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하구나, 부엌에서 새 세상을 꿈꾸는 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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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2년 전 『노동사회』(2006년 9월호, “애 볼래? 동냥할래? 동냥 할래!”)를 통해서 저의 육아기(記)를 읽으신 몇몇 독자들께서, 열렬한 공감을 보내주신 바 있어 최근 근황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학교가려고 문을 나서면 “똥 마려!”를 외치며 되돌아오던 큰 아이는 제법 노련한 처세술을 익힌 10살 소년으로 성장했다. 먹이고 입히고 놀아주어야 하는 ‘3중고’를 던져주며 초보엄마를 공포에 떨게 했던 갓난아이는, 삶의 기술을 익히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3살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난 2월에 2년 육아휴직의 마지막 단계로서 두 아이를 맡길 곳을 찾아 이사를 감행했다. 10살 아이가 학교를 마치면 저녁시간까지 안정적으로 돌보아 줄 시설이 있는 동네, 3살 아이가 아침에 눈 떠서 저녁까지 먹고 쉬고 놀 수 있는 적당한 보육시설이 있는 동네, 그리고 그런 시설이 출퇴근 시간 아이들을 맡기고 데려 오기에 멀지 않은 적당한 거리에 있는 동네를 찾으려니……. 그런 동네가 있기는 한가! 게다가 부동산이 삶의 공간이 아니라 ‘머니게임’의 최심급으로 승화하고 계신 21세기 서울에서, 이사라니!

낯선 곳에 던져진 큰 아이의 선택, 무단결석 

이사비용과 아이들 보육료를 내고 나면 생계비도 모자라겠지만 두 아이 맡기고 일을 나가려니 다른 길이 없다. 이사, 큰 아이 전학, 엄마의 복직, 2년간 꼭 붙어있던 엄마와의 이별을 겪는 3살 아이의 혼란까지, 모든 것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지금은? 새로운 일상이 시작된 지 두 달 남짓, 다들 잘 해내고 있다. 다만 작은 애는 울면 달래줄 수라도 있지만, 큰 애는 적응하기 힘들어해도 “다 컸으려니” 하고 방심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얼마 전,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사건이 하나 터졌으니, 무·단·결·석. 

늦잠 잔 엄마가 부랴부랴 등을 떠밀어 집을 나서긴 했으나, 학교 교문을 넘지 못한 큰 애는 책가방을 멘 채 동네유랑을 다녔다는 것이다. 월요일 아침, 책가방 메고 동네구경 다니는 10살 아이라니……. 아이는 동네 스타가 되었다. “학교 가는 길에 깡패 30명을 만나 숨어 있다가 학교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이가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결석 사유다(나중에는 35명으로 불어났다). 낯선 동네, 낯선 학교에 던져진 아이가 선택한 작은 모험이었다. 나는 대놓고 결석을 칭찬하지는 않았지만, 자기만의 문제해결 방식을 찾아 나선 10살 소년의 짧은 여정을 응원해주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으며 우리는 자란다.

저력은 유연하고 자유로운 낙천성에서 나온다

전철 안에서도 달리고 버스 안에서도 달린다. 생활인과 운동가 사이에서 달리고, 엄마와  자유인의 거리만큼 달린다. 뇌용량도 좀 딸리고, 체력은 더 딸린다. 2008년 3월, 2년 만에 돌아온 운동사회는 변화의 기운이 움트는 듯도 보이고, 정체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 달, 우리 단체 회원들이 번역서를 하나 냈다.『노동자 건강의 정치경제학』, 10년 전 미국에서 나온 책이지만 노동자, 활동가, 전문가 누구라도 한 번은 읽었으면 싶은 좋은 책이다. 마침 책 소식을 들은 노조간부가 전화를 해 왔다.

“책 나왔다면서요? 한 권 보내주세요”
“여러 권 사서 연맹 간부들한테도 돌리고 공부도 하세요”
“에이, 살 돈이 어디 있어요, 그냥 하나 보내줘 봐요”
“노조 예산에서 자료구입비로 사야죠. 자료구입비 없어요?”
“1년 예산 천오백인데 집회 3번하면 없어요, 책 안 줄 거요?”

나는 책을 보내주지 않았다. 공짜로 받은 책은 꼭 그만큼의 대접을 받는 법이다. 게다가 책의 인세 수입은 우리 단체가 해오고 있는 영세사업장 운동에 쓰기로 역자들과 출판사와 얘기해 놓은 터이다. 이런 뜻을 알리고 책을 판다면 많이는 안 팔려도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두리라 기대했지만, 책 나온 지 한 달이 지나는 지금 기대를 접으려 한다. 노조간부들은 너무 바쁘고, 돈도 없다. 무엇보다 책을 팔지 못한 이유는 노조간부들이 자기의 생각이 깨지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 같다. 대의원이 짜준 예산 안에서 움직이고, 정해진 투쟁계획대로 간다. 

좀 더 유연해졌으면 좋겠다. 좀 더 자유로워지면 좋겠다. 「무한도전」도 보고 「개그콘서트」도 좀 봤으면 좋겠다.「전국노래자랑」도 좋다. 출연자들의 장기자랑에 신나게 웃다 보면, “힘든 세상을 건너는 ‘보통 사람들’의 저력은 낙천성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온다.   

살며 활동하며, 땅에서 뒹굴자

온전히 생활인으로 살아본 지난 2년은 내 운동의 앞날에 큰 자산이다. 식솔들 먹을거리 입을거리를 챙겨야 하는 절대과제 앞에서 분투하는 ‘생활인’들이 운동의 자산 어쩌구 하는 이 글을 읽으신다면 책을 던져버릴지도 모르겠다. “우린 운동을 위한 도구였던가”, 두 아이의 절규도 들린다.

그래도 말하고 싶다. 아이를 키우려면 밥하고, 차려먹이고, 철따라 옷을 바꿔 입혀야 한다(이 땅의 기후는 옷값도 많이 들어간다). 아이 키우며 걱정할 일은 점점 늘어간다. 운동을 한다는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나는, 부엌에 서서 김치통을 열며, 꽁치를 구우며, 생각한다.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어떻게 오는가, 어디로부터 오는가. 가스불을 줄이며 생각한다. 아득한 거리다. 여기 부엌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은.

더 구체적이어야 하고, 더 배워야 한다. 하늘에서 이루려 하지 말고, 땅에서 뒹굴어야 한다. 집회 하느라 책 사볼 돈이 없는 노조라면 내년부터는 집회비용을 좀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집회장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면 노조 없는 노동자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세상이다. 집회장에서 노조사무실로 축지법을 써서 갈 수는 없다. 튼튼한 운동화 신고 사람구경, 세상구경 하면서 걸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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