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자들의 투쟁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4]

글쓴이 :

"정치적 성숙은, 노동운동이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 제도를 변혁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 대중의 다수가 근본적 개혁이 바로 자신들의 직접적 이익이라는 점을 현실 속에서 깨닫지 않으면, 노동운동은 본래 의미의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A. 스터름탈, 1983: 57)."

1. 영국의 차티즘 운동

차티즘 운동(Chartism)은 1838년 5월에 공포된 인민헌장(the People's Charter)의 실현을 목표로 이십 년 가까이 전개된 노동자계급의 광범한 대중적·독립적·조직적인 운동입니다. 인민헌장이 내세운 여섯 개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권, ② 비밀 투표, ③ 평등한 선거구, ④ 매년 선거(의원 임기 1년), ⑤ 후보자에 대한 재산 제한 철폐, ⑥ 의원에 대한 세비 지급 등이 그것이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반란이자, 국제 노동운동의 빛나는 서막이라 표현되는 차티즘 운동의 배경과 동인을 살펴봅시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영국은 18세기 말부터 산업 혁명이 진행되어 세계 최초의 공장 프롤레타리아가 발생했고, 1830년대에는 기계가 대규모로 도입됨으로써 공장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진전과 더불어 자본가들은 자본 축적과 부의 집중을 이룰 수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실업과 저임금, 그리고 무권리 상태에서 격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죠. 

정치적으로도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지 못했어요. 1832년에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한 중산계급의 투쟁으로 선거법이 개정되는데, 이에 따라 부르주아들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토지 귀족층을 압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 인구 1천6백만 명 가운데 유권자는 16만여 명에 불과했어요. 

전국노동조합대연합

1832년 정치개혁에서 노동자들의 선거권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자본가계급 또는 중산계급이 선거제도 개혁 운동을 벌이면서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다가 자신들의 요구만 관철하고 노동자들의 선거권과 출판의 자유 확대를 반대한 데 따른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부르주아들의 행위에 반발하면서 노동자들은 계급 의식을 일깨우게 됩니다. 한편, 1834년에는 의회가 새 구빈법(救貧法)을 가결했는데, 이에 따라 종래의 빈궁자 구제제도는 폐지되고, 노역장(勞役場)이 빈궁자 '원조'의 주요한 형태로 됩니다. 새 구빈법은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할 의도로 제정되었고, 그 결과 노동자들은 가족과 떨어져 감옥과 다름없는 규율, 굶주림, 단조롭고 무의미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832년 이후 노동조합 운동은 활기를 띠었고, 노동자는 부르주아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834년에는 전국노동조합대연합(the Grand National Consolidated Trades Union)이 결성되었는데, 이 조직은 건설노동자, 방적공, 도공(陶工), 재봉사, 모직공, 농업노동자의 큰 노조들을 포괄했다. 로버트 오웬이 이 조직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기본 이념은 "노동조합이 사회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산업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대연합은 분산성을 띤 직인조합(craft union)과 달리 전국 단위의 중앙집권적인 계급 조직이었습니다. 대연합은 1834년 조합원 50만 여명을 확보했고, 파업을 조직했으며, 오웬의 '교환시장' 사상을 실현함과 동시에 노동조합을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려 했죠. 그러나 대연합은 지도부의 분열과 지배 세력의 공격, 파업 준비 부족으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개혁 법안에 대한 환멸, 새 구빈법에 대한 분노, 노동조합 사업 부진에 대한 좌절, 오웬의 계획 실현 실패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한층 절박하게 정치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국가 권력에 다가가야 자신들의 곤경을 덜 수 있다는 확신이 커진 것이죠.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이해 관계는 적대적이며,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는 자주적인 행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런던노동자협회

이런 시대 상황에서, 차티즘 운동은 1836년 6월 런던노동자협회(the London Working Men's Association)의 창설로 본격 시작됩니다. 런던노동자협회는 인민헌장을 작성하여 노동자 운동에 '차티즘'이라는 명칭을 주었고, 초기 운동을 주도하면서 차티즘 운동의 산파 역할을 수행합니다. 런던노동자협회를 보면 이전의 급진주의 단체와 구분되는 특징이 발견됩니다. 협회가 노동자 출신만을 회원으로 인정한 점이 대표적입니다. 

런던노동자협회는 노동자 자신의 힘과 자각, 그리고 독자 활동을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부르주아적 민주파나 급진적 부르주아와 협조했습니다. 말하자면, 런던노동자협회는 노동자의 독자 활동을 강조했음에도 중산계급의 협조를 소망했고, 또 그들과 맺는 제휴의 가치를 인정했던 것이죠. 런던노동자협회가 1836년 10월18일 채택한 결의안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지금과 같은 갈등상태에서는 이해 관계가 우리와 적대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평등한 권리 및 법률과 정의를 열렬히 주장하는 자비심 있고 열성적인 친우들에게, 의회가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에 함께 할 것을 호소한다", "그런 결함이 모두 해롭고 분파적인 경쟁심을 망각으로 사라지게 하고, 이 나라의 모든 자원을 전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사용하도록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기본 방침에 따라 런던노동자협회는 1834년 해체했다가 1837년 다시 발족한 급진 부르주아 연합 '버밍엄 정치동맹'(the Birmingham Political union)과 연대하여 활동합니다. 1838년 5월 런던노동자연합 지도자들은 인민헌장을 공식화하는 한편, 버밍엄 정치동맹이 '국민청원'을 발표하자 노동자들은 한 손엔 인민헌장을, 다른 손엔 국민청원을 들고 의회 개혁 운동을 활기차게 벌입니다. 런던노동자협회와 버밍엄 정치동맹은 전국 각지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노동자 조직 작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노동자 집회가 열리고, 이들 집회에서 노동자들은 인민헌장을 채택하고, 청원에 서명함으로써 명실공히 차티즘 운동이 전개된 것입니다. 1839년 행해진 제1차 청원은 128만 명의 서명을 받았는데, 이 서명은 214개 도시에서 열린 5백 회가 넘는 집회에서 모아진 것이었어요. 가짜 서명과 선거권 요구에서 제외된 여성들의 서명을 고려한다 해도, 그것은 실제 유권자 보다 훨씬 많은 수의 국민을 대표하는 것이었어요. 청원은 다음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영국은 풍요한 토지와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다. 그러나 국가의 번영을 약속하는 모든 이런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자신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 우리는 그처럼 고통스럽고 오래 계속되는 참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신중히 고찰해 왔다. 결국 지배자들의 우매함이 신의 섭리를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다. 이 나라의 모든 에너지가 이기적이고 무지한 자들의 권력을 쌓는 데 소비되었고, 그 자원은 그들의 힘을 강화하는 데 낭비되었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가 지배하고 있다. 다수의 이익이 무시되고, 무지막지하게 짓밟히고 있다.

1837년∼1838년에 걸쳐 노동자들은 런던민주주의협회와 대(大)북부동맹 등의 정치조직을 설립하고, 소부르주아 민주파가 제시한 헌장의 슬로건을 채택합니다. 당시의 차티즘 운동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공장 지대의 산업노동자들, 웨일즈의 광부들, 런던의 저임금 노동자들, 수공업 부문 직인이 운동에 참가함으로써 활기를 띠게 되죠. 

차티즘의 절정, 전국헌장협회

1839년 2월 런던에서 차티스트 전국회의가 열렸지만, 모인 대표들은 부르주아 급진파를 비롯해 다양한 노선을 주장하는 여러 분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명확한 투쟁 방침을 설정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청원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인민헌장을 법으로 채택하도록 만든다는 목표에는 일치했어요. 이런 가운데 노동자 대표들이 차티즘 운동 목표의 실현을 위해 물리적 강제력을 비롯한 '최종 조치'를 취할 것을 제안하자 부르주아 급진파들은 총회에서 퇴장하고 전국회의는 노동자계급의 독자 회의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차티스트들은 명확한 행동계획을 세우지 않았어요. 여기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슬로건은 "가능하다면 평화적으로, 어쩔 수 없다면 폭력적으로"였어요.

1839년 7월 하원은 청원서 심의를 거부하였고, 총파업을 비롯한 최후 조치를 시행하려던 전국회의의 노력은 실패로 끝납니다. 1840년 7월 노동자계급 최초의 대중적 정치조직인 전국헌장협회(the National Charter Association)가 설립되고, 1842년 제2차 국민청원이 시작되면서 차티즘 운동은 절정기를 맞게 됩니다. 1842년 경제 불황에 따라 노동자들의 생활은 한층 더 곤궁 속으로 빠져들었고, '저주받은 공장제'에 대한, 그리고 억압과 잔인함에 바탕을 둔 사회 제도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중 투쟁이 고양됩니다. 제2차 국민청원은 다음 내용으로 시작되죠.

정부는 모든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생겼으며, 모든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하원은 국민이 선출하지 않았고 무책임한 행동만을 일삼으며, 다수의 비참함과 불만과 호소를 무시한 채 소수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 하원은 국민이 표현하는 희망에 반대되는 법률을 제정하고 비합리적인 수단으로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한편에는 참을 수 없는 독재정치를, 다른 한편에는 점점 몰락해 가는 노예를 만들어내고 있다. 소규모의 직업인과 노동자계급을 전적으로 몰락시키면서 토지와 자본의 이익을 옹호한다. 부정과 부패와 협박과 사기가 모든 선거에서 난무하여 … 세금은 현재 참기에는 너무 과하다. 부와 사치가 지배자들 사이에 만연하는 반면, 피지배자들은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 모든 이런 악폐는 계급 입법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하원은 이를 철폐하기는커녕, 오히려 늘리려 항상 노력하고 있다. 

한편, 중산계급 자유무역 주창자들은 1815년에 제정된 곡물법이 지주층의 특권을 유지하게 만드는 커다란 악폐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폐기하기 위해 1839년 반곡물법연맹(Anti Corn-Law League)을 창설했습니다. 자유무역에 호의적인 대부분의 부르주아들이 인민헌장에 정식화된 요구들을 지지했고요. 자유무역주의자들이 의도한 것은 곡물법 반대 투쟁에서 노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그것을 폐지하고, 그 뒤에는 어제까지의 동맹자인 노동자들을 배반하여 보통선거권 요구를 방기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차티스트들은 자유무역주의 부르주아와의 동맹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유무역주의자들과 공동으로 추진하는 곡물법 반대 투쟁이 실제로는 차티즘 운동을 자본가의 이익에 종속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곡물법이 폐기되어 곡가가 떨어지면, 자본가들은 이에 따라 임금을 내리게 될 것이어서 노동자들은 곡물법의 폐기로부터 얻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해석에 근거한 것이었죠.

이처럼 계급적 자립을 추구한 차티즘 운동은 전국헌장협회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노동자 대중은 역사상 처음으로 그들의 공통적인 계급 이익에 정치적 형식을 부여했고, 노동자 당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자립적 정치조직으로 결합하여 행동했습니다.
차티즘 운동의 영향력 증대는 3,317,752명이 서명한 제2차 국민청원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통해 반영되었습니다. 제2차 국민청원서 제출을 위해 5월 2일 하원으로 행진한 사람의 수를 『타임즈』는 5만 명이라고 밝혔으나, 차티스트 신문인 『노던 스타』(Northern Star)는 이보다 열 배는 더 될 것으로 추정했죠. 이 무렵 노조운동 안에서 차티즘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수많은 노조들이 전국헌장협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1842년 8월 총파업 

차티즘 운동의 정점을 이룬 것은 아무래도 1842년 8월 총파업이라 할 수 있어요. 8월8일 며칠 전에 일어났던 애쉬톤 하이드 스탤리브리지 지구(랭카셔) 파업이 확대되기 시작했고, 8월10일 맨체스터에서 일어난 파업은 총파업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8월16일까지 파업은 랭카셔, 체셔, 웨스트 요커셔 일부로 크게 번집니다. 노동자들과 정규군 부대의 지원을 받은 경찰부대 사이에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유혈 사태가 빚어지기도 합니다. 영국 산업의 심장부를 형성하는 넓은 지역이 사실상 내전 상태에 들어간 것이죠. 

파업이 내건 슬로건은 '인민헌장과 공정한 임금'이었어요. 

이것은 인민헌장이 사회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공정한 임금'의 원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제도를 수립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표현한 것이었죠. D. H. 코울은 『영국노동운동사』에서 "차티즘 운동은 순수하게 정치적 강령을 갖고 있었으나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운동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박지향은 「초기 차티즘 운동과 계급의식」이라는 논문(『노동계급의 형성』, 1989, 느티나무)에서 "인민헌장의 정치적 요구는 사회경제적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든 차티스트들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파업이 대중적이고 전반적인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그것은 대규모 차티스트 시위로 바뀝니다. 8월15일∼16일 맨체스터에서 열린 대집회가 이런 사실을 반영합니다. 

이런 사태 진전에도 불구하고, 파업 지도부는 노동자들에게 운동을 '법과 질서' 테두리 안에 한정시킬 것을 호소하면서 실제로 파업을 이끌 어떤 지도 방침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파업을 끝내는 데 동의합니다. 이 무렵 부르주아 시의회는 정규군의 지원을 받아 중심 산업들에서 일어난 파업을 억누릅니다. 8월 20일 이후 파업은 몇몇 지역에서 고립되어 남았을 뿐입니다. 지배계급은 파업 참가자들을 엄격히 처벌했습니다. 노동자 수천 명이 투옥되거나 식민지로 추방되었고, 많은 지도적 차티스트들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어요.

차티즘 운동의 쇠퇴 

1842년 패배는 차티즘 운동의 쇠퇴를 가져옵니다. 이는 차티즘 운동 지도자들이 1842년에 야기된 혁명적 긴장을 이용할 능력이 없었고, 차티즘의 이데올로기와 전술 사이에 심각한 내적 모순이 존재했으며(즉, 차티스트들의 계급적 자립 지향과 초계급적 환상 사이의 모순, 투쟁의 혁명적 성격과 '법 일반'에 대한 신뢰 사이의 모순), 1843년∼1845년 사이에 걸친 상공업 붐이 노동자들의 상태를 얼마간 개선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됩니다. 

차티즘 운동의 마지막 정치 투쟁은 1848년에 일어납니다. 1847년 영국이 심각한 경제 불황에 빠져든 가운데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시작된 유럽의 혁명적 정세에 고무되어 대중운동이 고양됩니다.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고, 1848년 4월 570만 명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가 의회에 제출되었어요(당시의 영국 인구수는 1,900만 가량이었죠). 정부는 25만 명에 이르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집회와 시위 등을 막으며, 다수의 지도자를 체포하여 장기간 투옥합니다. 그 뒤 차티즘 운동은 두 서너 해 동안 계속되기는 했으나, 그 위력과 영향력이 회복되지 못한 채 약화됩니다. 차티즘 운동은 1847년 6월 제정된 10시간 노동법, 공장법, 탄광법 등 사회입법을 노동자들에게 성과로 가져다 주었습니다. 

차티즘 운동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에릭 홉스봄은 『혁명의 시대』(1999, 한길사)에서 차티즘 운동의 실패 원인으로 지도층의 무능력, 지방 및 부문간의 차이와 의견대립, 그리고 거대한 청원운동 이외에 통일된 전국적 행동을 취할 줄 몰랐던 무능력을 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뒤로 전개된 국제노동운동 역사에서 독특한 하나의 서막 구실을 합니다. 노동자 운동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종속에서 정치적 자립으로, 경제 투쟁과 계급 평화에 바탕을 둔 사회개혁 계획에서 정치적·사회적 혁명으로, 분산적 행동과 분립적 조직에서 전국적 규모의 강대한 운동과 통일된 조직으로 전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차티즘 운동은 노동자 투쟁에서 대규모의 통일성을 이룩함으로써 노동운동 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영국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의 발현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2. 프랑스 노동자들의 봉기

1830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은 유럽 정치 지형에 큰 충격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이 혁명에서 파리 노동자들은 가장 전투적이고 무서운 세력으로 등장했어요. 부르봉 왕조 권력을 무너뜨린 '영광의 3일'을 쟁취한 것은 노동자들이 힘차게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권을 교체한 노동자계급 투쟁의 첫 번째 사건이었어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얻은 게 없습니다. 투쟁의 결실을 전유한 것은 부르주아 엘리트였어요.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기심을 확인하게 되었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됩니다. 

리용 봉기 

7월 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31년 11월, 프랑스에서 둘째로 큰 도시 리용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납니다. 리용 봉기는 매뉴팩처 방식에 기반한 특유한 산업조직 체계에서 발생했죠. 당시의 생산 방식은 자본가적 매점 상인이 견직 원사를 구입하여 직조공(織造工)을 고용한 소규모 작업장 소유주에게 이를 제공해 제품을 주문하는 방식이었어요. 작업장 소유주와 그 가족들은 노동자와 함께 일하는 것이 보통이고, 이들 소경영주와 노동자들은 합세하여 매점상인에 대항하기도 했어요.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조건은 열악했습니다. 

리용의 견직산업은 1826년 이후 수출 부진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었고, 노동자들의 상태는 더욱 곤궁해졌습니다. 게다가 '7월 왕정'이 새로운 재정법을 만들었는데, 이는 빈곤층의 부담을 한층 더 키웠습니다. 더욱이 매점상인들은 실업을 악용하여 구매단가를 낮추었고, 그 결과 임금은 낮아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상인들이 시 당국의 임금인상 종용을 거부하자,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11월20일 노동자들이 끄롸 루스(Croix-Rousse) 교외 광장에 모여듭니다. 그들은 일을 멈추고 다음날 자신들의 요구를 공동으로 시 당국에 제출하기 위해 시내로 들어갈 것을 결정합니다. 시 당국은 이를 저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부르주아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이 끄롸 루스에서 리용으로 통하는 도로 다섯 개를 모두 점거하여 노동자들을 막았어요.

11월21일 이른 아침,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납니다. 직조공들이 방위군을 밀치자 방위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고, 노동자들은 돌과 몽둥이로 맞서면서 리용 시내로 돌입하여 건물 몇 개를 점거하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합니다. 파리에서 바리케이드 봉기의 역사는 적어도 15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830년 7월 파리 혁명에서는 바리케이드를 민중 반란의 상징으로 삼았죠. 그 사이 정규군 대대가 끄롸 루스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전투는 밤늦게까지 계속됩니다. 무기상점과 무기고를 탈취한 노동자들은 재빨리 무장했고, 다음날 아침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죠. 노동자들은 "일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싸우다 죽을 것인가"라는 슬로건이 적힌 검은 깃발을 내걸었습니다.

11월22일 리용에서 벌어진 전투는 전날에 비해 한층 더 격렬했어요. 끄롸 루스와 리용 지구의 노동자들을 도우러 여러 지역 노동자들이 몰려옵니다. 격렬한 전투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노동자들은 시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죠. 11월23일 군사령부는 리용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시는 노동자들의 손에 들어옵니다. 3일 동안의 리용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엄청났어요.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천여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당국의 보고로는 약 3만여 명이 봉기에 참가했습니다. 

군대가 퇴각한 뒤 노동자들은 어떤 형태의 자치정부도 세우지 않았으며, 다만 시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조처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봉기 본부'는 설치했으나, 시장이나 행정장관을 체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수도 파리와 연락하는 것까지 허용했어요. 노동자들의 이런 행동양식은 대체로 봉기에 참여했던 소규모 작업장 소유주들의 타협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어요. 11월24일자로 리용 검사장이 법무부장관 앞으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냅니다. 

"주민들의 행동은 여러 가지 대조적인 면들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굶주리고 있지만 약탈하지 않는다. 폭동을 일으켰지만 승리를 남용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정권의 깃발을 끌어내리지는 않고 있다. … 인격과 재산은 존중되고 있다."

11월28일 리용에서 퇴각했던 군대는 증원부대 2만 명과 합세하여 다시 시내로 들어왔고, 시 당국은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놓으라고 명령했어요.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굴복했습니다. 12월1일 군대는 시 변두리를 점령했고, 12월3일에는 정규군 4개 연대가 시내로 진입했어요. 정부는 사건 재발을 두려워한 나머지 대량 유혈보복 조처를 취하지는 않았으나, 노동자 수천 명이 시에서 추방당합니다. 견직공들이 선두에 선 리용 봉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리용 봉기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과 생활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부르주아 소유 체제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음을, 그리고 노동자들이 자본가계급을 포함하여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전체 사회의 위계로부터 독립해서 행동할 수 있음을 표출한 것이었어요. 

두 번째 리용 봉기 

리용 노동자들의 다음 봉기가 발발한 것은 1834년 4월9일입니다. 

이 때는 노동자들은 공화주의 슬로건을 내걸고 싸웠어요. 이날 아침 공화주의자들이 시내에 뿌린 전단에는 "자유, 평등, 우애 아니면 죽음"이라는 슬로건이 적혀 있었습니다. 또 전단은 단결금지법에 반대해 투쟁할 것을 호소했고요. 노동자들이 시내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오전 10시 무렵 헌병들이 무장을 하지 않은 직조공들을 향해 발포를 했습니다. 리용의 노동자들은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서둘러 무장했고, 봉기자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공화국 아니면 죽음"이라는 슬로건 아래 전투에 참가합니다. 리용 중심부의 주요 지점들을 점거한 봉기자들은 근처에 사는 농촌 사람들에게 봉기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지요. 

정부군은 포격을 개시했고 격렬한 전투가 며칠 계속되다가 4월15일 노동자 봉기는 진압되었는데, 정부가 마지막에 동원한 병력은 정규군 3만 명이 넘었어요. 리용 봉기가 계속되는 동안, 생 떼띠엔느(Saint Etienne), 그레노블(Grenoble) 등 다른 도시와 군구들에서도 노동자들이 전투에 참가했어요. 4월13일과 14일에는 파리에서도 봉기가 일어났고, 4월13일 파리는 마치 전쟁 진지처럼 보였고, 4만 명의 장교와 병사가 전투태세를 취했어요. 이틀 동안의 바리케이드전이 일부 지역에서 벌어졌으나, 4월14일 아침나절 봉기자들은 포위를 당했고, 군대는 바리케이드 방어자들을 표적 거리 안에서 발포합니다. 그리고 장교와 사병들은 봉기자들을 숨겨주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총검과 소총으로 잔인하게 살해합니다. 

리용 노동자들의 두 번에 걸친 봉기는 지배세력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자립적인 투쟁이었으며,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계급적 성격을 띤 것으로서 세계노동운동사에서도 획기적 중요성을 갖는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3. 독일 노동자들의 투쟁

독일에서 전개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늦은 1820년대에 들어 본격 발전합니다. 1820년부터 1840년까지에 걸쳐 산업생산은 75%가량 증대했고요. 섬유산업이 급속히 발달하고 석탄생산이 증대되었으며, 철도망이 괄목할 만큼 신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1816년에서 1845년 사이에 2480만 명에서 3440만 명으로 증가합니다. 그러나 독일은 여전히 반봉건적인 농업국가로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서는 낙후되어 있었어요. 

독일에서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계급 정세에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정치적으로는 무력한 편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점점 강력한 힘을 장악했던 부르주아지가 형성되었고, 노동자계급도 성장했어요. 노동자계급의 핵심 부분인 산업노동자층도 증대합니다. 1832년 약 32만5천 명이 공업과 광업에 종사했는데, 1848년에는 그 수가 약 70만 명으로 불어나죠.

당시 독일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조건은 매우 열악했어요.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 정도 노동을 했지만, 임금은 기아 수준이었고 형편없는 빈민가에서 생활했으며, 사회보장과 선거권마저 보장받지 못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에 공공연한 형태의 계급 충돌이 일어납니다. 

당시 독일의 정치 지형은 복잡했습니다. 독일은 하나의 통일 국가가 아니라 38개의 봉건제후국으로 나뉘어 서로에 대해 경제적·정치적 장벽을 구축하고 있었어요. 또한 봉건적 지주의 통치 아래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영주국들도 많았고요. 이런 상황은 시장 확대를 바라는 부르주아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죠. 

그래서 독일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본받아 봉건적 통제와 장해를 철폐하려 했어요.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성장하고 있던 노동자계급에 두려움을 느껴 혁명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결국에는 프로이센 토지 소유계급인 융커와 비굴한 타협을 합니다. 이 타협으로 융커는 정치적 지배권을 계속 유지했고, 독일의 통일은 실현되지 못하죠. 그러나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의 길은 진척됩니다. 이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성과의 하나로 독일에서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이 대두합니다. 


[  1848년 혁명기 독일의 수도 베를린 모습 ]

의인동맹

독일 수공업자와 소(小)부르주아 지식인 출신의 정치적 망명자들이 1832년 파리에서 민주주의적 강령을 내건 최초의 정치조직 '독일 인민연맹'을 결성합니다. 이 연맹은 독일의 영주국가들에 흩어져 있던 지지 그룹이나 개인들과 비합법적인 결합을 가졌고, "성실한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노동으로 빵을 얻지 않고는 먹지 못하리라"를 신조로 내걸었죠.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정이 1834년 4월 결사금지법을 공포함에 따라 해체된 연맹의 구성원들은 비합법적인 '법익박탈자 동맹'(Outlaws' league)을 결성합니다.  

이 동맹은 엄격한 비밀조직으로서 그 구성은 주로 노동자들이나, 조직을 주도한 사람은 소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이었어요. 법익박탈자 동맹의 본부는 파리에 있었지만, 조직의 지부들은 독일 안에도 있었죠. 법익박탈자 동맹은 자신의 목표를 독일 해방으로 설정했으며, "먼저 독일 언어와 관습이 통용되는 나라들에서, 다음으로 세계 모든 나라들에서 사회적·정치적 평등, 자유, 공공윤리, 국가통일의 확립과 보전"을 선언했어요. 

1836년∼1837년 '가장 급진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사람들'이 법익박탈자 동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의인동맹'(Bund der Gerechten, the League of the Just)입니다. 의인동맹 결성 직후 이 동맹의 정치적 핵심은 스위스에서 온 수공업자들로 보충되었는데 그들은 스위스에서 급진적 민주주의 조직 '청년 독일'(1834년∼1836년)의 노동자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수공업자는 소부르주아가 아니라, 상인으로부터 재료를 제공받아 제품을 생산하여 납품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람들로서 신분상 직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이 조직이 내세운 주요 목표는 통일된 독일 민주공화국 수립입니다. '청년 독일'의 급진파들은 독일 수공업자 그룹과 결합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이 조직은 정치세력으로 바뀝니다. 
스위스의 현(縣) 당국이 독일 연방의 압력을 받아 '청년 독일'의 열성 활동가들을 추방하자, '청년 독일'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수공업자 그룹은 파리로 가게 되었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의인동맹에 참가합니다. 그리하여 주로 직인 중심의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들이 조직의 안정적 핵심을 이루게 되죠. 

1839년 5월 무렵에는 프랑스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의인동맹의 구성원 일부가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갑니다. 그들은 런던에서 의인동맹 본부와 '노동자교육협회'(the Workers' Education Association)를 조직했어요. 런던 본부는 파리와 스위스의 지부들뿐만 아니라 독일 지역 내 국가들에 있는 수공업자 비밀조직과도 연결을 맺고 있었습니다.

의인동맹의 활동은 주로 이론적·선전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조직 안으로는 이념의 혼란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의인동맹 결성 초기에는 프랑스의 공상적 공산주의자인 E. 까베와 재산공유제 주창자이면서 통일 민주독일을 지향하는 결연한 투사인 K. 샤프의 주장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어요. 1830년대 말부터 1840년대 초에는 빌헬름 바이틀링의 사상 체계가 의인동맹 안에서 우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바이틀링은 노동자계급을 사회 변혁의 담당자로 보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피압박 계급과 구별하지 않았어요. 그는 사회 발전의 합법칙성을 설명하지 않았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노동자계급의 동맹을 반대했죠. 또 그는 노동자계급이 정치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고 정당 건설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이런 바이틀링의 체계에서 종교적·감상적 구상들이 현저하게 드러나면서 1840년대 중반 들어 바이틀링의 사상이 쇠퇴합니다. 

그 뒤를 이어 의인동맹 회원들 상당부분이 '진정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습니다. '진정 사회주의'는 노동자가 추진하는 자립 투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보편적 사랑'의 설교와 불공정에 대한 폭로 등 도덕적 수단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죠. 그리하여 '진정 사회주의'는 감상적 원망과 민족주의적 지향, 그리고 사이비 혁명의 언설로 가득 차 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1845년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 여행을 하게 되고, 이 때 이들은 의인동맹 런던본부 지도부와 만나 유물론적 세계관의 기본 명제에 관해 토론합니다. 그 뒤로 맑스주의가 의인동맹의 이념체계 수립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 19세기 독일은 산업혁명을 겪는다. 사진은 1837년 무렵의 철도 ]

슐레지엔 반란

1844년 독일에서 최초의 노동자 대중 행동인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1842년∼1844년에 걸쳐 슐레지엔 직물 산업에서 생산한 면직 피륙 판매가 감소했고, 당시 슐레지엔의 직조공들은 상인들로부터 면사의 공급을 받는 촌리의 수공업자들이었죠. 1844년에는 직조공의 수입은 떨어진 반면에 식료품 가격은 올라갔어요. 슐레레지엔 직조공의 생활은 영국 노동자들 보다 훨씬 열악했죠.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분노를 촉발시킨 사건이 발생합니다. 슐레지엔 상인들 가운데서도 쯔반지거를 비롯한 '탐욕과 나쁜 성향'을 지닌 몇몇 악덕 기업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임금을 내리고 벌금을 부과하는 한편, 노동자들에게 난폭하게 굴었죠. 1844년 5월 들어 페테르스발다우 지역에서 심한 동요가 일어났으며, 슐레지엔 직조공의 '라 마르세이에즈'가 된 '피의 학살'(the Bloody Massacre)이란 노래가 점점 더 자주 들리게 됩니다. 

6월3일 쯔반지거 집 근처에서 그 노래를 부르던 한 직조공이 하인들에게 두들겨 맞고 현지 경찰에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다음날 노동자들 한 대열이 쯔반지거의 공장으로 몰려가 서류를 불태우고, 집에 들어가 물건들을 부수었죠. 그 다음날인 6월5일에는 다른 '악덕' 기업주들의 사업체로 몰려갑니다. 이런 사태에 놀란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에게 돈과 식량을 나누어주었고, 이날 낮에 군대가 페텔스발다우에 도착합니다. 

그 사이에 노동자들은 대열을 지어 근처에 있는 랑겐빌라우로 행진했고, 기업주들은 돈으로 노동자들을 달래려 했으며, 마을 목사는 노동자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이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했어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기업주의 수하들을 밀쳐내고 목사들을 개천에 빠뜨렸으며, 악덕 기업주의 공장 건물과 집을 마구 부수었어요. 군대가 도착하자, 노동자와 군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 충돌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행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군대는 퇴각하죠.

6월5일 밤부터 며칠에 걸쳐 군대가 반란이 일어난 지역으로 다시 투입되었어요. 정부당국은 압도적인 우세를 확보한 다음 대량 검거에 들어갔고, 이런 상황에서 6월9일 들어 직조공들은 직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슐레지엔 노동자들의 반란은 독일의 다른 지역과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의 투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습니다.

슐레지엔 반란은 많은 역사가들이 말하는 '기아 폭동'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억압자에 대한 저항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억압과 착취 체제에 대한 반란이었죠. 그런 점에서 슐레지엔 반란은 영국에서 일어난 차티즘 운동이나 프랑스 리용 노동자의 봉기 등과 같은 반열에 든다고 볼 수 있어요. (다음호에 계속) 

* 더 읽을 책
박지향, 「초기 차티즘 운동과 계급의식」, 이민호·김인중·박지향·안병준·정현백·유경준, 『노동계급의 형성』, 1989, 느티나무.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꼬뮨까지』,1991, 까치.
박남일, 『반역의 역사 상』, 1994, 계백.
A. 스터름탈, 『유럽 노동운동의 비극』, 1983, 풀빛.
W. Z. 포스트, 『세계노동운동사Ⅰ』, 1986, 백산서당.
D.H. 코울, 『영국노동운동사 상』(김철수·김천우 역), 1980, 광민사.
H. 바른케, 『독일노동조합운동소사』(국민문고편집위원회 역), 1970, 日本 大月書店.
헬가 그레빙, 『독일노동운동사』(박경서 역), 1985, 한벗.
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정도영 역), 1998, 한길사.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정도영·차명수 역), 1999, 한길사.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칼 마르크스 전기 1권』(김라합 역), 1987, 소나무.
칼 맑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2001, 박종철출판사.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박종철출판사.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The Institute of The Internationnal Working-Class Movement, 1976,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Ploblems of History and Theory-Progress Publishers Moscow. USSR Academy of Sciences, 1976, volume 1: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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