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제3절 노동자계급과 민족해방운동(Ⅰ)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32]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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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절 반전 투쟁의 고양과 각국에서 진행된 혁명-반혁명 정세
  제2절 코민테른의 창립
  제3절 노동자계급과 민족해방운동

※ 지난 연재분은 연구소 홈페이지(
www.klsi.or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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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장에서 두들겨 맞으면서 부당하게 대접을 받았죠. 나는 그런 나쁜 작업조건에 대항해서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공장 노동자들보다 좀 더 많이 글자를 보고 쓸 줄을 알았죠. 19살 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당이라든가 마르크시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는데, 1919년의 5·4운동 기간 중에 혁명에 관한 많은 선전이 있었고, 혁명적인 구호에 흥미가 깊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웨일스, 님, 1981: 275.


1. 아시아 국가들의 노동자와 민족해방투쟁

아시아 국가들에서 이루어진 노동자계급의 형성 과정과 구조는 이 지역에서 진행된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성에 의해 규정됩니다. 제국주의가 억압하고 있는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의 사회·경제적 후진성, 이들 국가들에서 잔존하고 있는 봉건적 관계나 씨족적 또는 부족적 관계, 압도적 다수의 문맹과 인민의 무권리 상태는 식민지 제도가 낳은 직접적 산물이었죠. 

이들 국가들에서는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발전이 제약 당하게 되었고, 파행적 구조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도시에서 이루어진 민족 공업의 성장과 토착 자본가가 수행하는 어느 정도의 활발한 기업 활동은 농촌 주민의 대량적인 빈곤화와 영락(零落), 상업과 고리대 자본 수중으로 들어간 대량적인 화폐수단의 축적, 농민에 대한 착취의 강화를 가져왔습니다. 제국주의의 종속하에서 진행된 토착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은 극도로 불균등했던 거죠. 

그런 가운데서도 자본주의는 ‘위로부터’ -제국주의 영향 하에서- 도, ‘아래로부터’ -경제구조상 절대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전(前)자본주의 구조의 자연적인 발전의 결과로서- 도 발전을 진행했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에서 추진된 민족 프롤레타리아트 형성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42~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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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의 낮은 발전과 반봉건적·봉건적 경영형태의 강력한 유제(遺制)의 결과로서 규정된 노동자계급의 상대적으로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낮은 비중.
2) 낮은 산업화 수준의 결과에 따른 전체 노동자계급 가운데 공장 노동자의 낮은 비중, 소상품 생산·수공업·매뉴팩처 생산과 결합된 노동자계급 비중의 우세.
3) 미숙련·저숙련 노동력의 우세와 상용(常用)노동자의 낮은 비율, 토지 및 개인경영과 밀접하게 결합된 노동자와 노동력의 높은 유동성. 
4) 노동자계급의 상용 부분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여성과 연소 노동자의 높은 비중.
5) 전반적인 저소득과 열악한 생활조건 아래에서 조성된 노동자 계층 사이의 임금격차 만연.
6) 자본주의적 착취방식과 반봉건적 착취형태의 병행적 사용.
7)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성과 계급의식의 성장을 가로막는 민족적·종교적·씨족적인 상이(相異)의 존재. 
8) 노동자계급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그들의 상태와 세계관에 대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량의 반(半)프롤레타리아적(전(前)프롤레타리아적)·소부르주아적 주민층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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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국가들에서 이루어진 노동자계급 형성의 이런 특수성은 노동운동의 전개 양상과 성격, 토착 부르주아지나 개별 자본가와의 관계, 그리고 민족해방투쟁 전개에서 노동운동이 차지하는 역할 등을 규정했습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승리는 아시아 지역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을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해방투쟁과 사회변혁운동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전망을 제시했죠. 이제 각국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인도

인도의 경우 19세기 말부터 1919년까지 공장 수는 5.5배, 거기에 고용된 노동자 수는 3.5배 증가했습니다. 1921년의 국세조사에 따르면, 총인구는 3억 2천만 명(소득이 있는 취업자는 1억 4,640만 명)이었고, 제조업에는 1,570만 명(공장 기업에는 150만 명), 광산업에는 34만 7천 명, 운수업에는 190만 명이 취업하고 있었죠. 농업 부문에서는 노동자 약 3천만 명이 고용되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약 1백만 명이 대농장(plantation)에 종사하고 있었어요. 영세기업을 포함하여 공업부문에 종사하는 인구는 약 10.7% 정도였고, 농업노동자는 농촌인구의 26.2%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인도 산업노동자 형성의 중심지는 봄베이로서, 여기에 노동자 40만 또는 45만 명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절반가량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죠. 

인도의 노동자 상태는 극도로 열악했습니다. 노동시간은 10~12시간을 상회했고, 임금은 최저생계비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어요. 노동자와 가족들은 기아에 허덕여야 했으며, 의료 혜택이나 노동보호를 받지 못한 채 고통 받아야만 했습니다. 평균 수명은 정부 통계에 따르더라도 28세였으며, 실업자군은 취업자 수를 훨씬 능가했죠.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인도의 노동자계급은 강력한 파업투쟁을 통해 스스로의 역량을 드러냈습니다.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에 걸친 파업투쟁으로 봄베이 방적 노동자 12만 5천 명의 임금이 인상되는 성과를 거두었던 거죠. 1918년에는 아마다바드, 칸푸르, 캘커타, 마드라스에서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1919년 4월에는 암리차르에서 영국 식민지군이 비무장의 주민들에 대해 총격을 가한 사건(약 1천 명이 죽고 2천 명 이상이 부상했다)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이 촉발되었습니다. 당시의 노동자 투쟁은 대부분 매우 궁핍한 경제 상태에서 비롯되었지만, 파업이 정치적 성격을 띤 경우도 적지 않았어요. 투쟁 형태에서도 연대파업을 비롯하여 정치적 무권리와 식민지 당국의 전횡에 대한 항의 파업, 경찰의 폭압과 박해에 대한 항의 파업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시 전개된 인도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두고, 인도의 민족해방운동가 B.G. 티일락은 “노동자 조직의 권위는 갈수록 더욱 높아져 노동자야말로 사회를 통치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죠. 

한편, 도시와 농촌의 광범한 노동대중이 참가한 민족해방운동은 점차 조직적으로 되었고, 한층 더 목적 지향적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미 전쟁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혁명적 인도인 망명조직과 결합된 비합법·반합법 조직의 활동이 갈수록 활발해졌던 거죠. 이런 망명자단체가 자리 잡고 있었던 주요 중심지는 프랑스, 독일, 아프가니스탄, 스웨덴, 미국 등이었으며, 10월 혁명 이후에는 중앙아시아, 그 가운데서도 주로 타시켄트에서 인도인 망명자의 수가 급증했습니다. 그러나 1920년 말에 여기서 결성된 인도 공산당은 곧 해산되었죠.

이 무렵 인도 국내에서는 민족혁명가들이 지하에서 밖으로 나와 공개적으로 대중들과 결합하기 시작했어요. 1919년 3월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정부에 비상대권을 위임하는 법안(라우라트 법안)에 반대하는 항의의 표시로 시민 불복종(hartal) 캠페인을 호소했습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노동자의 파업과 영국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되었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죠. 

암리차르에서 열린 인도 국민회의 대회는 간디가 제안한 비폭력 투쟁 강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1920년 9월 캘커타에서 열린 임시대회는 수십 년에 걸쳐 인도 민족해방운동의 주요 기조가 된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 진리 파악) -비폭력 비협력·불복종(상업, 교육시설 기타 시설의 활동 정지, 집회 및 시위의 실행 등)- 강령을 정식으로 채택했습니다. 1920년 12월에 열린 국민회의 정기대회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압도적 지지로 통과시켰는데, 국민회의의 강령이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모든 방법을 통한 인도 국민의 스와라지(자치) 달성의 길이라고 선언했죠. 국민회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배경으로 하여 간디는 1921년 말까지 1년 안에 스와라지를 이룩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조길태, 2000: 513~514).

한편, 국민회의는 1920년 10월에 제1회 전국대회를 개최한 노동조합 지도의 노동자 투쟁에 대해 지지의 뜻을 표명했습니다. 전(全)인도노동조합회의(the All-India Trade Union Congress)가 60개 조직의 대의원 800명이 참가하여 창설되었죠. 대회 의장은 국민회의 의장이었던 라즈파트 라이였습니다.

1921년 들어 파업운동이 고양되었는데, 파업은 369건이었고 참가인원은 60만 명을 넘어서기에 이르렀습니다. 1921년 11월에는 최초의 전국적 정치파업이 발발했는데,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웨일즈 공의 인도 방문에 항의하면서 독립 인정을 요구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47). 

식민지 당국은 민족해방운동과 파업투쟁에 대해 탄압으로 대응했는데, 그 결과 노동자 수천 명이 체포되었고 수십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어요. 그러나 이런 식민주의자의 탄압이 독립투쟁을 지속하고자 하는 인도 인민의 결의를 결코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노동운동의 고양은 봄베이, 캘커타, 마드라스, 라호르, 칸푸르, 베나레스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그것은 혁명 지향 그룹의 형성을 촉진했죠. 이 그룹의 대표자는 코민테른 제3회 대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어요. 인도 공산당의 창립은 식민지 당국의 탄압으로 지체되었다가 1925년에야 실행될 수 있었죠.

중국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 발발과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이르러 근대 산업노동자의 수는 증가하였고 노동자 투쟁도 고양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민주주의 제도의 도입과 진보적 사상의 확산에 따라 노동자 대중은 점차 계급의식을 지니게 되었으며, 노동자 투쟁과 계급의식의 향상을 바탕으로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조직형태가 생겨나게 되었죠. 이 조직들은 중국 노동자계급의 대중조직 즉, 노동조합의 맹아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중화전국총공회, 1999: 49~50).

중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제 기업이 692개였던 것이 1920년에는 1,759개로 증가했어요. 주요 공업부문이었던 섬유산업의 경우, 전쟁 이전에는 방적공장이 9개(그 가운데 8개가 외자기업이었음)였던 것이, 1922년에는 106개(그 가운데 37개 공장이 외자기업이었음)에 이르렀죠. 외자계 공업이든 민족계 공업이든 대부분이 몇몇 연안 도시 즉, 상하이(上海), 텐진(天津), 칭다오(靑島), 광저우(廣州) 등과 일본 자본이 지배하고 있었던 만저우(滿洲)에 집중해 있었습니다. 주요한 상공업 및 금융 중심지는 상하이였는데, 전체 공업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이 도시에 집중해 있었죠. 

중국 경제구조의 뿌리 깊은 복합적 구조에 따라 노동자계급 구성도 매우 다양한 양상을 나타냈어요. 노동자의 압도적 부분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가장 단순한 형태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도시에는 가내노동자가 800만 또는 1,000만 명 존재했고, 매뉴팩처 노동자 200만 명이 종사하고 있었으며, 1920년대 초 무렵 공장제 공업의 노동자 수는 60만 명을 넘지 않았죠. 공업노동자 가운데 임시노동자, 계절노동자, 계약직노동자가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했고, 여성노동자(50%)와 연소 노동자(10%)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 대부분이 제1세대 노동자였어요. 

제1차 세계대전 기간과 전후에 공장 노동자와 매뉴팩처 노동자의 수적인 증가에도 자립적인 노동자 조직은 초보적인 단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1919년에 발발한 5·4 운동 이전에는 중국의 노동자계급은 생성·발전의 제1단계에 있었고, 기본적으로 즉자적인 단계에 있었죠. 당시의 노동자계급은 부분적으로 반제(反帝)·반봉건 투쟁에 참가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주로 부르주아지를 추종하였고,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요구나 강령을 설정하지 못했어요. 조직 측면에서도 안정되고 강대한 대중조직을 창설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노동자계급의 초기 투쟁과 조직의 발전은 그들이 독립적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하면서 노동조합 조직을 설립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됩니다(중화전국총공회, 1999: 50~51). 

1919년 5·4운동은 중국 신(新)민주주의 혁명의 시발점임과 동시에 현대 노동운동의 기점이었습니다. 5·4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한 뒤 국제 노동자계급의 혁명운동이 폭풍처럼 일어났던 시기에 폭발했죠. 5·4운동의 직접적인 발단은 1919년 4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이탈리아 등을 중심으로 한 협상국이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하기 위해 소집했던 파리 강화회의에서 중국 대표가 제기한 요구들(중국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특수권익과 특권 일체를 폐지할 것, 일본이 점령한 산둥성(山東省)을 중국에 반환할 것, 21개 조를 취소할 것 등)이 거부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더욱이 이 회의에서 채택된 평화조약에는 일본이 무력으로 탈취했던 산둥성 관련 이권이 명문화되었어요. 이런 굴욕적인 결정에 대해 당시 베이징 군벌 정부는 이를 인정하고 서명하려 했죠. 이 같은 외교적 실책과 매국적인 타협 소식이 전해지자, 인민대중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 1919년 5.4운동을 다룬 신문 스크랩 ]

5월과 6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반제·반정부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는데, 학생·지식인·노동자·농민·민족자산계급 등이 중심이 되어 집회, 시위, 파업, 수업거부, 동맹 휴점(休店) 등 다양한 형태의 투쟁을 벌였죠.

노동자계급의 본격적인 파업 투쟁은 6월5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날 상하이 일본인 소유의 내외 면사공장 노동자 5,000명 또는 6,000여 명이 최초로 일손을 놓고 거리로 진출함으로써 상하이 노동자 정치파업의 신호를 알리게 되었죠. 같은 날 다른 일본인 소유 방적 공장 노동자 2만여 명과 방사공장 노동자들이 파업 대열에 참가했어요. 6월6일에는 중국인 소유 전차 회사, 프랑스인 소유 전차회사, 영국인 소유 제철소 등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6월9일에도 파업은 크게 확대되어 상하이 시 전체가 파업 사태를 맞았어요. 6월 10일는 파업이 한층 더 고조되어 철도 노동자를 비롯한 운수 노동자들과 짐꾼·목수·마부·청소부·선원 등이 파업에 동참했죠.

상하이의 파업 물결은 빠른 속도로 전국 각지로 파급되었어요. 난징(南京), 텐진(天津), 샤먼(廈門), 닝보(寧波), 우시(無錫), 기타 도시의 상인, 난징의 인력거꾼과 하역노동자, 주장(九江)의 항만 노동자, 탕산(唐山)의 광산 노동자, 장신뎬(長行店)의 철도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5·4운동은 중국의 노동자계급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대두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중화전국총공회, 1999: 55).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국 각지에서 발발한 노동자 파업은 반제·반봉건이라는 정치적 성격의 투쟁이었죠. 둘째, 정치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은 낡은 형태의 동업회(同業會)나 향토회 등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단결과 통일적 행동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파업의 초기단계에서는 노동자들이 애국적 부르주아의 영향을 받았지만, 파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많은 노동자들의 실제 행동은 부르주아나 소부르주아의 통제와 영향에서 벗어나 노동자 본래의 계급성을 나타냈더라는 거죠. 넷째, 노동자계급이 처음으로 정치투쟁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그 역량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세력으로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5·4운동은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노동운동이 혁명적 사상과 결합되는 계기를 만들었어요. 1920년에는 상하이, 베이징, 광저우(廣州), 창사(長沙), 우한(武漢) 등에서 사회주의 서클이 생겨났고, 리다자오(李大釗), 천두슈(陳獨秀), 덩중샤(鄧中夏), 마오쩌둥(毛澤東) 등 마르크스주의 선전가와 중국공산당 조직가들이 등장했습니다. 1921년 초에는 프랑스에 유학하고 있던 중국인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청년단이 결성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뒷날 중국공산당의 지도적 활동가들이 나오기도 했죠. 저우언라이(周恩來), 리리산(李立三), 첸위(陳毅), 리부춘(李富春), 덩샤오핑(鄧小平)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들 혁명적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고 공산당의 설립 준비에 착수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선전·조직 사업을 전개했어요. 그 과정에서 1920년 11월과 12월에 상하이 기계노조, 인쇄노조, 방직노조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습니다. 1921년 상반기에는 베이징과 광둥에서 노조들이 건설되었죠. 이 밖에도 후난성(湖南省) 창사에서 후난 노공회(勞工會)가 설립되었고, 홍콩에서는 중화해원공업연합총회(中華海員工業聯合總會)가 건설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전국의 많은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대중조직을 건설했죠(중화전국총공회, 1999: 57~58).

마르크스주의의 보급과 노동운동의 고양을 기초로 1921년 7월23일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중국 공산당의 최초 강령은 당의 기본임무가 무산계급을 지도하여 혁명을 전개하는 것이며, 최종목표는 중국에 계급적 차별 없는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규정했죠. 

중국 공산당 제1차 대회는 당이 건설된 뒤 일정기간 역량을 노동운동 발전에 집중시켜야 한다고 결정했어요. 대회에서 통과된 「결의」는 노동자의 산업별 노동조합의 조직화와 계급투쟁 정신의 강화를 강조했습니다. 또 결의는 당원을 노조에 파견하여 활동하게 하고, 노조에 대한 당의 지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결코 노조가 당파의 노리개가 되거나 다른 정치노선을 수행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죠. 그리고 노동자 학교의 설립과 노조 연구기구 설치를 역설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50~451).

이런 결의를 실행하기 위해 1921년 8월11일 당 중앙위원회는 노동운동을 공개적으로 지도하는 대표기구로서 중국 노동조합 서기부를 상하이에 설치하고, 간행물 『노동자 주간』을 발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서기부의 최초 주임은 장궈타오(張國燾)였고 비서와 간사는 리치한(李啓漢)과 리쩐잉(李震瀛)이었죠. 서기부는 1922년 전국에 걸친 파업이 고조되었을 때,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상하이 등지에 소재한 공업기업과 북방 철도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파업을 몇 건 지도했으며 노동입법을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921년 8월부터 1922년 5월 제1차 전국노동대회가 열리기 전 8개월 동안 중국공산당과 서기부의 지도에 따라 전국의 여러 공업도시와 철도, 광산 부문에서 노동자 투쟁이 일어났죠. 상하이에서는 1921년 말 삼신(三新)방적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비롯하여 프랑스 조계의 부두노동자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담배공장 노동자들이 잇따라 비교적 규모가 큰 경제투쟁을 벌였습니다. 북쪽 지방에서는 1921년 11월 롱해철로(?海鐵路)에서 큰 규모의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1922년 1월12일 시작되어 3월6일 종료되기까지 56일 동안 계속된 홍콩 선원 대파업은 중국의 노동운동이 고양된 중요 기점이었어요(중화전국총공회, 1999: 65). 선원 파업의 직접적인 원인은 홍콩 선원들이 제국주의와 외국 자본가들의 가혹한 억압과 착취를 당했던 데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파업 이전인 1921년 3월 중화해원공업연합총회(中華海員工業聯合總會)가 설립된 뒤로 자신들의 노동·생활조건 개선과 권리 보장을 위해 투쟁을 벌여 왔습니다. 홍콩 선원 파업은 하이강룬(海康輪)이라는 선박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선박의 선원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조합 권리를 요구하여 파업에 돌입했죠. 파업은 홍콩의 쿨리와 하역노동자조합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어 홍콩에 소재하는 모든 외양선과 국내선 선박의 중국인 선원들이 호응하여 파업에 참가했습니다. 1월 말에는 홍콩 운수노동자들이 동정파업을 일으킴으로써 파업 노동자 수는 3만 여명으로 늘어났어요.

그 뒤 영국 식민지 당국이 파업노동자를 살해했던 사전(沙田) 참사 이후, 이에 자극 받은 노동자들이 시 전체의 동맹파업을 일으키게 되었고, 파업 노동자 수는 10만여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2개월에 걸친 홍콩 선원 노동자 파업은 영국 식민지 당국의 무력진압과 파괴음모를 이겨내고 임금인상과 노동조합 인정 등의 성과를 거두고 마무리되었습니다(중화전국총공회, 1999: 65~66).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노동자의 단결과 통일을 촉진하고 노동자 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조합 서기부의 발의로 1922년 5월1일부터 5월7일까지에 걸쳐 제1차 전국노동조합대회가 광저우에서 열렸어요. 이 대회에는 12개 도시의 116개 노조, 34만 명의 노동조합원을 대표하는 173명의 대의원이 참가했습니다. 대표들 가운데는 공산당원, 국민당원, 무정부주의자, 상공업단체 대표 등이 있었죠. 대회는 10개 항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8시간 노동일제 도입을 위한 투쟁, 파업노동자에 대한 지원, 전국총공회 조직원칙안(노동조합 조직의 산업별 원칙) 등이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51~452).

제1차 전국노동조합대회가 폐막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공산당은 같은 해 7월 상하이에서 제2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대회는 중국 혁명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반제·반봉건 민주혁명 강령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실현이라는 목표를 내세웠죠. 대회는 또 혁명의 승리를 위해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전투적인 무산계급과 공동으로 투쟁해야 하며, 전국 노동운동의 현황을 파악하여 이 운동을 집중하고 확대하며, 정확하게 지도해야 한다”고 결의했습니다.

이처럼 노동운동이 고양되고 중국 공산당이 노동운동과 긴밀한 결합을 실행하는 가운데, 군벌은 제국주의 열강의 압력을 받아 1922년 초부터 노동운동에 대해 폭력적인 진압을 자행했습니다. 2월7일 강안, 장신뎬(長行店), 정저우(鄭州), 신양(信陽) 등지에서 무방비 상태의 파업노동자들에 대해 진압과 살육을 저질렀어요. 이 과정에서 노동자 52명이 죽고 300여 명이 부상당하는 이른바 2·7 참사가 일어났습니다(중화전국총공회, 1999: 79).

2·7 참사가 발생한 뒤, 전국 각지의 철로와 다른 부문의 노동단체들이 잇따라 군벌의 만행에 항의하고 경한철도(京漢鐵道)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활동을 전개했으나, 결국 군벌의 무력행사로 진압되었죠. 6월에는 노동조합 서기부의 리치한이 투옥되고, 노동조합 서기부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서기부가 조직한 노동조합들이 해산 당했습니다. 이러한 1922년의 파업투쟁(파업 100건, 파업 참가자 약 30만 명)의 교훈은 노동운동 발전을 위한 새로운 방향 모색과, 제국주의·군벌·국내 반동에 대한 전 민족적 투쟁 전개에서 노동운동의 역할과 임무에 관한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923년 슌이셴(孫逸仙)이 이끄는 민족혁명당 -국민당- 과 중국공산당은 양당의 정치적·조직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당면한 민족혁명 과제 해결을 위해 상호 결합해야 한다는 코민테른의 권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국민당은 당시 유일한 민족혁명당으로서 노동자를 포함해 여러 사회계층과 광범하게 결합되어 있었으나, 공산당은 아직 대중적 기반을 갖지 못하였고 당원 수는 고작 230명에 지나지 않았죠. 

민족혁명가와 공산당원의 정치적 블록 형성은 타협적 결정 -공산당원과 사회주의 청년단원을 개인적으로 입당시킴과 동시에 국민당을 개조한다는 타협- 에 따라 이루어졌어요. 국민당의 개조는 공산당원도 참가한 1924년 1월 광저우에서 열린 국민당 제1회 대회의 결정에서 정식으로 명시되었습니다. 슌이셴의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에는 반제국주의와 일반민주주의 원칙이 명확하게 규정되었죠. 대회는 “노동자와 농민에 의거한다”는 방침을 명백히 밝혔으며, 그 바탕 위에서 반제·반군벌 혁명을 추진하는 데서 모든 참가자와 협력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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