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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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침의 나라, 6·25 전쟁의 처참한 동족 살육과 국토 파괴가 아직도 세계인의 뇌리에 가득한 나라, 선박 건조 및 반도체 생산량 세계 1위인 나라,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의 이상한 월드컵이 끝났다. 월드컵에 참가하기 시작한 48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이겨본 적이 없는 팀이 4강에 진출하는가 하면, 거기에 맞춰 붉은 응원의 물결이 전국의 거리를 휩쓸며 전세계 TV 화면을 붉게 물들였던 2002년 6월, 그 뜨거웠던 여름날은 갔다. 

이 이상한 월드컵을 분석하기에 바쁘다. 모든 언론 매체들은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인력풀을 총동원하여 한마디씩 하게 하고 있다.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 기업의 연구소를 비롯한 학술단체들, 모든 운동단체들도 이 현상을 분석하고 그 성과를 챙기기 위해 오뉴월의 파리 떼처럼 윙윙거리고 있다. 볼만하다. 또 다른 월드컵을 즐기는 맛이 지금부터라는 생각도 든다. 그 모든 분석과 평가, 대안 제시를 위해 애쓰는 분들을 위해 화려한 열중 뒤의 쓸쓸한 얘기 몇 가지를 쓰려 한다. 

사라진 노점상

월드컵 개막을 두 달도 남겨놓지 않은 지난 4월 7일, 이번 월드컵의 공동 개최국인 대한민국 수도 서울시는 월드컵과 관련하여 노점상 정비 방안을 발표했다. 서울시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버스정류소의 안내표지판을 기준으로 전·후방 각각 3m, 11m 안에 노점이 들어설 수 없다. 또 지하철역 출입구로부터 6m, 횡단보도, 육교, 택시승차대 등은 주변 5m, 공중전화 부스와 분전함 등 공공시설의 3m안의 노점은 철거한다는 내용으로 이 원칙에 따라 한 달 동안 4300여 개의 노점을 정비할 계획을 발표했다. '전국노점상연합회'의 주장에 의하면, 이럴 경우 전체 노점상의 70%를 철거해야 하며, 사실상 IMF 사태 이후 거리로 쫓겨난 노동자들의 호구지책으로 늘어났던 노점상들이 또 다시 일손을 놓아야 할 형편이라는 것이다. 유독 국제 규모의 행사에 약한 우리나라 정부의 태도지만 지난 번 프랑스 월드컵 때의 도심환경 정책이나 공동 개최국 일본의 정책과는 다르게 현 정부와 서울시의 도시환경 정책은 출발부터 기층 민중을 배제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구속 수배에 시달리는 노동자

월드컵 동안 노동자들은 어떠했던가. 한국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온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월드컵으로 만든다는 명분으로 우리나라 대표적 노동단체인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위원장을 조직위원으로 위촉했다.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도 당연히 월드컵 조직위원이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단병호 위원장은 한 번도 조직위원회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 기간 내내 서울구치소의 독방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대표적 노동운동단체의 대표를 그 가입 단체들의 노동쟁의와 관련하여 책임을 물어 감옥에 가두어 두는 이상한 '대∼한민국'은 단병호 위원장말고도 많은 노동자들을 노동기본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아니 어쩌면 그것을 법으로 보장하는 행위의 결과인 업무방해 등을 이유로 감옥에 가두어 놓고 있다. 민주노총은 월드컵이라는 국가 대화합의 국제 정신에 맞게 단병호 위원장을 비롯한 구속노동자들의 석방을 간곡히 호소했지만 돌아온 것은 콧방귀뿐이었다. 아니 한 술 더 떠 월드컵 기간에도 파업을 빌미로 소환장을 발부하는가 하면 체포 영장을 발부하여 실질적인 수배자를 만들었다. 보건의료노조나 민주택시노조, 금속산업노조 소속의 두산중공업, 시그네틱스 등의 장기 파업 노동자들은 월드컵 기간 내내 언론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고립된 채 병원로비나 농성장에서 처절하고 외로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축구공 만드는 어린이 

월드컵 개막을 4일 앞둔 지난 5월 27일 영상미디어센터에서는 월드컵 공인구인 '피버노바'를 제작하는 '아디다스'를 포함한 스포츠 다국적기업의 아동 착취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날 기자회견은 홍콩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인 AMRC와 '국제민주연대'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노동자·아동노동 착취 월드컵 후원 초국적 기업 반대 국민행동'이 주최하였는데, 참석자들은 회견에서 "아시아에서는 어린이가 축구공을 만들며 착취당하고, 개최국인 한국기업의 노동자들은 노동기본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월드컵 후원기업들은 노동착취를 중단하고, 스포츠뿐만 아니라 노동현장에서도 진정한 페어 플레이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인도와 파키스탄 등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에는 다국적 스포츠 기업들의 축구용품 들을 하청 제작하는 생산거점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파키스탄은 세계 축구공 생산의 70%를 담당하고 있는데, 문제는 축구공을 만드는 파키스탄의 노동인구 중 5세에서 10대 중반에 이르는 10만 여명이 노동 착취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 개에 4만5천 원에 팔리는 2002 한·일 월드컵 피버노바 수제 축구공이 하나에 15원씩 받는 파키스탄 어린이들의 고사리 손으로 만들어지는데, 어린이들은 지문이 지워지고 허리 디스크와 시력 상실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피버노바 축구공은 한·일 월드컵 붐을 타고 세계 곳곳으로 팔려가고 있다.

미군 장갑차에 짓뭉개진 두 여중생 

월드컵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한 지난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 경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에서 미 2사단 44공병대(캠프하우스) 소속 미군 장갑차가 앞서 가던 여중생 두 명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던 미선이, 효순이 두 여중생들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미군 장갑차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여 더 짓뭉개졌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들은 옷가지 확인을 통해 겨우 숨진 여중생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월드컵 열기에 묻혀 일부 언론에 의해 단신으로 보도되었다. 미군은 서둘러 유가족들을 설득하여 사고경위 조사도 하기 전에 두 여학생을 화장하여 장사지내게 했고, 관심 있는 시민사회단체들이 달려갔을 때는 허탈해하는 유가족들의 한숨소리만 들렸다. 이들은 '미군 장갑차 고 신효순, 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워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즉각 미 2사단을 방문 항의하며 진상조사 및 책임자 처벌과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 당국은 사건 발생 일주일이 지난 6월 19일 오후 7시에야 한미 합동조사반의 이름으로 '이번 사고는 결코 고의나 악의가 아닌 비극적 사고'라고 말하며 '피해자의 과실'이라고 사고 경위를 발표했다. 이에 의심을 품은 대책위 관계자와 가족들의 집요한 추적에 의해 사고는 당시 작전 중이던 미군의 지휘체계는 물론, 운전병이 다른 교신 때문에 사고 위험성을 알리는 관제장교의 무전 교신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 미군의 과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당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유가족을 회유하여 거액의 보상금으로 사건무마를 흥정하는가 하면 항의하러 간 범국민대책위 인사들과는 일체 대화를 거절하고 오히려 취재기자를 폭행 감금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을 비롯한 범국민대책위원회와 시민들의 항의와 규탄이 미군 부대 앞이나 사이버 공간을 통해 이어졌으나, 8강과 4강으로 타오르던 월드컵의 뜨거운 붉은 열기에 묻혀 버릴 수밖에 없었다. 

6월 29일 서해교전이 벌어지고 우리 해군 4명이 전사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붉은 열기로 달아올랐던 월드컵이 끝났고, 우리는 파국으로 치닫는 노정·노사관계, 아직도 그칠 줄 모르는 노동자·서민들의 생존권 투쟁, 주한미군의 오만방자함, 남북 대치라는 '대∼한민국'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월드컵이 남긴 그늘을 돌아봐야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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