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주권을 지키는 농업회생운동에 노동자가 앞장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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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외환위기 직후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가 한창일 때 봉급쟁이 노동자들이 소주 한 잔 마시며 종종 했던 얘기가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겠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농촌에서 농민들과 생활했던 필자가 경험한 농민들의 반응은 "××놈들, 농사는 뭐 아무나 짓는 건 줄 알아"라는 농민들의 비참한 자조였다. 

정리해고라는 인생의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비록 말 한마디지만 위안을 찾았던 게 농사였을지 몰라도 막상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그런 노동자들의 마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꾸로 말하면 노동자들도 동시대를 사는 농민들의 처지와 상황에 대한 정보나 이해가 부족함을 말해주는 한 단면이다. 그 만큼 농업이나 농사는 도시 사람들에게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광고카피 수준 이상이 아닌 것이다.

'환타'와 '델몬트'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바나나는 어지간한 소득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일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한 과일이었고 오렌지주스는 곧 '환타' 였다. 이런 사정이 90년대 중반 'WTO 체제'가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따봉∼"으로 유명한 델몬트 오렌지주스의 맛을 보게 되고, 생과일로 오렌지와 파인애플을 거리에서 맛 볼 수 있게 되었다. 바나나는 이제 술집의 과일안주 가운데서도 찬밥일 정도로 싸고 흔한 과일이 되었다. 

그런데 대다수 도시 생활인들이 겪은 이런 사회상의 변화는 농민들에게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었다. 사시사철 수입해서 먹을 수 있는 오렌지 한 품목의 수입으로 전체 과일 가격은 떨어지고, 과수 농사를 짓던 농민은 수지타산을 계산해 과일 농사를 접고 다른 밭작물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밭작물의 생산과잉을 가져와 가격을 폭락케 하는 악순환을 가져 왔다. 실제로 계속해서 줄어들던 쌀 생산 면적이 90년대 중반 이후 다시 증가한 원인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현재 농가의 소득 수준은 도시 가구의 70% 수준까지 떨어졌다. 규모화로 세계와 경쟁해 보라고 농민의 등을 떠민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농민들은 빚까지 짊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살기 어려워진 농민들이 농사를 접고 비정규직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농하고, "내 자식만은 절대 농사 못 짓게 하겠다"는 농민의 바램(?)으로 농촌은 이미 노령사회가 된지 오래다. 

누군가는 개방화 시대에, 게다가 사람들의 입맛이 서구식으로 바뀌는 것까지 생각하면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도, 농업이 축소되어야 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도시는 갈수록 밀집되고 농촌은 갈수록 황폐화되는 것을 두고 문명사회에 대한 정서적 반감을 던지는 차원이 아니라, "농업을 지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세계화 시대에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훨씬 더 현실적이고 중요한 문제이다. 

식량 자급은 세계적인 문제

유엔인구기금(UNEPA)의 2001년 11월 세계인구현황보고서는 "2025년까지 80억명에 육박하는 인구들 가운데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면 식량 생산을 2배로 늘리고 분배를 개선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식량농업기구(FAO)도 "2025년 세계 인구를 85억명으로 추정하여 생산량이 현재보다 75% 증가해야 식량부족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추정하고 있다. 

월드워치연구소가 1996년 11월 로마에서 열린 세계식량정상회담을 위해 준비한 보고서는 2030년까지 국제 식량소비에 못 미치는 생산량의 지체가 계속 확대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농림수산성은 1995년 현재의 곡물 증산 속도가 그대로 유지돼도 2010년 세계의 곡물가격은 20% 정도 상승할 것으로 예측했으며, 그러한 정책적 판단에 따라 일본은 이미 98년에 식량·농업·농촌기본법을 전면개정해서 10년에 걸친 식량자급목표와 추진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고 있다. 식량의 안정적인 확보는 이미 국제사회의 중대한 현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공동체의 한 부분인 농민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는 문제는 제외하더라도 우선 '국민의 안전하고 안정된 식생활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우리 정부에게도 중대한 현안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세계적으로 식량재고가 불안정하게 움직이고, 중국의 WTO 가입과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성장으로 인한 국제 식량소비 급증, 국내 생산량 감소로 캘리포니아 쌀 가격이 두 배로 폭등하는 현실을 무시하고 "쌀은 반도체 팔아서 사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또한 광우병에, 조류독감에 국민들의 불안이 고조되어도 국민들의 안전한 식생활 보호를 위해 국내 농업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손톱만큼의 고민이라도 있는지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정부가 그렇게 닮고 싶어하는 선진국 중에서 식량자급률이 고작 30%도 안 되는 나라가 있을까? 그런 국가는 없다. 당장은 쌀 자급률이 97%에 달해 가격이 싸지만, 냉정한 경쟁체제에서 쌀 자급기반마저 무너지는 상황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부 발표로도 현재 약 26조원에 이른다는 쌀 산업의 비경제적 가치까지 고려하면 쌀 수입시대의 사회적인 간접비용 문제는 어느 정도일지 지금으로서는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일들이 당장 부닥칠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지금은 외면되고 있으며, 그런 까닭으로 국민의 안전하고 안정된 식생활 주권이 위협받고 있다.


[ 전국에서 상경한 농민들이 2월9일 여의도 공원에서 한-칠레 FTA 비준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집회를 열고 있다.  - 출처: 오마이뉴스 ]

농업을 국가기간산업 간주해야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한 마디로 현 정부와 보수정치권이 '농업포기'라는 너무나 손쉬운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아무런 실익이 없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겠다고 하는 게 그렇고, 경쟁력 없는 농업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으로 WTO농업협상에 나서고 있는 것도 그렇다. 재정경제부의 한 고위 관료는 몇해 전, 사석에서 "이제 더 이상 식량안보로 사기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고 한다. 4·15 총선을 앞둔 집권 여당의 핵심공약에서 아예 농업분야는 빠져 있다. 국민의 안정된 식생활 주권 유지에 반대하는 정부와 일부 집단이 한통속이 되어 농업포기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민의 안전하고 안정된 식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제 다른 한편이 농업 보호의 목소리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농업은 국민들에게 안전한 식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고용 창출과 농촌 사회의 유지, 환경보전, 생태질서의 유지, 자연경관의 제공 등 공익기능을 가진 국가기간산업이다. 즉, 농업은 이제 단순히 농민계층의 경제적 생계수단으로만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농민, 비농민을 아우르는 전체 국민의 안전하고 쾌적한 생활을 보장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공공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노동자가 앞장서서 자신과 가족의 식생활 지킴이가 되고, 주부가 나서서 아이들의 건강한 급식을 챙겨야 한다. 그리고 시민사회가 공익의 편에서 농업을 포기하려는 정부의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에 대한 감시자가 되는 '국민적인 농업회생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그러한 농업회생운동의 정치적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노동자의 농업회생운동은 상층 노동조합의 선언적 연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농업회생을 위한 사회적 합의의 한 주체로서 노동자는 안전하고 안정된 식생활 주권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권리임을 분명히 밝히며 농업회생운동에 나서야 한다. 그러한 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농민은 노동자와 농업회생을 위한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이 국민적 합의 속에 농업회생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제 노동자들도 식량주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자 선언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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