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제3절 노동자계급과 민족해방운동(Ⅱ)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33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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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절 반전 투쟁의 고양과 각국에서 진행된 혁명―반혁명 정세
  제2절 코민테른의 창립
  제3절 노동자계급과 민족해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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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고양된 노동운동은 네덜란드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해방투쟁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었습니다. 이런 운동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1914년에 창립된 동남아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인도네시아 사회민주연합’(ISDV, Indische Sociaal-Democratische Vereniging)과 전 민족적 대중조직인 ‘사레캇트 이슬람’(1912년에 창립된 ‘이슬람 동맹’)이었죠(양승윤, 1999: 303). 이들 조직은 제국주의와 식민지적 억압, 그리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민족통일전선의 초기 형태였어요. 인도네시아 사회민주연합 좌파는 노동자 조직 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노동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동맹은 조직을 확대하여 1916년 36만 명이었던 회원을, 얼마 지나지 않아 80만 명으로 확대했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 인구 약 5,000만 명 가운데 약 150만 명이 상용노동자였으며, 300만 명 이상이 계절노동자였습니다. 사탕공장 200군데에서 노동자 15만 명이 일했으며, 노동자 약 30만 명 이상이 사탕수수 대농장에서 일했죠. 1916년 당시에는 2,511개 기업에 노동자 약 12만 6,000명이 취업했으며, 1920년에는 공장노동자의 수가 34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노동자 상태는 매우 열악했어요. 특히 계절노동자와 미숙련노동자의 상태는 매우 참혹한 편이었습니다. 노동일에 대한 법적 규제는 없었고, 임금은 반기아적인 상태를 유지할 정도였죠.

이런 노동자 상태의 개선과 권리 보장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자주적인 활동이 전개되었는데, 당시 인도네시아에는 철도노동자, 전차종업원, 교원, 전신노동자 등을 포괄한 상당수 노동조합이 존재했으며, 조합원은 2만 4,300명 정도였습니다. 

1917년 말부터 1918년 초에 걸쳐 노동자 조직을 비롯한 민족통일전선이 중심이 되어 노동자 투쟁을 조직하게 되었어요. 이 무렵 자바 섬에서 수천 명이 집회와 시위를 벌였는데, 참가자들은 식민지 당국에 대해 실효가 있는 물가대책과 임금인상, 긴요한 경제적?정치적 요구의 충족을 제기했습니다. 봉건적 착취에 반대하는 농민운동 지지의 노동자 집회도 열렸죠. 1918년에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광범한 파업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들 투쟁에서는 철도노동자와 인쇄노동자 그리고 건축노동자가 중심이 되었고, 다른 직종의 노동자들도 파업에 참가했습니다. 노동자 투쟁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는데, 스마랑, 말랑, 바다비아, 수라바야, 반둥 등지에서 특히 대중적으로 완강했어요. 1918년 노동자 총 7,000여 명이 참가한 몇몇 파업은 노동자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수라바야와 말랑에서는 3,000여 명이 참가하여 소비에트나 적위군을 창설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당국의 탄압으로 무산되었죠.

1919년과 1920년에도 노동운동은 계속해 고양 국면을 맞이했는데, 1919년에는 노동자의 파업투쟁에 중부 자바와 술라베시의 농민들이 합류했어요. 그들은 식민주의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토착 봉건지주에 대해서도 투쟁을 전개했어요. 사탕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노동조합이 이 파업을 지도했죠. 그 밖에도 석유노동자, 인쇄노동자, 항만노동자 등이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파업 투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1919년 말에는 인도네시아 사회민주연합의 제안으로 사레캇트 이슬람과의 협력하에 단일의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인 ‘노동자계급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이 조직은 노동조합 22개, 조합원 7만 2,000명을 포괄했죠. 또한 노동자계급연합의 규약은 자본주의 사회의 폐절, 공업기업?은행?운수의 국유화 또는 사회화, 노동법규의 제정,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 수행을 위한 준비의 필요성 등을 규정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55). 


[ 192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당 대회 모습 ]

한편, 1920년 5월 인도네시아 사회민주연합은 ‘동인도 공산주의자연합’으로 명칭을 바꾸고, 이어 1925년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Partai Komunis Indonesia)으로 개편했어요. 이 당의 대표는 코민테른 제2회 대회와 제1회 극동민족대회 활동에 참가했습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합법적 가능성을 이용하여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죠. 1921년과 1922년에 걸쳐 공산당은 반제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을 위한 투쟁을 전개함과 동시에 당 세력 확대를 추진했어요. 그 결과 1922년에는 당원 1,300명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한편으로, 민족 부르주아지에 대한 식민주의자의 양보가 사레캇트 이슬람의 우익 지도자들로 하여금 1923년 초부터는 조직에서 공산당원을 배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많은 노동조합 및 사회단체들이 참가하여 ‘사레캇트 라얏트’(인민동맹)를 결성했는데, 이 조직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대중적 기반이 되었죠. 

1923년 5월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지도한 철도노동자의 파업이 발발했습니다. 여기에는 철도노동자 2만여 명 가운데 1만 3,000여 명이 참가했어요. 많은 공업부문 노동자와 운수부문, 통신부문 노동자들이 이 파업을 지지했으며, 특히 대규모적이고 완강하게 투쟁을 벌였던 곳은 동부 자바, 수라바야, 스마랑 등이었습니다. 식민지 당국은 파업에 대해 힘으로 탄압했어요. 또한 민주주의 조직에 대해 강압적으로 공격했죠. 파업이 금지되었고, 회의?집회?시위는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공산당원과 노동조합운동 활동가들은 가혹하게 탄압 당했습니다. 

조선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승리하고 이듬해인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는 혁명운동을 비롯한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습니다. 이런 변화의 요구는 식민지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죠. 세계적 차원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화들을 배경으로 조선에서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김경일, 2004: 82).

3·1운동은 1919년 3월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전개되었죠. 약 20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그 가운데 7,0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운동을 거치면서 노동자계급을 선두로 한 민중이 민족해방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대두하게 되었어요. 한편, 1910년대 노동자 파업은 3?1운동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3?1운동 당시 노동자들의 참여는 3월2일 경성지역 노동자·학생 등 400여 명, 3월3일 황해도 겸이포제련소 노동자 200여 명이 시위를 벌인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이어 3월4일에는 평남 진남포, 평북 선천의 노동자 파업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표10-1]에서 보는 바와 같이 3?1운동 당시 노동자계급의 참가는 주로 파업과 시위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 노동운동이 고양되었던 1919년도 노동자 파업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3·1운동을 계기로 촉발된 노동자 파업은 총 84건으로 1년 내내 지속되었으나 3·1운동이 소강상태에 있던 7~10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둘째, 지역별로는 공장이 많았던 경기도, 경상남도, 평안남도에서 전체 파업의 75%를 차지했죠. 셋째, 파업의 원인으로는 임금문제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고, 노동자 대우 개선문제와 일본인 감독자의 횡포 시정,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 등이 주요 요구로 제기되었습니다. 넷째, 파업참가 노동자 수가 이전에 비해 훨씬 증가했죠. 다섯째, 파업기간도 이전에 비해 점차 길어지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평균 일수로는 3일이었고 동아연초회사 경우처럼 17일 동안 지속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섯째, 그러나 파업의 결과를 보면 승리한 경우는 17건으로 20%에 지나지 않았고, 패배한 경우가 37건으로 44%를 차지했어요. 그리고 타협으로 마무리된 경우가 23건으로 27%였으며, 미해결 7건, 8%였습니다(성대경, 1977: 197~201). 

1920년대에 들어 임금노동자 수가 전반적으로 증대되고 임노동의 중심인 공장노동자층도 상대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또한 식민지 기반시설의 구축과 물자의 집산 및 운반, 그리고 도시의 발전 등에 따라 부두와 항만, 철도역과 거리에서 운수·운반에 종사하는 노동자층이 지속적으로 형성되었죠.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노동회’, ‘노우회’, ‘노동친목회’, ‘노동계’, ‘노동조합’ 등의 명칭을 건 노동단체들이 조직되었어요. 이를 조직형태에 따라서 보면 1920년대 초반에는 지역 내의 여러 직종을 망라한 지역별 노동조합(지역합동노조)이 가장 대표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김경일, 2004: 89~91). 

이와 같이 전국 각 지역에서 노동조합 조직이 활발하게 조직되는 가운데, 1920년대 전반 들어 몇 개의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National Center)이 건설되었어요. 1920년 4월에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와 같은 해 2월에 조직된 ‘조선노동대회’, 1922년 10월 설립된 ‘조선노동연맹회’가 그것입니다(김경일, 2004: 92~101, 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127~135).

우선 조선노동공제회는 1919년 선진적인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고 있던 ‘조선노동문제연구회’를 모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체는 이듬해 2월7일 해체되었어요. 이후 연구회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한 대동단결의 합법적 조직운동을 노동자층에서 전개하기 위해 조선노동공제회를 창립하기로 했죠. 그리하여 1920년 4월3일 서울 인사동 명월관 지점에서 조선노동공제회 발기인 총회가 열렸습니다. 이 총회에는 발기인 쪽에서 50명이 참가했고, 또 개인 자격으로 인력거부, 지게꾼, 신문배달원과 같은 이른바 자유노동자들 100여 명도 참가했습니다. 곧이어 4월11일에는 서울 광무대(현재 을지로 4가 소재)에서 발기인 286명을 포함하여 678명이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노동공제회’ 창립총회가 열렸어요. 그 총회는 회장에 박중화(朴重華), 총간사에 박이규(朴珥圭), 의사장에 오상근(吳詳根)을 각각 선출했습니다.

창립총회에서 노동공제회는 ⑴ 인권의 자유평등과 민족적 차별의 철폐, ⑵ 식민지 교육의 지양과 대중문화의 발전, ⑶ 노동자의 기술양성과 직업소개, ⑷ 각종 노예의 해방과 상호부조 등의 강령을 채택했습니다. 이와 아울러 노동공제회는 “노동의 신성과 노동자의 존귀”를 바탕으로, “민족적·계급적으로 이중의 압박과 착취의 대상”이면서 “박멸과 자멸의 운명밖에 없는 조선의 노동자, 농민 대중”의 민족적, 계급적 해방을 선언했습니다.

또 노동공제회는 조직의 당면과제로서 노동자의 교육과 경제, 그리고 위생을 설정했죠. 또한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대책으로는 지식계발, 품성향상, 환난구제, 직업소개, 근검저축의 장려, 위생 장려, 일반 노동 상황의 조사 연구와 기관지의 발행, 일반 노동문화의 보급 등을 내세웠습니다.

조선노동공제회가 결성된 이후 전국 각지의 산업 중심지에서 노동공제회 지부들이 잇따라 조직되었습니다. 1922년 3월 말까지 전국에 설치된 지부 수는 50여 개에 이르게 되었죠. 창립 당시 678명이었던 회원 수는 1921년 3월이 되면 17,889명까지 증가하게 됩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지부 설치뿐만 아니라 주요 도시들에서 직업 또는 직종별 노동조합 조직에도 노력을 쏟았어요. 이를 통해 서울의 인쇄직종조합, 전차종업원조합, 자유노동조합과 대구의 인쇄직공조합, 토목공려회, 그리고 진주의 양화직공조합, 자유노동조합 등이 결성되어 활동을 추진했죠.

조선노동공제회는 창립에서 해체에 이르는 2년 동안에 노동자들의 의식을 계몽하고 노동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소비조합을 설치하여 공제활동을 벌였고, 노동쟁의에 대한 진상조사와 중재를 행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에도 일정한 형태로 개입했습니다(신용하, 1986: 162~163).

그러나 조선노동공제회는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조직이나 활동 측면에서 일정한 한계를 나타냈습니다. 우선 노동공제회는 전국적인 조직이었음에도 노동단체들의 연합체가 아니었으며, 각 회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이에 참가했죠. 즉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으로서의 조직적 위상을 확립하지 못했던 겁니다. 또한 회원 가운데는 지식인과 도시 중산층이 많았으며, 지도부의 대부분이 노동자의 권익 향상과 병행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노동공제회가 조직을 확대하고 활동 영역을 넓혀 가는 과정에서 각종 투쟁과 파업에 대해 일정한 지도역량을 발휘했지만, 임금인상이나 노동일의 단축 등과 같은 절실한 일상적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활동보다는 상호부조와 계몽, 그리고 직업소개 등의 활동에 치중했다는 부분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노동단체’임에는 분명하며, “본격적 근대적 노동조합 운동을 준비한 노동자 조직으로서 우리나라 노동운동 발전에서 중요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김인걸, 1964: 31, 37)는 평가가 가능할 겁니다. 

한편, 조선노동공제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전국적 노동조직으로서 ‘노동대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노동대회는 김광제(金光濟), 권직상(權直相) 등이 중심이 되어 노동자들의 상호부조와 인격향상, 그리고 의식의 발달 등을 목표로 1920년 2월에 발기인 대회를 갖고, 같은 해 5월 창립총회를 개최했죠. 노동대회는 전국에 걸쳐 지부 조직에 착수하여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개성, 원산, 광주, 신의주, 마산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회원 수는 한때 8,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보고되었기도 하죠. 

그러나 노동대회는 창립한지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내부분열에 휩싸였고, 1923년 무렵에는 조직세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노동대회는 뒤에서 서술하게 될 ‘조선노동연맹회’와 대립하여, 차금봉(車今奉) 등의 조선노동공제회 잔류파와 함께 조선노농대회 준비를 추진하다가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의 조직에 합류하게 되죠.

조선노동공제회와 노동대회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지식인과 노동자계급이 완전히 분화되지 않은 채, 내부적으로 노선이나 계급?계층에서 매우 복합적인 구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조직으로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갖가지 분열의 요소를 안고 있었던 거죠. 이런 시점에서 노동조합운동의 본래적인 성격과 임무를 충실히 정립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는 가운데, 지식인과 노동자계급을 주축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노동조직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노동연맹회’가 그것입니다.

1922년 10월18일 창립된 조선노동연맹회는 ⑴ “사회역사의 필연적인 진화이법(進化理法)에 따라 신사회 건설을 기도함”, ⑵ “공동의 힘으로 생활을 개조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지식의 계발, 기술의 진보를 도모함”, ⑶ “현 사회의 계급적 의식에 의하여 일치단결을 기도함”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습니다.

또한 조선노동연맹회는 ‘선언’에서 “자본주의의 독해(毒害)는 세계 도처에 왕양(汪洋), 팽배(澎湃)하여 생산의 권위를 가진 노동자를 기계시하고 그 노동력을 상품시하여, 오인 노동자는 고민참통(苦悶慘痛)함이 인내하려 하여도 다시 더 인내할 수 없는 정정에 달하였도다.”고 하면서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했죠. 그리고 선언은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실태를 폭로하면서, “조선의 노동자도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위하여 만국의 노동자와 단결하여 분투코자 하노라”고 밝혔습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133). 

조직의 구성과 관련하여, 노동공제회가 개인 자격의 가입형태를 취했던 것과는 달리 노동연맹회는 개별 노동조합 가입에 의한 연맹체 성격을 취했습니다. 그런데도 노동연맹회는 파쟁과 분열로 인해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으로서 명실상부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죠. 이런 정황으로 인해 노동연맹회 창립 당시의 가맹단체가 경성전차종업원회를 비롯하여 진주노동회, 대구노동공제회, 경성노우회, 광주노동공제회, 경성양화직공조합 등 13개 단체, 조합원 수 3만여 명이었던 것이, 1924년 4월 해체될 때는 불과 5개 단체만을 포괄하고 있었을 뿐이었죠. 그런데도 이들 회원 단체가 당시 경인 지역에서 가장 잘 조직된 선진적 노동조합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신용하, 1989: 73). 

조선노동연맹회는 노동공제회나 노동대회보다는 훨씬 진전된 활동 양상을 보였습니다. 특히 1922년 12월의 경성양화 노동자 파업을 비롯하여 1923년 6월의 경성고무 여성노동자 파업, 1922년 12월부터 1923년 7월에 이르는 시기에 전개된 양말, 고무, 양복제조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했죠. 노동연맹회 활동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조선에서 최초로 1923년 5월1일, 메이데이 행사를 조직했다는 사실입니다. 조선노동연맹회는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성을 계기로 해체되었습니다.

이런 노동 조직의 창설과 더불어 1920년대 초두의 노동운동 전개 양상은 1919년의 3·1운동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1919년의 파업 건수는 84건으로 노동자 9,011명이 파업에 참가했죠. 이는 그 전 해인 1918년에 일어난 50건의 파업 건수와 파업참가자 6,105명에 비교해서는 크게 늘어난 수치였어요. [표 10-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20년에는 파업 건수가 1919년에 비해 조금 감소했지만, 여전히 1910년대에 비해서는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1920년대 초두에 전개된 대표적인 파업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1920년 서울지역 고무 공장, 양말 공장, 양복제조, 금은세공, 구두제조 등의 노동자들이 일으킨 연쇄적인 지역 동맹파업, 1921년 부산지역 부두노동자 5,000명이 참가한 총파업, 1922년 부산 조선방직 노동자 500여 명 참가의 파업·시위, 경성 인력거부 1,000여 명의 파업투쟁, 1923년 부산 조선방직 노동자 1,700여 명이 참가한 파업, 평양 양말 공장 노동자 1,000여 명이 참가한 파업 등말입니다. 

이 시기 파업 투쟁의 주요 원인을 보면, 임금인상 또는 임금인하 반대와 노동조건 개선 등 경제적 요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대부분의 파업은 일본인 고용주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민족적·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죠. 파업 지속 기간을 보면, 대부분 단기간에 끝났다는 점에서 파업투쟁이 그다지 완강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파업 결과를 보면, ‘성공’ 보다는 ‘실패’가 더 많았죠. 그러나 1920년대 초반의 이런 파업 투쟁은 이후 전개된 노동운동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2. 라틴 아메리카 노동자계급의 투쟁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농업=원료부속지로 전락했습니다. 그렇지만 전(前)자본주의적 잔재가 두텁게 존재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자본주의적 경제구조가 이들 국가의 사회·경제적 발전에서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었어요. 19세기와 20세기의 경계 시점에서는 개별 국가 사이의 발전 수준과 속도에서 두드러진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국가들에서는 부르주아 사회를 특징짓는 계급형성의 과정이 완료되었는가 하면(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칠레, 우루과이), 다른 국가들에서는 자본주의가 봉건적 또는 반봉건적 질서의 완강한 벽을 뚫고 자기발전의 길을 헤쳐 나아가고 있었죠(볼리비아, 파라과이, 중앙아메리카 공화국들). 이런 사회·경제적 발전과 관련하여 계급적 모순의 성숙이나 노동대중의 투쟁 형태는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주요 국가들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형성이 기본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공업노동자 수가 40만 명을 넘어섰고, 브라질에서는 30만 명, 멕시코에서는 공업과 운수부문에 약 50만 명이 취업하고 있었죠. 다른 국가들에서도 노동자 수가 급증했고, 노동자계급의 구성도 변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멕시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쿠바 등에서 노동조합운동이 강화되고 사회주의 지향의 정치조직이 대두되기 시작했어요(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33). 
라틴 아메리카의 노동조합운동은 지배적인 대토지 소유자와 그 동맹자, 즉 모든 유형의 외국 제국주의자의 광포한 반동에 대항하여, 광활한 대지의 모든 지역에서 민족해방과 노동자계급의 자기 확립을 위한 장구하면서도 과감한 투쟁을 전개했죠(Foster, 1956: 346).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보다는 빠르게 자본주의 발전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발전의 주축인 자본 측면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 것은 민족자본이 아니라 외국자본이었죠.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미국 자본 소유 회사들이 아르헨티나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문인 식육가공도매업의 58.5%를 소유했고, 영국 자본이 29%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토착 자본가 소유는 겨우 1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 191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일어난 '비극의 주간' 사건으로 노동자 5,000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 ]

1919년 1월 들어 파업투쟁의 물결이 맹렬하게 일어났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노동자 집회 참가자에 대한 경찰의 도발적 공격에 대항해 총파업 투쟁이 발발했죠. 경찰 총격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에 군중 20만 명이 모여들었는데, 이폴리토 이리고옌 정부 당국은 이 집회에 대해 다시 무력을 행사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은 병기고를 점거하여 무기를 들고 경찰과 군대에 대항해 바리케이드 전을 벌였어요. 정부는 포병을 동원하여 봉기자들을 진압했으며, 그 과정에서 노동자 5,000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이른바 ‘비극의 주간'(Semana Tr?gica)을 맞은 것입니다(강석영, 1996: 50). 한편, 이와 같이 대중투쟁이 고양되는 가운데, 1918년 아르헨티나 사회당 좌파는 ‘국제사회당’을 창립하고, 1919년 4월에는 코민테른 가입을 선언했으며, 1920년 12월에는 ‘아르헨티나 공산당’으로 개칭했습니다.

한편, 1922년 3월에는 ‘아르헨티나 노동조합연맹’(Uni?n Sindical Argentina)이 결성되었어요. 이 연맹에는 대부분의 노동단체가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연맹 지도부는 생디칼리스트적 견해를 극복하지 못한 채, 통일전선의 반대자를 지지했으며 정당과 국제적 센터로부터 ‘독립’을 강력히 주장했죠. 이런 노선 때문에 노동자 투쟁의 지도에서 잘못된 경향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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