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Ⅱ)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28]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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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절 반전 투쟁의 고양과 각국에서 진행된 혁명―반혁명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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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에서 전개된 노동자혁명

핀란드는 러시아 10월 혁명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핀란드가 러시아에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죠. 핀란드는 1세기 넘는 동안 러시아 제국(帝國)의 구성 안에 들어 있었지만, 일정한 자치제와 서유럽에 가까운 정치조건을 유지해 왔습니다. 

핀란드는 전형적인 농업 국가였습니다. 인구의 3분의 2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산업노동자는 불과 12%에 지나지 않았죠. 공장 노동자 수는 10만 명을 약간 넘을 정도였고, 농업 노동자는 30만 명이었습니다. 15만 명에 이르는 소작인(영세자치농)과 빈농의 생활상태는 농업노동자와 유사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147). 

1917년에는 핀란드 거의 대부분의 도시 노동자와 농업 노동자 일부가 파업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어요.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노동조합 발전을 바탕으로 1899년에 창설되었는데, 의회(Seym) 의석 200개 가운데 92석을 차지하고 있었죠. 러시아 전제(專制)가 무너진 뒤 우파 사회민주당원 6명이 연립정부에 참가했으며, 사회민주당 소속의 토코이가 정부 수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17년 가을에는 사회민주당이 정부에서 탈퇴했으며, 10월 혁명 전야에는 노동조합과 더불어 정치적·경제적 개혁을 목표로 한 급진적 강령을 표방했습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에서 승리한 러시아 10월 혁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핀란드에서도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었습니다. 11월12일에 열린 노동조합 대회는 식량위기와 실업 극복을 위한 긴급대책, 8시간 노동일의 법제화, 사회보장제 도입, 지주권력으로부터 소작인 해방, 부르주아지의 반혁명 부대 무장해제와 해산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죠. 

의회의 부르주아 다수파가 이런 노동조합의 요구를 거부한 11월14일에는 총파업이 시작되었어요. 적위대를 주축으로 한 노동자계급은 전투를 벌이면서 사회민주당 좌파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과 비슷한 형태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파업을 지도하고 있었던 중앙혁명평의회가 동요를 나타냈죠. 평의회는 권력을 장악할 결심을 확고히 하지 못했으며, 의회가 대중의 압력에 못 이겨 8시간 노동일법과 지방자치기관의 선거 민주화법을 채택하자 파업을 중지시켰습니다.

1917년 12월6일 의회는 핀란드의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의회에서 겨우 과반수를 차지했던 부르주아 정당들은 페르 스빈후부드(Pehr Svinhufvud)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산업노동자들과 소작 농민들은 전면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했으며, 핀란드에 아직 남아 있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군의 도움을 얻어 이를 실현하려 했죠(변광수, 2006:301).

이런 가운데 스빈후부드 정부는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해 핀란드의 독립 승인을 요청했어요.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들이 러시아보다 먼저 승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번에는 스빈후부드 정부가 독립 승인을 러시아 정부에 요청했죠. 12월31일 러시아의 인민위원회의는 핀란드 공화국의 국가적 독립을 승인하는 결정을 채택했습니다. 소비에트 권력은 핀란드 노동자들에게 러시아의 노동대중과 자유의지에 따른 동맹을 제안했던 겁니다.

그러나 스빈후부드 정부는 ‘민족 통일’을 구실 삼아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준비했습니다. 슈츠콜 무장부대가 스스로 정부군임을 선언하고 사령관에는 차르 시대 장군직에 있었던 만네르헤임이 임명되었죠. 한편, 정부는 북부에 식량을 비축하면서 독일과 군사원조에 관한 비밀 교섭을 시작했습니다.

스빈후부드 정부의 이런 내전 준비에 대응하기 위해서 노동자계급에서는 무장투쟁이 불가피하게 되었죠. 이런 요구에 따라 핀란드 사회민주당협의회는 1918년 1월23일 노동자집행위원회를 창설했는데, 이 위원회는 권력 장악 준비를 지령했습니다. 위원회는 1월27일 《핀란드 인민에게 보내는 혁명적 호소》에서 이 나라 모든 권력은 ‘조직된 노동자계급과 그 혁명적 기관’에 속한다고 선언했어요. 그 다음날인 1월28일 새벽 적위대는 헬싱키의 정부 청사를 점거했습니다. 곧이어 노동자들이 모든 공업 중심지와 핀란드 남부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149). 

이런 가운데 정부의 일부 각료들은 헬싱키를 탈출하여 바사 시에서 백색 정부 역할을 시작했는데, 이 정부는 핀란드 북부 전체와 중부 일부에 그 권력을 확대했습니다. 백위대는 1월28일부터 핀란드 북부에 남아있던 러시아군 수비대를 대상으로 공격을 가했습니다. 드디어 내전이 시작된 겁니다. 이로써 핀란드는 ‘적색’과 ‘백색’의 양대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죠.

1월28일에 성립한 혁명정부 = 인민전권(全權)대표회의(CPR)는 사회민주당이 주도했고, 혁명정부의 활동은 노동자평의회가 통제했습니다. 인민전권대표회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길로 나아갈 방침을 선언했으며, 민주개혁에 관한 강령을 우선적으로 내세웠죠. 또 혁명정부는 1월31일 포고를 통해 소작인과 토지 없는 농민은 그들이 지금까지 임차해 경작했던 토지에 대해 보상 없이 그 소유자가 된다고 포고했습니다. 그리고 핀란드 은행이 국유화되고 민간은행은 폐쇄되었어요. 도망친 기업주나 사보타주한 사람의 기업은 노동자나 정부 관리의 통제하에서 기업 활동이 재개되었죠. 

1918년 2월23일 헌법 초안이 발표되었는데, 거기서 핀란드를 민주공화국으로 선언했습니다. 또한 헌법은 인민대의기관의 완전한 주권을 명확히 규정하고, 인민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넓은 가능성을 열어둠과 동시에 권력의 남용 방지와 인권옹호를 위한 체제를 도입했죠. 

그러나 이런 혁명적 강령과 방책들은 백색 핀란드 정부와 벌이는 국내전쟁 정세하에서 그다지 용이하게 실현되기는 어려웠어요. 그것은 부르주아지에 대한 통제와 탄압의 형태를 취했고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적색 핀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었죠. 러시아는 적색 핀란드에 식량 지원 말고도 사료, 석유, 섬유, 피혁, 의료품 등을 제공했어요. 또 러시아는 핀란드 적위대에 장비, 병기, 탄약 등을 공급했으며, 적위대 안에서 러시아인 의용병 수천 명과 에스토니아인 수백 명이 전투에 참가했죠. 그러나 러시아는 혁명 직후의 국내 형편 때문에 핀란드 측에 대해 군사원조를 하는 데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백색 핀란드 정권 측은 적색 핀란드에 대한 내전을 준비하면서 독일 측에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독일 군부는 스빈후부드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어요. 독일이 자기들 나름대로 정치·군사적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독일 군부는 핀란드 혁명정부를 무너뜨린 뒤 거기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볼셰비즘 절멸’을 위한 교두보를 구축하고, 발트 해에서 독일의 입지를 굳혀 협상국을 상대한 전쟁에서 자국의 북부전선을 확보한다는 속셈을 갖고 있었습니다. 

1918년 3월5일 독일군은 올란드 제도(諸島)에 진격하였습니다. 4월3일에는 발트 사단이 항구에 상륙했죠. 그에 잇따라 상륙부대가 증가되었는데, 간섭군 병력은 1만 5,000명에 이르렀습니다. 빌풀라 부근의 전선이 붕괴되고, 4월6일에는 탐페레가 함락되었습니다. 4월11일 간섭군이 헬싱키 공격을 시작했고, 전투 3일 만에 수도가 반혁명군의 손에 장악되었어요. 비보르크로 이동한 인민전권대표회의는 무력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에 남아있던 사회민주당 우파 지도부는 4월16일 노동자들에게 당장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했죠. 그럼에도 핀란드 노동자들은 거의 4월 말까지 격렬한 저항을 계속했어요. 4월29일 적위대의 마지막 보루였던 비보르크가 함락된 뒤에야 투쟁이 끝나게 되었던 거죠.

핀란드 혁명 패배의 결정적 원인은 독일의 군사적 간섭이었지만, 국내에서 행해진 가공할 만한 백색 테러의 자행도 큰 원인으로 작용했어요. 테러의 직접적 희생자만 해도 약 2만 5,000명에 이르렀습니다. 비보르크에서만 적위병 4,000명과 많은 러시아인들과 폴란드인들이 재판 없이 총살당했죠. 약 9만 명이 감옥과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수천 명은 기아와 궁핍으로 사망했습니다. 국내 전쟁이 끝난 뒤 핀란드는 독일의 예속국이 되고 말았죠. 

적위대의 패배와 더불어 러시아로 망명한 혁명 지도자와 참가자들은 1918년 8월29일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공산당 창립대회를 열었습니다. 핀란드 공산당은 창립 이후 25년이 넘는 동안 매우 어려운 상태에서 비합법 투쟁을 전개해야만 했죠.


[ 1918년 독일 베를린 인민대표자 평의회의 포스터 ]

독일의 11월 혁명

독일에서 일어난 11월 혁명은 유별나게도 수도에서가 아니라 독일 북서 지방에서 시작되었어요. 1918년 초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주력이 군사적으로 크게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심정으로 독일의 전쟁 지도부는 킬에 주둔한 주력 함대로 하여금 영국의 최고 함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했죠. 이미 독일의 패배가 어느 정도 예상되고 있던 때에 독일 해군을 제압하려는 영국의 기도를 막는다는 것은 아마도 가망 없는 계획처럼 보였을 겁니다(Foster, 1956: 247). 

1918년 11월3일 킬 항(港)에 정박해 있던 군함 소속 수병들이 영국 함대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출항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수병들 사이에 전쟁에 대한 혐오감과 병영 조건의 악화 그리고 장교들의 특권적 지위에 대한 증오심 등이 급속히 강화되었으며, 수병들의 이런 불만과 분노는 군대 상층부의 무모한 출동 명령과 억압적인 대응 조치를 계기로 한꺼번에 폭발했죠. 봉기한 수병은 적기를 내걸었으며, 노동자들은 곧바로 그들을 지지하고 나섰어요. 수병 평의회와 노동자 평의회가 자연스럽게 결합한 것이죠. 

혁명 운동은 킬에서 연안을 따라 빠르게 확산되면서 드디어는 전국으로 파급되었습니다. 거의 동시에 남부 독일에서도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어요. 1918년 11월8일 뮌헨에서는 혁명이 승리하여 위데르스바하 왕조가 붕괴되었고, 노동자·병사·농민 임시평의회가 ‘바이에른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혁명이 서부 독일과 중부 독일의 공업 중심지를 관통함에 따라 곳곳에서 노동자·병사 위원회가 창설되었으며, 11월9일에는 혁명의 물결이 마침내 베를린에 당도했죠.

베를린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약 1개월 전인 10월3일, 이미 헤르트링 수상은 사직하고 루덴도르프 군사독재 체제는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새롭게 성립된 바덴 공(公) 막스 내각은 최초의 의회 다수파에 의한 내각이었죠. 이 내각에는 사회민주당 소속 에베르트와 샤이데만이 입각했습니다. 한편, 당초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한다는 구상을 세우고 있지는 않았죠. 

반면 혁명적 인민위원회 지도부, 스파르타쿠스단, 독립사회민주당 좌파는 회합을 갖고 제정(帝政) 타도와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을 위한 무장봉기를 최종적으로 11월11일 결행한다는 방침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은 계획했던 것보다 이틀 일찍 베를린을 휩쓸게 되었어요(광민사 편집부, 1981: 26~27).

11월9일 아침 베를린 노동자들은 스파르타쿠스단과 혁명적 평의회의 궐기 호소에 따라 ‘평화, 자유, 빵’을 요구하며 가두로 몰려나왔습니다. 병사들도 여기에 합류했고, 몇 시간 뒤 수도는 봉기자들의 수중에 장악되었어요. 수상인 막스는 독단으로 황제의 퇴위를 선언하는 한편, 정권을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이양했죠. 새로운 ‘제국 수상’ 에베르트는 민중들에게 가두에서 물러갈 것을 호소했으나, 그의 동료인 샤이데만은 혁명파의 손에서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공화국 선포 직후 두 가지 결정적인 타협이 성사되었어요. 첫 번째가 ‘그뢰너-베르트 협약’이었습니다. 국방부 장관 그뢰너(Wilhelm Gr?ner) 장군이 공화국을 지원하는 대가로, 에베르트는 공화국을 온건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동시에 급진적인 평의회 운동을 저지한다는 것이었죠. 그뢰너는 이 협약을 계기로 볼셰비키 혁명과 같은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고 큰 소리쳤습니다. 

두 번째 타협은 ‘슈틴네스-레기엔 협약’이었어요. 자유노동총연맹의 의장 레기엔(Carl Legien)은 제철 기업가인 슈틴네스(Hugo Stinnes)와 협정을 체결했는데, 하루 8시간 노동일 제도를 도입하고 ‘황색 노조’(어용노조)에 대한 기업가들의 지원을 중단하는 등 노동조합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내용이었죠.

한편, 공화국이 선포된 다음날 11월10일에 구성된 정부, 즉 인민대표자평의회(Rat der Volksbeauftragten) 역시 타협의 산물이었습니다. 이 임시 중앙권력은 사회민주당 대표 3인(에베르트, 샤이데만, 란즈베르크)과 독립사회민주당 대표 3인(하제, 디트만, 바르트)으로 구성되었어요. 임시정부는 베를린 노동자·병사평의회 대표자들에 의해 승인받음으로써 어느 정도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메리 풀브록, 2000: 234).

독일 혁명은 독일 황제를 포함해 군주들을 몰아내고 지배층으로 하여금 휴전에 서명하게 함과 동시에, 유혈 전쟁을 종식시키고 공화국을 선포하게 했습니다. 혁명의 원동력은 도시 노동자와 혁명적 수병, 그리고 병사들이었죠. 말하자면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와 수병 또는 병사의 외투를 걸친 도시 및 농촌의 소부르주아지 일부였던 거죠. 이 혁명은 인민혁명이었으며, 혁명의 과정에서 인민대중은 그들 자신의 요구를 제기했고, 파괴된 구체제 대신 새로운 사회제도를 자주적으로 창출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새로운 혁명 권력의 맹아 구실을 했죠. 그러나 권력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으로 이양되지는 않았습니다. 

11월의 독일 혁명은 이미 두 가지 특징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전국에 걸친 자연발생적 인민봉기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운동의 중심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192~193).

인민대중의 혁명적 활동에도 11월 혁명의 기본 임무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제국주의적 기초는 그대로 잔존하고 있으며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존속하고 있고, 부르주아 민주혁명도 미완성으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로 이행을 위한 혁명은 실행되지 않았던 거죠(바른케〈일본 번역판〉1970: 62). 

사실상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독일의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지도력을 갖고 있었다면, 능히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수행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 겁니다. 노동자들의 혁명적 열정, 그들의 군사적 행동, 그들이 시도한 소비에트 형태 등은 이런 가능성을 충분히 입증해주는 것이었죠.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느 정도의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저항을 누그러뜨리려 했습니다(Foster, 1956: 247~248).

정치적으로나 산업정책 면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배반당한 독일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들의 공개적인 투쟁은 총파업을 계기로 촉발했습니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들은 스파르타쿠스단의 지도로 무기를 확보했으며, 독립사회당 좌파 세력도 노동자 투쟁을 지지했습니다. 며칠 사이에 봉기자들은 베를린 철도역, 전화국, 가스, 수도, 전기공장, 그리고 다른 주요한 건물들을 점거했죠. 투쟁이 다른 도시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임시정부는 노스케 장군의 지휘하에 군 병력을 동원하여 혁명운동을 격퇴시키는 데 성공했어요. 무장투쟁은 2주일 동안 계속되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죠.

이런 무장투쟁의 실패로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간부들은 혁명이 이미 11월 말에 종료된 것으로 간주한 반면, 스파르타쿠스단이나 독립사회민주당 좌파 등의 처지에서는 혁명은 바야흐로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자의 경우에는 질서회복이 최대의 과제였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혁명의 계속적인 전개가 필수적인 과제였죠. 

이런 가운데 1918년 12월30일부터 1919년 1월1일까지에 걸쳐 베를린에서 ‘독일 공산당’의 창립대회가 열렸어요. 여기에서는 스파르타쿠스단을 중심으로 브레멘, 함부르크, 기타 좌파 세력이 참가했죠. 대회는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강령을 채택했습니다. 

독일 혁명은 1919년 1월 초에 극적인 정점으로 발전했습니다. 1월4일 독립사회민주당 당원인 베를린 경찰서장 아이호른(Eichorn)의 해임이 투쟁을 촉발시킨 발단 구실을 했어요. 다음날인 1월5일 노동자 약 15만 명이 일손을 멈추고 수도의 가두로 진출했습니다. 혁명적 평의회 집회에서 혁명위원회가 꾸려졌으며, 이 혁명위원회는 총파업을 선언하고 “에베르트·샤이데만 정부 타도”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죠. 그러나 1월6일 노동자 50만 명이 거리로 몰려나오자 혁명위원회는 동요했고, 대중은 지도부 없이 방치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월11일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봉기를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1월15일에는 봉기가 진압되고 노동자 수천 명이 검거되었는데, 이 때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도 함께 체포당했죠. 경찰에 구금되어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그들은 잔인하게 살해당했어요. 살인자들은 밝혀졌지만 처벌되지 않았습니다(Foster, 1956: 250). 

1919년 1월에 전개된 베를린 투쟁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월10일 브레멘의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브레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언했어요. 부르주아 정당과 우파 사회민주당 대표는 평의회에서 배제되었으며, 평의회는 몇 가지 급진적인 개혁 -노동자 군사 대대의 편성, 실업자에 대한 보조금 증액, 새로운 임금율표의 작성 등- 을 실시했습니다. 반혁명에 대한 비상조치는 부르주아지와 장교의 무장 해제, 부르주아 신문에 대한 검열 등을 포함했죠. 쿡스하벤에서는 브레멘에서 일어난 사태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으며, 함부르크와 기타 도시들에서도 평의회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노스케 무장 징벌대가 브레멘 소비에트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말았죠.

1월 전투의 결과로서 독일 혁명의 근본문제 -평의회 권력인가, 부르주아 의회 권력인가- 는 의회 권력 쪽으로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1919년 1월19일 실시된 국민의회 선거에서 부르주아와 융커 정당이 총투표자의 54%를 획득했고, 사회민주당은 38%, 독립사회민주당은 8%를 획득했으며, 공산당은 선거 보이콧 전술을 택했죠. 2월6일 헌법제정국민의회가 바이마르에서 개원되었으며, 2월11일에 에베르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샤이데만을 수상으로 하고 사회민주당, 가톨릭 중앙당, 민주당으로 구성된 ‘바이마르 연립내각’이 구성되었습니다. 그 결과로서 7월31일 바이마르 헌법이 성립됨으로써, 11월 혁명은 의회제 민주주의 노선의 확립이라는 방향으로 일단 마무리되었죠(광민사 편집부,1981: 33).

바이마르 체제는 혁명적 위기 속에서 성립된 위기관리 체제였고,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타협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노동대중의 불만을 증대시키는 근본적인 요인들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죠. 군수생산은 크게 축소되었고, 군대에서 많은 인력이 노동시장으로 복귀함에 따라 실업이 크게 증대되었어요. 1919년 2월 당시 실업자 수는 100만 명을 넘어섰고, 베를린에서만도 30만 명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죠. 이런 상황에서 자연발생적인 파업이 일어났고, 그것은 빠르게 대중적 파업으로 발전했어요(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03).

2월 중순에는 독일 중공업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라인-베스트팔리아 지방에서 파업투쟁이 일어났습니다. 루르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반수 이상에 이르는 광산에서 파업을 결행했어요. 투쟁의 정점을 이룬 2월22일에는 노동자 18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죠. 노동자들은 기업 사회화(국유화)의 즉시 실시와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바꿀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평의회와 지도부 승인을 거부하고 군사 개입 방침을 취했죠. 노동자 수천 명이 정부군 부대를 상대로 무장 저항을 단행했으나 투쟁은 분쇄되었습니다. 

2월 말에는 중부 독일에서 파업 투쟁이 벌어졌고, 3월 초에는 파업의 물결이 베를린에까지 파급되었습니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이런 파업 투쟁에 대해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1,200명 이상이 사살되었죠. 파업 투쟁에서 제기된 주요 요구 사항은 노동자 평의회제도의 승인, 6시간 노동제, 의용군의 무장 해제와 노동자 무장 허용 등이었습니다.

1919년 봄에 전개된 노동자의 혁명적 투쟁에서 가장 정력적으로 제기된 것은 ‘생산 또는 경영 평의회’(공장위원회)에 대한 기업가와 정부의 승인이었어요. 생산통제에 관한 권리와 경영관리에 대한 공동참가 요구는 당시 노동자 투쟁의 공통적인 기본 축이 ‘사회화’, ‘평의회 체제’(R?tesystem), ‘평의회 권력’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죠.

노동자계급의 평의회 체제와 사회화에 대한 갈망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었기 때문에 정부나 노동조합 지도부는 평의회에 대한 종래의 태도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평의회에 대한 적대적 태도에서 평의회 포섭 태도로 전환하게 된 것이죠. 결국 평의회의 조기 해산과 배제라는, 샤이데만을 비롯한 사회민주당 지도부와 그것에 동조한 노동조합 집행부의 종래 방침은, 아무런 수정 없이 온전하게 그대로 관철되기는 어려웠던 겁니다. 그리하여 1918년 제정된 바이마르 헌법 제165조에 노동자의 단결권에 관한 규정이 설치되었고, 1920년 경영협의회법(Betriebsr?tegesetz)이 제정되었습니다. 이것은 협의회(R?te)라는 명칭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노동자 투쟁에서 제기된 평의회체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죠. 법에서 규정한 평의회는 노동자의 생산 통제권과 ‘평의회 권력’을 담당하는 조직이 아니라, 종업원의 이익대표기관으로서 노동자계급을 자본주의 체제 안으로 ‘포섭’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던 겁니다.

결국 독일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머문 채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화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독일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주도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단련시키고 인민대중에게 투쟁의 중요한 성과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민주 = 공화제적 바이마르 헌법에 규정된 사회적·민주적 권리들은 프랑스 헌법이나 미국 헌법보다는 훨씬 더 큰 활동의 가능성을 제공해주었으며, 일반 시민들에게도 보통선거권과 일정한 민주적 자유를 영위할 수 있도록 보장했죠. 이런 사회적·민주적 자유와 권리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 결과로서 획득된 중대한 성과였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08). 

오스트리아 혁명  

오스트리아에서는 1918년 10월30일 빈의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자연발생적인 대규모 시위와 더불어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민대중은 임시 국민의회가 열리고 있던 의사당을 향해 행진했어요. 시위운동은 공화제 선언을 요구했으며, 평의회 권력의 수립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의회는 공화제를 선언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어요. 의회는 단지 일시적으로 입법기능을 수행했을 뿐이었고, 집행 권력은 사회민주당의 카를 렌너를 수반으로 한 3당 대표 구성의 국가회의가 장악하고 있었죠. 

그 다음날인 11월1일에는 혁명적 활동이 전국에 걸쳐 발생했으며, 각지에서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설치되었고, 병영과 광장에서 열기찬 집회가 열렸습니다. 11월12일에는 빈에 있는 거의 모든 기업이 가동을 중단했으며, 수만 명에 이르는 군중이 의사당 앞으로 집결했습니다. 노동자와 병사들의 반란이라는 현실적인 위협 때문에 렌너를 수반으로 하는 국가회의는 더 이상 군주제(君主制)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죠. 임시 국민회의는 민주공화국을 선언하고, 제헌의회와 지방기관의 선거를 보통선거권에 기초하여 실시할 것을 공포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평의회 권력인가 제헌의회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어요. 이 문제의 해결은 아무래도 사회민주당의 결정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죠. 사회민주당은 평의회를 곧바로 실제적인 권력 기관으로 전화시키는 데 대해 ‘공산주의적 모험’이라는 근거를 들어 반대 주장을 폈습니다.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평의회 권력에 대한 거부 방침을 설명하면서 여러 가지 논거를 제시했으나, 그 진정한 동기는 인민대중의 자주적 행동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죠.

1918년 11월 당시 오스트리아의 노동자계급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데서 매우 유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부르주아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붕괴에 따라 매우 위축되어 있었고, 군대는 완전히 붕괴되다시피 되어 독일에서처럼 반혁명 부대를 편성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부르주아적 의회주의의 바탕 위에서 부르주아지와의 협력을 추구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11). 

연립정부를 주도했던 사회민주당(카를 렌너 수상, 옷토 바우어 외상)은 낡은 국가기구와 자본의 경제적 지위에 대한 불가침을 유지하는 데 협력했어요. 그 대신 기업가는 일정 정도의 양보를 해야만 했습니다. 8시간 노동일제가 도입되었고, 생산(경영)평의회가 일정한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실업자와 전쟁 부상자에 대한 급부금제도, 질병보험, 유급휴가제도 등이 도입되었습니다. 또 전쟁 시기에 제정된 법률들은 폐지되었죠. 

1919년 2월16일 실시된 국민의회 총선거에서는 부르주아 정당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어요. 부르주아 정당은 총투표의 60% 정도를 획득했으며, 사회민주당은 40%를 약간 상회하는 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당은 대통령의 지위를 사회민주당 당원인 카를 자이츠에게 위임했으며, 연립정부 수반에는 렌너가 다시 선임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정세 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은 심각한 식량난과 실업 그리고 생활 빈곤으로 인해 자연발생적인 항의 소동을 지속적으로 일으켰어요. 노동자 평의회를 혁명적 기관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무게를 더해 가고 있었죠.

3월1일, 린츠 노동자 평의회의 제안으로 빈에서 전(全)오스트리아 노동자평의회 대회가 열렸습니다. 지금까지 평의회에서 독점적 지위를 지녔던 사회민주당은 재선거 실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죠.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는 평의회의 목적을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철폐를 포함한 혁명성과의 정착”으로 설정하여 한층 발전된 내용을 담았고, 평의회의 임무를 “정치에 대한 직접참가”로 규정했으며 노동대중의 해방 수단을 계급투쟁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무렵 헝가리에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언되었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3월22일 빈에서는 헝가리와의 연대를 명분으로 4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시위를 벌였으며, 4월 초에는 빈의 노동자와 인민군 병사들로 구성된 파견단 약 1,200명이 헝가리에 들어가 간섭군과 치열하게 싸웠죠.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중립주의적 강령에 의해 당의 통일을 유지하면서 최소한의 유연성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혁명적 행동방침을 여전히 표명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길은 점진적이면서도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던 거죠. 또 “수탈자에 대한 수탈”은 국유화 또는 “자본가와 지주 소유에 대한 난폭한 몰수 방식”으로서 실현될 수는 없는 것이며, 오로지 “질서정연한 조세제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5월에는 경영평의회에 관한 법률이 채택되었는데, 실제로 이것은 평의회를 ‘기능적 민주주의’의 궤도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행해진 것이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13).

이런 조치에 이어 6월에는 혁명 세력에 대한 정부의 강경 방침이 그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6월14일 무장경찰대가 오스트리아 공산당 건물을 습격하여 지도적 활동가 130명을 체포했던 거죠. 이런 탄압의 목적은 다음날로 예정된 대중적 시위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부의 탄압 조치에도 다음날 시위가 감행되었고, 시위에서는 “평의회 독재 수립”, “기아와 착취 반대”, “사회혁명” 등의 슬로건이 표명되었습니다. 이날 경찰대가 시위대를 습격했어요. 이에 따라 12명이 죽고 80명이 중상을 입게 되었는데, 중상자 가운데 8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말았죠. 

혁명의 파고가 퇴조를 보이게 되면서 부르주아 정당은 연립정부를 파기하고 사회민주당 지도부를 권력에서 배제시킬 방침을 정했습니다. 1920년 10월17일 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종전 선거에서 획득했던 것보다 20만 표를 덜 얻었고 의석 3개를 잃었으며, 사회민주당은 내각에서 배제 당했죠.

혁명의 공포에서 벗어난 부르주아지는 ‘사회화’의 모든 계획과 ‘기능적 민주주의’ 관련 프로젝트 일체를 거부했어요. 그리하여 부르주아 지배의 완전한 복권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노동자 평의회는 파괴되었고 사회민주당이 구상했던 ‘인민 공화국’의 전설은 결코 실현되지 못했죠. 그러나 혁명은 승리에서 뿐만 아니라 패배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남기게 마련입니다. 혁명의 전개에서 혁명을 바르게 이끌 진정한 혁명적 지도부가 불가결한 요건이라는 사실이 그것이죠.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헝가리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오스트리아 혁명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1918년 10월31일 밤 좌파 사회민주당원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이끈 무장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부다페스트의 주요 전략 거점과 정부 관청을 점거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했습니다. 도시는 봉기한 인민대중의 손에 장악되었죠. 이런 가운데 국왕은 연립정부 조각을 국가회의(의회) 지도자 미하이 카로이 백작에게 위임했습니다. 

연립정부에 참가한 부르주아 정치가와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는 미처 군주제 폐지를 결정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1918년 11월16일 국가회의가 헝가리를 ‘인민공화국’으로 선언하게 된 것은 혁명적 노동자와 병사들의 강력한 공격이 행해진 데 따른 결과였죠. 수 세기에 걸친 합스부르크가의 억압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헝가리는 국가적 독립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인민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민족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농민들에게 토지를, 노동자들에게 노동·생활조건 개선 등을 제공하고 보장하는 일을 서두르지 않았죠. 

이런 상황에서 혁명적인 새로운 노동자 조직이 결성되었어요. 11월2일 헝가리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중앙위원회와 노동조합 지방조직 지도자들로 구성된 ‘부다페스트 노동자평의회’가 창설된 거죠. 그 다음날에는 군 단위 대표자회의에서 부다페스트 병사평의회가 재편·확대되었습니다. 또 몇몇 주(州)에서는 농민평의회가 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평의회는 지주 또는 자본가의 억압과 사회적 불공정의 일소, 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확립, 농민에게 토지 제공 등을 요구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15~216).

한편, 1918년 11월24일 헝가리 공산당이 창건되었습니다. 이 무렵 30만 명에 이르는 이전의 전쟁 포로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귀국했는데, 이들 가운데는 벨러 쿤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공산당 헝가리인 그룹이 있었어요. 이들은 헝가리 공산당의 중핵을 구성했는데, 여기에 사회민주당 좌파 일부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했습니다. 당 중앙위원회 의장에는 벨러 쿤이 선출되었고, 12월7일에는 기관지 『붉은 신문』(V?r?s Ujs?g)이 발행되었습니다. 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무장할 것과 평의회를 건설하고 강화할 것, 평의회에서 협조주의자를 배제할 것, 적위대를 편성할 것 등을 호소했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사회민주당으로 구성된 연립정부는 정치·경제적 곤경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코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 한편으로, 지주 소유지를 점거한 영세토지소유 농민들에 대해 무장 징벌대가 공격을 가했는가 하면, 공산당의 영향력 증대를 막기 위해 정부는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했죠. 1919년 2월21일 경찰은 당 중앙위원을 비롯한 활동가 57명을 체포했습니다.

정부의 이런 조치들에도 3월 초에는 농업 노동자와 영세토지소유 농민이 코포슈바르 시 부근에서 거대 지주들의 토지를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3월18일에는 수도의 최대 공업지구에서 파업이 발발했으며, 같은 날 파리 코뮌을 기념하는 대중적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행해졌습니다. 3월20일에는 인쇄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대부분의 신문이 발행되지 못했죠.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는 대중행동에 참가했습니다. 

3월15일 이전에 이미 낡은 국가기관들이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주에서는 노동자들이 주를 관할했던 지방행정관을 추방하고 노동자·농민·병사평의회 권력을 수립했습니다. 평의회가 미처 설치되지 않은 주에서는 임시혁명권력 기관으로서 ‘디렉토류움’(집정부, 執政府)이 창설되었죠. 수도에서는 부다페스트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가 사실상 정세의 주도권을 행사했고요. 이런 가운데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에 대한 요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바야흐로 혁명적 위기가 성숙되었습니다.

1919년 3월11일 공산당 지도부는 사회민주당과의 통합을 위한 기초적 조건 10개항을 정식화했습니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좌파 사이에서는 양당 통합과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에 대한 교섭이 이전에도 진행되었죠. 공산당이 제기한 조건은 이러했습니다. 부르주아 정부에서의 헝가리 사회민주당 대표 탈퇴, 지배계급과의 협력 중지와 노동자·병사·빈농 평의회 권력의 수립 방침 채택, 타민족에 대한 지배 철폐, 부르주아 의회제 공화국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의 대체(이 공화국 체제에서는 부르주아지의 군사력을 폐지하고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군대를 창설하고, 낡은 국가관리기관 대신 새로운 소비에트적 기관을 설치한다는 내용을 담음)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1919년 3월21일 이런 방침에 기초하여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즉시 통합하여 사회당을 창설한다는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날 무장한 노동자 부대가 수도의 주요 거점을 재빨리 점거했으며, 경찰과 군대의 잔존 부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단행함과 동시에 수도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확립했죠. 

같은 날,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어요. 정부 -혁명정부 평의회 또는 인민위원회의- 의 수반은 사회민주당의 산돌 가르바이가 추대되었고, 벨러 쿤은 외무 인민위원으로 취임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피 흘리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군대를 포함해 헝가리 민중의 광범한 층이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했고, 국가통치의 무능력을 스스로 인정한 부르주아와 지주 진영은 고립되어 무력 저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19년 4월에는 헝가리 역사상 처음으로 권력기관인 평의회 선거가 보통·비밀선거로 치러졌고 6월에는 평의회 대회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헝가리 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공화국 헌법이 채택되었죠. 헌법은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비에트 공화국 내에서 모든 자유와 권리를 향유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제도와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폐지하고, 사회주의적 생산양식과 사회주의적 사회제도로 대체한다”고 규정했습니다. 

헝가리 소비에트공화국은 몇 가지 급진적인 사회·경제적인 개혁을 단행했어요. 노동자 20명 이상의 공업기업, 은행, 저축금고, 상업기업과 운수기업, 대도시의 임대주택이 국유화되었고, 그것은 공장노동자 평의회의 관리로 이관되었습니다. 57헥타르를 초과하는 토지소유가 무상으로 국유화되었고, 지주의 토지 소유가 일소되었죠. 또한 소비에트 정부는 8시간 노동일제도의 도입을 비롯하여 사회보험제도 시행과 교육제도의 개선 등을 준비했습니다.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의적이고 변혁적 활동이 전개되면서 국내외적인 반동과 압력은 강화되었습니다. 협상국 최고회의는 부다페스트에 비밀사절단을 파견했는데, 그 임무는 정부에서 공산당원을 ‘평화적으로’ 축출하는 것이었죠. 거기다가 드디어 헝가리가 경제봉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공공연하게 군사적인 간섭을 했으며, 4월16일 루마니아 왕국 군대는 트란실바니아에서 공세를 취했고, 4월27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북동쪽에서 침입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외국의 군사 개입에 대비하기 위해 5월 초 적군(赤軍)이 개편되었어요. 노동자 10만 명이 입대했으며 헝가리 노동자 대대 외에도 오스트리아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루마니아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등으로 구성되는 국제부대가 편성되었습니다. 

6월 초에 헝가리 적군은 간섭군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고,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카르파티아로 진출했습니다. 이것은 슬로바키아에서 전개된 혁명운동의 고양을 위해 매우 유리한 조건을 조성했죠. 6월16일에는 슬로바키아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언되었습니다. 

6월 중순 들어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위협이 강화되었어요. 프랑스 수상 클레망소가 서명한 각서는 헝가리 적군이 공세를 중지하고 경계선 내에서 철퇴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혁명정부평의회는 이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죠. 6월30일 헝가리 소비에트 정부는 협상국 측의 어떠한 보장도 받지 않은 채 북부 전선군의 철수를 개시했습니다. 이것이 슬로바키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붕괴를 가져오고 말았죠.

이 무렵 헝가리 국내에서는 반혁명 책동이 활발해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부농(富農)의 반란, 수도와 지방에서 진행된 군주주의파와 사관들의 활동을 통해 구체화되었습니다. 이런 정황을 두고 벨러 쿤은 공화국이 “권력의 위기, 경제의 위기, 정신의 위기에 빠졌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파리의 협상국 최고사령부는 헝가리에 대한 군사개입 계획을 작성했어요. 한편,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빈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의 항복에 대한 비밀 교섭을 벌이고 있었죠.

8월1일 루마니아 군대가 부다페스트에 돌입한 가운데 헝가리 소비에트정부는 사퇴를 강요당했습니다. 우파 노동조합 지도자 G. 페이들을 수반으로 하는 ‘노동조합’ 정부가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관의 일소와 자본가적 소유의 부활에 착수한 것이죠. 그러나 이 정부는 며칠 동안 존재했을 뿐 반혁명적 군주주의자들에 의해 구축되고 말았습니다. 곧 이어 군사독재 체제가 수립되고 백색 테러가 헝가리 국내를 휩쓸었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어요. 7,500명이 살해되었고 7만여 명이 감옥이나 수용소에 갇혔으며, 10만 여명이 모국을 등져야만 했습니다. 헝가리 소비에트공화국은 협상국가들과 국내 반혁명 음모가들의 연합에 의한 타격으로 결국 붕괴되고 말았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24).

헝가리 소비에트 정권이 물러난 뒤 헝가리는 극도의 혼란을 겪게 되었어요. 실제적인 힘을 보유한 정권이 수립되지도 못했고, 또 루마니아 군이 일정기간에 부다페스트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날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 군대의 장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극우 군사집단이 발흥하여 혁명세력에 대한 피의 보복을 저질렀죠(이상협, 1996: 241). 

헝가리 소비에트공화국은 끝내는 패배했지만, 133일 동안에 걸쳐 민중 권력을 수립하고 중요한 사회·경제·문화적 개혁을 실시했다는 점에서 국제노동운동의 혁명적 경험을 쌓게 만들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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