 사회적 성과들을 탈취하고자 기도했어요. 또한 배타적 애국주의 분위기를 부추겼습니다. 한편으로는 반동적인 민족주의적·군국주의적·보복주의적 단체 ―슈탈헬름(Stahlhelm), 올게쉬(Orgesch)와 같은 조직― 들이 기세를 펴기도 했고요.

이런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서 1920년 3월13일 카프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카프(Kapp)와 뤼트비츠(L?ttwitz)가 군사독재정권의 수립을 목표로 민병대를 동원하여 베를린으로 진격한 것이죠.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우익세력의 쿠데타가 일어난 겁니다. 쿠데타가 발생하자 에베르트 정부는 처음에는 드레스덴으로, 다음에는 슈투트가르트로 도주했어요. 제크트 장군 휘하의 정규군이 민병대와 싸우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카프 쿠데타를 막은 것은 결국 노동자들의 총파업이었습니다.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은 공화국 방위를 위해 총파업 제기를 호소했고, 3월15일 전국의 노동자 1,200만 명이 총파업을 결행했습니다. 총파업에서 보여준 노동자계급의 통일된 힘은 반란 수뇌부가 전형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죠. 그것은 지배계급 내부의 대립과 동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구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을 세우지 못한 카프 정권은 기대했던 지배세력의 지지도 얻지 못한 채, 결국 4일 만에 붕괴되었습니다. 노동자계급은 총파업에서 결집된 역량을 바탕으로 ‘노동자 정부’를 구상했지만, 결국 실현하지는 못했죠(광민사, 1981:39).

총파업은 3월22일 중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루르 지방의 노동자들은 무장한 채 투쟁을 계속했어요. 이 파업위원회는 적군(赤軍)을 조직하고 백색 테러리스트를 지역에서 축출했습니다. 정부는 특사를 파견하여 노동자 측 대표와 교섭을 벌였고, 그 결과 3월24일 ‘비르헤르트 협정’이 체결되어 노동자들은 무장을 풀었습니다.

한편, 카프 쿠데타에서 민병대의 봉기 진압을 거부했던 정규군은 루르와 라인 지방의 ‘붉은 광부군’을 진압하는 데서는 민병대와 기꺼이 협력했습니다. 독일군은 제크트 장군의 지도 아래 사실상 공화국 이전의 프로이센 전통을 이어받아 ‘국가 안의 국가’를 이루고 있었죠. ‘정치적’이라는 이유에서 공화국 지원을 거부한 그 ‘비정치적 태도’는 나중에 공화국을 허물어뜨리는 아주 정치적인 행위로 돌변하게 됩니다(풀브룩, 2000: 240~242). 

이처럼 반동 보수세력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모순이 격화되는 가운데, 정치적으로도 일찍이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큰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전승국과 패전국 사이의 모순이 두드러지게 격화되었으며, 특히 1922년 말에는 전쟁 배상문제를 둘러싸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충돌이 크게 증대되었죠. 프랑스의 푸앵카레(Poincar) 정부는 유럽에서 프랑스 패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배상 지불 지연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명하고, 독일에 대해 ‘현물담보’ 제공을 요구함과 아울러 제재(制裁)를 행사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에 대해 빌헬름 쿠노를 수반으로 하는 독일 정부는 민족주의적인 선전을 강화하면서 배상 지불 기한을 지연시키는 한편, 미국과 영국의 국제적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정부 측의 이런 노력은 별로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죠. 

1923년 1월11일에는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루르 공업지대에 침입했으며, 에센, 겔젠키르헨, 뷰어, 보훔, 도르트문트를 점령했습니다. 이 지역은 인구 약 300만 명이 살고 있는 곳이며, 독일 석탄 산출의 72%와 선철(銑鐵)과 조강(粗鋼)의 50% 이상이 생산되고, 독일 공업 노동자의 약 4분의 1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와 벨기에는 유럽 최대의 공업지대 점유계획을 실현하게 된 것이죠. 세계전쟁 종결 이래 가장 첨예한 위기가 유럽 열강 사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637~638). 

프랑스와 벨기에의 침입행위에 대응해 쿠노 정부는 1월13일 배상방출의 정지를 선언하고, 점령군에 대해 ‘수세적 저항’ 행사를 전 독일 국민에게 요구했어요.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는 가운데 석탄 산출이 감소하고 운수가 마비되었습니다. 프랑스는 루르 지역을 관세경계를 통해 격리시키는 등 압박을 강화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이 같은 충돌은 양국의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는 정치적 성숙 정도와 국제주의 원칙 존중에 대한 중대한 시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독일에서는 1922년 11월에 열린 ‘전독일 경영평의회(공장위원회) 대회’ ―여기에는 독일 공산당,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대표와 무당파 대표도 참가했다.― 가 정부의 반동적 정책에 대해 구체적인 강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강령은 인플레이션과 빈곤화를 저지할 것, 베르사유가 안긴 무거운 짐을 유산계급에게 전가시킬 것, 반혁명 세력의 활동을 제한할 것 등을 요구했죠.

프랑스가 루르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을 때, 독일 공산당은 “푸앵카레를 루르에서, 쿠노를 슈프레에서 때려 부수자”는 슬로건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독일 공산당은 노동자 정부 수립, 노동자의 무장과 반동조직의 무장 해제, 공장위원회에 의한 생산통제 등을 요구했죠. 그러나 이와는 달리 사회민주주의파 지도자들은 행동통일을 깨뜨리고 다시 ‘계급평화’, ‘민족적 단결’의 설교자 역할을 도맡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파리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루르 점령 반대”, “독일 노동자와 함께 평화 만세”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시위와 행진을 벌였어요. 한편으로 1923년 5월에는 독일의 정세가 더욱 더 악화되어 몇몇 도시들에서 기아행진과 반전시위가 발생했으며, 파업의 물결이 다시 높아졌습니다. 특히 루르 지역의 광산 노동자와 금속 노동자 3만 8천 명이 참가한 파업투쟁은 큰 관심을 끌었죠.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인플레이션이 전에 볼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가공할 정도의 물기등귀, 상업과 산업의 혼란, 투기, 실업 등의 사태가 노동자와 도시 중간층을 절망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에 따라 쿠노 정부의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점점 커졌죠. 이런 국민의 불만을 이용한 세력은 반동적인 민족주의 조직이나 군국주의 조직, 테러리스트 조직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전면에 나선 조직이 바로 히틀러의 나치스당이었습니다.

1923년 1월 말 뮌헨에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 Partei: NSDAP)의 제1회 전국대회가 열렸고, 돌격대원 500명이 오케스트라의 연주 속에 군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 자리에서 “독일의 배신자”와 싸우자고 신경질적으로 호소했죠. 그가 말한 배신자는 “마르크시스트”(그는 사회민주당원과 공산당원을 이렇게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공화파 정부까지 포함하여 지칭했습니다. 프랑스 군이 독일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고 경제상태가 매우 악화된 상태에서 파시스트의 배타적 애국주의 선전과 사회적 민중선동은, 특히 전선에서 돌아온 전직 군인이나 프티부르주아지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노동자를 습격하거나 유혈 충돌을 도발하기도 했죠.

이 같이 반동 보수 세력의 움직임이 갈수록 거세지는 가운데, 7월 들어 노동자 수십만 명이 참가하는 ‘반파시즘의 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또한, 8월에는 독일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혁명적 공장위원회 전(全)독일위원회가 노동자들에게 전국 총파업 참가를 호소했습니다. 이 호소에 응답하여 전국의 노동자 300만여 명이 며칠 동안 일손을 멈추었죠.

1923년 8월에는 쿠노 정부가 총사퇴를 하고, 사회민주당, 중앙당, 독일 민주당, 독일 인민당이 공동으로 ‘대연합’ 정부를 조각했으며,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수반이 되었어요. 그는 공공연하게 군사독재 선언을 요구한 극우파의 권고를 도외시한 채, 사회민주당 우파의 협력을 얻어 입헌적 수단에 의한 ‘강력한 정권’을 실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프랑스에 대한 ‘수세적 저항’ 방침을 방기하겠다고 선언한 슈트레제만은,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대중운동에 대해서는 탄압 방침을 취했습니다. 

9월 중순께 파업운동은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었어요. 베를린을 비롯한 몇몇 도시에서 벌인 기아행진이 경찰대와 충돌을 빚었습니다.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에서 노동자 민병대가 행진을 하고 있는 동안, 뉘른베르크에서는 무장 파시스트 단체와 반동적 민족주의 조직 소속의 7만 5천 명이 시위를 벌였습니다. 퀴스트린에서는 비합법의 ‘검은 국방군’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죠.

이런 혼란스러운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9월26일 에베르트 대통령은 전국에 걸쳐 계엄령을 선포했어요. 이에 따라 민주주의적 자유와 그 보장에 관한 효력이 정지되었으며, 집행 권력은 국방군 최고사령관 폰 제크트 장군의 손에 이양되었습니다. 정부는 우익 반란자들에 대한 무력진압보다는 혁명적 노동자의 행동 분쇄를 준비하고 있었죠. 

한편, 1923년 10월10일 작센에서 에리히 자이그너를 수반으로 하는 노동자 정부 ―좌파 사회민주당 5명과 공산당원 2명― 가 성립했습니다. 6일 뒤에는 튀링겐에서도 동일한 성격의 정부가 수립되었고요. 그러나 이런 주 정부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사회민주당 장관들은 단호한 대책의 실시를 회피하기 일쑤였고, 공산당 소속 장관들도 주요한 문제, 이를 테면 노동자의 무장, 국가기관의 정화, 노동대중의 고통완화 등을 과감하게 단행하지 못했죠. 노동자, 농민, 실업자, 도시 중간층의 적극적인 행동을 이끌지 못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644). 

1923년 10월 하순에는 독일의 사회적·정치적 정세가 매우 긴박해졌습니다. 슈트레제만 정부는 작센과 튀링겐 노동자 정부를 군사력을 동원하여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이에 대응해 독일 공산당은 전국적 무장봉기 준비를 강력히 진행하면서, 10월20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독일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전국 총파업의 결행을 결의했죠. 이 총파업은 슈트레제만 정부의 타도와 노동자·농민 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무장봉기를 예정했습니다. 

봉기의 군사계획은 10월22일 밤부터 23일 새벽까지에 걸쳐 함부르크 노동자들이 봉기를 개시하고, 이 봉기가 작센과 튀링겐을 목표로 삼고 있는 국방군을 혼란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었어요. 작센과 튀링겐에는 ‘프롤레타리아 백인대’ 세력의 3분의 1이상이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여기가 주요한 투쟁의 장(場)이 될 수밖에 없었죠. 무장봉기의 주된 무대가 될 이 지역은 남부(바이에른)의 파시즘과 북부(프로이센)의 반혁명세력을 절단하는 혁명적 ‘방벽’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총파업 호소는 켐니츠에 소집된 작센의 혁명적 공장위원회, 감시위원회, 여타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회의에 전달되었으며, 이 회의에는  바이에른과 브런즈윅 그리고 다른 몇 주의 대표도 참가했습니다. 
  
10월21일 회의가 예정되어 있는 날, 국방군 부대가 이미 작센을 향해 출동했습니다. 켐니츠에서는 총파업에 대한 합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무장봉기의 연기가 결정되었죠. 그러나 10월23일 새벽 함부르크에서는 봉기가 시작되었고, 봉기 참가자들은 몇 시간 뒤 경찰 분서(分署) 50군데 가운데 17곳을 점거하고 소총 170정과 탄약을 탈취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별 그룹의 행동 성공은 전체적으로 계획적인 공격으로까지 진전되지는 못했어요. 함부르크 북부 노동자 밀집 지구에서는 노동자들이 빠르게 바리케이드를 구축했지만, 봉기자들과 연대하여 가두에 진출한 노동자 수천 명은 거의 무기를 지니지도 못했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경관대는 기관총과 장갑차, 화물자동차, 정찰용 항공기까지 동원했죠.

켐니츠에서 늦게 도착한 봉기 연기 지령은 이미 전투에 들어간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투쟁참가를 준비하고 있던 노동자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 결과 봉기 이틀째 되는 날, 전투가 계속된 곳은 시내의 3지구뿐이었습니다. 5천 명을 헤아리는 경관대는 몇 척의 군함까지 지원받아 봉기자의 저항을 압도했습니다. 10월25일 저녁 무렵 함부르크 무장봉기의 고립이 명백해지면서, 봉기 지도부는 투쟁의 중지를 지령했습니다. 함부르크 봉기는 프롤레타리아의 대중적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무장봉기가 실패한 뒤, 작센 정부와 튀링겐 정부도 슈트레제만 정부의 압박에 의해 붕괴되었죠. 그 자리에 반동세력이 밀치고 들어갔습니다. 
   

[ '비어 홀 폭동'의 무대였던 뷔르거 브라우 켈러. 1945년 독일 점령 후 미국 보병 42사단 군인들이 자신들의 상징인 무지개를 벽에 그리고 있다. ]

11월 들어 독일의 앞날에 매우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이른바 ‘뮌헨 반란’ 또는 ‘비어 홀 폭동’이 그것입니다. 11월8일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 무장 돌격대원(SA) 6백여 명이 뮌헨의 뷔르거 브로이켈러(B?rger Broikeller)라는 맥주 가게를 습격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바이에른 국무장관과 군 사령관 등 바이에른 지배층이 참석해 베를린 중앙정부의 계엄령 수용에 관한 대책 회의를 열고 있었죠. 히틀러는 이 자리에서 ‘국민혁명’의 개시와 바이마르 공화국 타도를 위한 ‘베를린 진격’을 주창했습니다. 바이에른의 지배층은 히틀러의 뜻에 따르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당시 뮌헨을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 지방은 1920년 카프 반란 뒤 왕당파 정권이 성립하여 반동 우익세력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어요. 나치스도 그들로부터 무기와 자금 원조를 제공받고 있었죠. 바이에른 지배층은 옛 왕실의 부활을 통해 베를린 중앙정부에서 분리·독립하기를 원했고, 히틀러는 극우 군사단체들과 협력하여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히틀러는 1922년에 무솔리니가 ‘로마 진격’을 통해 이탈리아에 파시스트 체제를 수립한 데 크게 고무되어, 독일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11월9일 히틀러는 무장 시위대 3천여 명과 함께 시위를 벌였습니다. 히틀러의 무장 행동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구스타프 폰 카르 바이에른 주 지사와 장교단은 반란이 성공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반란 진압에 나섰죠. 바이에른의 지배층뿐만 아니라 옛 왕실과 가톨릭교회 세력까지 반란을 반대하여 히틀러는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히틀러의 반란은 이틀 만에 불발로 끝났죠. 결국 히틀러는 체포되어 9명의 주동자와 함께 재판을 받았어요. 그 결과 히틀러는 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이듬해 12월 성탄절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한 해 동안 수형생활을 하면서 나치즘의 성전이 될 『나의 투쟁』(Mein Kampf)을 썼습니다. 히틀러는 뮌헨 반란의 실패를 계기로 쿠데타 전술을 포기하고 의회주의를 택하게 되었죠(풀부룩, 2000: 24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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