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사회주의의 등장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7]

글쓴이 :

이상(理想) 사회에 대한 사상

노동자계급이 독자적인 계급으로서 자기 위상을 확립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갖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 제도가 만들어낸 착취와 억압에 대한 투쟁이 미처 성숙하지 못했고,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위치와 사회 계급들의 운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착취 없는 사회'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이를 이뤄내기 위한 투쟁에 관해 역사적인 전망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죠. 

마르크스는 이런 사정을 『철학의 빈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자신을 계급으로 구성할 정도로 충분히 발전해 있지 못하고, 따라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 자체가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지 않으며, 생산력이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과 새로운 사회 형성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들을 예견하게 할 정도로 부르주아지 자체의 태내에서 충분히 발전되어 있지 않은 조건에서 이 이론가들은 피억압 계급의 욕구에 대비하기 위해 각종 체계를 고안해 내고 혁신적 과학을 추구하는 유토피아주의자들일 따름이다."

자본주의의 전개와 더불어 갖가지 폐해와 모순들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이 분출합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에 반드시 따르는 무정부성, 자본 사이의 치열한 경쟁, 끝없는 이윤추구,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 날로 커지는 빈부격차, 갈수록 심해지는 도덕적 타락이 드러나면서 노동자계급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죠. 

'이성'(理性)의 왕국은 부르주아지의 이상화(理想化)된 왕국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적 사법(司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평등'은 법률상의 부르주아적 평등으로 귀착되었다는 것, 가장 본질적인 인권의 하나로 선포된 것은 부르주아적 소유권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성 국가, 즉 루소의 사회계약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태어났고, 또 그런 것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통찰이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통찰과 인식은 사회 변혁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고, 새 사회에 대한 사상들을 만들어내는 토태가 되었죠. 

유토피아의 긍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폴락(L. Polak)의 『미래의 모습』에서 제시된 주장이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유토피아는 정신의 자기 해방을 통한 인간 해방 역사의 이정표다. … 인간 문명의 전개를 특징짓는 역사적 투쟁은 유토피아로부터 제기된 요구들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유토피아는 세계상 및 인간상을 변화시킴으로써 본질적인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유토피아는 현재와 미래를 이어준다. … 한편, 유토피아는 시대 정신의 자손이며 지배적인 세계상의 표현이다. 다른 한편, 유토피아는 다가올 세대의 사고를 반영한다. 유토피아는 미래의 유산을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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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토피아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년)가 그리스의 두 단어 topos(장소)와 ou(부정)로 만든 '유토피아'(Utopia)에서 유래된 말로서 원래는 '어디에도 없는 곳'을 뜻한다. 모어는 이 말을 1516년 출간된 소설 『최선의 국가 상태와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섬에 대하여』의 제목으로 삼았다. 모어는 이 소설에서 정치적·사회적 평등이 실현된 새로운 사회, 국가 질서의 모델을 제시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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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소유의 철폐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와 관련한 이론과 사상을 낳았습니다. 근대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은 토마스 모어의 이론에서 출발하죠. 모어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사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토대를 형성한 변혁의 서막'을 목격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본의 시초축적 과정과 부르주아지의 부상, 봉건제의 몰락으로 발생한 영국의 사회적·정치적 대립, 그리고 대규모로 진행된 농민들의 프롤레타리아화와 빈곤화를 체험하죠.

모어는 영국에서 시행된 엔클로저(enclosure, 종획) 운동의 사회적 결과를 '인간을 잡아먹는 양떼들'로 묘사했고, 헨리왕(1491∼1547년)이 통치하던 시절 7만2천여 명에 이르는 크고 작은 도둑들이 처형당한 사실을 두고 영주와 용병들이야말로 진짜 도둑이라고 일갈했죠. 

그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완전히 제거해야 착취와 적대적 계급 사이의 이해관계가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곳, 돈이 모든 것을 재는 척도가 되는 곳, 이런 곳에서 정당하고 행복한 정치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 소유물을 어떤 식으로든 평등하고 정당하게 분배하고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유일한 수단은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평등과 정의의 정신을 토대로 건설한 유토피아의 근본 명제는 유토피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체를 그 핵심으로 합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두가 모두를 위해 의미 있는 노동을 수행하고, 물질적 재화를 공동으로 생산하며, 개인들이 번갈아 행하는 공공 복지 활동이 자연스럽게 인간 생활이 됩니다. 여기서는 빈곤이나 사치, 사유재산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안락한 삶을 영위하고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게 되죠. 농업, 노동, 교육, 재화의 분배 등은 국가가 조직합니다. 

모어는 자본의 시초축적을 탁월하게 표현했고, 사적 소유 문제를 착취에 대한 비판과 관련지어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어요. 그의 유토피아는 '천년 왕국설'과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합리성을 띤 사회적 유토피아 이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론은 대중들이 생각하는 유토피아와 일치하진 않았고, 당시 영국의 상황에도 맞지 않았죠. 유토피아와 더불어 시작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사상은 그 뒤 길고도 복잡한 길을 걷게 됩니다. 

모어의 사상은 1세기 후 토마소 캄파넬라가 구상한 유토피아적 계획서인 『태양의 나라』에서 되살아납니다. 캄파넬라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14살 때 수도사가 됩니다. 1598년 반(反) 에스파냐 폭동에 참가해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했는데, 그가 구상한 '태양의 나라'에서는 사회 불평등의 원천인 사유재산이 폐지되고, 모든 주민들은 4시간 동안 일해야 하며 생산물은 필요에 따라 분배됩니다. 캄파넬라는 사유재산제의 형성 원인을 일부일처제에서 찾았으며, 사유재산의 철폐를 위한 유일한 전제가 '여성 공동 소유'라고 주장했죠. 캄파넬라는 모어와 마찬가지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철폐와 평등한 분배를 중시했으나, 사회경제의 구조에 대한 분석을 구체적으로 시도하지 않았으며, 사회 발전에 대한 역사적 접근에까지 이르진 못했습니다. 

베라스 달레는 17세기 프랑스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가장 탁월한 사상가로 평가받습니다. 베라스 달레는 『세바랑브의 역사』를 통해 사회주의를 인간의 자연적 속성에 부응하는 이성적 질서로 묘사했죠. 그는 애초 원시적 가족 공동체에서 이성의 원리에 부응하는 공산주의적 질서로 나아가는 발전 과정을 설정하려 했습니다.

모어, 캄파넬라, 달레가 사회주의 국가 제도에 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당시의 구체적인 사회 상황에 비판적으로 맞섰고, 이를 나름의 이론으로 소화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 합니다. 그들의 사상에서는 노동 문제와 정의롭고 평등한 노동 분배가 큰 영역을 차지하죠. 그러나 그들이 묘사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 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어요. 이들은 이상적인 사회 질서, 즉 지식인 계층이나 계몽군주가 지배하는 사회 질서를 기술하는 데 만족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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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클로저
우리나라 말로 종획(綜劃)운동이라 불린다. 영주·지주가 미개간지·공유지 등 공동 이용이 가능한 토지에 담이나 울타리를 쳐서 농민이나 주민의 이용을 막고 사유지로 만든 일을 말한다. 한마디로 농민으로부터 땅을 수탈하는 운동으로 주로 영국에서 볼 수 있었던 토지 경영의 사유화 현상이다.

영국의 경우, 중세 때 시작되었고 19세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가장 활발하게 시행된 것은 15∼16세기와 18∼19세기의 두 시기였고, 사회 문제가 된 것은 15세기 말 이후였다. 일반적으로 그 첫째 시기를 제1차 엔클로저, 둘째 시기를 제2차 엔클로저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농민의 실업과 이농 현상이 심해졌고, 농가의 황폐, 빈곤의 증대는 엔클로저에 대한 통렬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정부에서도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고심한 나머지 자주 금지령을 내렸지만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아무튼 엔클로저 때문에 중소농은 몰락해 농업노동자가 되거나 농촌을 떠나 공업노동자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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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와 부자의 대립 

18세기 들어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면서 더 깊이 있는 내용을 선보입니다. 유토피아주의자들 가운데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던 쟝 메리에는 『유서』에서 인간은 본래 평등하며, 인간의 유용 노동으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죠. 그는 기존 사회 질서를 부도덕한 것으로 보고, 재산 공유를 토대로 하는 사회주의적 질서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또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일하지 않는 부자나 절대권력자들 사이의 대립을 정당화한다는 이유로 종교를 반대했죠. 나아가 민중을 계몽하여 그 힘으로 압제자를 쫓아낼 것을 촉구했어요.

18세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모렐리는 그의 『자연법전』에서 인간 본성에 맞는 원시 공산주의 질서에 관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사회 질서의 불평등과 대립을 체험함으로써 원시 공산주의 질서의 장점을 인식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획득하며, 이런 질서의 재건은 이성의 전리품이 될 것이라 주장했죠. 그의 주장은 대단히 사변적이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16, 17세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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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코뱅당
자코뱅당(黨)은 프랑스 혁명기 급진파의 모임으로 파리를 중심을 활동하였으며, 프랑스 혁명을 사회 혁명으로 밀어붙이는 주요 세력으로 활약했다. 본래는 본부를 파리의 생토노레가(街)의 자코뱅 수도원에 둔 헌법 옹호를 위한 의원과 시민의 조직인 ‘헌법을 위한 우인(友人)의 모임’에 불과하였다. 1791년 7월 입헌왕정파가 탈회하여 푀양클럽을 창설하여 남아 있는 로베스피에르, 페시옹 등을 중심으로 소시민·상퀼로트같은 기층 계급과의 접촉이 긴밀했다. 

1792년 8월 10일 파리 민중의 봉기를 기화로 혁명을 사회 혁명으로까지 전진시키는 강령을 수립하였다. 동시에 혁명전쟁 수행을 위하여 지롱드당의 자유주의 경제, 부르주아 본위의 정책에 대항하여 인민 민주주의의 입장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파리의 꼬뮨과 지역위원회에 동지들을 많이 모아 산악당 독재의 사회 기반을 구성하였다. 독재 완료 후 지방 지부는 약 5000개, 당원은 50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산악당이 제패함에 따라서 우파의 당통과 좌파의 에베르 등 사이에 대립이 생겨 결국 공안위원회와 보안위원회를 수중에 넣은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등에게 지도권이 넘어갔다. 이른바 자코뱅주의란 덕(德)을 공화정의 중추로 하고, 노동에 바탕해서 인민 모두 충실한 생활을 하는 소농민이나 소생산자층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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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독재 사상의 출현

18세기 말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발전에서 가장 다듬어지고 실천적인 사상을 펼친 사람은 바뵈프와 그의 추종자들이었죠. 프랑스 북부 생캉탱 지방의 빈농 출신으로 시골 빈민의 변호인 노릇을 도맡았던 바뵈프는 인간의 무지를 바탕으로 한 질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결국 붕괴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연적 질서가 귀족에 대항한 평민의 투쟁으로 해체된 것이지, 일반적인 빈부 대립이 원인이 되어 해체된 것은 아니라고 봤어요. 바뵈프는 기존의 사회·정치적 대립은 가난한 인민 층의 무지와 부자 층이 이런 무지를 악용한 결과라 생각했으며, 혁명으로 이 대립을 제거하고 공산주의 질서를 수립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혁명가 집단의 지도 아래 민중이 봉기할 때만 기존의 반혁명적 정치 질서를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했죠. 이를 위해 그는 민중을 계몽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며, 반혁명 기도를 격퇴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독재라는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바뵈프가 목표로 한 사회는 모든 성원이 사회 노동의 계획적 분배에 따라 공동의 복지를 위해 일하는 사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바뵈프주의자들은 자코뱅파와 연합하여 1793년 헌법을 토대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바뵈프는 1796년 총재정부 타도를 위해 쟈코뱅단원, 혁명군 장병, 소시민, 노동자들을 포섭 무장봉기를 기도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이듬해 처형되었습니다.

바뵈프와 그 추종자들은 프랑스 대혁명이 위대하고 최종적인 혁명의 서곡이라고 믿었죠. 그들이 쓴 글에서는 계급이나 계급투쟁에 대한 개념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적대적인 사회 집단으로 구분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역사적 현실주의와 혁명 정신으로 일관된 것으로 앞선 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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