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제3절 노동자계급과 민족해방운동(Ⅲ)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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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무렵, 칠레에서는 광산 지역과 도시들에서 파업투쟁이 크게 고조되었습니다. 1918년 ‘굶주림의 해’에 극심한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광산 노동자들이 격렬한 투쟁을 주도했으며, 몇몇 지역에서는 이들의 행동이 유혈투쟁으로 전화하기도 했죠. 이에 따라 정부가 노동자 투쟁을 저지할 목적으로 1918년 사실상 외국인 출신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추방을 위해 거주법(Lev Residencia)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강석영, 1996: 190).

1919년 1월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는 노동자들이 무기를 들고 봉기하여 며칠 동안 도시를 장악했어요. 또 1919년 8월에는 산티아고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군중이 기아와 궁핍에 항의하여 시위를 벌였죠.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1920년 들어 빈곤과 실업이 만연되면서 대중폭동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몇 년 동안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관심을 모은 것은 1921년 산 그레고리오 광산 폐쇄에 반대하여 일어난 초석(硝石)노동자들의 파업이었습니다.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 정부는 무력으로 이 파업을 진압했어요. 또한 이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L. E. 레카바렌(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걸쳐 뛰어난 활동가로 평가됨)을 지도자로 하는 사회주의노동당 좌파의 지위가 한층 강화되었는데, 이 정파는 칠레의 주요한 노동조합 중앙조직인 ‘칠레 노동연맹’에 대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어요. 사회주의노동당은 1922년 1월 랑카과에서 열린 제4회 대회에서 ‘칠레 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코민테른에 가입했습니다. 칠레 공산당은 노동운동과 긴밀한 결합을 추구했으며, 노동운동 발전에 대해 두드러진 영향을 미쳤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36). 

브라질

브라질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수입 대체 산업화를 추진한 결과, 국내 수요의 충족을 위해 섬유산업과 식료품 산업이 확대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14∼1916년 사이의 물가는 16% 증가하였으나 임금은 겨우 1% 인상되었죠. 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가 쌓이지 않을 수 없었어요. 특히 이민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은 임금 인상을 비롯해 산업안전과 보건의 충실, 의료혜택, 여성노동자 보호 등 노동·생활조건 개선과 기본 권리 보장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파업을 단행했죠.

1917년 상파울루 무카에 있는 직물공장에서 대규모적인 파업이 발생하여 브라질 전역으로 확대되었어요. 당시 노동자들은 20%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30일 동안 파업을 지속하여 요구조건을 달성했습니다. 그 뒤로 1917년부터 1921년 사이에 걸쳐 상파울루에서 파업 6건이 발생했고,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파업 84건이 발생했습니다(강석영, 1996: 122∼123).

1917년 6월 브라질에서 가장 중요한 공업지구인 상파울루 주에서 노동자 약 8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어요. 파업 노동자들은 단호한 행동 준비를 했죠. 그들은 병사들을 상대로 노동자들을 혹심하게 착취한 대기업주들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선전활동을 펴기도 했습니다.

1918년 말에는 파업의 새로운 물결이 브라질을 휩쓸었는데, 리우데자네이루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수도의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는 노동자 공화국이 선언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노동자 파업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럼에도 노동자 투쟁은 몇 년 동안 끊이질 않았어요. 1919년 10월에는 파업투쟁이 맹렬한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상파울루, 산투스, 캄피나스, 소로카바 노동자들이 공동행동을 일으켰죠. 정부는 파업 노동자들에 대해 혹독한 탄압을 가했고, 노동자와 활동가 100명 이상이 국외로 추방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22년 3월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와 노동운동 지도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브라질 공산당’을 창립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결성과 더불어 곧바로 지하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922년 선거 과정에서 에피타시우 페소아 정부가 부당행위를 저질렀는데, 이에 반발하여 소장파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죠. 정부는 군인들의 이 같은 반정부 행동을 진압한 뒤, 곧바로 진보적 조직의 탄압에 나섰던 겁니다.

1924년에도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소장파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이 반란에 가담한 장교들은 정부 측이 진압에 나서자 내륙지방으로 도주하여 2,500km를 전진하면서 2년 반 동안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반란자들 가운데는 뒷날 30년 이상 브라질 공산당을 이끈 루이스 카를로스 프레스치스(Lu's Carlos Prestes)도 들어 있었어요(강석영, 1996: 125). 

멕시코

1910년부터 1917년까지에 걸친 멕시코 혁명이 종료된 뒤에도, 노동자계급은 자기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면서, 1917년 헌법 규정의 충실한 실시와 노동·생활조건의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직물노동자와 석유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는데, 정부는 노동자 조직에 대해 엄격한 탄압을 가했죠. 

노동자들의 가장 권위 있는 조직이었던 ‘세계노동자회관’(Casa dos Trabajadores del Mundo)의 활동이 금지되었고, 그 지도자들은 투옥되거나 살해당했습니다. 노동운동의 한 갈래로서 ‘멕시코 노동자지역연합’(CROM)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조직은 미국노동총연맹(AFL)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개량주의적 노선을 견지했죠.



한편, 1919년 8월25일에 열린 제1회 사회주의자대회에서는 노동운동 내의 혁명적 노선과 개량적 노선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어요. 대회는 이런 논쟁에도 결국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을 채택했죠. 1919년 9월 개별적인 마르크스주의 그룹이 ‘멕시코 공산당’으로 통일되었으며, 공산당은 1921년 ‘전국노동총동맹’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38).

쿠바

쿠바의 대중운동은 다른 나라에 비해 반제국주의적인 성격을 한층 더 짙게 띠었습니다. 노동자계급은 미군 철수, 독립적인 대외정책의 실시,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 독점체 활동의 제한 조치 시행 등을 요구했죠. 1919년 3월 아바나에서 발생한 총파업은 특히 전투적이었습니다.

1920년대 초 노동조합은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 라틴아메리카 뷰로 활동에 참가할 것을 표명했어요. 생디칼리스트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노동자신문을 통해 러시아 10월 혁명의 의의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고요.

1920년대 초두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전개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시기 라틴 아메리카 노동운동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의 옹호와 민족의 해방, 그리고 전체 인민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드디어 정치투쟁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대중적 노동운동과 민주주의운동의 고양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국내정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죠. 그 결과 노동입법이나 최저임금법의 제정 등 사회개량적 성과들이 성취되기도 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40~441).

3. 아프리카 노동자들의 반제국주의 투쟁

아프리카 대륙은 자본주의 열강의 식민지 팽창 역사에서 최초의 대상이었고, 동시에 식민지주의자들이 영토를 ‘정복’한 최후의 지역 ―이전에는 점령되지 않았거나 또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서 재분할된― 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열강 국가들의 식민주의적 활동은 그들 마음대로 분할한 영유지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부족적, 그리고 봉건적 관계들의 다양성,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로의 편입에 따른 불균등성, 그리고 착취의 여러 가지 형태와 방법의 차이는, 이 거대한 대륙의 사회 경제적·정치적 발전에서 매우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유형을 만들어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40~441).

아프리카 대륙의 북부 ―이집트와 머그레브 국가들― 에서는 자본주의가 이미 20세기 초기에 분명한 형태로 자태를 나타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선진 국가들로부터 ‘이식(移植)된’ 자본주의가 주도적 생산양식이 되었습니다. 열대 아프리카에서는 가부장적이고 부족적·봉건적 관계가 여전히 지배적이었으며, 그 가운데 서아프리카 지역은 중앙아프리카나 동아프리카 지역보다는 발전한 상태였죠.

제1차 세계대전은 아프리카 오지까지에 걸쳐 상품-화폐 관계의 발전과 전(前)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붕괴를 촉진했어요. 제국주의 독점체들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유용광물, 인적 자원, 식량자원을 찾아 구석진 곳까지 침입했습니다. 또 남자 주민들의 상당한 부분을 교전 열강국가들의 군대나 군수산업용 중요 원료 생산, 그리고 군대 및 민생용의 상품생산에 강제적으로 동원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의 운용 영역을 강제적으로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죠. 이런 여러 가지 변화들은 민중운동의 고양을 위한 전제조건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런 운동 추진에서 노동자들의 역할을 증대시켰습니다.

이집트와 알제리에서 진행된 민족 프롤레타리아트 형성과정은 앞에서 본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와 유사했습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연방과 열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형성은 그것과는 달랐죠. 이곳에서 널리 보급된 것은 강제노역제도와 임시=계약노동제도였어요. 식민지주의자는 노동력의 여러 가지 강제징모방법 ―현지 부족과 토착민의 광대한 토지 수탈, 지불하기 어려운 중과세, 노역― 을 사용하였으며, 군대와 경찰 그리고 족장의 권력 등을 동원했습니다. 또 고용된 전문 청부업자에 의한 중개제도가 활용되었는데, 이것은 뇌물주기, 사기, 기만 등의 방법으로 토착 부족 상층으로부터 노동력을 ‘징모’하게 하여 식민주의자들에게 인도하는 방편이었죠.

이 같이 기형적인 형태로 진행된 사회 경제적 변화라 할지라도, 그런 변화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민족적 각성을 촉진했어요. 1920년 3월에는 아크라에서 영국령 서아프리카(황금해안, 나이지리아, 시에라리온, 감비아) 식민지 조직 대표자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 케이슬리 헤이포드를 의장으로 하는 ‘서아프리카 민족회의’가 창립되었습니다. 회의에서 채택된 결의는 “대표자회의는 아프리카인들이 교육과 능력에 상관없이 유럽인들에 비해 고용과 임금 그리고 포상 면에서 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현실을 비난한다”고 밝혔죠.

열대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조직들이 결성되었습니다. 1919년 우간다에서 현지 지식인들이 ‘청년 우간다협회’를 결성했으며, 이 협회는 현지 권력기관의 민주화를 요구했죠. 1921년 케냐에서는 ‘동아프리카협회’가 조직되었는데, 토착민의 정치적 권리 보장, 조세 감축, 강제노역제도 폐지, 아프리카인 노동자의 임금인상 등을 요구했습니다. 니아살랜드에서는 ‘토착인 협회’가 설립되어 문화·교육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아프리카인의 정치적 권리 보장,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사이의 평등, 권력기관에서의 현지 주민 대표권 확장 등을 요구했습니다.

세네갈, 다호메이, 벨기에령 콩고, 기타 식민지에서는 민족적 애국조직이 결성되었고, 철도노동자를 비롯한 사무직 노동자와 여러 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공산당과의 협력을 통해 1921년 파리에서 ‘식민지간(間) 동맹’을 결성하고 자신들의 신문 『파리아(Paria)』를 발행했죠. 

1920년대 초까지 전체적으로 아프리카 노동운동의 발생과 발전, 그리고 노동조합의 조직화는 사실상 모든 계급과 주민층의 대표가 포함된 민족해방투쟁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투쟁의 가장 적극적인 참가자는 민족 부르주아지였으며, 운동의 원동력은 도시 중간층이었죠.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해방투쟁에 참가함으로써 민족적·정치적 자각을 촉진하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부족주의 사상과 이제 막 일기 시작한 보수적 민족주의 사상이 노동운동의 발전과 계급적 세계관의 성숙을 억제하고 왜곡시켰죠. 

이제 1920년대 초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의 노동자투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남아프리카 연방

남아프리카 연방에서는 광산업(다이아몬드, 금, 석탄, 동, 석, 백금, 은, 연) 부문 외에도 1922~1923년 공장이 7,000여 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868개는 금속가공과 기계제조 공장이었고 1,877개는 식품, 729개는 섬유 공장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외국독점자본 소유였죠.

이 영국 자치령(인구 690만 명 가운데 유럽 출신자가 150만 명, 인도 출신자가 15만 명이었음)에서는 공업 프롤레타리아트와 광산 노동자 등 총 노동자 수는 1923년 당시 약 50만 명이었습니다. 농촌 인구의 4분의 1 이상(약 80만 명)은 백인 농장에서 고용(또는 계약) 노동자로서 일하고 있었죠. 광산업에서는 노동자 약 30만 명 가운데 백인은 3분의 1이 안 되었어요. 그러나 기계제조, 금속가공, 조선, 보석가공, 인쇄업 등에서는 백인이 다수를 차지했죠. 숙련된 유럽 노동자들 가운데는 영국인이 압도적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 연방에서는 당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t)체제가 엄격히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사회·경제적 바탕이 된 것은 아프리카인 노동자와 유색인(혼혈인이나 아시아에서 온 이주민)에 대한 극심한 차별이었어요. 비백인계 노동자 수가 증대하고 있었음에도, 아프리카인은 여전히 노동자계급 가운데 가장 심하게 착취당하고 무권리 상태에 있었으며, 이들의 임금은 백인의 5분의 1, 또는 6분의 1 정도였습니다. 

영국 노동법을 그대로 베낀 노동법규는 백인 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되었고, 아프리카인 노동자들과 유색인 노동자들은 노동법규의 적용 대상이 되지 못했어요. 억압과 착취를 위한 인종주의정책은 노동운동의 발전을 가로막은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투쟁에서 국제협력의 문제를 전면에 제기하게 됐던 것이죠.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은 노동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 무권리 상태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가운데, 1918년 5월 요하네스버그에서 백인 노동자들의 파업이 승리하게 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아프리카인 노동자들도 파업을 벌였습니다. 이 파업으로 노동자 100명 이상이 구속 되었으나, 이것은 더 큰 투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1918년 6월19일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트란스발 지부는 7월1일까지 아프리카 노동자들에게 하루 1실링 임금을 인상하라고 요구하는 군중집회를 열었어요. 6월29일에는 열흘 전보다 더 큰 규모의 집회가 개최되었고, 영국 국기인 유니온 잭이 찢어졌으며, 전차와 자동차의 통행이 저지되었는가 하면, 폭력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뒤 7월에도 파업이 계속되었으나 요구조건은 끝내 관철되지 않았죠(김윤진, 2006: 228).

1917년 당시 남아프리카 연방의 노동운동에서는 두 개의 당, 즉 ‘남아프리카 노동당’과 ‘남아프리카노동당 인터내셔널연맹’(남아프리카 국제사회주의연맹―ISL)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연맹은 혁명적 주장을 펴면서 조직 활동과 선전을 활발하게 추진했습니다. 연맹은 주간지 『인터내셔널』을 발간하고, 이를 통해 노동자 국제연대 원칙에 대해 선전했습니다. 또 이 연맹이 주도하여 1917년 8월에는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이 결성한 최초의 조직인 ‘아프리카인 산업노동자’가 창립되기도 했죠. 

1919년 3월에는 요하네스버그에서 파업을 결행한 시(市)전차종업원들이 노동자평의회를 창설하고, 시의 운수·송전·급수 관리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으로 파업 노동자의 요구가 실현된 뒤, 평의회는 관리권을 시측에 반환했죠.

1920년 2월17일부터 21일까지에 걸친 비트바테르스란트(Witwatersrand) 지역 21개 광산의 노동자 7,100명이 일으킨 파업은 원주민 파업으로서, 정부의 강압적인 조치로 패배했습니다. 정부는 광산노동자 주택지구로 군대를 투입하여 파업 지도자들을 체포했으며, 노동자들을 강제적인 방법으로 일터로 복귀시켰어요. 빌리지 딥(Village Deep)에서는 저항을 계속한 노동자들 가운데 몇 명이 주택지구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군인들의 발포로 사살되기도 했습니다(김윤진, 2006: 229~230).

한편, 1920년 1월에 열린 남아프리카 국제사회주의연맹 제5회 대회는 ISL의 코민테른 가입을 결정하고, 코민테른 제3회 대회와 프로핀테른 제1회 대회에 참가했어요. 1921년 7월과 8월에는 케이프타운에서 남아프리카 연방 공산당의 창립대회가 열렸는데, 당원은 약 500명이었습니다. 당은 민주공화국 수립, 흑인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정치적 권리 보장, 반민주적·인종주의적 법률의 철폐 등을 요구했습니다. 당은 구체적 요구로서 노동일의 단축, 최저임금제의 확립, 인종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의 파업권과 사회보장의 평등한 권리 보장을 제기했죠.

이런 정당과 정치조직이 크게 관심을 기울인 것이 노동조합의 조직화와 파업운동이었어요. 1918년 당시 노동조합원 수는 7만 7,800명이었는데 1920년에는 13만 5,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노동조합원의 압도적 다수가 백인노동자였고, 흑인노동자는 겨우 5%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것도 케이프 주(州)와 킴벌리에 국한되었죠. 

노동자계급의 조직성이 높아지면서 파업운동도 격화되었습니다. 정부 통계를 보면, 그것이 백인노동자의 파업만을 집계한 불완전한 것이지만, 파업의 고조 양상이 잘 드러납니다. 1918년의 경우 파업 23건, 파업참가자 2,600명이었으며, 1919년에는 파업 45건, 참가자 2만 3,300명, 1920년 파업 60건, 참가자 10만 5,600명으로 나타났습니다. 1921년에는 파업은 25건으로 감소했으나, 파업은 한층 더 대중화되었죠. 예컨대 아프리카인 광산노동자가 일으킨 파업에 노동자 10만여 명이 참가하기도 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66).

파업운동은 1922년에 특별히 치열했어요. 3월에 트란스발에서 사업장 40군데에 소속한 금광 노동자, 석탄광 노동자, 철도 노동자, 기계공장 노동자가 총파업을 벌였는데, 파업은 곧 봉기로 전화했죠. 파업의 주된 원인은 제국주의자와 남아프리카연방 부르주아지 특유의 방법에 의한 노동자 임금인하 방책이었습니다. 기업가는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는 백인노동자들을 저임금의 흑인노동자로 대체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인종적 대립을 격화시켰으며 백인 노동조합은 노동자 해고와 노동자 교체의 중지를 요구했죠. 

정부 당국이 ‘트란스발의 붉은 반란’이라 부른 이 파업으로 무력충돌을 빚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포병대, 기관총, 그리고 탱크로 무장한 군대 2만 명 이상을 동원하여 광산과 파업 사업장을 습격하였어요. 결국 3월12일과 14일 이틀에 걸친 전투에서 백인 노동자들은 진압을 당했습니다(김윤진, 2006: 233). 당시 파업노동자와 군대와의 무력충돌에서 153명이 죽고 687명이 부상당했는데, 군대와 경찰 측의 사망자는 72명이었고 부상자는 291명이었습니다. 이 봉기가 진압된 뒤 노동자 4명이 사형 당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박해를 당했죠.

1923년에는 파업 참가자 수가 2만 4,000명으로 감소하기는 했으나, 파업이 점차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어요. 노동자들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고 탄압 받는 동료들을 옹호하였으며, 연대파업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파업조정특별법 ―여러 단계의 중재(仲裁)를 거치는 ‘노동쟁의’ 강제적 해결의 반민주적 제도― 제정에 착수했습니다.

이집트

이집트의 노동운동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조직 ‘와프드당’((Wafd Party)의 지도 아래 전개된 민족해방운동과 긴밀한 연계 아래 발전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면화 생산에 일면적으로 치중한 농업 국가였어요. 면화는 거의 다 영세경영에서 재배되었으며 경지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8.9%였고, 대토지 소유자는 토지의 40%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수많은 농민들은 상시적인 농업 노동자로 일했죠.

공업의 발전은 매우 취약했고, 수공업=매뉴팩처 생산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인구는 1924년 현재 1,390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노동자는 약 55만 명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주로 제조업, 운수업, 건설업에 종사했고, 지역적으로는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포트사이드, 수에즈에 집중되어 있었죠. 노동자들 가운데는 여성과 연소노동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손작업의 섬유생산과 양탄자 짜기 그리고 봉제업 부문에서 일했습니다. 노동관계법이나 노동보호제도 그리고 사회보험은 시행되지 않았고, 노동일은 기업주의 자의적 결정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노동자계급은 가혹한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에 시달리면서 반제 투쟁에 나섰으며, 영국에 반대하는 파업투쟁을 비롯하여 시위, 무력충돌까지 벌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운동의 고양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19년 3월9일에 시작된 반식민지적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아랍 세계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혁명― 이었어요. 카이로의 노동자들은 이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몇 차례의 파업과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 와프트당 창립멤버. 왼쪽 원은 알리 참시, 가운데는 사드 작룰, 오른쪽은 무스타파 나하스 ]

1919년 8월부터 1921년 12월까지에 걸쳐 이집트에서는 파업이 81건 발생했고, 노동자 3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습니다. 주로 시(市) 전차종업원, 수에즈 운하와 카이로의 가스공장 노동자, 담배제조 노동자, 섬유 노동자 등이었죠. 이 과정에서 현지 노동조합 95개가 결성되었어요. 파업에서는 경제적 요구와 더불어 식민지주의 축출, 노동조합과 민족적 정치조직에 관한 권리 보장 등의 요구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68).

1921년 말에는 영국의 이집트에 대한 예속적 조약 시행과 와프드당 지도부에 대한 탄압 시도에 항의하여 대규모 시위가 감행되었고, 카이로에서는 총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식민지군은 전차와 항공기까지 동원하여 저항운동을 진압하기는 했으나, 영국은 결국 1922년 2월 보호통치를 폐지하고 이집트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죠. 술탄 푸아드 1세가 국왕이 되었고, 정부는 민주적 개혁 실시를 약속했습니다.

이런 정치적 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1918년에 출범했던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포트사이드의 사회주의적 조직들은 1921년 ‘이집트 사회당’으로 결합했습니다. 사회당은 당내의 사상적 불일치에도 노동조합 내에서는 활발한 활동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1921년 3월에는 노동조합원 5만 명을 포괄하는 20개의 노동조합 대표자 회의에서 ‘이집트 노동총동맹’이 결성되었죠. 대표는 안토니오 마론이었습니다.

한편, 1923년 1월에 열린 사회당 제2회 대회는 당의 명칭을 ‘이집트 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코민테른 가맹을 결정했습니다. 이집트 공산당의 강령은 이집트의 독립, 제국주의자 간섭 중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정치적 권리 보장,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경제상태 개선을 위한 투쟁 강화 등이었죠.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영향력이 성장하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낀 푸아드 국왕 정부는 정규 군대를 동원하여 목공 노동자 파업을 진압한 뒤, 1923년 3월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시행하였습니다. 또한 많은 부문과 업종에 속하는 노동자에 대한 파업 금지 조항을 형법에 규정했죠. 이에 따라 이집트 공산당은 비합법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고,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 마론은 그 뒤 감옥에서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알제리 

알제리 노동자계급의 형성은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촉진되었습니다. 1920년대 알제리에는 광산노동자 2만 5,000명, 운수노동자 2만 5,000명, 기계노동자 1만 명, 항만노동자 1만 명, 목공노동자 1만 5,000명, 인쇄노동자 1만 1,600명, 담배제조노동자 5,000명 등이 존재했습니다. 

10월 혁명 이전에 알제리에서 전개된 조직적 노동운동은 유럽계 노동자들이 주도했고, 아랍인이나 베르베르인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어요. 프랑스 사회당원과 공산당원이 알제리 노동운동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했는데, 이들은 모든 노동자의 평등을 요구했고, 민족적·민주적 세력들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활동을 추진했죠. 노동자의 파업투쟁의 동향을 보면, 1919년 파업 53건, 파업참가자 7,800명이었고 1920년에는 파업 20건, 파업참가자 6,300명이었습니다. 1920년에 일어난 파업 가운데 중대 파업으로는 3개월 동안 계속된 철도노동자 파업이 있었는데, 식민지 당국은 노동조합의 적극적 활동가와 일반조합원에 대한 대량적인 탄압을 가했죠. 

1923년에는 광산노동자의 투쟁과 항만노동자의 투쟁이 발발했는데, 파업참가자는 8시간 노동일제와 임금인상을 요구했습니다. 이들 파업에서는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 노동자와 유럽인 노동자가 처음으로 공동행동을 취했으며, 또한 정치적 요구도 제기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69). 

튀니지와 열대 아프리카 

튀니지와 열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노동자 투쟁이 전개되었어요. 튀니지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해방운동과 노동운동이 고양되면서 식민지 당국은 유럽인 노동자들에게 본국에서 시행되는 노동법규의 일부 조항을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에는 프랑스노동총동맹(CGT)에 가입한 튀니지노동조합연합이 설립되었는데, 그러나 이 노조는 유럽인 노동자가 지도했으며 아랍인 노동자들과의 결합 정도는 취약했죠. 1924년 혁명적 성향을 지닌 노동자들은 프랑스 노동총연동맹에서 탈퇴하여 ‘튀니지 노동총동맹’을 결성했으며, 여기에는 아랍인 노동자도 참가했습니다.

열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진행된 사회 경제적·정치적 변화에 따라 식미지 민중의 정치적·민족적 자각이 높아지게 되었고, 토착 노동자계급의 형성이 촉진되었습니다. 카탕가(벨기에령 콩고)에서는 1924년에 다이아몬드, 석탄, 석유 채굴, 건설 등의 부문에 흑인노동자 약 4만 명이 일하고 있었어요. 상당히 많은 수의 노동자 집단(강제로 끌려온 노동자들이거나 계약노동자들)이 앙골라, 다호메이, 케냐, 로디지아 세네갈, 기타 식민지에 출현했죠. 몇몇 지역에서는 파업이 일어났으나 당국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진압했습니다. 노동조합운동은 겨우 출발단계에 있었고, 노동자 정당은 미처 존재하지 않은 상태였죠.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미 민족해방운동에 참가했고, 자신의 권리와 요구를 주장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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