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 어머니와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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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태일재단에서 8월27일 개최한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의 삶을 조명하다> 토론회에서 발표된 글을 발췌 및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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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의 삶의 궤적

1) 탄생, 그리고 전태일 동지의 분신 항거

이소선 어머니는 1929년 12월30일(음력 11월9일) 경북 달성군 성서면 감천리에서 부친 이성조 씨와 모친 김분이 씨 사이에서 1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장하고 성실한 소작일꾼으로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이 들면 절대 굽히지 않을 만큼 똑 부러”진 성격이었다(오도엽, 2011: 292). 네 살 때 아버지는 일제에 항거하여 투쟁하다가 학살되었고, 모친은 막내딸을 데리고 다사면 박곡리 박실마을에 20세나 많은 논 네 마지기 농군에게 개가해, ‘연후댁’이라는 이름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오빠(이상일)는 일본으로 밀항하고 언니는 어릴 때 외갓집에 가 있어서 이미 가족이산의 경험을 하게 된다. 

아들을 먼저 보낸 어미가 되기까지

어린 의붓자식은 소 먹이는 일, 개똥 줍는 일, 나무 하는 일 등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구구단과 한글을 깨우치려 노력했다. 일도 고통스러웠지만 마음에 사무친 것은 ‘차별’이었다. 박실마을은 정씨 집성촌으로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하고 더욱이 의붓자식에 대한 업신여김이 유난히 심했다. 이때의 경험 때문에 어머니는 ‘사람 차별’을 가장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오도엽, 2011: 313). 1945년 이른 봄, 어머니는 대구 방직공장에 근로정신대로 끌려가서 극악한 근로조건에 채찍질과 배고픔을 견뎌내며 강제노역을 하던 중,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공장을 탈출하여 숨어 있다가 해방을 맞는다. 

어머니는 1947년 18살의 나이로 대구 남산동의 봉제공 출신 가난한 자영업자 전상수 씨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다음해 9월28일(음력 8월26일) 장남 전태일을 낳았고, 이후 태삼(1950년), 순옥(1953년), 순덕(1958년)을 출산했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 부산으로 옮겨 남편이 미군부대에서 옷 수선으로 생계를 꾸려오다가, 4년 만에 사업 실패로 서울로 이사를 와서 서울역 염천교 주변에서 팥죽 장사, 채소 장사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960년 남대문 대도시장에서 옷 공장을 하던 남편이 브로커에 속아 사업을 망치고, 이태원 달동네를 거쳐 용두동 천막촌에서 생활하다가 대구로 옮겨 갔다. 

1964년 생계를 위해 어머니 홀로 서울에 와서 식당 일을 하다가 피를 쏟는 중병을 얻어 요양한 뒤, 중앙시장에서 우거지 장사를 하며 주변 거지 아이들을 자식처럼 돌봤다. 이 무렵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가 전태일 동지와 어머니가 다시 만나, 남산동 80번지 판자촌에 셋집을 얻어 가족 모두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불이나 도봉동을 거쳐 공동묘지인 쌍문동 208번지에서 무허가 벽돌집을 지어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족과 아들의 친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고, 심지어는 영안실에서 나오는 죽은 사람의 옷을 빨고 기워서 내다 파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다시 중병을 앓게 되고 끝내는 실명하게 된다. 주변 사람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던 어느 날 눈을 뜨게 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한편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남편은 1969년 4월 뇌출혈로 세상을 뜨게 된다. 

전태일 동지는 삼발이 장사, 우산 장사, 구두닦이 등을 하다가, 1964년 시다 모집 광고를 보고 평화시장 삼일사에 취직을 하고, 미싱 보조를 거쳐 1966년 가을, 통일사 미싱사, 한미사 재단 보조로 옮기고 1967년 재단사가 되었다. 전태일 동지의 관심은 평화시장 어린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집중되었다. 전태일 동지는 아버지와의 대화 속에서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고, 1969년 6월 말경 ‘바보회’를 결성한다. 그리고 두 차례 해고를 당하면서도 ‘삼동회’를 조직하여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 실행을 추진한다. 어머니에게도 근로기준법을 배우라고 요구한다. 

동지는 여러 방도를 동원하여 노력하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도 높고 두터웠다. 결국 동지는 스스로를 불태워 그 벽을 허물고자 하였다. 1970년 11월13일 22살의 나이로 전태일 열사는 몸에 불을 붙인 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절규하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말을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남기고 산화한다.

연이은 시련과 고통, 어떻게 이겨냈을까

전태일 동지의 분신 항거 전까지 어머니의 41년간은 파란만장 기구한 삶의 연속이었다. 물론 당시는 누구에게나 살기 힘든 세상이었지만, 어머니는 유난히 어려운 고비들을 많이 겪는다. 겨우 철이 들 무렵 아버지의 죽음, 오빠를 살리기 위한 어머니의 개가, 세끼 연명조차 힘들었던 가정 형편에, 의붓자식에 대한 차별과 박대, 형제의 생이별, 근로정신대의 강제노동 등 어릴 적 경험들은 가혹한 시련들의 연속이었다. 이 가운데 어릴 때 가족관계에서 겪었던 힘들었던 경험들(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개가, 오빠 언니와의 생이별 등)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바탕을 형성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속에서도 글자를 깨우치려 노력하고 차별에 항의한 일, 목숨 건 공장 탈출 등의 행동은 비슷한 나아의 또래들에 비해 당돌하다고 할 만큼 당찬 투지를 보여준다. 아마도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이 들면 절대 굽히지 않을 만큼 똑 부러”진 아버지의 성격을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여러 난관을 겪으면서 어떤 일이든 일단 부딪쳐 보자는 식의 강한 도전의식이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최근까지 기억하고 있을 만큼 강했던 차별에 대한 저항도 그러한 도전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결혼 후 가정을 꾸리고도 시련과 고통은 계속되었다. 남편의 연이은 사업 실패와 가족의 이산,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겨운 심각한 생활고와 연이은 병고를 겪으며 겨우 살아남는다. 이 시기는 우리 가난한 민중들의 절대빈곤의 시대이었지만, 어머니의 삶은 어느 누구와 비교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조건들 속에서 펼쳐졌다. 인간은 누구나 삶에 대한 집념을 강하게 지니고 있고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훨씬 강한 집념을 가진 것이라 치부해버리기에는 한계상황이 연속적으로 너무 많이 다가왔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개는 생활고에 지친 나머지 체념 상태를 운명으로 받아들여, 평범한 하층민으로 살거나 삶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긋지긋한 고생을 이겨내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해 네 명의 아들과 딸을 길러냈고, 그 중에서 전태일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키워냈다. 스스로도 다른 자식들과 함께 고되기 그지없는 노동운동에 몸을 던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인내력과 도전의식, 그리고 밑바닥 사람들에 대한 사랑

거기에는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있던, 어떤 상황에도 참고 견뎌내는 인내력과 상황 타개를 위한 도전의식, 투지 등이 기초체력처럼 작용했을 것이다. 그 위에 남편을 대신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의식, 자식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 나쁜 조건에 대해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주변의 거지 아이들까지 거두는 인간애, 극도의 열악한 상황도 타개해내는 생활상의 지혜 등이 중첩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살아남기조차 고통스러웠던 생활상의 어려움들을 극복해낸 동인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아가 어머니는 스스로 낙오 직전의 고달픈 인생역정의 어려움을 경험을 통해 속속들이 알고 있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가족을 포함하여 주변 밑바닥 노동자들과 핍박받는 모든 민중들이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그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아들인 전태일 동지가 밑바닥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적극 나선 데 동의하고 아들의 권고에 따르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곧 전태일 동지는 극한에 가까운 고통과 설움을 당했기 때문에 그토록 결연한 실천과 투쟁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고, 이후 어머니가 운동에 뛰어든 것 역시, 아들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기도 한 것이지만, 스스로 밑바닥 생활을 이해하고 그 해결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인식한 결과라는 것이다. 

요컨대 어머니는 감내하기 어려운 시련과 고통을 성장 과정에서 체득한 끈질긴 인내력과 강한 도전의식으로 극복해내고, 밑바닥 노동자들을 사랑으로 감싸고 함께 싸울 수 있도록 스스로 온몸을 던지려는 아들의 결단을 지지하고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처럼, 모든 어머니는 강한 생명력과 투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이소선 어머니와 같이 자신이 경험한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투쟁에 뛰어들고, 핍박받는 사람들에 대해 한없는 사랑을 베풀며 난국을 헤쳐 극복해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갖추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이소선 어머니의 특별한 강점을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운명적인 것으로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이소선 어머니의 인생역정은 사람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하느님께서 무언가 특별한 목적이 있어 그에게 감당토록 한 운명적인 인생역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즉 고난과 시련, 그것도 지독한 고난과 엄중한 시련을 통해서만 더 없이 큰 지혜와 더없이 큰 사랑을 얻는 것이 인생의 이치임을 보여주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삶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장기표, 2008: 165).

2)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투신

(1) 아들과의 약속

1970년 11월13일 전태일 동지가 눈을 감은 후 어머니의 삶은 온통 노동운동에 집중된다. 어머니는 박정희 정권의 회유와 협박 및 매수공작을 단호히 물리치고, 긴급한 노동조건 개선조치와 노조 결성 보장 약속을 받아낸 후 닷새만인 11월18일 전태일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11월27일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를 결성해냈다. 

아들 전태일 동지와의 마지막 약속

이후 어머니의 삶은 끊임없는 악전고투 바로 그것이었다. 투쟁의 현장, 핍박과 억압에 대한 항변과 격돌의 장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친자식 전태일 동지와 같이 산 22년보다 더 많은 39년의 세월을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핍박받는 민중들의 어머니로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사기관에 잡혀가고 구류를 살고 구속된 횟수가 250번을 넘는다고 했다(하종강, 2011: 476). 법무부 문서에는 이소선 어머니가 180번이나 구류처분을 당했고 3년여의 옥살이를 치룬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김남일, 2011: 498). 과연 무엇이 그 조그만 체구에 몸도 약한 여인을 그 험난한 길에 나서게 한 것인가? 무엇 때문에 어머니는 평범한 시민의 삶을 내던지고 용광로와 같은 투쟁과 저항의 현장에 온몸을 던지며 천만 노동자들을 사랑으로 가슴에 안으려 한 것인가?

아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어머니의 생각은 거의 신념에 가까울 정도로 확고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태일 동지와의 절박했던 마지막 대화가 자리하고 있다.

“어머니, 내가 3분 있다 죽을지, 10분 있다 죽을지 모르니…… 내가 말하는 것 잘 듣고 엄마 꼭 들어주세요.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합해서 싸워야지 따로따로 하면 절대로 안돼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가 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이대로 가면 전부 결핵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캄캄한 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조금씩 구멍을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 내가 부탁하는 거 꼭 들어주겠다고 크게 한번 대답해 봐요.”(민종덕, 1990: 32, 오도엽, 2011: 83-84).

어머니는 피가 목에서 울컥울컥 쏟아지는 처참한 모습을 보며,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라고 두 번 세 번 크게 답한다. 열사는 친구들에게 “부모에게 효도하고 시간이 좀 남으면 우리 어머님께도 날 대신해 효도를 해주게.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도 꼭 이루어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네. ……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하며, 큰소리로 맹세한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어머니에게 “배가 고프다.”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는다. 이런 이야기를 어머니는 미칠 것 같은 그리움을 담아 여러 사람에게 들려준다. 어떤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의 처절했던 마지막 모습과 약속을 잊을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들이 이루려다 못 다한 뜻을 이루기 위해 노동운동에 나서게 되었다고 자주 말했다. 어머니가 아들과의 약속을 삶의 가장 큰 목표로 삼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깊었던 데서 더욱 절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이 있지만, 어머니는 평생을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왔다. 『전태일 평전』을 읽다가 앓아눕는 일, 동지의 기일에 밤잠을 못 이루고 몸져눕는 일, 나이 80이 넘어서도 아들을 꿈에라도 한번만 봤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흘리는 일(배은심, 2011: 42) 등등이 그 표징이다. 그 어려운 시절에 낳아 기른 장남이어서 더욱 애착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배은심, 2011: 137). 

투쟁과 고난의 현장에 항상 함께했던 어머니

어머니는 1971년 사용자들이 전태일 동지 사진을 박정희 사진으로 바꿔달려고 하자 이를 저지하고, 그 후부터는 아들 사진에 딱딱한 종이를 붙여 구겨지지 않게 한 후 목에 걸어 옷 속에 감추고 다녔고, 장사를 하다가도 가슴이 메어지면 사진을 꺼내 어루만지며 “꼭 너의 뜻을 이루겠노라.”고 다짐했다(안재성, 2007: 124). 또 평소에 어머니와 아들은 주변에서 살뜰하기로 소문이 날 정도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고 하며, 아들이 엄마 준다고 공장에서 남은 천 조각으로 만든 내의를 40년이 지나서도 입고 있었다(전태일기념사업회, 2008: 262). 무엇보다 거지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 돌봐주고, 감방에서 허기진 아이들에게 건빵을 나누어 주었던 어머니의 인간애가 아들 사랑의 바탕에 있었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는 말처럼 전태일 동지의 짙은 인간미와 인간애 또한 이와 결합된 것 아닐까 싶다. 

어머니는 아들의 유언을 지켜내기 위해 40여 년간 혼신의 힘을 쏟는다. 어머니의 삶은 노동현장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점차 민주화운동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해갔다. 이를 통해 어머니는 분신 항거 직후부터 아들과의 약속을 성실하고 훌륭하게 이행한다. 그리고 노동기본권이 완전 봉쇄된 1970년대 유신독재체제의 삼엄한 상황을 뚫고 청계노조를 지키고 키워냈다. 청계노조는 민주노조운동의 발상지이자 요람으로, 역사적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자 노력했다.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민주노조들이 등장하고 자주적 민주적 투쟁적인 활동가들이 수없이 늘어났다. 

민주노조운동은 1980년대 새로운 노동운동의 모색기를 거쳐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분출한 노동자 대중의 분노와 열망을 바탕으로 힘찬 노동자투쟁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노동자들은 전태일 동지가 바라마지 않던 인간다운 삶, 노동해방을 소리높이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이후 노동운동은 다시 험난한 조건에 눌려 신음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한시도 쉬지 않고 노동현장에 나가 “힘을 내라.”, “힘을 합쳐 헤쳐 나가라.”며 북돋았다. 격렬한 투쟁의 현장, 어려운 고난의 현장에는 맨 앞에 언제나 검은 반점투성이의 부은 얼굴에 쉰 목소리와 가냘픈 주먹의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학생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아들의 당부도 충실하게 수행했다. 생전 처음 보는 대학생을 보고 아들의 행적을 세세히 알려주고 장례를 맡기는 일에서부터,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는 아들의 소망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엄혹한 유신독재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청계노조와 자신을 찾아오는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자식처럼 반갑게 맞이하며, 그들의 얘기를 성실하게 경청하고 실행에 옮겼다. 공권력에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피신시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학생들과 지식인, 종교인 등 재야민주인사들은 어머니와 청계노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활동에 기꺼이 참여했다. 이들 대부분이 유신반대투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청계피복노조의 투쟁과 활동은 민주화운동진영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갈 수 있었다. 이렇게 평화시장은 노학연대 실천의 장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흐름은 청계피복노조 복구를 위한 격렬한 시위투쟁으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지식인, 대학생들의 거대한 노동현장 투신의 흐름을 형성하는 데도 이바지했다. 

아울러 어머니는 치열한 투쟁을 통해 재야 민주화세력과 연계를 맺고 사회문제의 외곽지대에 머물러 있던 노동문제의 심각성과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앞에 서서 투쟁함으로써, 사회운동을 정치적 측면에서 승화시킨다. 결국 어머니는 “캄캄한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뚫고, 학생과 노동자가 같이 끝까지 싸워서, 조금씩 구멍을 넓혀 연약한 노동자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아들과의 약속을 120% 지켜낸 것이다.

(2)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의 견인차로서 자기결단

이처럼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과의 목숨을 건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어느 면에서는 아들의 ‘마지막 유언’이 어머니의 그 후 삶을 규정한 기본적인 동인 또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아들을 키워온 20여 년보다 두 배 가까이 긴 세월동안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험난한 투쟁으로 지샌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이뤄진 운동가 이소선의 삶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과의 약속이 절박한 것이라 하더라도, 생명까지 위협하는 폭압적인 유신독재체제와 신군부 정권의 탄압, 그리고 굴곡이 심한 노동운동 과정과 극심한 생활고 등으로 인해 포기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1970년대 이후 어머니의 삶이 전적으로 아들과의 약속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곧 어머니는 아들의 장렬한 죽음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지만, 이후의 삶의 전 과정은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지적들이 이를 말해준다. 

“사람들은 보통 이소선 어머니를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로 위치 짓는다. 그러나 가까이 모셔온 어머니는 단순히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만은 아니었다. 아들이 누구였는가와 상관없이 이소선 여사는 그 자체로 노동자의 어머니요 민중운동의 지도자였다. 이소선 어머니는 분명 아들의 뜻을 살리기 위해 노동운동을 시작했지만, 어느 결에 그 자신이 아들보다 열 배 백 배 더 열성적인 투사가 되어 진보운동의 지도자로 그 역할을 다해왔다.”(안재성, 2011: 166-167).

“전태일이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얼굴을 들추어낸 횃불이었다면, 이 여사는 노동자의 빛이었다.”(신영복, 2011: 245).

“전태일이 불이었다면 여사는 물이었다.”(김근태, 2011: 393).

“마흔 살까지 이소선은 전태일의 어머니였다. 그로부터 다시 마흔 해는 이소선의 아들이 전태일이었다. 어머니는 전태일을 두 번 낳았다.”(백무산, 2011: 296).

“당신은 생물학적 전태일의 어머니에서 열사의 어머니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에서 노동자의 어머니로, 산자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기시며 이 자리에 오셨다. …… 열사의 분신은 분노와 좌절에서 온 극단적 행동이 아니라 제 한 몸 불살라 해저문 언덕을 넘고 캄캄한 굴을 뚫고 나갈 횃불이 되어 주시었고, 어머니는 그 횃불을 세상 사람들 손에 들려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마흔 해 한날한시도 거르지 않고 몸소 그 횃불을 들고 노동자들의 진보대열에 함께 하셨습니다. 다투지 말 것이며 작은 차이를 넘어 크게 하나가 되어 나가라고 타이르며 꾸짖으며 다시 다독이셨습니다.”(오종렬, 2011: 46).

“당신은 아들이 죽음으로 연 새로운 길을 더 넓게 더 힘차게 열었습니다. 당신은 생애 절반을 전태일의 어머니로 살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바로 전태일로 살았습니다. …… 당신의 아들은 자신과 시다들의 삶에서 노동자의 처지를 보는 눈이 있었고, 그 처지의 뿌리를 파헤치려는 지혜를 지녔으며, 바보회를 통해 주위의 벗들과 함께 하는 힘을 보여주셨고, 폭력의 침묵에 절망하면서도 피억압자의 거의 유일한 무기, 바로 자신을 던져 싸우는 용기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 하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당신은 아들이 죽음으로 연 새로운 길을 더 넓게 더 힘차게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때로는 묵묵히, 때로는 거침없이 걸었습니다.”(안효상, 2011: 53).

“심지어 나는 전태일 열사가 있기에 이소선 여사가 있다기보다는, 이소선 어머니가 있기에 전태일 열사가 있던 게 아닐까 의구심까지 가져 보았다. 이소선 여사가 없었다면 전태일 열사는 신문 한 귀퉁이의 토막기사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안재성, 2011: 166).

물론 이러한 표현들은 고인에 대한 추모의 의미에서 업적들을 크게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어머니가 행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의미와 성격을 설명함으로써, 단지 아들과의 약속 때문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결의와 결단에 의해 삶을 살아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지독한 가난과 참혹한 차별 속에서 더없이 큰 사랑과 큰 지혜를 얻어왔던 사람으로서 사회 민중운동에 나설 수 있는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장기표, 2008: 168). 

어머니는 아들이 개인적인 이유로 죽음의 부탁을 했다면 단호히 거부할 정도를 넘어서서 엄하게 나무랐을 것이고,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한 것은 아들의 뜻이 옳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세상의 잘못에 대해 분노하고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장기표 선생은 어머니의 삶이 스스로의 뜻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전태일 동지가 자기 어머니에게 “내가 못 다한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세요.”하고 부탁한 일이고, 둘째는 아들이 죽은 직후 당시 학생들에게 장례식까지 맡길 정도로 학생운동권 사람들을 전적으로 믿고 함께 한 일이며, 셋째는 정부 관계기관에서 위자료 명목으로 건넨 거액의 돈을 단호히 거절한 일이다(장기표, 2008: 169). 곧 전태일 동지의 유언은 어머니가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결과이고, 이미 어머니는 엄혹하기 그지없는 밑바닥 생활 과정을 통해 정의로운 일을 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 학생운동에 장례식을 맡김으로써 정치 사회문제로 확대 부각시킬 수 있다고 혼자서 판단한 점, 정부기관의 매수공작을 단호히 거부한 것은 부정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하며 노동자에게 비인간적인 일을 강요하는 잘못된 사회는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는 확신을 본능적이라 할 만큼 갖고 있었다는 점 등이 그 이유다.

부당한 외부 간섭과 방해 책동에 단호했던 어머니

아무튼 어머니의 투쟁과 고난은 전태일 동지의 분신 항거 직후부터 시작된다. 

먼저, 자신과의 투쟁이다. 어머니는 이미 분신 사실이 알려졌고 친구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도, 택시를 버리고 버스를 갈아타면서 병원으로 갔다. 아들은 이미 죽은 것이고 빨리 가서 아들을 보면 아무 생각할 여지도 없이 기절하고 말 텐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오도엽, 2011: 81). 이러한 태도는 세상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감정을 억제하고 앞날을 생각하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취하기 어려운 냉정한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대응은 자신에게 엄격한, 자기와의 투쟁의 극치로서, 아들의 행적에 대한 확신과 밑바닥 삶을 견뎌온 어머니 생애의 압축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철저한 자기와의 투쟁은 분신 직후 정부기관에 대한 대응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훗날 감정으로 치닫기 쉬운 숱한 투쟁 과정에서 보여준 인내와 자제력, 그리고 냉정하면서도 단호한 대응으로 나타난다. 웬만해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모습도 자기와의 투쟁의 한 단면이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청계노조의 모든 투쟁과 활동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앞에 있었다. 어머니를 중심에 두지 않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그런데 초기에 어머니는 노조에 대한 경험이나 사전지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청계노조 안팎에 많은 대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이 같이 했지만, 그들 역시 현장활동에 대해 무지했고 어머니에게 지혜를 빌려줄 처지에 있지 못했다. 청계 노조원들 역시 노동자이기는 하지만 훈련된 조직노동자는 아니었다. 아들과의 약속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투쟁과 활동 방법은 제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정확하게 형세를 판단하고 투쟁으로 모든 난관을 돌파해냈다. 여기에는 삶의 과정에서 어머니가 체득한 노동의 가치와 정의에 대한 확신과, 노동자에 대한 넓고 깊은 사랑이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 없이는 조합원들의 청계노조에 대한 애착이나 목숨을 건 격렬한 투쟁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운동이 발전하면서 청계노조 내부에도 갈등과 알력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그 해결의 정점에는 언제나 어머니의 판단과 조언이 작용하여 왔다. 

어머니는 부당한 외부 간섭이나 방해 책동에 대해서는 앞장서 단호히 투쟁했다. 그러면서도 조직 운영이나 활동 방향을 결정 하는 데 있어서는 노조 스스로 논의하고 결정하도록 자율성을 보장했고, 자신에게 물어올 때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노동운동과 함께 성장한 어머니의 삶

어머니의 투쟁 및 활동영역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쳐 민주노조진영이 구축되면서 급격히 확대된다. 어머니는 민주노조진영의 구축에 이은 전노협의 건설과 민주노총의 출범을 누구보다 기뻐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의 발전에도 큰 기대를 걸었다. 어머니는 1987년 이후의 노동운동의 성장과 발전이 아들이 꿈꾸어온 세상을 앞당기는 것이라 보았다. 전노협, 민주노총은 전태일 동지의 분신 항거일을 기려 매년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였고, 어머니는 민주노총의 거의 모든 행사에 참여하여 노동자들을 격려하였다. 

그 중심 화두는 언제나 ‘노동자 전체의 단결’이었다. 한국노총에 대해서는 청계노조 설립 초기에 김성길 초대 지부장 등의 지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왔지만, 1970년대 이후 한국노총이 정부에 눌려 무력화하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 후 1990년대 후반 한국노총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관계를 트기 시작했고, 2001년에는 전태일 노동상이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에게 수여되는 단계로 발전했다. 한국노총 간부들이 전태일 동지 추도식에 매년 참석하였고,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와 회원으로 가입하거나, 어머니가 직접 한국노총 행사에 참여하는 등 한국노총과의 관계를 공식화했다. 

이와 아울러 어머니는 전태일기념사업회 활동이 확대되면서 분주해졌다. 1984년 이름을 바꾼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과 확산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1988년부터 활발하게 전개했다.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실천 기간 설정, 전태일 문학상 및 전태일 노동상 수상, 각종 토론회, 문학 및 문화 행사, 기념관 준공, 영화와 연극 제작, 전태일 거리 및 다리 설치와 거리 동판 사업, 표지석 설치, 소식지 『사람세상』 발행과 전태일 거리 문화제, 다시 만나는 전태일 행사 등등이 그 예들이거니와, 이 모든 사업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업과 활동들은 단순히 전태일 동지의 노동운동 정신을 계승 확산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많은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노동단체, 사회시민운동, 학생운동, 농민운동, 지식인운동을 서로 결합시킴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촉진시키는 역사적인 계기를 이룬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재야 민주화운동에의 참여와 활동

어머니 자신의 뜻에 따라 인생 후반의 역정을 살아왔음을 나타내는 일로서 재야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투신한 일을 들 수 있다. 어머니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자 가족모임이 조직되자, “내 아들의 몸은 땅 속에서 잠자고 있지만 혼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으니 나도 구속자 가족이다.”라고 하며 목요기도회 등의 인권 집회에 참석했다. 어머니는 반유신투쟁에 나선 재야민주화인사들의 재판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왔으며, 집회에서는 가장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기동경찰과 싸우는 등 언제나 선두에 서서 과감한 행동을 보였다.

1975년 4월 인혁당 관련으로 8명이 처형당할 때도 격분한 어머니는 유가족들과 함께 데모에 참가했다. 이때도 어머니는 영구차를 가로막고 드러누웠고, 기동경찰에 구둣발로 차이고 머리채를 잡히고 곤봉으로 두들겨 맞으며 격렬히 싸우다 연행되었다(민종덕, 1990: 229-230, 金英琪, 1977: 344). 

또한 1975년 2월21일 설립된 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 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1985년 12월12일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아 삼엄했던 유신독재체제에 맞선다. 이어 1986년 8월2일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약칭 유가협)를 설립하여 1993년까지 초대회장을 맡고, 2009년 2월28일에는 고문으로 추대받아 활동한다. 

1988년에는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135일간의 농성을 전개하고, 1989년 1월5일에는 대선 부정투표를 폭로한 이동균 대위의 양심선언 투쟁을 조직한 데 이어, 1989년 3월 범민족대회 판문점 예비회담 남측 대표로 참가하려다 불구속 입건되었다. 또한 1989년 12월 시화전을 열어 유가협의 보금자리인 ‘한울삶’을 마련하여 입주시키고, 1998년 11월4일 의문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 앞 422일간 천막농성에 참여한다. 2006년 5월14일 평택 미군기지화 반대 집회에 참가하여 격려 연설을 하고, 2007년 5월1일 창원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참관하여 이북 노동자들 만나기도 했다. 2008년 5월8일에는 용산참사 현장을 찾아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이명박 정권을 규탄하는 집회 시위에 앞장선다. 

이러한 어머니의 활동과 투쟁들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넓은 의미에서의 전태일 동지의 당부에 포함되는 성격의 것들이다. 하지만 평화시장의 어리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노동자들을 출발점으로 하여 노동해방, 노동의 인간화를 희구했던 전태일 동지의 당초의 뜻보다는 훨씬 범위가 넓다. 이것은 어머니 스스로가 숱한 투쟁을 통해 체득한 정치적 사회적 인식의 결과이며,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40여 성상을 올곧게 살아왔다는 데 대한 중요한 근거일 것이다. 

2. 어머니를 지탱해준 요소들

어머니는 아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약속을 계기로 하여, 스스로의 결의와 결단 그리고 실천과 인식의 변증법적 고양 과정을 거쳐 이 나라 역사 발전에 거대한 디딤돌이 되었다. 그러나 40여 년을 병마에 시달리며 난폭하기 그지없는 권력과 자본의 횡포와 맞서는 일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이를 이겨내고 투쟁의 맨 앞에 나설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의 다짐과 노력이 누구보다 치열했던 결과지만, 그 외에도 어머니를 지탱할 수 있게 여러모로 힘이 되었던 요소들도 있었을 것이다.

노동운동 및 민주화운동의 진전, 그리고 가족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계노조를 비롯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과 1987년 이후 크게 확장된 민주노동운동의 영역 및 민주화의 진전일 것이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비록 소수이지만 어머니로 하여금 강한 책임감과 함께 긍지와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을 것이다. 아울러 전국 전 산업에서 폭발한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위력과 전노협, 민주노총의 출범 그리고 한국노총의 개혁 추진과 민주노동당의 진출은 어머니 자신의 치열한 투쟁이 기여한 바가 크지만 중요한 환경 변화로서 어머니가 큰 자부심을 갖고 더욱 운동에 정진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들 일련의 성과들에 대해 어머니가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의미를 크게 평가하고 기뻐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전태일기념사업회, 2008: 255-259). 

둘째로 어머니를 지켜준 요소는 가족들의 힘이다. 전태삼, 전순옥, 전순덕 등 가족들의 생계에 대해 어머니는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챙기지 않았다고, 그래서 미안하기 그지없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노동운동에 몰아넣고 어린 손녀 손자들에게 푸른 수의의 험악한 모습을 자주 보인 일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자식들은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어머니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랐다. 나아가 스스로 결혼도 하고 외국에 유학해서 박사까지 받아오기도 했다. 가족 구성원들의 이런 생활과 의식은 어머니가 투쟁에 과감하게 나설 수 있는 기본환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청계노조 조합원들과 재야운동가들

셋째, 전태일 동지의 친구들과 청계노조 조합원들의 존경과 사랑이다. 최종인, 임현재, 이승철, 김영문, 신진철 등은 전태일 동지가 눈을 감기 직전 “부모에게 효도하고 시간이 좀 남으면 우리 어머님께도 날 대신 효도를 해주게.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도 꼭 이루어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네. ……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말을 듣고 큰소리로 맹세했다. 이들은 약속대로 아들이 되었다. 아들의 친구인 최종인, 이승철, 임현재는 아예 쌍문동으로 이사해 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딸과 아들을 자처했다. 

이들은 청계노조운동을 주도하였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어머니와 행동과 의견을 같이 했다. 항시 목숨을 건 투쟁의 전면에 서고 연행과 수배 구속을 밥 먹듯 당했다. 이들은 어머니와 같이 지방 시골에서 가난에 짓눌리면서 성장해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청계천 노동자들은 부모, 특히 어머니에 대한 애정결핍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안재성, 2007: 79). 이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 신뢰도가 남달리 깊었을 것이다. 이승철은 크리스챤아카데미 교육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어머니라고 답변할 정도였다(안재성, 2007: 83). 이들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청계노조를 지키고 키우는 데 온 몸을 던졌고,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갈등도 생겨나지만 이들 사이의 끈끈한 정과 결속 의지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 보인다. 

넷째, 장기표 선생을 비롯한 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을 들 수 있다. 장기표 선생은 수배 중에 전태일 동지의 분신 항거 후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난 학생이었다. 어머니는 처음 그를 만나 “내 아들 태일이가 나에게도 대학생 친구가 한사람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했는데, 태일이가 죽고 나서야 나타났구나.” 하면서 분신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고 한다(전태일기념사업회, 2008: 173). 이를 계기로 어머니와 학생운동이 연결되고, 노동운동과의 결합이 진전되었다.

어머니는 어느 인터뷰에서 문익환 목사를 가장 존경하고 좋아한다고 밝혔다. 어머니는 재야인사로서 영안실에 처음 찾아온 고 장준하 선생을 필두로 70년대 이후 재야민주화운동가 대부분을 만났다. 어머니는 언제든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르쳐주어서 일을 한다고 말한다. 특히 장기표 선생한테 배워서 노동운동도 하고 민주화운동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당사자들은 어머니 스스로의 의지의 발로일 뿐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그러나 엄중하기 이를 데 없는 정치적 압박 상황에서 지식인들과의 접촉과 대화는 상황판단의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을 것이고, 심리적으로도 많은 의지가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거의 모든 재판과 기도회, 집회, 회의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그것은 노동자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싸워준 것이 고맙기도 하고,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대해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들 모임에서 민주화운동가, 지식인, 학생들이 나누는 생생한 사례들에서 많은 지식을 얻었고, 그 결과를 청계노조원들에게 전달해줄 수 있었다(민종덕, 1990: 221).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식인, 민주화운동가, 노동운동가들은 야학, 상담, 학습, 조직, 재야운동과의 연결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그 후 전태일기념사업회(김금수, 남상헌, 이광택 회장 등), 전태일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전태일재단 등을 이끌고 참여한 많은 사람들도 어머니를 지탱하게 하는 큰 힘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끊임없이 빛이 돼준 종교적 신념

다섯째,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적 신념이다. 어머니는 1964년경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중병을 앓게 되고 끝내는 실명하게 되는데, 주변 사람의 권유로 교회에 나갔다가 어느 날 눈을 뜨게 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꼬이고 꼬이기만 하는 인생이었다. 쨍하니 빛 한 번 들지 않았던 삶이었다. 남편의 사업 실패는 가난이 주는 배고픔보다는 헤어날 길이 없다는 절망을 안겨주었다. 벼랑 끝으로 한없이 추락하던 어머니의 손을 잡아준 것이 교회였다. 삶의 무거운 짊을 덜어주었고 진창에 빠진 이소선의 몸을 마른 땅위로 건져 올려 주었다.”(오도엽, 2011: 57). 

그 후 어머니는 매일 아침 새벽기도를 할 만큼 기독교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교회는 한 교회가 아니라 어떤 교회라도 가서 기도를 하고 종교 때문에 다툼을 벌이거나 기독교를 믿으라고 권하는 일도 없었다. 그것은 청계노조에서 체득한 바,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조직을 통해 형성된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종교적 신념은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아들을 불태워 자신보다 일찍 떠나보낸 어미로서의 죄책감을 기도로 조금이라도 풀어보려는 모성애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된다.

3. 노동운동에 대한 관점

어머니가 노동운동과 관련하여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단결과 통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다투지 말 것이며 작은 차이를 넘어 크게 하나가 되어 나가라고 타이르며 꾸짖으며 다시 다독였다.”(오종렬, 2011: 46). 또한 어머니는 “지난 마흔 두 해 동안 가히 노동 영웅의 어머니를 마구 짓밟고 할퀴고 가두고 그랬지만, 단 한 번도 쓰러진 적이 없고 …… 흔들리는 비겁자를 꾸짖어 바로세우고 병든 양심은 소스라쳐 일깨우고, 옳고 그름이 뻔한 데도 제자리를 못 찾는 분열주의 사기꾼들을 바로 세우셨다.”(백기완, 2011: 43-44). 

“뭉쳐야 이긴다.”

이처럼 어머니는 “어떤 이론가보다 노동운동의 원칙에 명쾌한 해답을 갖고 있었다.”(권영길, 2011: 395). 1970년 이후 온몸으로 익힌 투쟁의 원리는 “뭉쳐야 이긴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는 하나가 되어야 이긴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갈라져 있어서는 안 된다. 정규직, 비정규직 갈라져선 안 된다. 1천만 노동자 중 10만 명만 서울광장에 모여서 하루만 집에 가지 말고 투쟁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어머니는 강조한다. 

노동자의 단결과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살아생전에 나눈 아들과의 대화와 유언에서 많이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청계노조의 투쟁 과정에서 체득한 실천적 경험일 것이다. 그는 청계노조 초기 노동시간 단축투쟁과 시다 임금 직불제 투쟁을 하면서 잘 흩어지는 노동자들의 상태에 매우 안타까워했다. 또한 어려움에 당면했을 때 흩어지는 노동자의 모습에 가슴을 조이기도 하고,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으로 인한 분열과 대립 갈등에 밤잠을 설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노동자의 통일된 행동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은 더욱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단결 통일의 신념은 한때 민주노총과 구별하여 대했던 한국노총이 내부 개혁을 추진하면서 양대 노총의 연대와 통일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발전한다. 2009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 39주기 행사 때 민주노총, 한국노총이 하나의 천에 하나의 구호로 이름을 나란히 적어 만들어 놓은 플래카드를 보며, “이제는 됐구나.”하고 기뻐하던(배은심, 2011: 42) 모습에서 이 소망은 여실히 드러난다. 

아울러 어머니는 전태일 동지의 분신 항거 후 오히려 스스로를 던져 난국을 헤쳐 보려는 노동자, 학생들이 늘어나는 데 대해 무척이나 슬퍼하면서, “더 이상 죽지 말고 싸워라.”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게 된다. 기륭전자 투쟁 현장에서, 한진중공업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에게, 어머니는 간절히 자신의 뜻을 호소한다.

대중 위에 서려는 운동에 대한 단호한 거부

노동운동의 현상에 대한 인식은 비정규직 보호를 노동운동의 중심과제로 설정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증함에도 정규직 노동자 중심으로 진행되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자 방향 제시였다. 

어머니는 “노동자의 권익 쟁취는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지 않으면 허구”(민종덕, 2011: 141)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어머니가 민가협, 유가협 활동과 통일운동, 빈민운동 등 정치투쟁에 나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또한 단순한 경제투쟁도 정치투쟁과 결합하여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청계노조의 활동 과정에서 체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도적 대중정치투쟁을 주창했던 서노련에 대해서는 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이 끝나자 해고자와 구속자 중심으로 서울노동운동연합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대중조직의 경제투쟁을 넘어선 선도적 정치투쟁노선을 제창했다. 아직은 노조를 튼튼히 꾸려야 할 시기에 공개적인 정치조직은 맞지 않는다고 보아 서노련을 처음부터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어머니는, 서노련과 함께 청계노조에 대한 공격이 가해지자 완강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어머니는 청계노조가 심각하게 침탈당하자 청계노조는 서노련 방식과 맞지 않다고 주장하고, 노동조합이 뭔지 지금이 독재와 싸워야 할 때인지 고민할 것을 강조했다. 

“노동자 속에 노동조합이 있어야지 몇몇 운동가끼리 모여 어떻게 노동운동을 하냐. 서노련을 탈퇴하고 노동자 속에 들어가 노동조합을 튼튼히 꾸려. 그 힘으로 노동운동도 하고 정치운동도 해야 옳지 않냐. 나한테 조합주의다 경제주의다, 욕을 해도 좋다. 하지만 노동자가 따라갈 수 없는 노동운동이 말이 되냐. 나는 노동조합 하면서 독재랑 싸웠다. 내가 백날 고민해도 답은 마찬가지다.”(오도엽, 2011 : 218). 

어머니는 대중조직을 무시하고 정치투쟁만을 내세우는 서노련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서노련 때문에 청계노조가 파괴되고 조합원들이 분열하여 다투는 모습이 너무도 싫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속에서 대중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의 중요성과 노동운동의 이상과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

어머니는 역사 발전에 대한 확신을 분명하게 갖고 있었다. 그 한 예로 전태일 열사 20주기 추도식 인사말을 들 수 있다. 이 말의 중요성은 전체 인사말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는 데서 잘 나타난다. 앞선 추도사에서 누군가 노동자의 처지는 과거와 하나도 다름이 없다는 의미로 말한 데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여기에는 관념적이거나 근거 없는 패배주의를 경계하고 노동운동의 변화 발전에 대한 확신을 제시함으로써, 노동자들에게 내일을 향한 희망과 승리와 전진의 근거를 제시하려는 어머니의 열정을 잘 나타나 있다. 

“왜 하나도 다름이 없는가. 내가 바보 같은 눈으로 봤는지 오랫동안에 구경거리가 됐는지 하나도 다름이 없다는 말은 안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왜 우리가 하나도 다름이 없는가. 저는 달라졌고 우리는 이겼다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왜 자기 스스로 용기 없는 말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그때는 둘 셋만 모여도 잡아갔고, 노동자 보고 근로자라 안 해도 잡아갈 땐데, 우리 막 노래 부르고 길가에 가면서 우리 8월 5일 평양 간다, 소리 지르며 다녀도 하나도 잡아가지 않았어요. 그러니 여러분과 우리 전체가 투쟁하는 힘이 얼마나 커졌는가. 정부가 아무리 탄압한다 해도 용기 있고 힘 있을 때가 많았어요. 이거 정말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있네 하지 말고, 우리 승리했네 하는 노래 좀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아는 20년은 정말 우리 힘이 얼마만큼 커졌다는 거예요. 스스로가 용기 없는 그 소리는 이젠 안했으면 좋겠어요. 쟤네들이 정말 힘이 큰 모양이다 놀라게 확실한 것 좀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 우리는 정말 하나가 되면, 우리 자신이 부끄럽지 않고 우리들 힘이 한데 뭉치면, 우리가 하려는 일은 금방 이룩할 수 있다,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동지여, 20년 전의 그때나 아직도 똑같습니다는 말은 오늘부턴 취소했으면 좋겠어요. 우린 힘이 있잖아요. 그때처럼 억압받고 가만히 있을 거예요?”(이소선어머니화갑준비위원회, 1990: 89-91). 

4. 어머니 성품의 이모저모

어머니가 몸져눕기 전, 이미 육신이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병들고 망가져 있었다. 그런데도 웬만해서는 아프다는 표정도 말도 잘 하지 않는다. 그 고통스러움을 어머니는 이렇게 실토했다.

“눈물 없는 눈물의 어머니”

“어휴, 나는 너무너무 많이 맞았어요. 비가 오려하면 그냥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나를 자빠트려 놓고 구둣발로 밟고서 살이 뚝 떨어져 옷에 엉겨 붙고 그랬어요. 집회를 할 때도 내가 몸집이 작으니까 사람들 안본 틈에 힘센 남자들이 팔꿈치로 급소를 팍 치고 가요. 그러면 정신이 멍해서 그냥 집회 끝날 때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앉아 있는 거야. …… 너무 많이 맞았어. 이런 구름 끼고 하는 날은 한 번 말하기도 너무너무 힘들어.”(이영란, 2011: 108).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운명처럼 따라다니던 배고픔과 고통스러운 일들로 이미 정상이 아닌 건강 상태에서,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이후에는 권력과 자본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수많은 상처를 입었다.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세상살이가 뜻대로 되지 않은데 대한 마음의 상처도 깊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감내하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에게 힘내자고 독려하는 그의 성품과 덕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어머니의 이런 맺힌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어머니께서는 온몸이 눈물로 가득 찬 눈물덩이셨습니다. 날마다 차올라 터지지 않을 수 없는 눈물덩이였지만 그것을 새겨내는 아, 눈물 없는 눈물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한이 복받쳐 숨결보다 더 가팔랐습니다. 하지만 속을 뒤집는 그 한을 차라리 떵딱(장단)으로 갈마(역사)를 달궈치는 이물(앞장)이셨습니다.”(백기완, 2011: 43). 

한편 어머니의 성품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바 대체로 다음 일곱 가지로 분류되는 듯하다. 곧, 총명함, 겸손, 배려, 순발력, 자제력, 낙천성, △독교인이 그것이다(장기표, 2008: 190-194). 아울러 어머니의 청계노조 결성과 성장을 위한 노력은 아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노동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사랑에는 “뛰어난 통찰력, 예리한 기지, 범접할 수 없는 대담성, 그리고 모든 사람을 감싸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는 술회도 있다(민종덕, 1990: 6). 이 지적들은 오랫동안 어머니와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풍부한 경험담과 자료를 토대로 하고 있어서, 생동감과 많은 공감을 갖게 한다. 

부담 주지 않는 편안함과 탈권위의 대담성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필자가 가진 느낌은 ‘편안함’이었다. 고생을 많이 겪은 얼굴이지만 투쟁으로 단련된 단단한 투사가 아니라 웃음 많은 평범한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청계노조원들이나 간부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도 거의 공통으로 갖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누구를 만나도 부담 주는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으며, 긴장감을 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일상의 고민이 없는 것도 아니며 건강한 상태는 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편안한 인상을 항시 지닐 수 있다는 것은 한 많은 삶의 역정에 비추어 보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어릴 때부터 겪었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거기에다 죽음을 건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노동자 민중에 대한 사랑이 없는 곳에서 그처럼 격렬한 분노와 투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깊고 넓은 인간애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탈권위의 대담성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어머니는 권력기관 또는 권력자들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1989년 유가협 ‘한울삶’을 마련하기 위한 시화전을 준비할 때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직접 찾아가 거액의 그림을 팔아온 사실이나, 1999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을 위해 422일간 국회 앞 농성 중에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따진 일 등은 투쟁의 정당성이나 확신이 없이는 행할 수 없는 탈권위의 대담한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배려에 바탕한 인내심

어머니는 인내심과 자제력이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긴박한 위기 상황이 오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당황하거나 곧바로 상대를 비난하지 않는다고 한다.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고 대응 방책을 강구하거나 상대방의 의견을 먼저 듣고 부당하다고 판단되면 단호히 비판한다. 그의 자제력은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분신했다고 하는데도 택시가 아니라 버스로 병원까지 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짐작되는 측면이다.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성장 과정의 시련과 가정을 가진 뒤에도 그치지 않은 고통을 겪으면서, 어떤 어려움도 참아내는 강한 인내심이 형성되었을 것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즉자적인 감정 대응보다는 냉정한 자제력이 요구됨을 숱한 고난의 생활 속에서 터득한 것으로 이해된다. 

어머니의 깊은 인내와 자제력은 주변에 대한 배려에 바탕하고 있는 듯하다. 본인이 심신이 괴롭고 눈물이 터져 나오려 해도 참고 견뎌내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공연한 걱정을 끼치거나 상심해서 용기를 잃게 할 수도 있다는 배려의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어제나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을 배려하여 양보하고 아껴주신다고 한다. 청계노조 조합원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민주화운동으로 자식들을 잃은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에 대한 배려 역시 매우 극진하다고 한다. 다 같이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자식들이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집회나 시상식에서 구성원 모두를 단상으로 나오게 해서 소개하기도 한다. 이런 예들은 작은 일 같지만, 생때같은 자식들을 먼저 보낸 어버이의 쓰라린 동병상련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어머니의 세심한 배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겸손한 배려는 노동자들을 격려할 때 “여러분은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자고 하지만 태일이보다 더 유능하고 위대하다, 여러분이 모두 전태일이다.”고 격려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어머니는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잘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 생각은 어머니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행로를 잘못 잡아 많은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이 같은 어머니의 배려심은 파란만장한 고난을 겪으면서 체득한 인간애의 결과이고, 특히 어릴 때 의붓자식으로서 겪은 인간적 차별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들 고맙습니다. 내 말은 이거뿐입니다.”

어머니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더없이 따뜻하고 겸손했다. 그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잘 모른다, 누군가 가르쳐줘서 아는 일”이라고 답한다. 수줍음도 많아서 먼저 나서는 일은 거의 없다. 적적한 밤이 되면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서글프게 부르는 순박한 여인이다. 지난 41년 동안 그가 참가한 집회 시위와 농성이 몇 번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도 없거니와, 공권력에 의한 숱한 연행이나 구금 끝에 네 차례나 옥고를 치렀지만, 그때마다 의지는 더욱 강해질 뿐이고 겸손함과 소박함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투사다. 그럼에도 자칫 투사들에게서 느껴지는 강경함이나 결연함보다는 포근하고 자상한 평범한 어머니의 모습을 언제나 보여주었다. 무수한 가난과 병마로 고통이 그치지 않았지만, 안부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난 괜찮다고 언제나 평온한 얼굴로 오히려 상대를 위로하고 격려하곤 했다. 깊디깊은 사람에 대한 사랑, 거친 세상에 팽개쳐진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 대한 애정, 혼자 열 걸음보다 여럿이 한 걸음으로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열망의 결과일 것이다. 

어머니는 40여 년간 헌신적인 삶을 살다보면 가끔은 으스대고 싶을 때도 있으련만, 언제든 자신이 버티어온 삶을 주변사람들의 덕으로 돌린다. “내가 살며 못한 것도 있지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할 사람도 많은 거야. 못난 사람이 이제껏 살았으니 얼마나 옆에 고마운 사람이 많겠냐. 그래서 지금까지 나를 아껴준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을 쓸라면 쓰라고 했지. 소설처럼 지어내지 말고. …… 건달이한테 글 써서 남 아프게 하지 말라고 했어. 내가 잘난 것 없이 못된 짓만 했으니 괜히 내 이야기를 쓰다가 남 아프게 해서야 쓰겄냐. …… 내 흉은 괜찮아도 남 흉 될까 싶은 거는 그것도 내 잘못이니 빼라 그랬지. …… 아무튼 모든 사람들 고맙습니다. 내 말은 이거뿐입니다.”(오도엽, 2011 : 9).

위기 상황에서 돋보이는 삶에 대한 통찰력

또한 어머니가 총명하고 순발력이 뛰어나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고 공부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다. 전태일 동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세상 이치는 누구보다 정확하고 간명하게 읽어내고 그 해결책을 실천에 옮긴다. 그는 신문이나 잡지도 제대로 보지 않음에도 지식인보다 뛰어난 식견과 통찰력을 갖추고 있다. 거기다 누구도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기지와 순발력으로 긴박한 위기 상황을 돌파해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머니의 이러한 총명함과 순발력은 사태의 본질을 간파하는 통찰력과 자기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능력은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조차 어려운 지독한 가난과 시련을 통해 밑바닥 인생을 비롯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며, 어머니와 그 아들이 지닌 정의감도, 분노와 용기도, 결단과 투쟁도, 그리고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는 희생정신도 모두 인간에 대한 사랑, 특히 밑바닥 인생도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에서 나오는 것이다(장기표, 2008, 191-192).

어머니가 갖는 통찰력이나 순발력은 삶의 지난한 과정에서 체득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의식적인 배움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노동자투쟁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재판과 기도회, 집회, 회의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그것은 노동자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싸워준 것이 고마워서였기도 하고,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대해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들 모임에서 민주화운동가, 지식인, 학생들이 나누는 얘기를 통해 많은 생생한 사례들을 듣고 많은 용기와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결과를 청계 노조원들에게 전달해줄 수 있었다(민종덕, 1990: 221). 

때로는 승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패배하여 가혹한 탄압을 받기도 한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스스로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했고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어머니는 이론보다 현실을 중시하고 장황한 논리보다 구체적인 실천을 앞세우는, 실천과 인식의 변증법적 결합을 경험하면서 의식을 높여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어머니는 언제나 당당하고 거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노동자가 존중받는 새 세상이 올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갖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5.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어머니의 일생을 조감해보았다. 내용은 장황하게 엮여져 있지만, 어머니의 삶을 만분의 일이라도 제대로 설명해냈는지 의문이다. 아무튼 어머니는 아들 전태일 동지의 거룩한 죽음을 계기로 하여 결연한 의지와 투쟁에 나섬으로써, 이 나라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 민주화운동가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는 아들과의 약속을 충실히 수행했다. 아울러 당면한 노동문제와 노동조합 과제에 대해 스스로의 결단과 투쟁력으로 과감히 맞섰다. 그의 밑바닥 노동자,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중을 위한 헌신적인 사랑과 투쟁은 전태일 동지가 죽음으로 각인시킨 사상과 철학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어려움을 뚫고 나아가려 할 때마다 되새기는 반성과 교훈의 교본으로 오랫동안 남게 된 전태일 동지의 정신은 훗날 이렇게 기려졌다. “첫째,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다. 둘째, 각성된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다. 셋째, 기존 현실에 대한 철저한 비판으로 인하여 완전한 거부, 완전한 부정으로 전환된 사상이다. 넷째, 근본적인 개혁의 사상, 행동의 사상이다.”(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1983: 156-160).

이 때문에 어머니의 삶은 성모 마리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지적되기도 한다(장기표, 헌정문집: 166). 아들 전태일을 성인으로 키워낸 것, 근 40년간 단 하루도 빼지 않고 고 아들의 죽음을 되새기면서 아픔을 겪으면서 참아낸 것, 아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생명을 건 투쟁을 스스로 해왔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인간해방, 노동해방이라는 전태일 동지의 오랜 꿈과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에도 오늘날의 노동현장은 좌절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아들 전태일 동지가 최소한의 노동기준을 지키라고 목숨을 던진 이후, 죽지 말고 맞서 싸우라는 어머니의 처절한 호소에도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죽음으로 저항했다. 

1970년부터 2006년까지 50명에 가까운 노동자가 절실한 요구를 내놓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그 숫자는 전태일-김경숙 열사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포악한 1970년대보다 노동기본권이 크게 신장되었다는 민주정부시대에 더 많아 보인다. 그만큼 비정규직 노동을 비롯한 노동문제의 심각성이 오히려 더 깊어진 결과다. 그럼에도 조직률, 현장조직력, 연대, 도덕성, 지도력, 방향성 등 노동운동의 핵심 원리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노동운동은 현상유지마저 힘겨운 상황이고, 진보정치는 파탄 직전의 위기로 몰려 있다. 

이제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는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머니가 절규에 가깝게 외쳤던 노동자의 단결과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가? 원론적인 질문 같지만 현실은 기본에 가까운 답을 요구하고 있고, 어쩌면 노동운동은 그에 치열하게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동의 지도자, 활동가, 간부들의 의식과 자세, 역할과 임무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결국은 사람이 문제를 만들고 답을 마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어머니의 생애를 재조명해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낀다. 이 글은 바로 그에 대한 문제제기 차원에서 시도된 것이고, 앞으로 많은 사람들의 논의를 거쳐 이 문제제기에 대한 풍성한 해답이 반드시 수행되기를 기대한다. 그 과정 속에서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큰 다행으로 여길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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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전태일 열사가 불이었으면 이소선 여사는 물이었다'.
김남일, '용기와 지혜, 어머니의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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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심, '영원한 노동자의 어머니'.
백기완, '아, 이소선 어머니'.
백무산, '어머니는 이 시대의 미륵이셨습니다'.
신영복, '노동자의 어머니 고 이소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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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상, '이소선 어머니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어머니라 불린 사람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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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이소선 어머니의 삶과 사랑', 『조선 질경이 이소선 - 팔순 기념 헌정 문집』, 2008, 전태일기념사업회.
민종덕, 『어머니의 길 - 이소선 어머니의 회상』, 1990, 돌베개.
안재성, 『청계, 내 청춘 - 청계피복노조의 빛나는 기억』, 2007,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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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신문 잡지 방송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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