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제2절 코민테른의 창립(Ⅰ)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30]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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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절 반전 투쟁의 고양과 각국에서 진행된 혁명―반혁명 정세
  제2절 코민테른의 창립

※ 지난 연재분은 연구소 홈페이지(
www.klsi.or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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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가 탄생했다. 자본주의의 해체, 그 내부적 분해의 시대,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혁명의 시대가. 제국주의 체계는 붕괴되어가고 있다. 식민지에서의 격동, 이전에는 자립하지 못했던 소민족 사이의 격동, 프롤레타리아의 봉기, 몇몇 나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승리, 제국주의적 군대의 해체, 지배계급이 국민들의 운명을 계속 이끌어갈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 ―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의 상태이다. 인류의 문화 전체는 바야흐로 폐허화되었고, 완전한 멸망의 위험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인류를 구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 힘은 프롤레타리아다.”
-코민테른 제1회 대회에서 채택된 ‘지침’.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

러시아에서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를 거두고,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직후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혁명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사회적 관계의 근본적 변혁을 요구하는 방대한 인민대중의 투쟁을 지도하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당과 전투적인 국제연대의 설립이 주요 임무로 제기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국주의 모순이 갈수록 격화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 발전함에 따라 혁명주의적 프롤레타리아 정당과 사회쇼비니즘을 극복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조직 설립의 객관적·주체적 전제가 성숙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10월 혁명의 승리와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국가 탄생은 새로운 형태의 인터내셔널 창설을 가능하게 했으며, 러시아는 많은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과 상호결합 및 상호원조를 확보하는 데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혁명적 인터내셔널을 창립하는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이 확인된 바로 뒤,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미 제기했던 것이었죠.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국제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 내부에는 세 갈래의 조류가 형성되었는데, 사회쇼비니즘 조류와 중앙파적 조류, 그리고 혁명적 국제주의적 조류가 그것이었습니다(김성윤, 1986,Ⅰ: 38~40). 

사회쇼비니즘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국내평화’를 강조하고 ‘조국 옹호’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전쟁 승리를 위해 노동자들을 전쟁 목적에 동원하는 것을 원조했어요. 주요 국가의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사회쇼비니즘을 지지했습니다. 중앙파 조류는 전쟁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사회쇼비니즘 주창자들과의 통일을 지지함으로써 대중들에게 그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기회주의적 실천을 정당화했으며, 혁명의 시기상조론을 제시하여 우파 지도자들을 도덕적?정치적 파산으로부터 구출했습니다. 카우츠키를 이론적 지주로 하는 중앙파의 주장은 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사회쇼비니즘의 실체를 폭로하여 혁명적 노선으로 노동대중을 결집시키는 데서 오히려 중요한 장애로 등장했죠.

혁명적 국제주의 조류는 사회주의 혁명 노선에 따라 ‘자국’의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대한 혁명적 투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쇼비니즘과 중앙파 조류의 주장과 행동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이런 세 갈래의 조류가 노선 투쟁을 전개하는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를 거두게 되자, 혁명적 국제주의 조류가 중심이 되어 제3인터내셔널 창설 움직임을 구체화하게 된 것이죠. 

1918년 1월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적 국제조직 건설을 준비하기 위한 최초의 국제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는 볼셰비키, 좌파 사회혁명당,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 미국의 좌파 사회민주주의자 등과 그 밖에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의 국제주의자 대표가 참가했어요. 회의는 각 당과 조직이 본국 정부에 반대하고 즉시 강화를 목표로 혁명적 투쟁의 길로 나아가는 데 동의할 것과, 러시아 10월 혁명과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한다는 결의를 기초로 국제회의를 소집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여러 나라의 좌파 정당과 그룹에 전달되었죠(김성윤, 1986 Ⅰ: 71~72).

한편, 당시 사회쇼비니즘 주창자와 중앙파는 공산주의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제2인터내셔널 부활을 명분삼아 국제적 연합체 설립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은 제3인터내셔널 창립을 미루기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됐죠. 이런 조건들을 고려하여 1918년 12월24일 러시아 공산당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혁명가들에게 제3인터내셔널(공산주의 인터내셔널 = 코민테른)의 창립을 서둘러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1919년 1월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국제협의회가 열렸어요. 이 협의회는 가능한 한 빨리 제3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소집하자는 레닌의 제안을 채택했습니다. 이 취지문에는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 라트비아,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과 발칸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연합, 그리고 미국 사회주의노동당의 대표가 서명했죠. 호소문은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의 스파르타쿠스단의 강령에 기초하여 앞으로 창립될 인터내셔널의 사상적·정치적 노선을 간결하게 정식화했으며,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목표·전술 및 조직원칙을 개략적으로 밝혔습니다. 협의회는 39개의 당과 그룹, 그리고 조직에 대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립문제를 토의하고 창립대회 활동에 참가하도록 호소했습니다(김성윤,1986 Ⅰ: 72~73).

1919년 2월 말 각국의 대표들이 여러 가지 장애와 봉쇄 그리고 전선을 뚫고 모스크바로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 사회당 대표, 프랑스, 영국, 미국의 좌파 사회주의 그룹 대표는 국내의 제약으로 참가하지 못했죠. 헝가리 공산당 대표와 독일의 한 대의원은 러시아로 오는 도중에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1919년 3월2일 크레믈린에서 국제공산주의자회의가 열렸습니다. 의장단으로는 레닌, 에벨라인(독일), 플라텐(스위스)이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공산당과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 공산당 외에 유럽에 존재했던 공산당은 6개 국가뿐이었고,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좌파 사회주의 그룹이나 공산주의 그룹들이었죠. 

회의에는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에 걸친 21개국 35개 조직(19개 조직이 의결권을 갖고, 16개 조직이 심의권을 가짐)을 대표하여 대의원 총 52명이 참가했어요. 대의원들은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영국, 헝가리, 독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루마니아, 소비에트 러시아, 핀란드,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스위스, 스웨덴, 미국 등 자국의 공산주의 및 좌파 사회주의 당과 그룹을 대표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및 백 러시아, 에스토니아, 아르메니아, 볼가 연안 독일인, 투르키스탄,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쟌의 공산주의 조직들은 각각 독자적인 대표단을 파견했습니다. 한편, 이란, 중국, 조선, 터키 등의 피억압민족 대표들도 참가했는데, 이 같은 종류의 회의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죠(김성윤,1986 Ⅰ: 75).

회의는 3월4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1회 대회(창립)로서 성립했습니다. 의사일정의 주요 사항 가운데 하나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침」(이하 ‘지침’)에 관한 것이었는데, 토의 결과 나온 지침은 10월 혁명의 승리와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 일어난 혁명운동의 고양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 즉 “자본주의 해체의 시대, 그 내부적 붕괴의 시대, 프롤레타리아트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와 함께 지침에서 중심적인 임무로 제기된 것은, 노동자계급이 주도하여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부르주아 국가기관을 철폐함과 동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소비에트 체제로 대체하는 일이었죠. 그리고 지침은 승리를 향한 길은 대중투쟁을 통해 열릴 수 있고, 그 필수적인 전제조건은 혁명의 직접적인 적이나 사회민주주의자뿐만 아니라 중앙파(카우츠키파)와 결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동녁 편집부, 1989, 1: 33~40). 

또한 지침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을 확인하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행동을 국제적인 규모로 결합·조정하여, 일국 내의 계급투쟁 승리와 세계혁명의 임무들을 결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죠. 코민테른은 제국주의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 투쟁과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과의 밀접한 결합을 끊임없이 실현하고,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종국적인 붕괴를 촉진하기 위하여” 피억압 민족의 투쟁을 지지할 것을 자신의 의무로 내걸었습니다(김성윤, 1986 Ⅰ: 76).

지침에서 밝힌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 획득 구상은 대회의 활동과 결의의 중심 문제였어요. 당시 이런 구상은 혁명투쟁의 단계적 목적으로 이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행동 슬로건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노동자계급 앞으로 보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선언은 “제3인터내셔널은 열려 있는 대중행동의 인터내셔널, 혁명적 실현의 인터내셔널, 행동의 인터내셔널이다”라고 했죠. 선언은 또 “노동자평의회의 깃발 아래, 권력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목표로 한 혁명투쟁의 깃발 아래, 제3인터내셔널의 깃발 아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로 끝맺고 있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69).

또한 회의는 레닌의 「부르주아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테제와 보고」를 청취했습니다(동녁 편집부, 1989, 1: 283~292). 이를 통해 레닌은 “‘민주주의 일반’과 ‘독재 일반’을 계급 바깥에서 또는 초계급적으로 마치 전 인민적인 문제처럼 제기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기본 학설 즉 계급투쟁의 학설을 노골적으로 비웃는 것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또 “역사의 교훈은 무릇 피억압계급이 독재의 시기 -즉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착취자가 늘 그러했듯이 어떤 범죄도 꺼리지 않는 필사적이고 흉포한 반항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시기- 를 거치지 않고 지배의 지위에 올랐던 예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거니와, 또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지적했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관련하여 레닌은 착취자를 타도하고 그들의 반항을 탄압하는 수단으로서 정당할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유일한 방위수단으로서 노동대중 전체에게 절대로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모든 독재가 그러하듯이 정치적 지배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계급의 폭력적인 반항을 탄압할 필요에서 생겨난다는 점에서 다른 계급의 독재와 유사하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다른 여러 계급독재 -중세 지주의 독재, 모든 자본주의적 문명국의 부르주아 독재- 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지주나 부르주아의 독재가 주민의 대다수 즉, 근로대중의 반항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것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에 반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착취자 즉, 주민 중에서 극소수인 지주와 자본가의 반항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코민테른 제1회 대회에서 채택된 문서들은 국제 노동자계급에 대해 권력 획득을 위한 투쟁에서 전투적 강령을 제시하고, 공산당의 임무와 기본적인 전술 방향을 규정했습니다. 

한편, 대회는 코민테른의 집행을 위해서 소비에트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발칸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연합, 스위스, 스칸디나비아의 각 공산당 대표로 구성된 집행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간부 5명으로 구성된 뷰로(간부회)에 조직 활동을 위임하였고, 러시아 공산당 대표 지노비에프가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승인되고, 서기에는 발라바노바, 제르긴이 승인되었죠.

레닌은 코민테른의 창립에 대해 “코민테른의 창립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대중뿐만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핀란드, 스위스의 프롤레타리아 대중, 한마디로 국제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획득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립은 확고한 사실인 것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제3인터내셔널의 역사적 위치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죠. “제1인터내셔널은 사회주의를 위한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토대를 마련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많은 나라에서 운동이 광범하게 대중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을 준비했다. 제3인터내셔널은 제2인터내셔널 활동의 성과를 이어받아 그들의 기회주의적, 사회쇼비니즘적, 부르주아적 및 소부르주아적인 오류를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기 시작했다”(김성윤, 1986 Ⅰ: 82).

이런 평가에도 코민테른 창립에서 드러난 한계와 문제점은 결코 부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몇 가지 특징적 사실을 나타냈어요(일리, 2008: 339∼348). 코민테른의 창립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승리와 1918년 가을에 중부 유럽에서 일어난 격변,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나타난 급진화 등이 세계사적 전환점이 임박했다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혁명적 열정이 충만한 가운데 열린 코민테른 창립대회는 우선 참가자의 대표성이 문제될 수 있었죠. 연합국의 소비에트 러시아 봉쇄와 내전, 소비에트 정부의 외교적 고립 등이 1919년 말까지 이어진 상황에서 초청장을 정확히 전달하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각국의 혁명적 정당과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의 체계도 미처 확립되지 못한 조건에서 대표가 선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자 가운데는 상당수가 소비에트 공화국 내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죠.

다음으로,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한 대표들의 대부분이 노동자계급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 못했으며, 스스로는 혁명주의 당원으로 자처했지만 사실상 체계화된 공산당의 당원은 아니었고 소규모 좌파 그룹에 속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코민테른의 혁명적 활기와 유럽 노동운동의 코민테른에 대한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지지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죠. 그럼에도 코민테른이 식민지·종속국에 대해 대폭 문호를 개방한 것은 매우 특징적인 일이었습니다.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 참가한 대표자 52명 가운데 12명이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점에서 러시아 혁명은 반식민지주의라는 신선한 물결을 좌파의 심장부에 안겨주었다고 할 수 있죠. 이 밖에도 코민테른 창립 대회는 젊은 활동가 세대의 도래를 특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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