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15년차 활동가가 보는 한국노총 개혁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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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kason@hanmail.net

필자는 한국노총의 지역조직, 산별조직에서 15년 정도 활동하면서 2002년 한국노총개혁특위 위원으로 참여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은 이를 바탕으로 한 개인의 의견으로, 노총개혁의 방향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먼저 독자들이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또한 이 글은 4·15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남순위원장을 비롯한 한국노총 임원이 모두 사퇴한 후, 4월19일 구성된 한국노총 비상대책위원회가 임시집행부 역할을 맡아 개최되는 5월25일 노총임시대의원대회에 직선제 규약개정안을 상정하고, 동시에 보궐임원선거를 실시하기 직전에 작성된 것임도 밝힌다. 

이번에 선출되는 보궐임원은 2005년 2월까지가 임기이며, 위원장과 부위원장, 사무총장이 보선대상이다. 또, 직선제규약개정안이 통과되면 2005년 2월 노총임원 직선제가 실시될 예정이다. 금번 한국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단순히 보궐임원을 선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선제 규약개정을 노총개혁의 단초로 보고 이를 관철하고자 하는 측과 이를 반대하는 측과의 공방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단위노조 대표자1), 노총지역지부, 노총지역본부, 산별대표자2)들의 일치된 요구로 직선제 규약개정안이 상정되었지만, 그 통과전망은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


[ 4.15 총선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녹색사민당 장기표 대표와 한국노총 이남순 위원장   - 출처:매일노동뉴스 ]

"결의는 산별이 하고 실천은 지역이 한다?"

현재 한국노총에는 27개 산별조직에 약90만 조합원이 있다. 그리고 제조, 운수, 금융, 공공이 각각 삼분의 일씩을 점하는 구성을 갖고 있다. 한국노총은 자체 연구보고서에서 하나의 산별이 자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약 5만 수준의 조합원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현재 5만 조합원이 넘는 산별조직은 금속, 화학, 택시, 자동차, 금융, 연합 등 6개 정도이며, 절대 다수는 3만명에도 못 미치는 실정이다.

그런데, 주목할 부분은 이처럼 산별조직간의 편차가 심한데도 불구하고 노총임원 및 산별대표자로 구성되는 '회원조합대표자회의'가 사실상 가장 막강한 의결기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소수 임원을 빼고는 대부분 산별대표자가 노총임원을 겸하고 있어 '회원조합대표자회의'는 사실상 '산별대표자회의'인 셈이다. 현실적으로 회원조합대표자회의 즉 산별대표자회의에서 거의 모든 주요사항이 결정되고, 상급 의결기구인 중앙위원회, 대의원회의에 상정되는 안건 역시 산별대표자회의의 결정이 예외 없이 수용된다고 할 수 있다(최근 중앙위원회는 거의 열리지도 않는다). 

이 같은 해묵은 현상을 산별대표자들의 리더십과 조직장악력 때문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단위노조, 현장과 밀접한 지역지부, 지역본부를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현장조직'들의 요구와 대의원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비민주적 의사결정구조로 규정되곤 한다. 그리고 '산별대표자회의의 기능축소 또는 폐지'는 항상 개혁의 1순위로 꼽혀 왔다.3)

4·15총선 참패로 노총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여론이 들끓자 상근임원들과 비상근임원들도 동시에 사퇴했다. 현장에서는 녹색사민당의 참패에 대해 '현장과 동떨어진 잘못된 정치방침', '결의 따로 실천 따로'식의 고질적인 행태를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리고 산별위원장과 지역대표자들도 사퇴하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현장의 요구들은 임원 총사퇴와 산별대표자회의에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것 정도 선에서 봉합된 것 같다. 이 같은 상황에서 비상대책위원회는 선거제도 혁신을 통해 새 집행부를 선출함으로써 한국노총의 재결속과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개혁요구를 수용하고 직선제 규약개정을 마련하게 되었다.

개혁의 첫 단추, 직선제

일단 직선제로 노총임원을 뽑게 되면, 연맹과 각급 조직에서 직선제 도입이 이어지고 더불어 조직의 투명성과 민주성이 강화되는 개혁프로그램이 수반될 수밖에 없으며, 현장과의 괴리를 좁혀 한국노총의 체질과 경쟁력이 획기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긍정적 효과를 중요시한 개혁방안이었다. 물론 끊임없이 직선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고, 투표소 설치 방식의 선거관리와 비용문제를 제기하거나, 선거후유증에 대한 우려 등을 근거로 들며 관리 가능한 범위에서 간접선거제나 선거인단제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직선제 규약개정은 주로 대의원 관리의 측면과 산별대표자들 간의 합종연횡을 중심 노총지도부를 구성해 왔던 관행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특히 산별대표자들의 입장에서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한국노총 건설'이라는 원점에 서지 않는 이상 참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방안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상대책위원회가 직선제 규약개정안을 임시대의원대회에 상정하겠다고 추진하였으니 갈등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직선제규약개정안은 산별대표자회의에서 대폭 삭제되고, 비대위에서 마련해서 대의원들에게 사전 배부키로 했던 마련한 자료는 배포가 금지되었고, 직선제 방안 사전홍보를 각급 조직에 약속했던 비대위 위원장은 사퇴하고 말았다.4)

결국 직선제 규약개정을 둘러싼 갈등과 진통은 그동안 산별대표자회의에서 실천 없는 결의를 남발하고, 갈수록 현장과 멀어지는 상층중심의 비민주성과 무책임성에 대해 자기 살을 베어내는 개혁 없이는 노총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광범위한 현장의 인식을 새삼스럽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 한국노총은 금융노조 이용득 위원장을 새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선출했으나, 직선제 규약개정은 부결되었다.  - 출처:매일노동뉴스 ]

중장기 비전 부재와 취약한 조직간 협력

경쟁조직인 민주노총에 비해 한국노총은 합리적 노동운동과 정치력, 이의 기반이 되는 정책력이 경쟁우위였다고들 한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환경변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공세 속에서 이에 대처해 나가는 한국노총의 대응력과 정책력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특히 사업방식과 관련하여, 산별·지역·단위노조 차원에서 각 사업에 관해 의견을 소통하고 역할을 분담할 수 있는 채널이 매우 취약하다. 노총과 산별, 지역이 협력하고 지혜를 모으는 방식보다는 거의 노총에 일임하고 의존하거나, 시달되는 지침을 활동에 참고하는 식의 경향이 고착화되어 있다.

잘못이야 노총중앙 뿐만 아니라 각급 조직에게도 분명히 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노총은 내셔널센터로서 핵심적인 부분인 정책활동의 질적·양적 개선에 치중하지 못하고 있다. 급하게 단위노조의 어려움을 지원해 주는데 머물다 보니 중장기 비전은 부재하고, 현장과 각 산별로부터 집약되어야 할 정책활동의 알맹이들은 축적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다양하게 토론을 전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방향과 정책을 수립해야 함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정책과 방향이 불분명해진다. 이에 따라 중장기 사업이나 조직의 발전계획 등을 포함하는 조직적 비전의 부재로 조직적 자신감의 저하되고 조직이 표류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인식마저 확산되고 있다.

희망과 의욕을 가진 이들도 지쳐서 떠나고, 산하조직들과 유기적인 연계는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2006년 말까지 산별노조 건설과 유사산별통합5)이 한국노총의 핵심개혁과제로 결의되었지만 노총차원에서 이를 추진하는 산별조직들을 지지하기보다는 방관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제 투쟁력만으로 노조활동이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시기는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강한 반대의 목소리 속에는 대안모색의 고민이라도 묻어있어야 한다. 대안을 지닌 투쟁이 힘있고 유연하고 효과적인 전술을 구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득력 있는 대안을 모색하려면 현장과 조합원이 참여하는 여러 가지 채널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노총의 정책과 비전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선거 때만 보이는 개혁세력 

노총의 개혁세력은 주로 선거 때만 나타났다. 아마 한국노총 개혁이 조직안팎으로 반향이 가장 컸던 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수천개 노동조합이 생겨나고 민주노조운동이 거세지면서 노총에 위기가 닥쳤던 1989년, "어용과 굴종의 노총역사를 청산하자"는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당선된 박종근 위원장 시절인 것 같다. 개혁적 이미지로 96년 말 노동법날치기반대 총파업투쟁을 이끌었던 박인상 위원장이 조직적 약속을 저버리고 여당의 전국구로 가버렸을 때에도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일부대표자들과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개혁적 모임이 일시적으로 존재하기도 했지만, 결국 선거 때 특정후보를 지원하는 정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한국노총에서는 이념과 노선을 두고 평소 논쟁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몇 년 전 인본주의를 지향한다는 노총이념 정립을 위한 세미나에 참석한 기억이 있지만 이후 구체적인 후속노력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선거를 앞두고 '개혁'과 '수구' 또는 '보수'라는 표현으로 서로를 가리키며 공방을 벌이다가 선거가 끝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고 마는 식이었다.

아마도 변화를 원치 않는 세력들은 스스로를 '조직의 주류'라고 생각할 것이다. 평소에는 조직적으로 도전하는 개혁세력이 없기 때문에 조직 내 소수의견이 있어도 전혀 부담이 될게 없다. 필자는 한국노총이 소수의 대표자들이 좌지우지하는 조직이 아니라 90만 조합원을 두려워하는 노동조합조직으로 거듭나고,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받는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노총의 변화와 개혁을 위한 상설적인 연대모임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모임이 노동운동의 원칙과 현장의 목소리를 옹호하고 희망과 비전을 만들어가며, 한국노총의 운동풍토와 운동노선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큰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 같은 연대모임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서로를 격려하고 협력하면서 지속적으로 노총개혁의 큰 흐름을 형성해 나갈 수 있다면, 4·15총선 참패 후 변화와 개혁을 목말라하는 조합원들에게 희망의 빛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변화와 개혁을 원한다면 모이자

한국노총의 개혁방향을 세 가지 점에서 살펴보았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첫째, 현재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직선제규약개정을 둘러싼 공방의 이면에는 사실상 한국노총을 좌우하는 산별대표자회의와 현장과의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괴리현상이 있다. 직선제 규약개정의 통과여부를 떠나 상층부 중심의 비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혁신하는 것이 핵심이다. 

둘째, 갈수록 인재와 조직이 떠나고, 정책과 비전도 찾기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한국노총이 산별·지역·단위노조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참여를 확대하는 사업방식과 본연의 정책기능 강화를 위한 쇄신책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선거 때만 되면 개혁세력이 출현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압박 속에서 결국 한국노총 내에는 개혁적인 노력을 지속하고 있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노총의 변화와 개혁을 원한다면 결국 함께 모여서 건전하고 힘있는 세력이 되어 실천하고 만들어 가는 길밖에 없다. 

[ 후주 ]
1) 5월21일 '노총개혁과 직선제관철을 위한 전국단위노조대표자회의'가 결성되었으며, 함께 직선제 관철 광고에 참여한 조직은 11개 산별 140여개 단위노조에 달한다.
2) 5월4일 열린 319차 산별대표자회의는 선거제도 혁신방안(직선제, 선거인단, 현행 간선제) 중에서 직선제안을 만장일치로 선택함으로써 5월중 보궐선거 후, 2005년 2월 직선제로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규약개정안 상정을 결의해 놓고 있다. 그런데, 산별대표자 중 일부는 직선제를 '찬성'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상정'키로 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3) 산별대표자회의에 대해 자조적인 얘기들이 많다. "결의는 산별이 하고, 실천은 지역이 한다"거나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산별대표자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는 안은 대의원회의에도 상정할 수 없으므로), "무소불위의 산별대표자회의" 등등
4) 5월19일 320차 산별대표자회의에서는 규약개정안의 대폭삭제를 통해 직선제규약개정이 되어도 추가적인 규약개정 없이는 직선제를 사실상 실시할 수 없는 개정안을 상정키로 했다. 그리고 5월17일 비대위 결정으로 노총대의원들에게 보내기로 한 규약개정안과 직선제 실시가능 방안인 ARS방식과 투표소설치방식 등이 포함된 참고자료조차 배포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에 대해 박헌수 비대위위원장은 5월21일 전격사퇴하면서 사퇴성명을 통해 온전한 직선제 규약개정을 당부하며 각급조직과 약속한 직선제 실시방안의 사전홍보 약속을 지키지 못한데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물러난다고 밝혔다.
5) 노총에서는 2003년 2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핵심개혁과제로 2006년 말까지 27개 산별을 제조, 공공, 금융, 운수, 일반등 5개 대산별로 통합하자는 결의가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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