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노동체제, 문제의 뿌리와 극복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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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노동시간 단축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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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건설산업연맹

1.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1880 년대 노동운동 구호 중에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자유!”라는 외침이 있었다. 1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갈수록 더 절실하다. 물론 지난 130년간의 노동능률 향상과 기술 발전을 생각하면 이 구호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 하루 24시간 중 12시간은 휴식과 산책, 놀이 시간으로 하고, 나머지 12시간을 “4시간 노동, 4시간 독서, 4시간 친교로 채우자”라는 내용으로 말이다. 물론 이것은 구호의 차원이지 현실의 차원은 아니다.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예를 들면, 아이나 노인을 돌봐야 한다든지, 병원이나 우체국에 왔다 갔다 한다든지, 의미와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을 사무적으로 만나야 한다든지, 때로는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싸움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시간들이 자주 끼어든다.

그러나 노동 현실을 살펴보면, 이런 예기치 않은 시간의 문제보다, 이미 구조화된 시간의 문제가 우리 모두의 꿈을 산산조각 낸다. 바로 ‘장시간 노동체제’의 문제다. 이것은 흔히 초기 자본주의 현상이거나, ‘유혈착취’가 특징인 중소영세기업의 문제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판을 치는 오늘날, 이것은 시대의 경계를 넘고, 국경을 넘어, 심지어 영세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서, 범지구적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얽혀 있는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 더 절실해진 노동시간 단축 요구

노 사관계 분야 학술문헌에는 ‘노동시간 체제(working time regime)’에 관한 일반적인 정의는 물론, ‘장시간 노동체제(long-hours work regime: LWR)’에 대한 정의조차 없다. 어쩌면 학술적인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현실이 너무나 명백하게 감지되기 때문일 터다. 그럼에도 굳이 여기서 정의를 내리자면, ‘노동시간 체제’란 “직접적 노동시간, 휴게시간, 휴가시간, 각종 면제시간 등의 길이와 구성을 나타내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장시간 노동체제’란 “실 노동시간의 길이가 주 40시간을 넘는 등 직장-가정 균형을 저해할 정도의 긴 노동이 지속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그 렇다면 이 노동시간 체제, 더 구체적으로는 장시간 노동체제를 규정하는 핵심 변수들은 무엇일까? 가장 기본적으로는, 잉여가치 생산을 둘러싼 자본 전략과 노조 대응, 즉 ‘노자관계’가 있다. 일례로, 개별 자본이 시간당 기본임금을 아주 낮게 유지하는 경우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장시간 노동에 매달려야 한다. 이것은 노동이 생산한 총 가치 중 임금 부분을 가능한 한 작게 유지하고 가능한 잉여 부분을 늘리려는 것이기 때문에, 일찍이 칼 마르크스(K. Marx)가 『자본 I』(1867)에서 말한 ‘절대적 잉여가치’를 키우려는 자본 전략과 일치한다.

한편으로, 마르크스가 “기계는 노동에 대한 자본가의 무기”라 표현한 것은, 절대적 잉여가지 증대 전략에서 더 나아가서, 임금으로 나가는 필요 노동시간에 대한 잉여 노동시간의 상대적 비율을 늘리려는 자본의 전략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개별 자본이 새로운 생산 기술의 도입과 경영 합리화 등을 통해 노동능률 향상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이 ‘상대적 잉여가치’ 증대 전략의 일환이다. 요컨대, 이렇듯 절대적․상대적 잉여가치를 높이려는 자본의 전략과 이에 대한 노동의 대응, 그리고 이에 반응하는 새로운 자본 전략의 상호작용, 즉 ‘노자 간 역동적 관계’에 따라 장시간 노동체제가 상당 부분 규정되는 것이다.

다양한 변수들로 구성되는 ‘장시간 노동체제’의 함수

한 편, 노동시간 체제는 앞에서 언급한 협의의 노자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생활문화의 변동, 양성평등을 비롯한 사회적 평등, 제도적 지원 등의 함수이기도 하다. 줄리엣 쇼어(J. Schor)는 『과로하는 미국인』(1992)에서 1970년대 노동자와 1990년대 노동자를 비교하면서, 분명히 생산성은 올랐는데 노동시간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 쇼어에 따르면 “소비중독이 장시간 노동체제를 부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나는 『살림의 경제학』(2009)에서 이 소비중독을 ‘노동중독’과 함께 자본증식이라는 수레를 지탱하는 두 바퀴로 비유한 바 있다. 결국 이를 통해 인간의 생활세계가 더욱 화폐의존도, 즉 자본의존도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생활의 화폐의존도가 높지 않다면 굳이 임금노동을 오래하지 않아도 된다. 아파트 대출이나 자동차 할부, 각종 보험 등 꾸준히 돈을 벌어서 돈을 넣어야 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노동자들은 임노동에 스스로 속박될 것이고, 보다 짧은 시일 안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선호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생활세계의 화폐의존도’를 장시간 노동체제를 규정하는 또 다른 변수라 본다.

한편, 양성평등을 비롯한 ‘사회적 평등 정도’ 역시 장시간 노동체제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양성평등의 정도가 높을수록 사람들은 가사노동의 분담을 위해 장시간 노동을 가능한 한 적게 하려 할 것이고, 그러한 평등 정도가 낮을수록 대개 남성이 장시간 노동을 하게 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나아가 (장시간 노동에 대한) ‘사회제도적 지원’, 예컨대 저녁 늦게까지 아이를 돌보는 보육시설의 확충이나 24시간 매장, 또는 은행 등에서의 금융업무 시간의 확장 등은 장시간 노동을 조장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이렇듯 생활세계의 여러 변수들이 노동시간 체제에 영향을 미친다.

한편, 앨리 러셀 혹실드(A. B. Hochschild)는 자신의 저서 『시간 속박』(1997)에서, 미국 사회에서 “노동이 가정이 되고 가정이 노동이 되는 뒤섞임 현상,” 그리하여 “시간 속박”이 확산하는 현상을 지적하고, 이것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적’ 가족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대신 돈벌이 노동이라는 ‘공적’ 경제가치를 평가절상 하는 “문화적 가치”의 변동 때문이라 설명한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여성이 직장에 나가는 게 특이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여성이 가정에 머무르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덕스베리(L. Duxbury)와 히긴즈(Ch. Higgins)도 캐나다 사회가 1991년에 비해 2001년엔 “직장업무를 가정에 들고 가서 보충노동을 하는 경우가 3분의 1에서 2분의 1 수준으로 높아졌다”고 경고한다(2006). 그리하여 직장-가정 균형이 갈수록 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돈벌이 노동을 평가절상 하는 ‘문화 가치의 변화’도 장시간 노동체제를 규정하는 중요 변수가 된다. 물론 이 문화 가치의 변동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지배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나온 노동의 적응 형태 중 하나다.

노동자들의 변형된 ‘사회적 유전자’도 극복 대상

그 런데 이러한 자본의 전략과 노동의 대응, 생활세계의 변화, 가치관 변동 등 여러 중요한 변수들로써 노동시간 체제 또는 장시간 노동체제를 논리적으로 잘 설명한다 하더라도, 아직도 뭔가 허전한 구석이 남는다. 그것은 특히 자본 전략의 측면보다는 노동 대응의 측면, 즉 노동자의 주체적 측면과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이 여전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자본이 잉여가치를 축출해가는 걸 뻔히 아는데, 왜 노동자들은 순종하거나 스스로 자본의 속박 안으로 더 단단히 묶여 들어가는가? 노동이 자본의 공격성 앞에 분명히 피해자인 것은 맞는데, 그렇다고 노동이 자본과 ‘공범 관계’를 이룬 측면은 없는가?

나아가, 좀 잘 나가는 노동자가 그보다 약한 노동자에게 공격적인 것은 왜 그럴까? 심지어 노동자가 스스로 힘든 줄 알면서도 장시간 노동을 마치 정상인 것처럼 수용하거나, (일중독이나 과로사 등으로 나타나듯) 갈수록 상황이 더 심해지는 것을 방치하는 건 왜일까? 특히, 노동이 스스로를 죽이는 이 파괴의 시스템을 근원적으로 바꾸려는 실천보다 (자기 몫을 조금 더 갖기 위한) ‘분배투쟁’으로, “배부른 돼지”로 만족하려는 경향은 어떤 뿌리에서 유래하는가?

이런 면에서 우리는 자본과 노동의 구조적 차원만이 아니라, 그러한 관계를 유지․확대․강화하는 데 일조하는 ‘노동의 주체적 행위 차원’까지 심층적으로 살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개념들이, ‘시스템 동일시’와 ‘경쟁의 내면화,’ 그리고 ‘노동의 내면화’이다. 나아가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강수돌과 홀거 하이데(H. Heide)는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2009)에서 자본의 원초적 축적기부터 지금까지 부단한 구조적 폭력이 노동을 비롯하여 온 사회를 짓눌러 왔음을 강조한다. 물론 노동의 저항도 숱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저항들은 거듭 패배로 끝났다. 바로 그 과정에서 갈수록 더 많은 이들이 물리적, 정신적 상처(트라우마)를 입게 되고, 좌절감과 두려움에 떨게 된다. 칠전팔기의 자세로 다시 시도를 해보지만, 역시 역부족으로 끝난다. 마침내 강력한 자본과 권력의 지배 앞에서 유일하게 남은 생존 전략은 그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체제에 반항하거나 도주하기보다는, 순응하고 적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스템 동일시’다.

이제 남은 과제는 시스템이 요구하는 ‘경쟁을 내면화’하고 개별 자본이 강요하는 ‘노동을 내면화’하여, 더 이상 자본과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 결과, 적군이 아군이 되고 아군이 적군이 되는 묘한 상황이 나타난다.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이나 자기 자신의 참된 내면조차 효율적이고 경쟁적인 노동 수행에 방해 요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노동자의 ‘사회적 유전자’가 심각하게 변형된 결과다. 그리하여 제 아무리 똑똑한 노동정책이나 노조의 대응방책이 나온다 한들, 제 아무리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거세게 일어난들, 삶의 현장에서는 장시간 노동은 물론 만성적 과로, 비정규직 경시, 기업별노조의 이기주의, 일중독, 과로사 문제들이 풀리기보다 더 심해진다. 마침내, 이제 노동은 ‘해방의 조건’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 자기 내면의 진정한 느낌, 인간해방의 근본 문제 등을 회피하기 위한 ‘마약’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자본’도 넘어야 하지만, ‘노동’도 넘어가야 한다.

이상과 같은 이론적 배경에 의거할 때, 우리는 장시간 노동체제(LWR)는 노자관계(IR), 생활세계의 화폐의존도(DoM), 양성평등(GE), 사회적 지원(SS), 가치관 변화(VC), 노동동일시(IwW) 등의 함수로 정식화할 수 있다. 즉, LWR = f(IR, DoM, GE, SS, VC, IwW)으로 정리된다. 아래에선 이 변수들을 하나씩 자세히 고찰한다.

2. 상대적 저임금과 잉여가치

노 동시간 국제비교를 보면, 수십 년 전이나 2000년 이후나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놀라운 것은 한국이 그나마 노동시간 단축을 한답시고 2004년 이후 단계적으로 주5일제 근무를 시행하고 있지만, 실제 현실은 별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일례로, 유엔 산하 국제노동기구(ILO)가 2004년에서 2005년 통계를 기준, 41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 노동자의 49.5%가 1주일에 48시간 이상 일하고 있어 50.9%인 페루에 이어 2번째였다(『YTN 뉴스』, 2007년 6월7일).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상대적으로 낮은 노동생산성

또, 같은 기구에서 52개국의 각종 노동 관련 통계를 분석한 뒤 2007년 발표한 「노동시장 핵심 지표」 보고서에서도, 한국 노동자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2,305시간으로, 과거에 비해 줄긴 했어도 여전히 비교 대상국 중 최고였다(『경향신문』, 2007년 9월3일). 한국에 이어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 홍콩과 말레이시아, 태국 등이 노동시간이 긴 그룹에 포진했다. 이에 반해 벨기에와 덴마크, 프랑스, 독일 등은 연간 노동시간이 1,600시간에 미치지 못해 최단 노동시간 국가 그룹으로 분류됐다.

이 것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서도 마찬가지다. 2007년 현재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316시간으로, 지난 10년간 29개 OECD 국가들 중 압도적 1위를 유지했다. 2위인 헝가리와 연간 400시간 이상 차이가 난다. OECD 평균치인 1,786시간과는 무려 600시간 차이가 난다. 특히 2003년 법정 주당 노동시간이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었지만 실제 노동시간은 거의 줄지 않았다. 2004년 2,404시간이던 연간 노동시간은 2007년에는 2,316시간으로 고작 88시간 줄었다. 사무직은 예사로 저녁 6시 이후 초과노동을 하고, 생산직은 평일 초과근로는 물론, 주말이나 휴일에는 특근으로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스스로 박탈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장시간 노동을 함에도 한국 노동자들의 1인당 노동생산성[국내총생산(GDP)을 취업자 수로 나눈 것]은 미국(63,885달러)의 68% 수준(43,442달러)이다. 1980년의 28% 수준에 비하면 (기술 발전 및 투자 확충 등으로) 크게 높아졌으나, 여전히 노동 효율성이 낮다. 이러한 비효율적 장시간 노동은 많은 경우, 상사 눈치 보기 등 조직 문화, 업무 시간 중 잡담 등 비효율적 시간 사용, 낮은 기본급과 과도한 잔업 등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된다(노광표, 『경향신문』, 2011년 6월3일).

장시간 노동 강제하는 수당 중심의 임금체계

그 런데 이러한 국가별 비교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산업 분야별 실 근로시간이다. 특히 가장 잘나가는 분야 중 하나인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경우, 완성차업체와 부품업체에서 모두 전 산업 평균보다 30% 이상 노동시간이 길다. 아직도 1960~70년대 수준의 ‘살인적’ 장시간 노동이 지배적이다. 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박사의 「우리나라 노동시간 유연성의 활용」 보고서(2011)에 따르면, 자동차 부품업체의 연간 근로시간은 2006년 2,597.9시간까지 줄었다가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엔 다시금 2,752.7시간으로 늘었다. 이는 2009년 기준 전 산업 평균 연간 근로시간인 2,074시간보다 32.7%나 많다(『국민일보』, 2011년 4월6일). 이 보고서는 전국금속노조가 산하 완성차업체들과 부품업체들을 대상으로 2008년과 2010년 각각 실시한 노동시간 실태조사에 토대한 것인데, 이에 따르면 “연장노동이 월별로 관행화, 고정화”되고 있어, “일부 회사는 월 연장노동 시간이 117시간에 이를 정도”다. 급상승한 생활비에 비해 여전히 낮은 기본급이 연장근로를 강제한 측면이 있다.

구체적인 예로, 2011년 대표적인 노동쟁의 사업장이며 자동차부품 제조업체인 ‘유성기업’의 노동자들의 경우, 입사 9년차의 월 기본급은 1,234,316원으로, 시급으로 환산했을 때 약 5,900원 정도다. 이는 현재 법정 최저임금 4,320원보다 1,580원 더 높은 수준이다(사회진보연대, 「사회화와 노동」, 2011년 6월3일, 제521호). 낮은 기본급을 보충하기 위해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월 평균 30시간의 연장노동, 80시간의 야간노동, 37시간의 주말특근을 수행한다. 이러한 장시간 노동 및 야간 노동은 1년 6개월 동안 4명의 노동자가 자살하거나 뇌출혈, 급성패혈증 등으로 돌연사를 하도록 하는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삶의 위기는 유성기업 노조로 하여금 현대자동차 노조와 마찬가지로 심야 노동을 없애는 ‘주간 연속 2교대제’를 제안하게 재촉했다.

종속적 부품생산 체제와 생산 기지 해외 이전

흥 미롭게도 유성기업은 현대차라는 완성차업체의 하청 계열화 구조의 일부다. 현대자동차의 임금 수준은 유성기업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생활비용에 견주면 기본급만으로는 생활이 힘겹다. 현대자동차 역시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생산기계의 현대화를 통해 살아 있는 노동을 효율적으로 흡입한다. 기존의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과 더불어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이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이러한 ‘기술혁신을 통한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 범지구적 경쟁으로 확산되면, 중장기적으로 ‘고용 없는 성장’을 부르고, 더 장기적으로는 ‘성장 자체도 정체’하게 만든다. 이러한 조건에서 진행되는 독점자본 중심의 수직계열화는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외연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사내하청, 사외하청 등 ‘종속적 부품생산 체제’다.

요컨대, 많은 논란이 가능하겠지만, 이러한 종속적 부품생산 체제는 그간 과학기술 시스템이 산업생산에 엄청나게 도입되었음에도 여전히 한국의 제조업은 상대적 저임금에 기초한 장시간 노동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이 독점자본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통해 사회 전체로 재생산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할 것이다. 앞서 말한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이 결코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닌 셈이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단기적으로는 ‘고용 있는 성장’을 동반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고용의 정체’를 부른다.

이러한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기술혁신 및 자동화의 도입, 도요타식 적기생산방식 등 생산의 네트워크화 같은 각종 생산합리화의 결과,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과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그 결과는 이중의 의미에서 역설적이다. 첫째, 자본의 수익률은 갈수록 떨어진다(‘이윤율 저하 경향’). 이에 따라 자본은 목숨을 걸고 ‘마른 수건도 짜내는’ 극한적 노동통제를 구사한다(‘반경향의 작동’). 둘째, 그 결과 노동의 안정성도 갈수록 떨어진다(‘실직 공포’와 ‘비정규화’). 일례로 가장 처우가 좋은 축에 든다는 (그러나 내심으로는 장시간 노동과 과로에 시달리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도 극심한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이러한 조건에서 마침내 2011년 봄, 이들은 “2세들을 위해” 기업 측에 ‘고용 상속’을 요구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이 해프닝은 바로 이 ‘첨단 생산기술 아래의 장시간 노동체제’라는 모순(대립물의 통일)이 빚어낸 부산물이었다.

참고로, 여기에다 생산 입지의 해외 이전, 즉 신자유주의 물결과 더불어 강화된 ‘자본의 해외 생산기지 건설’이란 요인을 추가할 수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강화와 상대적 고임금 경향을 회피하기 위해, 이러한 저임금 및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자본증식구조를, 세계 노동시장의 격차를 활용하여 해외의 유리한 입지로 이동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순의 해결이 아니라 모순의 이전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30년이 흐른 지금, (스탈린주의적 노동통제와 자본주의적 부정부패가 맞물려 돌아가는)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것, 그 결과 미국 달러를 가장 많이 소유한 국가로 급등한 것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다.

3. 생활의 화폐의존도 심화

물 론 겉으로 드러나는 절대 임금액만 보면 한국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은 40년 전에 비해 1,000배나 많은 월급을 받는다(약 5만 원에서 약 5000만 원으로). 그런데 절대임금 액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질적 구매력과 실 노동시간이다. 실 노동시간의 경우,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주40시간인 법정 정규노동의 임금만으로는 노동자들의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전체 임금의 30~50%는 초과노동, 심야노동, 휴일특근 등으로 만들어진다. ‘직장-가정 균형’은 사치품일 뿐이다. 매일 파김치가 되듯 장시간 노동하는 것이 몸에 밴다. 오히려 한가하게 노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일-가정 양립’ 구호 사치로 만드는 화폐 의존도 심화

이 제 ‘실질 구매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실질 구매력이란 ‘명목임금을 물가로 나눈 것’으로, 물가가 오르면 임금이 올라도 말짱 도루묵이란 얘기다. 현대경제연구원의 「OECD 국가 중 국내 물가가 높은 이유」란 보고서(2011년 5월11일)에 따르면, 2000~2010년 우리나라 식품물가지수 평균 상승률은 4.4%를 기록했다. 이는 OECD 평균인 2.8%, 주요 7개국(G7: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의 평균인 2.1%를 크게 웃돈다. 같은 기간 ‘근원물가’(주거비, 교육비 등) 상승률도 평균 2.6%로, OECD의 2.3%나 G7의 1.7%보다 높았다. 근원물가 가운데 13.27%를 차지하는 전체 교육기관에 대한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7.0%로, G7 평균 4.6%, OECD 평균 5.7%보다 훨씬 컸다. 또 근원물가의 10.04%를 차지하는 주거비 중 아파트 임대료는 OECD 국가 중 2번째였다. 요컨대 한국의 평균 소비자물가(CPI) 상승률은 OECD 평균인 2.7%나 G7 평균 1.9%를 웃도는 3.1%로 나타났다.

 

그 러나 이런 추상적 수치는 오히려 현실을 가린다. 한국의 사교육비는 교육부의 공식 조사만 해도 20조 원을 넘고, 통계에 잡히지 않은 부분까지 하면 30조 원을 넘는다. 가구별 자녀 1인당 평균 50만 원이 넘는다. 대졸과 고졸의 임금이나 경력 격차가 심각한 현실, 나아가 서울의 대학 출신과 지방대 출신의 처우 격차가 심한 상황, 일류대와 비일류대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현실적 조건에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사교육을 동원해서라도 자녀들이 좀 더 ‘좋은 대학’에 가서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 즉, 자녀의 교육 지원을 위해 장시간 노동을 선택하는 것이다(이는 다음 절에서 다룰 ‘강자 동일시’의 한 결과다). 그런데 대학 등록금은 어떤가? 사립대학에서는 평균 등록금이 2000년의 451만 원에서 2011년 776만 원으로 올랐고, 국립대학조차 같은 기간 219만 원에서 440만 원으로 올랐다. 일부 사립대의 경우 연간 1천만 원에 육박한다.

주거비가 아니라 ‘투거비’가 된 현실

주 거비는 어떤가? 사실 통계에 잡히는 주거비는 실제 주거비라기보다, 은행 융자를 내서라도 집 한 채를 장만하기만 하면 나중에 가격이 엄청 오를 것이라 보고 쓰는 돈이란 의미에서 ‘투거비’라 하는 것이 정직하다. 그렇지 않다면 수천만, 때로는 수억에 이르는 은행 융자와 이자를 감내하지 않을 것이다(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막차’를 탄 사람들은 ‘하우스 푸어’란 덫에 걸려버렸다). 예컨대 한국은행이 2011년 5월25일 발표한 「1/4분기 가계신용」에 따르면, 은행 등 금융기관의 가계대출과 카드사의 판매신용을 더한 가계신용(가계 빚) 잔액은 2011년 3월 말 현재 801조 4천억 원으로, 처음으로 800조 원을 넘어섰다.

그러 나 엄밀한 의미에서 국제비교의 지표로 활용되는 자금순환표상 가계부분 금융부채인 ‘실질 가계부채’를 보면, 그 수치는 무려 1천조 원에 이른다. 이를 기준으로 하는 한국의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부채비율은 2010년 말 현재 146%로, 주요국보다 훨씬 높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때 미국의 금융부채 비율이 120%였다니, 지금 한국의 상황은 매우 위험한 수준이다. 이 가계부채의 절반 정도는 모기지, 즉 주택담보 대출이다. 요컨대 한국의 가계당 부채 규모가 4천만 원이 훨씬 넘는다. 앞서 주거비가 아니라 ‘투거비’라 꼬집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요즘은 집집마다 1대 아니면 2대씩 갖게 된 자동차도 문제다. 대개 일시불보다는 할부로 사는데, 일반적으로 3년 동안 매월 납부해야 하는 돈이 수십만 원씩이다. 나날이 오르는 기름 값에다 유지비까지 하면, 자동차 한 대만 해도 할부금 포함해 평균 유지비가 1백만 원 가깝다. 예전엔 생각지도 않던 것이다. 나아가 통신비는 어떤가? 2010년 8월 통계청의 「2/4분기 가계 동향」에 따르면, 전국 가구(2인 이상)의 통신서비스 지출은 총 지출의 7.35%인 14만 2,542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관련 통계가 나온 2003년 이후 가장 높은 것이다. 통신서비스비가 소비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4분기 기준으로 2006년 6.84%에서 2007년 7.08%, 2008년 7.23%, 2009년 7.24%, 2010년 7.35% 등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통신요금 인하에도 가구당 통신비 지출이 늘어난 이유로는 스마트폰 가입자 증가 등이 꼽힌다. 이런 식으로 첨단 기술과 더불어 일상생활의 화폐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기본생활을 보장하지 않는 사회, “인생은 혼자”

게 다가 한국은 사회보장의 미비로 말미암아 노후에 대한 불안감이 상존한다. 예전에는 자식들이 사회보장 역할을 했다. 하지만 갈수록 자식들이 이기적으로 변하는 데다, 고용불안과 막대한 부채 등 경제적 여건이 강한 압박을 가해, 더 이상 부모의 노후를 예전처럼 보장하기 어렵다. 정부나 각종 사회기관들이 “노령화 사회에 대한 대책이 절실하다”고 소리를 높이는 이유도 이런 까닭이다. 결국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다. ‘살아 있는 한’, 또한, IMF 때처럼 언제 잘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이 벌어 놓아야 그나마 노년에 노숙자나 거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삶을 짓누른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정태인 새사연 원장이 쓴 「복지논쟁과 노동」이란 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재계를 일단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노동계는 노동시간 단축에 찬성할까? 난 조직노동, 그 중에서도 대기업 위주인 민주노총이 제일 반대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가 이렇게 도발적인 발언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40대에서 50대의 중장년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은 아이들 사교육비와 부동산 값을 대기 위해 여전히 잔업과 철야를 반복하고 있다. 총액임금이 중산층 이상이라 하더라도, 월급은 애들 교육비로, 대출 이자로, 주먹 속 마른 모래처럼 금세 빠져나간다. 더구나 외환위기 때의 경험(“언제 잘릴지 모른다.”)은 일할 수 있을 때 최대한 해야 노후 걱정을 그래도 덜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하청업체 등 다른 중소기업, 또 비정규직과의 임금격차가 심해지면서 더욱 더 대기업 노동자들의 ‘해고 비용’(해고되면 치러야 할 대가)은 높아졌다. 그만큼 파업이나 이직 위협 등 노조의 무기는 무뎌졌다.”

이 모든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직접적 생산관계라고 할 수 있는 노자관계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자본에 종속되는 정도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기존 남성 부양자는 물론, 여성들의 삶의 시간도 갈수록 더 많이 돈벌이 노동에 묶인다. 이와 더불어 자녀들과 어른들의 친밀한 소통의 시간은 사라지고, 모든 인간관계가 개별화하거나 사무적으로 변하고 만다[에바 일루즈의 『감정 자본주의』(원제: Cold Intimacies)]. 그 와중에 자녀들의 가치관도 돈벌이 중심이 된다. 이런 과정이 비인간화를 부름을 느끼면서도 사람들은 이 흐름을 바로 잡으려는 의지와 능력을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다. 이게 ‘진짜 문제’다.

4. 노동과의 동일시

바 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장시간 노동체제의 더 근원적인 부분에 이른다. 앞에서 던진 질문들, 예컨대 자본이 절대적․상대적 잉여가치를 부단히 축출해가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왜 노동자들은 순종하거나 스스로 자본에 더 예속시키는 길을 가는가? 노동은 자본의 공격성 앞에 분명히 피해자이면서도 왜 자본과 ‘공범 관계’를 맺어나가는가? 특히 노동자가 스스로 힘든 줄 알면서도 장시간 노동을 마치 정상인 것처럼 수용하거나, (일중독이나 과로사 등으로) 갈수록 그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방치하는 건 무슨 까닭인가? 특히, 노동자가 스스로를 죽이는 이 파괴의 시스템을 근원적으로 바꾸려 노력하기보다 (자기 몫을 조금 더 차지하려) ‘분배투쟁’에 머물고 마는 경향은 왜 그런가?

문제의 근원을 외면하게 하는 내면화된 두려움

이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자본주의 형성 초기부터 막대한 시스템의 폭력을 겪으면서 ‘집단적 상흔’을 경험했고, 그로 인한 근원적인 ‘두려움’에 고통을 당하면서 마침내 생존 전략으로, ‘시스템과의 동일시,’ ‘강자와의 동일시,’ 그리고 그 강자 내지 시스템이 요구하는 ‘노동과의 동일시’를 통해 ‘경쟁의 내면화,’ ‘노동의 내면화’를 집단적으로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단 한 차례의 충격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폭력과 크고 작은 상흔이 부단히 반복되면서 누적적이고 다층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다.

마침내 장시간 노동은 상처받은 자아를 인정받거나 자아실현을 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처럼 보이게 된다.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해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 수준과 동일시된다. ‘자랑스런’ 대한민국 경제, 그 50년간의 산업화 과정 속에서 이런 분위기가 온 사회에 집단적으로 관철되었다. ‘우리’ 경제를 위해, ‘국익’을 위해, ‘우리’ 기업을 위해, ‘나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자는 데 누가 말리겠는가?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지극히 근원적인 문제에 진실하게 대면하기를 요구한다. 많은 경우 현실의 기득권이나 현실적 열망이 헛된 것임을 고백하기를 요청한다. 따라서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고통이 아무리 두렵고 불편할지라도, 이에 과감하게 직면하고 껴안으면서도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늘 그래왔듯 조금 나아가는 듯하다가도 금방 원점으로 회귀한다. 그래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다시금 ‘뿌리’를 살펴야 한다.

폭력과 상흔의 한국 자본주의 역사와 노동의 내면화

한 국 자본주의의 본격적 싹을 ‘일제하 자본주의 산업화’에서 찾는다면, 일제의 침략 자체가 폭력적 과정이었고 일제하 산업화 과정 또한 폭력적이었다. 그것은 공장 노동의 엄한 규율과 강력한 노동통제를 도입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세계조차 억압하는 과정이었다. 약삭빠르게 강자에 빌붙어 사는 ‘친일파’들의 삶(‘강자 동일시’)은 그 이후 선택 가능한 생존전략을 미리 예시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일본 제국주의 또한 선진 제국주의의 폭력 앞에 재빠르게 ‘강자 동일시’를 한 결과로 탄생한 것이었다.

해 방 직후 새로운 체제를 요구하던 진보 세력은 미군정의 폭력과 그 앞잡이 세력들(부활한 친일 세력들)의 폭력을 경험하면서 또다시 상흔을 겪는다. 한국전쟁 또한 ‘상흔의 중층화 과정’이었다. 그 위에 ‘레드 콤플렉스’가 집단적으로 각인된다. 그 핵심은 ‘낙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자본주의 성장을 옹호하는 세력이 아니라면, ‘내부의 적’이 되어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두려움이다. 이에 대한 정신교육이 가정, 학교, 언론, 사회를 통해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제 온 사회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선진국의 길로 매진해야” 하며, 누군가 딴소리를 하면 즉각 배제, 고립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런 전제들이 충족된 연후에 한국 경제는 1960년대 초부터 1997년까지 약 40년간 쉼 없이 성장 가도를 달려왔다. 고속도로 위의 자동차처럼 주춤거리면 죽는다, 앞만 보고 무조건 달려야 안전하다, 그런 생각에 바탕하여 오랜 세월을 살았다. 그 과정은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을 포함) 대체로 ‘성장지상주의’와 ‘분배갈등’이라는 두 축에 의해 이끌려왔다. 그러다가 사고가 터졌다. 바로 1997년의 IMF 사태다. 나라의 발전이 나의 발전이라고 동일시해온 이들에게 나라 경제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경험, 민주노조조차 내 분신인 일자리를 지켜주지 못할 수 있다는 경험, 나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경험 등은 다시금 상상 이상의 집단적 상흔을 각인했다.

그리하여 IMF 사태 이후의 노동 현실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이는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민주노조가 있는 곳이나 없는 곳이나 마찬가지다. 첫째, ‘이미’ 해고된 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 “일하고 싶다”,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목숨을 걸고 투쟁한다. 둘째, ‘아직’ 해고되지 않은 자들은 “잘못 찍히면 해고다”, “살아 있을 때 많이 벌자”, “물량이 많을 때 많이 일하자”며 목숨을 걸고 노동한다. 그 결과, 최근 유성기업 사례에서 보듯, 파업 중인 노동자와 노조가 “공장으로 돌아가 일하고 싶다”고 하는데도, 오히려 회사가 노동자들로 하여금 공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가로막는 기묘한 일까지 벌어진다. 물론 이것은 개별 자본이 파업 노동자를 배제하고, ‘모범 노동자’만 잉여가치 생산에 투입하려는 의도임이 뻔하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저 뿌리 깊은 ‘경쟁의 내면화’ 및 ‘노동의 내면화’를 털어내기 위한 논의는 유보한 채, 오로지 노동시장 내부에서의 ‘파이 확보’에 매몰된 주체의 모습이다.

‘자기 파괴성’ 대안 제시 못한 민주노조운동

이런 점에서 민주노조운동의 논리를 내재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지난 20년간 민주 노조는 “연장근로의 예외규정을 사업장에서 엄격히 규제하기보다 오히려 잔업과 특근의 보장이라는 ‘자본의 덫’에 빠져 허우적대기 바빴다. 언제부터인가 사업부대표가 되기 위해서 활동가가 조합원들에게 주말근무 몇 개를 더 따내겠다고 약속해야 하는 장시간 노동체제의 포로가 되었다”(이상호, 『프레시안』, 2010년 3월1일). 그렇다! 장시간 노동체제의 지속화는 분명히 자본과 국가에게 1차적 책임이 있지만, 2차적 책임은 이러한 ‘담합 구조’에 눈감거나 앞장선 노동조합에게 있다. 고통스럽지만 사실이다.

장시간 노동체제를 위한 관행적 ‘공범 관계’는, 현대자동차 노조의 ‘고용 세습’ 요구와 마찬가지로 생존의 절박함에 내몰린 노동자의 처절한 목소리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리하여 그 고통 자체엔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본을 넘어가고자 하는 노동의 주체성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에 더욱 단단히, 그것도 스스로 나서서 결박되고자 하는 ‘자기 파괴성’에 다름 아니다. 고통스럽지만 이것이 사태의 진실이다.

삶의 유일한 이유로서 ‘자식의 출세’

요 약하면 이렇다. 자본과의 거듭된 싸움에서 패배하고 좌절하고 상처 입은 노동자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본 사회 구성원 전체는 집단적으로 강자 동일시, 체제 동일시를 선택했다(강수돌 & 하이데, 2009). 그것이 유일한 ‘현실적’ 생존 방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불행하게도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 과정이다. 이제 나는 없다. 내 꿈도 없다. 내 느낌도 없다. 오로지 자본이 설정한 사다리 안에 들어가서 밤낮으로 높이 기어오르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일밖에 없다. 이 ‘자기 배신’은 말 못할 고통을 수반한다. 자신의 진정한 느낌을, 뿌리 깊은 곳에서 거듭 치솟아 오르는 두려움과 서글픔을 계속 억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을 찾는다. 즉, 노동중독이 다른 중독들과 결합한다. 일종의 ‘합병증’이다. 소비중독은 노동중독을 재촉하고, 노동중독자는 소비중독 속에서 (금방 공허해질) 일시적 위로를 얻는다. 언제까지 이 ‘못할 짓’을 계속해야 하는가?

바로 이때 떠오르는 것이 ‘내 자식들’이다. 내 자식만큼은 이것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낙’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자기에 대한 배신은 이제 ‘자식에 대한 기대’와 결합한다. 내가 아무리 고생해도 내 자식이 ‘성공’한다면, 설사 나는 더 이상 저 사다리의 높은 곳에 못 오른다 해도 내 자식만 ‘출세’를 한다면, 그간의 내 고생은 보람이 있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자식에 대한 기대는 제2차의 자기에 대한 배신이 된다.

5. 결론: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자본을 넘고 노동을 넘어

이 제 긴 논의를 마무리해야 한다. 다시금 유성기업 사례로 돌아가 보자.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왜 파업을 했나? 그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밤에는 일하지 않고 잠자고 싶다.’였다”(노광표, 『경향신문』, 2011년 6월3일). “밤에는 일하지 않고 잠자고 싶다.” 그렇다! 이것이 유성기업 노동자가 원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도대체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물어본 것이다. 바로 이런 ‘자기 물음’이 집단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가랑비처럼 이슬비처럼, 현장을 바꾸는 작은 변화들

그 러면서도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의식과 감정은 이미 양파껍질처럼 겹겹이 싸여 있다. 이를 차곡차곡 벗겨내야 한다. 그래야 본질적 부분, 참된 자아가 나온다. 10명 내외의 친밀한 ‘인간적 소모임’이 중요하다. 가급적 술은 적게 마시라. 물이나 차만 갖고도 인간적 대화가 가능해야 한다. 처음엔 ‘나 혼자만 느끼면 뭐 하나?’ 싶지만, 일단 뱉어내 보라. ‘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네? 나도 그런데.’라는 반응들이 나온다. 이게 중요하다. 그러면서 솔직해지라. 내 깊은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냥 뱉어내기 시작하라. 그리고 공유하라.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강자인지 가리는 싸움은 제발 그만두라. 내가 느끼는 고통, 내가 느끼는 두려움을 정직하게 말하고 공유하라. 그러면서 공감대가 형성되면, 그 어떤 장애물에도 우리의 자연스런 인간적 필요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무엇부터 시작할지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런 작은 변화들이 모든 현장에서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그렇다고 소낙비처럼 홍수처럼 쏟아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가랑비처럼 이슬비처럼, 평화롭게 느긋하게 행복하게 진행되는 것이 더 낫다. 변하지 않는 듯하면서 변하기 시작하고, 움직이지 않는 듯하면서도 움직여나가야 한다. 그리고 ‘특정한’ 계기가 터지면, ‘모두’ 손에 손을 잡고 광장으로, 대로로 나와야 한다. 모여야 한다. ‘축제’를 벌여야 한다. 더 이상 자본과 권력이 우리를 구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자율적으로, 집단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스스로 다스려나간다고 큰 소리로 외쳐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장시간 노동,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력을 좀먹는 노동, 사람과 자연을 체계적으로 압살하는 노동은 사라졌노라고, 이제 더 이상 돈 놓고 돈 먹는 이윤 게임은 끝났노라고 선언해야 한다.

“4시간 노동! 4시간 독서! 4시간 친교!”

혹시 우리 당대에 새 세상이 오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우리의 꿈은 계속 흐른다. 포기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는 한, 그래서 나의 정체성 대신에 자본을 정체성으로 바꿔 놓지 않는 한, 2세가, 3세가 그런 투쟁을 이어갈 것이다.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실패는 있어도 굴복은 없다. 패배는 있어도 배신은 없다. 힘들고 지칠지라도 참된 해방의 전망은 우리의 집단적 영혼 속에 살아 숨 쉬며 이어질 것이다. 마침내 광장에서 공장에서 마을에서 공원에서, 이제 성장지상주의, 출세지상주의는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진정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어진 사다리 안에서 더 높은 곳을 동경하고 승진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원탁에 옹기종기 앉아서 존재의 기쁨과 삶의 행복을, 관계의 소중함과 창조의 아름다움을 나누는 것임을 온 세상에 선언해야 한다.

이것 이 노동 해방이고 인간 해방이다. 그래야 “4시간 노동, 4시간 독서, 4시간 친교”라는 구호를 현실로 만들어, 날마다 “이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웃으며 살 수 있다. 그것이 자본을 넘고 노동을 넘어 참 행복을 여는 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것이 인간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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